霜餘水反壑 서리 내린 뒤 물은 계곡으로 흘러 들어가고
風落木歸山 바람에 진 나무도 산으로 가누나
歲華晩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昆蟲皆閉關 벌레도 모두 숨어 움추리는도다.
양사언(楊士彦: 1517~ 1584)
이 립 옹(而立翁)
조선 전기의 문인, 서예가로 자(字)는 응빙(應聘)이고 호는 봉래(蓬萊). 완구(完邱). 창해(滄海). 해객(海客)이다. 시와 글씨에 모두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草書)와 큰 글씨를 잘 써서, 안평대군(安平大君). 김 구(金絿). 한 호(韓濩)와 더불어 조선 전기 4대 명필가(名筆家)로 일컫고, 조선 3대 명필가(名筆家)를 칭할 때는 양사언(楊士彦). 한 호(韓濩). 김정희(金正喜)를 꼽는다. 또한 형제인 사준(士俊). 사기(士奇)와 함께 중국의 소 순(蘇洵). 소 식(蘇軾). 소 철(蘇轍) 삼부자(三父子)와 비교되기도 한다.
〇 양사언(楊士彦) 중종 35년(1540) 경자(更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 2위
중종 35년(1540) 경자(更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1등. 2위
자: 응빙(應聘)
호: 봉래(蓬萊)
생년: 1517년
합격연령: 30세
전력: 유학(幼學)
거주지: 경(京)
본관: 淸州
父: 양희수(楊希洙) 조봉대부(朝奉大夫) 이천도찰방(利川道察訪)
〇 양사언(楊士彦) 명종 1년(154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0위.
자: 응빙(應聘)
호: 봉래(蓬萊)
생년: 1517년
합격연령: 30세
전력: 생원(生員)
관직: 부사(府使)
본관: 청주(淸州)
父: 양희수(楊希洙)
祖父: 양제달(楊悌達)
曾祖父: 양 치(楊治)
〇 배(配): 숙부인 음성박씨(淑夫人 陰城朴氏)
숙부인 간성이씨(淑夫人 杆城李氏)로 아버지는 이시춘(李時春)이다.
〇 1男: 양만고(楊萬古)
2男: 양만세(楊萬世)
3男: 양만춘(楊萬春)
〇 중종 12년(1517)경기도 포천군 신북면(新北面) 기지리(機池里)에서 양희수(楊希洙)의 5男으로 출생하다.
〇 중종 35년(1540) 나이 20세로 경자(庚子) 생원. 진사시(生員. 進士試)에 <단사부(丹砂賦)>를 지어 1등, 2위의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한 뒤, 부모님이 연이어 돌아가시자 6년간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의 상(喪)을 마쳤다.
〇 명종 1년(1546) 나이 30세로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사기책(士氣策)>을 시답(試答)해 20위로 합격한 뒤 대동찰방(大同察訪)을 지냈다. <열운정기(閱雲亭記)>를 짓다.
〇 삼등현감(三登縣監)을 지내다.
〇 명종 10년(1555)나이 30세에 함흥판관(咸興判官)으로 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다. 을묘왜란 때 종군(從軍)하여 남정가(南征歌)를 짓다.
〇 명종 11년(1556) 나이 40세. 경기도에 기근(饑饉)이 들어 병중에 송피(松皮)로 연명하다. 詩 <식송피(食松皮)>를 짓다.
〇 명종16년(1561) 나이 45세로 평창군수로 있으면서 상소하여 궁핍하게 지내는 백성들의 실상을 알리다. 양사언은 여러 지방의 부사(府使)나 군수(郡守)로 재직하면서 효제(孝悌)와 민속교화(民俗敎化)에 주력하여,
백성들이 양부사(楊府使)를 친어버이처럼 받들었다는 칭송과 백성들의 손에 의해 세워진 선정비(善政碑)가 그냥 세워진 것이 아님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기에 실어 본다.
〇 명종 16년( 2월 17일) ‘평창군수 양사언이 상소(上疏) 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맡고 있는 고을은 바로 옛적 예맥(濊貊)의 한 작은 고을 입니다. 주민들은 모두 암굴에서 짐승처럼 거처하는 섶을 묶어 입구를 가리며 비탈 밭을 경작하여 근근히 수확하면서 구차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목조(穆祖)의 비(妃)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조세를 감면했는데도 전결(田結)은 8백결에 불과하고 민호(民戶)도 5백호를 넘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세가 바뀌어 청백한 수령이 부임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곤궁에 빠져 원망 속에 살아온 지 60여년이 되는데, 그 사이 논밭은 날로 더욱 황폐(荒廢)해지고 백성들은 갈수록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신이 부임한 날에 먼저 장부를 보니 곡식이 9백석이고 주민이 40호이고 남아있는 관리가 8~9명이고, 시역(廝役)이 수 십명이었는데, 귀신같은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를 했고 옷은 해져서 몸도 제대로 가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애처로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전지가 묵게 된 까닭을 물어 보니,
‘백성들이 흩어진 지 누구와 더불어 경작하겠는가? 40호의 힘으로 옛날 500호의 부역을 감당해야 하고 100결의 전지로 800결의 공물을 내야 한다.
아비 죽은 아들과 남편 죽은 과부뿐이어서 일족(一族)이 떠난 데는 호(戶)가 끊어졌고, 이웃이 떠난 데는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 우리 고을을 점검해 보면 위태롭고 고달픈 사연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마음에 감촉되는 바가 있어 신은 밥이 넘어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깊이 생각하고 심력을 다 기울여 세 가지 계책을 얻었는데 전하께서는 잘 살펴주소서. 등(縢)나라와 설(薛)나라가 부용국(附庸國)으로 조회(朝會)하지 못한 것은 땅이 편소했기 때문이고, 여좌(閭左)의 한전(閒田)에 대해 공물을 받지 않은 것은 주민이 가난했기 때문이고, 관문(關門)과 교량과 산림과 천택(川澤)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은 것은 흉년이었기 때문입니다.
열 집에 아홉 집이 빈 고을이 무익하게 허명만 있으니 삭제하고 다른 고을에 합쳐 다스리기만 하고 부역을 시키지 않는 것이 계책의 한 가지입니다. 46호의 주민들을 위로하고 각종 명목의 신구(新舊) 공물을 면제하는 것이 계책의 한 가지입니다. 미수한 대여 양곡은 포기하고 10년 동안 산림세(山林稅)를 면제하는 것이 계책의 한 가지입니다.
이 네 가지 계책을 쓰고도 유민(流民)이 돌아오지 않거나 양곡이 저축되지 않았다는 곳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불쌍한 이 백성들이 전하의 어진 정치를 받아 10년간 부역도 공물도 세금도 부담하지 않게 된다면 어찌 한 고을만의 다행이겠습니까. 온 나라의 유민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신이 외람되이 수령의 적에 있으니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요, 허기(虛器)만 안고 앉아 있을 수 없겠기에 쇠잔한 고을 잿더미 위에서 먼저 세 가지 계책을 바치고 다음으로 도형(圖形)【상소문 아래에 그 고을의 산천을 그리고 또 민호(民戶)> 전결(田結)과 창고 양곡의 해마다의 모곡(耗穀)을 조목조목 열기하였다.】을 그려 올리니 전하께서 밝게 살피소서.
아아, 눈앞의 참담하고 급박한 상황은 문사로만 애통해 할 정도가 아니니, 어찌 여유를 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대신들과 상의하여 안으로는 해사에 위임하고 밖으로는 관찰사에게 하유하여 결단을 내려 시행하신다면 백성을 은혜롭게 보호하는 정치가 이번 이 일로 실천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저의 어리석은 소견을 용서하소서.”
하니 정원에게 전교하기를,
“이 상소의 내용을 보니 백성을 사랑하는 심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림까지 그려 계책을 진술하였으니 그 정성이 가상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헤아려 조처하게 하고 그 뜻으로 군수(郡守)에게 회유(回諭)할 것을 감사에게 하서(下書)하라.”
하였다.
〇 명종 19년(1564) 48세. 고성군(高城郡) 구선봉(九仙峯) 아래 감호(鑑湖)가에 비래정(飛來亭)을 짓다. 이 정자는 양사언(楊士彦)이 은거(隱居)하려고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아들 양만고(楊萬古)가 호를 감호(鑑湖)라 지은 것으로 보아, 양만고는 아마도 고성에서 태어난 듯싶다.
비래정(飛來亭)
바다는 신선계로 들어가고 海入壺中地
누대는 물 위 하늘에 떠있네 樓居水上天
푸르게 떠 있는 것은 쌍옥순이고 靑浮雙玉筍
붉게 꺽인 것은 만금의 연꽃이네 紅折萬金蓮
수은을 달이니 용은 솥에서 울고 煉汞龍吟鼎
안개를 먹으니 뼈는 이미 신선이네 餐霞骨已仙
그대는 황학을 불러 술을 마시게 居招黃鶴酒
나는 백구와 더불어 잠을 잘 테니 吳與白鷗眠
〇 선조7년(1574) 58세. 강릉부사(江陵府使)로서 기우제문(祈雨祭文)을 짓다.
* 내천(內遷)하여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종부시정(宗簿寺正)를 지내고 있다.
〇 선조 10년(1577) 61세로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있을 때 선정(善政)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계(官階)를 받았고, 북변의 병란을 예지하고 마초(馬草)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도 않았다. 한편 그는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예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〇 선조 14년(1581) 65세로 함경도 안변부사(安邊府使) 재직 중 지릉(智陵: 태조의 증조부 의 陵)의 화재 사건에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로 귀양을 가다.
〇 선조 17년(1584) 5월에 귀양에서 풀려나오는 길에 나이 68세로 병사(病死)했다.
〇 묘소는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吉明里) 금조산(金鳥山) 자락에 있고, 동네에 있는 길명사(吉明祠)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으로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에 위치하고 있다.
포천 유림(儒林)에서 매년 음력 9월 16일에 제향하고 있다. 문집으로는 《봉래시집(蓬萊詩集)》과 다수의 유묵(遺墨)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