두 자리 수 나이를 갖게 되면서부터 예순이 내일 모래로 다가온 지금까지, 숨 쉬는 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들었던 내 생애의 첫 10년과, 모든 소리와 단절된 무성음의 세상에서의 25년을 거쳐 인공와우 덕으로 부자연스럽고 불완전하게나마 환경에 따라서는 어느정도 대화도 가능해질 만큼 말소리를 듣게 된 세상에서 다시 25년 지내면서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청각의 메커니즘, 청능의 구조를 이해하게 된다.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귀에 들어온 소리에서 뇌가 그 의미를 포착해내는 것이다. 포착을 잘 해내려면 들은 소리에서 그 의미를 가장 비슷한 말로 바로 연상해내야 한다. 평소 사람들과 많은 대화로 소통하며 정상적인 언어감각을 유지해 왔어야 연상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인공와우 착용한 뒤에 바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예전에 듣던 자연스러운 소리와 다르기 때문에 새롭게 듣는 훈련을 해야 하는 점도 있지만 연상을 잘 해내야 말을 알아듣기 쉽다는 점에서,,,소리가 멀어지는 것 이상으로 사람과 멀어지고 대화와 교제가 거의 단절된 가운데서 10대와 20대를 캄캄하고 외로이 지낸 내게 인공와우의 효과가 적은 것은 당연한 결과로 여겨진다. 지금도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라곤 하루에 몇 마디 되지 않는다. 하루종일 말 한마디 없이 지내는 날도 드물지 않다. 그래서 사람의 말에는 뇌가 반응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2009년 프리덤으로 외부기기만 업그레이드하고 말 알아듣기 훈련과 노력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부터 어느날 컴퓨터 앞에 앉아서 교회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우연히 성경듣기를 클릭했다가 성경말씀은 특이하게 잘 알아듣게 들리는 것을 깨닫고 놀라왔었다. 대번에 30% 정도 알아듣게 들리는 것이다. 그후 6년이 지난 지금은 오디오 케이블이나 헤드폰으로 성경을 들을 때 거의 100% 알아듣는다. 말 알아듣기가 포착과 연상에 달렸다면 성경말씀은 그만큼 내게 연상이 잘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과 교제와 대화가 단절된 가운데 내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모을 수단은 "읽기"와 "쓰기" 뿐이었고 성경이 그 주요 읽을거리가 되어 마치 사람들에게 대화가 일상적이듯이 성경 읽기가 내게 일상이었던 것이다. 성경이라고 다 잘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 성경에서 구약 선지서는 알아듣기가 팍 떨어진다. 아직껏 못다 읽은 책도 있을 만큼 선지서는 즐겨 읽지 않아서 연상이 잘 안되기 때문이지 싶다. 많이 읽은 성경은 특이하게 잘 알아듣는 사례는 내 삶의 환경에 아쉬움을 준다. 실청 후에도 대화와 교제의 끈을 놓지말고 언어감각을 유지해 왔다면 성경 말씀 잘 알아듣듯 사람 말의 의미도 쉽게 연상하고 포착해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이 듣기의 핵심인데 이제라도 적극적으로 말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살았으면 좋겠지만 그럴 대상이 없어서 듣기 훈련은 늘 손 안에 쥐어지는 작으마한 녹음기인 리코더에 신문 논설이나 성경 찬송을 녹음해 가지고 다니며 오디오케이블로 연결해 듣는다. 그러다보니 육성보다 스피커나 오디오케이블을 통해 듣는 소리가 더 익숙하다. TV에 오디오케이블로 연결해 들으니 변별이 더 잘된다. 사람의 말은 물론이고 스피커, 헤드폰, 이어폰에서 나는 소리는 극히 짦은 거리라 하더라도 공기의 진동을 거쳐 어믐처리기의 마이크로폰에 전달되는 과정이 있다. 그런 반면 오디오케이블은 공기의 진동 과정이 없이 전기적인 신호로만 달팽이관 속의 전극에 전달되기 때문인지 공기의 진동과정을 거치는 다른 소리에 비해 극히 정제된 소리로 들려서 말소리 변별에는 더 낫지만 음감이 풍부하지 않아 음악 감상에는 헤드폰보다 못하다는 생각이든다. 또한 사람 말소리는 부드러운데 스피커나 헤드폰, 오디오케이블로 듣는 음질은 육성보다 자극적인 된소리로 들려서 짜증스럽다. 늘 정제된 오디오케이블로만 들으니 특히 남자 말소리는 흙탕물같이 혼탁하게 들린다. 최근 1년째 매주 토요일마다 한 청각사의 도움으로 청능 훈련을 받는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 내게 무상으로 수고해주니 큰 은혜이다. 청능 훈련 내용보다 한 시간동안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획기적인 일이다. 댓가없이 베푸는 그의 기능 봉사가 헛 되지 않아서 이제 사람들과 소통이 되는 삶을 누렸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