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경管境을 산동반도에 두었던 번조선의 편년체 역사
노중평
산동반도는 조선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당시에 부루단군이 3제 부우를 봉하여 다스리게 한 동평국의 땅이었다. 단군조선 제25세 솔나 단군이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진조선을 기자조선이라 하였다. 이후에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이 되었다.
부루단군시대에 조선은 1차로 구려 동평 망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후에 2차로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삼조선이 되었다. 막조선은 한반도로 중부지방이 막(춘천)과 북막(평양)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조선기』 제4세 부루단군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축원년(BC 2240) 9월에 중제 부여夫餘를 요사遼西에 봉하여 망구왕茫球王이라 하였고, 3제 부우夫宇를 동해빈東海濱에 봉하여 동평왕東平王이라 하였고, 4제 부소夫蘇를 수분하綏芬河에 봉하여 구려왕句麗王이라 하였다. 이상은 중원에서 조선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말한 것이었다.
『삼한관경본기』에서 번조선의 관경管境이 밝혀진다. 번한은 (부루)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泰山에서 제사지내도록 했다. 번조선에 천제를 지내는 태산이 있다는 말이다. (이하 노중평의 주) 번한의 나라에 태산이 있다는 것은 번한의 나라인 번조선이 산동반도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부루)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황하 치수사업)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番韓을 통해서 우사공虞司空(하의 우임금)에게 고하였다.” 본문은 번조선의 왕을 번한이라 했다는 말이다. 번한은 번조선의 왕이다.
『단군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45세 여루 단군 때 3조선이 있었다. 병진 32년 (BC 365년) 번조선, 진조선, 막조선이 있었다. 진조선이 요서 쪽에 있었다. 막조선은 遼西의 동쪽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연燕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와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육박해 왔다. 이에 번조선이 상장上將 우문어于文言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 막조선에 군사를 보내어 복병을 숨겨두고 燕나라와 齊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고 요서의 여러 성을 찾았다.
위 기록은 조선에 번조선, 진조선, 막조선의 3조선이 있었다는 말이다. 번조선은 산동반도에 있었고, 진조선은 요서에 있었고, 막조선은 송화강 쪽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력을 확장하여 한반도로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막조선은 산동반도에 있었던 예왕국 쪽에서 온 사람들이 합류한 나라로 볼 수 있다. 춘천 쪽에 예읍濊邑(중도에 예읍이 있었다고 본다)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양 쪽을 북막이라 하였고, 춘천 쪽을 막이라 하였다. 45세 余婁 단군 병진 32년(BC 365)에 번조선 조정에 北漠(평양)의 추장 액니거길厄尼車吉이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燕나라를 칠 것을 간청하였다. 번조선은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 만 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上谷을 공격하고 성읍을 쌓게 하였다. 46세 단군 普乙 무술 19년 (BC 323) 정월에 읍차 기후箕詡가 병력을 이끌고 이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를 구하여 허락하고 연나라에 대비하라 하였다. 이상의 기록은 번조선이 군사력이 막강하였음을 보여준다.
46세 단군 보을 계혜 44년 (BC 298년) 북막(평양)의 추장 니사尼舍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47세 단군 고열가 계유 44년 이해 겨울 북막(평양)의 추장 阿里當夫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칠 것을 청했으나 단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이때는 진조선이 완전히 쇠퇴기衰退期에 들어서 있을 때였다. 막조선에 속한 북막의 추장이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치자고 하였으나 연나라를 공격할 만한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이 진에게 멸망한 이후에, 한은 중원과 요서에서 조선 지우기 작업에 착수한다. 그것이 바로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끌어들이고 진조선과 번조선을 축소 조정한 것이다. 조서을 어떻게 축소 왜곡했는가 보기로 한다.
중국이 제시한 한사군 위치도. 진조선과 번조선을 합하여 진번군이라 하였다. 원래 진조선이 있었던 요서와 번조선이 있었던 산동반도에서 진번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요서에서 남하시킨 낙랑군 남쪽에 집어넣은 것이다. 형편없이 축소시켜 버린 것이다.
진번군眞番郡은 진조선眞朝鮮과 번조선番朝鮮을 합하여 줄인 말로 볼 수 있는 말이다. 서한西漢은 진조선과 번조선을 합하여 진번군이라 하였다.
조선이 건국하였던 최초 BC 2333년 경에 진조선은 요서遼西에 망구국茫球國이라는 이름으로 있었고, 번조선은 산동반도에 동평국東平國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
그러나, BC 109년에 漢武帝가 진번으로 축소하여 한반도韓半島로 끌어 들였다. 낙랑군樂浪郡과 현토군玄免郡과 임둔군臨屯郡을 합하여 한사군漢四郡이라 하였고 유주자사부幽州刺史部에 두었다. 유주幽州는 조선시대에 진조선에 속했던 지역이었다.
『史记·朝鲜列传』∙『索隐』의 注는 “진번을 동이의 소국이었는데, 후에 군이 되었다”고하였다.(真番为“东夷小国,后以为郡”) 「백도백과」는 설명하기를 진번군은 ‘진번족의 거주지’를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번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크게 말하면 동이족이고, 작게 말하면 조선족이 있었을 뿐이었다. 동이족, 즉 번조선족과 진조선족을 합하여 진번족이라 했던 것이다. 인종을 축소 왜곡을 하고 나서 인종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축소하고 왜곡했으니, 당연히 일치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진번군을 소제 시원 5년(BC 82년)에 낙랑군에 병입幷入시켰다. (昭帝始元五年(前82年)罢真番郡,并入乐浪郡。)
이상 번조선과 막조선의 위치파악이 되었으므로 번조선의 편년체 역사를 옮겨 보기로 한다. 번조선은 조선의 땅이다. 『番韓世家』 上 번한은 번조선 왕이다. 세가는 번한 왕가의 역사라는 말이다. 번조선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뜻에서 번한세가 상하에 기록된 번한의 역사를 옮겨 보기로 한다.
『태백일사』의 「삼한관경본기」: 진국辰國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성 에 한 번씩 이른다.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에서 지모가 뛰어나게 세상에 소문 난 자를 골라 번한이라 하였다. (노중평의 주, 즉 번조선의 왕을 세웠다는 뜻이다) 부府를 험독에 세우게 하였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노중평의 주, 府는 치소治所를 말한다) 험독險瀆은 치소를 둔 요새를 말한다. 이 요새를 왕검성王儉城이라 하였다.(노중평의 주, 왕검성은 번조선의 부가 있는 곳으로 번조선의 국도國都가 된다. 왕검이 순수 가는 국도를 일반적으로 왕검성이라 했다고 볼 수 있다.) 辰國天帝子所治故五歲巡到埌耶者一也...檀君王儉擇蚩尤後孫中有智謀勇力者爲番韓立府險瀆今亦稱王儉城也 주) 낭야성은 산동성 제성현諸城縣의 동남쪽에 있는 군명郡名 진국辰國은 용의 나라이므로 저룡옥猪龍玉이 많이 출토된 홍산紅山이 있는 적봉赤峰으로 볼 수 있다.
番韓世家 上 번조선의 세가는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 나온다. 삼한이 시작되기 전, 삼조선시대의 번조선 세가의 역사이다. 단군왕검이 멸망한 청구靑邱의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후손 치두남蚩頭男을 1세 번한番韓에 임명하였다. 1세 번한이 경자년에 요중遼中에 12개의 성을 쌓았다. 험독險瀆∙영지令支∙탕지湯池∙통도桶道∙거용渠鄘∙한성汗城∙개평蓋平 ∙대방帶方∙백제百濟∙장령長嶺∙갈산碣山∙여성黎城이었다. 2세 낭사, 번한 치두남이 죽으니 아들 낭사가 즉위하였다. 이해 경인 3월에 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하여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사성埌邪城이라 하니, 번한의 낭사에 세워진 때문이다. 주, 번조선의 땅에 속한 요서성遼西城과 요동성遼東城 중에 백제百濟가 있었다. 백제를 세운 소원진의 소서노, 온현의 온조, 연진의 연타발이 모두 백제로 이동하여 백제를 세운 백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3세 물길勿吉, 낭사가 죽으니, 계묘년에 아들 물길勿吉이 즉위하였다. 4세 애친愛親, 물길이 죽으니, 갑오년에 아들 애친愛親이 즉위하였다. 5세 도무道茂, 애친이 죽으니, 아들 도무道茂가 즉위하였다. 6세 호갑虎甲, 도무가 죽으니, 계해년에 아들 호갑虎甲이 즉위하였다. 정축년에 진조선의 천왕(단제 혹은 단군)께서 순시하시다가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노중평의 주, 이분이 5세 단군 구을丘乙(BC 2099~2084)이다) 대박산大博山에 묻혔다.) 번한 호갑虎甲이 사람을 보내어 문상하고, 병사를 보내어 경계토록 하였다. 7세 오라烏羅, 호갑이 죽으니, 기축년에 단군 달문의 아들 오라烏羅가 즉위하였다. 갑신년에 하나라 왕 소강少康(하나라 6대 소강왕, BC 2056~2034)이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렸다. 8세 이조伊朝, 오라가 죽으니, 병술년에 아들 이조伊朝가 즉위하였다. 9세 거세居世, 이조가 죽으니 병인년에 아들 단군 아술阿述의 동생 거세居世가 즉위하였다. 10세 자오사慈烏斯, 거세가 죽고 신사년에 아들 자오사慈烏斯가 즉위했다. 11세 산신散新, 자오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들 산신散新이 즉위했다. 12세 계전季佺, 산신이 죽으니, 무자년에 아들 계전季佺이 즉위했다. 경인년에 명을 받아 삼신의 단을 탕지산湯地山에 세우고 관리들의 집을 옮기게 하였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安德鄕이다. 13세 백전伯佺, 계전이 죽고 정사년에 아들 백전伯佺이 즉위했다. 14세 중전仲佺, 백전이 죽은 후 을미년에 중제仲弟 중전仲佺이 즉위했다. 15세 소전少佺, 중전이 죽은 후 신묘년에 아들 소전少佺이 즉위했다. 갑오년에 장군 치운蚩雲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에 묵태墨胎를 파견하여 탕 임금의 즉위를 축하했다. 16세 사엄沙奄, 소전이 죽고 갑자년에 아들 사엄沙奄이 즉위하였다. 17세 서한棲韓, 사엄이 죽고 동생 서한棲韓이 즉위했다. 18세 물가勿駕, 서한이 죽고 정축년에 아들 물가勿駕가 즉위했다. 19세 막진莫眞, 서한이 죽으니 신사년에 아들 막진莫眞이 즉위했다. 20세 진단震丹, 막진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진단震丹이 즉위했다. 이해 은나라 왕 태무太戊가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21세 감정甘丁, 진단이 죽으니, 계유년에 아들 감정甘丁이 즉위했다. 22세 소밀蘇密, 감정이 죽으니, 아들 소밀蘇密이 즉위하였다. 계사년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北亳(하북성 상구현)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이 이에 사과하였다. 23세 사두막沙豆莫, 소밀이 죽자, 아들 사두막沙豆莫이 즉위하였다. 24세 갑비甲飛, 사두막이 죽으니 계부 갑비甲飛가 즉위했다. 25세 오립루烏立婁, 갑비가 죽으니 경신년에 아들 오립루烏立婁가 즉위하였다. 26세 서시徐市, 오립루가 죽자 그의 아들 서시徐市가 즉위하였다. 27세 안시安市, 서시가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안시安市가 즉위하였다. 28세 해모라奚牟羅, 안시가 죽으니, 그의 아들 해모라奚牟羅가 즉위했다. 29세 소정小丁, 해모라가 죽으니, 단군 소태蘇台 5년에 우사의 소정小丁을 번한에 임명하였다. 30세 고등高登, 고등高登이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은殷나라의 무정武丁을 쳤다. 색도索度에 이르러 병사를 보내어 불을 지르고 약탈한 뒤에 돌아왔다. 서여는 북박北亳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湯池山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刺客을 보내 소정小丁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番韓世家 下 31세 서우여徐于餘, 단제 색불루索弗婁가 몸소 삼군三軍을 이끌고 서우여徐于餘를 토벌하러 갔다.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에 봉할 것을 약속하며 설득하니 서우여가 이에 따르므로 단제 색불루가 서우여徐于餘를 번한으로 삼았다. 단제 색불루索弗婁가 서우여를 폐廢하여 서인庶人을 삼았다. 서우여는 좌원에서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천 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32세 아락阿洛, 서우여가 죽고 아락阿洛이 즉위하였다. 33세 솔귀率歸, 아락이 죽고 정축년에 솔귀率歸가 즉위하였다. 34세 임나任那, 솔귀가 죽으니, 갑자년에 임나任那가 즉위하였다. 천왕이 조서로서 천단天壇을 동교東郊에 설치하고 삼신께 제사지내다. 무리가 둥글게 모여 북을 치며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았다.
정성으로 천단을 쌓고 삼신을 축수하네 황운을 축수함이며 만만세로다 만인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35세 노단魯丹, 임나가 죽으니, 병신년에 동생 노단魯丹이 즉위하였다. 북막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노일소路日卲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36세 마밀馬密, 노단이 죽으니, 기유년에 아들 마밀馬密이 즉위하였다. 37세 모불牟弗, 마밀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모불牟弗이 즉위했다. 을해년에 감성監星을 두었다. 38세 을나乙那, 모불이 죽으니, 정해년에 아들 을나乙那가 즉위하였다. 갑오년에 주나라 왕 하瑕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39세 마휴麻庥, 을나가 죽으니, 정묘년에 마휴麻庥가 즉위하였다. 40세 등나登那, 마휴가 죽으니, 기사년에 동생 등나登那가 즉위했다. 이극회李克會가 말씀을 올려 소련∙대련의 묘를 세워 삼년상의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이에 따랐다. 41세 등나가 죽으니, 무수년에 아들 해수奚壽가 즉위하였다. 임인년에 아들 물한勿韓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三聖墓에 제사지내게 하였으니, 묘는 상춘常春의 주가朱家의 성에 있다. 42세 오문루奧門婁, 해수가 죽으니, 기묘년에 아들 오문루奧門婁가 즉위하였다. 43세 오문루가 죽으니, 정묘년 아들 누사가 즉위하더니 무인년(BC 943)에 천자를 찾아뵙고 태자 등올登屼과 작은 아들인 등리登里가 별궁에서 한적하게 거하고 있음에 태자 형제들에게 노래를 바쳤다.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라 항상 터럭같은 일로서 골육의 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요 말도 오히려 같은 여물통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을 만드나니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세언細言일랑 삼가 듣지 마소
44세 이벌伊伐, 누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들 이벌伊伐이 즉위하였다. 병신년에 한수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 기미년에 상장 고력高力을 파견, 회군淮郡과 합쳐 함께 주周나라를 치게 하였다. 45세 아륵阿勒, 이벌이 죽으니, 신유년에 아들 아륵阿勒이 즉위했다. 병인년 주나라의 이공二公이 사신을 보내 와 특산물을 바쳤다. 46세 마휴麻休, 아륵이 죽으니, 을축년에 아들 마휴麻休(혹은 마목麻沐)가 즉위하였다. 47세 다두多斗, 마휴가 죽은 뒤 병진년에 아들 다두多斗가 즉위했다. 48세 나이奈伊, 다두가 죽으니, 기축년에 아들 나이奈伊가 즉위했다. 49세 불리不理, 나이가 죽으니, 기미년에 아들 불리不理가 즉위하였다. 50세 여을餘乙, 불리가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여을餘乙이 즉위하였다. 51세 엄루奄婁, 여을이 죽으니, 갑술년에 엄루奄婁가 즉위했다. 무인년에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52세 감위甘尉, 엄루가 죽으니, 아들 감위甘尉가 즉위하였다. 53세 술리述理, 감위가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술리述理가 즉위했다. 54세 아갑阿甲, 술리가 죽으니, 무오년에 아들 아갑阿甲이 즉위했다. 경오년에 천왕은 사신 고유를 파견하여 먼저 한웅∙치우∙단군왕검의 삼조의 상像을 나누어 주더니, 이를 관가에 모시게 하였다.(노중평의 주, 치우천왕을 우리가 모신 것은 이때부터라 할 수 있고, 지나가 조상으로 모시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 탁록에 귀근원을 짓고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55세 고태高台, 아갑이 죽고, 계유년에 고태高台가 즉위하였다. 56세 소태이蘇台爾, 고태가 죽으니, 아들 소태이蘇台爾가 즉위했다. 57세 마건馬乾, 소태이가 죽으니, 아들 마건馬乾이 즉위하였다. 58세 천한天韓, 마군이 죽고 병진년에 천한天韓이 즉위했다. 59세 노물老勿, 천한이 죽으니, 병인년에 아들 노물老勿이 즉위하였다. 60세 도을道乙, 노물이 죽으니, 신사년에 아들 도을道乙이 즉위했다. 계미년에 노魯나라 사람 공구孔丘는 주周나라에 가서 노자老子 이이李珥에게 예禮를 물었다. 이의 아비의 성은 한韓이요, 이름은 건乾이니, 그의 선조는 풍이風夷 사람이다. 뒤에 서쪽으로부터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부터 이리저리 돌아 아유타阿踰佗에 이르러 백성을 가르쳤다. 61세 술휴述休, 도을이 죽고 병신년에 아들 술휴述休가 즉위했다. 62세 사양沙良, 술휴가 죽고 경오년에 아들 사양沙良이 즉위하였다. 63세 지한地韓, 사양이 죽자, 무자년에 아들 지한地韓이 즉위하였다. 64세 인한人韓, 지한이 죽고, 계묘년에 아들 인한人韓이 즉위하였다. 65세 서울西蔚, 인한이 죽고 신사년에 아들 서울西蔚이 즉위하였다. 66세 가색哥索, 서울이 죽으니, 병오년에 아들 가색哥索이 즉위하였다. 67세 해인解仁, 가색이 죽자, 경진년에 아들 해인解仁(일명 산한山韓)이 즉위하였다. 이해에 자객에게 시해 당했다. 68세 수한水韓, 해인이 죽자, 신사년에 아들 수한水韓이 즉위했다. 임오년에 연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와 안촌골安村忽을 공격했다. 또 험독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須臾 사람 기후箕詡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니, 곧 진眞∙번番 2한韓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의 남쪽에서도 싸우려 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69세 기후箕詡, 무술년(BC 263)에 수한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매 이에 기후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와 이를 축하하였다. 이 해에 연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니, 기후도 역시 명을 받아 왕이라 칭하고, 처음에는 번한성番汗城에 머무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70세 기욱箕煜,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箕煜이 즉위했다. 71세 기석箕釋, 기욱이 죽고, 신미년(BC 230)에 아들 기석箕釋이 즉위했다. 이해에 각 주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720인이었다. 기묘년(BC 222) 번한이 교외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을유년(BC 216)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72세 기윤箕潤, 기석이 죽고, 경술년(BC 191)에 아들 기윤箕潤이 즉위하였다. 73세 기비箕丕, 기윤이 죽고, 기사년에 아들 기비箕丕가 즉위하였다. 처음에 기비는 종실의 해모수解慕漱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려 하였다. 해모수는 기비의 도움으로 대권을 쥐었다. 74세 기준箕準, 기비가 죽고 아들 기준箕準이 즉위했다. 정미년(BC 146) 떠돌이 도적인 위만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마침내 바다로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
|
|
첫댓글 漢은 진조선(요서)이 멸망하자 조선을 지우고, 번조선(산동)이 멸망하지 조선을 지우고, 진과 번만을 남겨 진번군이라 하였습니다. 요동을 낙랑군이라 이름을 바꾸고 한반도의 허리에 갖다 붙이고, 진번군을 낙랑의 허리 밑에 갖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산동은 예족이 사는 땅 예라했고, 요서는 맥족이 사는 땅 맥이라 했습니다. 한반도는 삼한시대에 예맥으로 불렀습니다. 예족과 맥족이 쫓겨와 사는 땅이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