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 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안소영지음 2005. 11. 4 보림출판사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손병순
공자는 나이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하늘의 뜻을 안다. 나도 이제 그 하늘의 뜻을 따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갔다. 그동안 겪었던 모든 수고와 역경은 새로운 희망의 발판이 되었고 운명을 바꾸었다. 이 모두가 책을 읽었기 때문이며, 책은 운명이었다.
공자께서도 가난과 자신의 낮은 사회적 신분에 좌절하지 않고 책을 엮은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읽은 책이 다섯 수레에 가득 실리도록 읽고 또 읽어서 성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도 운명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위기가 기회다. 그들이 살았던 조선시대보다 지금은 휠씬 편리하고 살기 좋은 세상 아닌가 ? 그들 보다 더 좋은 운명으로 바꾸어 나갈 것이다. 그가 살았던 암담했던 상황지독한 가난, 앞날에 대한 걱정, 서자라는 운명의 굴레를 극복하고 좋은 벗들과 그를 알아주는 정조대왕과 함께 그 시대를 조명해보면서 먼 길의 시작에 선 나 자신을 심기일전(心機一轉)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낙엽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잔 술에도 금방 취해 얼굴은 홧홧하고 손발은 저릿저릿 힘이 없었다. 끝없이 아득한 가을 하늘 속으로 내 몸이 붕 떠올라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차라리 점점 작아져 한 점 티끌이 되었으면 짧은 순간 이대로 떠돌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면,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비참한 것은 쓰일 데가 없다는 절망감이다. 책만 파고들면 무엇하나? 내 말과 글로는 세상을 조금도 바꾸어 놓지 못하는 것을, 몸을 움직여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이던가?
고작 종이를 묶어 책을 만들거나 밀랍으로 윤회매를 만드는 것 뿐, 그러나 살아가는 데는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은 일들이었다.
공자는 나이 서른에 학문과 인생에 뜻을 세우셨다고 한다. 하지만 어렵게 뜻을 세웠다 하더라도 세운 뜻을 펼쳐 보일 데가 없는 나의 삼십 대는 내내 외롭고 서럽기만 했다.
나보다 어린 벗들의 이십대 젊음은 눈부시긴 하였지만, 그들의 삼십대도 나처럼 서러울 것만 같아 지레 눈물겨웠다.
그렇게 세월만 보내는 동안 어느새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와 있었다. 세상일의 어느 것에도 흔들림이 없다는 나이, 불혹(不惑).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흔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외아들 광규가 자라 혼례를 치를 나이가 되니 덜컥 겁도 났다. 이제까지 무엇하며 살아왔던가, 지나온 세월들이 참으로 덧없이 느껴졌다. 여전히 세상 어디에도 쓰일 곳을 얻지 못한 채, 나는 술에 취해 낙엽 위에 누워 있었다.
내 나이 마흔을 두 해 눈앞에 둔 1778년, 나와 벗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정초부터 심념조 대감 집에서 다녀가라는 전갈이 왔다.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따로 만난 적은 없었기에 무슨 일일까 궁금하기만 했다. 심대감이 그해 봄에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으로 임명되었는데, 내가 수행원으로 가게 되었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박제가는 체제공 대감을 따라가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국경을 넘어 중국 땅을 밟게 되다니, 그것도 정식으로 나라의 명을 받아서 가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문득 담헌 홍대용선생의 말씀이 떠올랐다. 선생이 태인 현감으로 떠난 것은 한 해전이었다. 작별인사를 하러 간 나와 벗들에게 실제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네들에게도 좋은 날이 꼭 올 것이니.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하며 자신을 갈고 닦게.”
선생은 주상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시기 전에, 가까이 모시며 가슴 속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고 한다. 능력은 있되 쓰이지 못하는 불우한 인재들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하셨다는데, 우리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이었을 것이다.
선생이 말씀하신 좋은 날이 온것인가? 새삼 담헌 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왔다.
그해 봄에는 나와 박제가, 그리고 뒤이어 유득공이 드넓은 중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779년에는 우리 모두 대궐의 부름을 받아 검서관이라는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도 쓰일 곳을 얻게 된 것이다.
박제가는 중국에서 갓 돌아와 <북학의>를 썼으며 1780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 완성되었고, 1784년 유득공이 발해고(渤海考)를 완성하고 , 1790년 백동수를 비롯한 장용영의 모든 무관들과 장교, 병사들이 힘을 모아 <무예도보통지> 완성하였다.
또다시 운명이 바뀌고 1800년 정조가 마흔아홉이란 한창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덕무의 벗들도 또한 차례 운명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어린 순조 임금을 대신하여 세도정치가 득세하고, 정조의 개혁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노론 계열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반대파인 남인들은 모진 박해를 받았다.
정조가 그처럼 애착을 가지고 만들었던 규장각도 축소되고, 장용영은 해체되어 백동수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지원은 늙음과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805년 세상을 떠났다. 관직에서 물러나 독서로 세월을 보내던 유득공도 180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서구는 평안감사까지 올랐으나 1805년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포천에서 글을 읽으며 조용히 지냈다.
그 아들과 손자들은 ..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와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과 유본예, 박제가의 막내 아들 박장암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검서관이 되었다.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은 할아버지를 닮아 모든 분야에 박식하였으며, 김정호, 최한기들과 교류하며 저술에 몰두하였다.
유득공의 회고시를 외우던 그의 아들 유본학과 유본예는 검서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쇄국과 개방의 격렬한 흐름속에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가까이에서 목격하면서 조선에서도 개혁과 개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으며, 집 가까이에는 훗날 개화사상을 토대로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정변을 일으키는 김옥균과 홍영식과 박영효가 가까이 살고 있었다.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의 벗들이 드나들던 할아버지 연암의 사랑방이 그랬듯이 제동에 있는 박규수의 사랑방에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젊은이들로 늘 붐볐다.”
역사는 스스로 움직이는 사람을 위해서 그 시간을 맞춰주는 것 같다. 스스로 책만 보는 바보라 하였지만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결코 책 속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하루종일 들판에서 일하고 돌아와 봐야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던 조선 백성들의 사는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시작한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과 사상,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다. 그 시대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선조들의 놀라운 감동을 보면서 내게도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그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나도 그분들 이상으로 노력과 열정,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JCkBdL9jYJM&list=UUHLuAf5t4xwq-fJUAlzgsng&index=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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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책 속에 길이 있고 만고불변의 진리가 그득하지요.
철학자 베이컨이 독서는 완성된 사람을 만들고 토론은 재치있는 사람을 만들며 필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고 했잖아요.
어수선한 세상일수록 독서를 통해 길을 찾고 난세를 극복해 나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