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회심준비론’을 이단이라 공격하는 이에게 두 번째 변증(2).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초대교회 이후, 사도들의 전승과 신앙고백으로 내려오는 전통적 신학사상을 정리하여 체계화시킨 탁월한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 칼빈주의 장로교 신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또한 그의 신학은 청교도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변증으로서 그의 설교 및 주석에, 특별히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청교도 준비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 강요 제 3권 3장 4항(율법 아래에서의 회개와 복음 아래에서의 회개)에서 회개를 두 종류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율법의 회개" 라고 불렀다. 이러한 회개에 있어서는, 죄인은 죄의 가책으로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떨며, 그 불안한 상태에 붙잡힌 채 빠져나오지 못한다. 성경의 실례로서, 가인(창 4:13)과 사울(삼상 15:30) 그리고 유다(마 27:4)를 든다. 이 사람들의 회개에 대한 성경의 기사를 보면, 이들은 자기의 죄가 중대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을 보수자(報讐者)와 심판자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생각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회개는 그들이 이생에서 이미 들어간 지옥의 관문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존엄하신 진노 앞에 벌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복음의 회개"라고 불리웠다. 이 회개에 있어서는, 죄인은 큰 고통을 받지만 고통을 이기고 일어서며, 그리스도를 자기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양약과 두려움에 대한 위로와 불행을 피하는 피난처로 의지한다. "복음의 회개"는 죄의 가시에 찔려 아픔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믿음으로써 각성되고 새롭게 되어 주님께로 돌아선 사람들에게서 예증된다. 히스기야는 죽으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두려움으로 떨었다. 그러나 그는 울면서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확신을 되찾았다(왕하 20:2; 사 38:2). 니느웨 사람들은 멸망하리라는 무서운 위협을 듣고 마음이 괴로왔지만,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않아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맹렬한 진노를 돌이켜 주시기를 희망하였다(욘 3:5,9). 다윗은 백성을 계수한 것이 큰 죄였다고 고백하고 이어서 "여호와여…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덧붙여 기도하였다(삼하 24:10). 나단의 책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자기의 간음죄를 인정하고 여호와 앞에 엎드렸으나, 한편 용서를 기다렸다(삼하 12:13, 16).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사람들의 회개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이렇게 물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베드로 자신의 회개도 이와 동일하였다. 그는 몹시 울었으나(마 26:75; 눅 22:62), 소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물론 칼빈은 회개라는 단어를 율법적, 복음적으로 나누는 것을 싫어 했지만 회개에서 “죄의 가책으로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떨며, 그 불안한 상태에 붙잡힌 채 빠져나오지 못”하는 원리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래 기독교 강요 3권 3장 5항을 살펴본다면 칼빈이 회개에 대하여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더욱 알게 될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3권 3장 5항에서 회개의 정의를 말한다: 회개는 우리의 생활을 참으로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순수하게 또 진실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전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는 옛 사람과 육의 죽임과 성령의 살림으로써 구성된다.
옛날 예언자들과 이후의 사도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회개를 권고한 그 모든 설교들을 우리는 그러한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들이 추구하였던 한 가지는 이것이다. 자기의 죄로 인해 당황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고통스러워서 자기들이 노여우시게 한 분 앞에 엎드려 자신을 낮추며, 진정한 회개를 통해 바른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이야기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정욕대로 방종하게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하며(삼상 7:2,3), 그들의 지도자가 부르는 곳으로 기꺼이 나아간 것에 대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했다고 되어 있다. 또 세례 요한과 바울은 모든 행동에서 이런 회개를 보이며 증거하는 생활을 가리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한다(눅 3:8; 행 26:20; 참조, 롬 6:4).
준비론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특별히 흥미를 주는 것은 회개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생기게 된다는 칼빈의 개념이다((Inst, 3,3,7). 이는 죄인의 마음이 회개를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각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회개를 전할 때에는 흔히 심판에 관해서 언급한다. 예컨대 예레미야서에는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되어 있다 (렘 4:4). 또 바울이 아덴 사람들을 책망할 때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하였다(행 17:30-31). 이 외에도 많은 성구가 있다.
성경은 간혹 과거에 이미 받은 형벌을 통해 하나님이 심판자이시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죄인들이 만일 속히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형벌이 임할 것이라는 경고를 깊이 생각토록 하기 위함이다. 신명기 29장(19절 이하)에서 우리는 이러한 예를 볼 수 있다. 죄를 무서워하는 것과 죄를 미워하는 생각이 회심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사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회개의 근원이라고 본다(고후 7:10). 우리가 형벌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하고 혐오할 때에,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날카롭게 상처 입지 않으면, 우리 육신의 나태함은 고쳐지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징계의 막대기를 들어 더 세게 치지 않으셨다면, 목석같이 둔하고 무딘 우리의 육신에 아무런 효과도 없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쇠망치로 때려 부수어야 할 완고함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협하실 때에 더욱 엄하게 다루지 않으실 수가 없다. 잠든 자들을 부드럽게 달래는 것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기독교 강요 제 3권 3장 20항(어떤 의미에서 회개는 용서의 선행 조건인가?)에서 죄에 대한 증오심이 회개의 시작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우리를 처음으로 접근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자들은 가련하고 고통받는 죄인들뿐이며, 신음하고 수고하며 무거운 짐지고 주리며 목마르고 슬픔과 불행에 시달리는 죄인들뿐이다(사 61:1-3; 마 11:5,28; 눅 4:18).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회개를 목표로 노력하며, 일생을 통해서 회개에 전념하며, 끝까지 회개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보통 우리 인간에게는 회개를 요구하신다. 이것은 그의 자비가 사람들이 회개하는 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라고 그는 말씀하신다(사 56:1). 또,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20).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6-7).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은 우리의 회개가 근거가 되어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을 자격이 생긴다는 뜻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끝까지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하시고, 만일 그들이 은혜를 얻고 싶으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지를 알리신다. 따라서 이 육신의 감옥에서 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의 결점, 즉 우리의 타고난 생명과 싸워야 한다. 즉, 육을 죽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훈련하여, 드디어 육을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나는 자신을 혐오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혐오하는 것은 진창에 빠져서 전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가며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접붙임을 받아 계속 주의하여 회개하는 생활을 하기 위함이다. 실로, 죄를 진정으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의에 대한 사랑에 먼저 사로잡히지 않으면 아무도 결코 죄를 미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가장 단순한 것이지만 성경의 진리와 가장 잘 들어맞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는 칼빈의 신명기 설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그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올바로 인도해 주셔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뚜렷이 다른 두 가지 은혜를 수여하신다는 사실이 언급되어야 한다. 하나는 우리가 준비되어 그분께 순종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은혜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깨우치셔서 그분의 뜻을 알게 되는 즉시 그분을 섬기는 지속적인 애정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는은혜이다.... 인간이 믿음으로 이끌려오기 전에...그들은 미리 어떤 적절한 준비를 하게 된다.... 그들은 믿음은 없지만 믿음으로 가는 입구에 서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적 움직임이 인간으로부터, 혹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으로부터 나오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분께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하나님께서는 미리 가르치셔서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부여하신 하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행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준비론에 대한 설명은 은혜에 대한 설명이다. 청교도 준비 교리는 교회 회중들에게 율법주의를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칼빈은 구원에 이르는 단계로써 공로에 의한 자기 개선의 모든 형태를 거부했다. 하지만 칼빈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믿음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것은 믿음이 일어나는 순간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믿음으로 이끄는 비밀스러운 작용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믿음은 기본적인 지식이나 수동적인 설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율법으로 마음을 준비시켜야 한다. 율법은 돌 같은 마음을 망치로 두들겨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율법을 쓰시기 전에 표면을 매끄럽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회개라 불렀지만 칼빈은 이것을 참된 회개로 이끄는 믿음을 위한 준비로 생각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칼빈이 회심의 일반적인 방식은 믿음을 위한 준비를 포함한다고 가르쳤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