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제4대 탈해왕 9년 한명재(漢明宰) 8년 을축(乙丑) 춘삼월의 일인데 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사이에서 닭우는 소리가 있거늘 밝음에 표공(瓢公:대보(大輔))을 그곳에 보내어 살피게 하니 금색의 조그마한 궤가 나무가지에 걸려 있고 그 아래서 흰닭이 울고 있는지라 표공이 돌아와서 왕께 그 사실을 아뢰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다 열어보니 그 안에 남아(男兒)가 들어 있으며 용모가 뛰어난지라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를 도와서 아들을 점지함이 아니 겠는가? 하고 거두어 양육(養育)하니 자라남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智略)이 많은 지라 이름을 알지(斡智:향언(鄕言)에 소아(小兒)를 일컬음))라하고 성을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김씨라고 하였으며 닭의 이상함이 있는 연고로 시림(始林)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하고 인해서 국호(國號)로 하였다.
강조(康造;각간(角干))의 따님으로 짝을 지어주니 이가 바로 마정부인(摩貞夫人)이라 7대손 미추대에 이르러 첨해왕을 세우다.
또 일설에는 불빛이 시림(始林)을 밝히고 붉은 구름이 하늘로 쫓고 땅이 드리우더니 구름속에서 ㄱㅁ빛의 적은 궤가 나무가지에 걸려있고 광채가 나온는데 나무가지아래서는 흰닭이 울고 있는지라. 표공이 그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수레를 타고 숲으로 가서 사람을 시켜 궤를 열어보니 그 안에 어린 남아(男兒)가 들어 있으며 용모가 비범한지라 왕이 기꺼히 좌우에 일러 말하되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 아니겠느냐? 하고 안고 환궁(還宮)하는데 새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너푸는지라. 왕이 날을 택하여 태자로 삼고 곧 이름을 알지라 하고 성 김씨라 하였ㅇ며 뒤에 파사(婆娑)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함.
삼가 안찰건데 우리동방의 김씨(金氏)가 전조(前朝)의 한 할아버지의 후손이면서 본관(本貫)이 서로 같지 아니한 것은 진실로 그 자손이 많이 나누어진바로서 이로인해 성씨(姓氏)를 한것이니 어찌 태사공사마천(太史公司馬遷)이 이제(二帝 : 요순(堯舜)) 삼황(三皇 : 하우(夏禹), 은탕(殷湯), 주무(周武))과 진한(秦漢)이 함께 황제(黃帝)를 선조로 하면서 진(秦)은 스스로 진(秦)이라하고 한(漢)은 스스로 한(漢)이라 하였겠는가? 원래 그 선조인즉 하나로서 문호분립(門戶分立)에 각기 선후가 있을 뿐이라 이것을 본다면 우리 김씨도 천지와 더불어 서로 시(始)에서 종(終)토록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김씨 외에도 별다른 또하나의 김씨가 있으니 곧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뒤가 그것이다.
유리왕(儒理王) 즉위 19년은 한광무(漢光武) 건무(建武) 18년 임인년(壬寅年)인데 이때에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등 9인이 각각 추장이 되어 그 부족을 거느리고 계노리로 술을 마시면서 귀지봉(龜旨峯)을 바라보니 거기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거늘 그곳에 가서 마침내 금궤를 얻은지라. 그안을 열어보니 여섯 개의 금색 알이 있는데 하루도 못되어 여섯 남아(男兒)가 껍질을 깨고 나오니 얼굴이 비범하며 장대(狀大)한지라 대중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더라.
처음 난분을 추대하여 주공(主公)을 삼고 먼저 나온 까닭에 수로(首露)하고 일커르고 금란(金卵)에서 나온 연고로 김씨(金氏)로 성(姓)을 하였으며 국호로 가락(駕洛)이라 하니 지금의 김해(金海)로 성(姓)을 하였으며 국호를 가락(駕洛)이라 하니 지금의 김해(金海)이라. 그 다음에 오형제가 각기 오가야(五伽揶)의 주인이 되니 첫째는 아라가야(阿羅伽倻)라하니 지금의 함안(咸安)이요. 둘째는 고령가야(古寧伽倻)라 하니 고령(高靈)이요. 셋째는 대가야(大伽倻)라하니 지금의 합천이요. 넷째는 성산가야(星山伽倻)라 하니 지금의 성주(星州)요. 다섯째는 소가야(小伽倻)라 하니 지금의 고성(固城)이라.
왕비 허씨(許氏)의 이름은 황왕(皇王)이니 곧 남천축국왕(南天竺國王)의 따님으로서 바다를 건너 옴으로 왕이 맞이하여 왕후로 삼아서 아홉아들을 낳으니 일곱아들은 부성(父性)을 따르고 두아들은 모성(母性)을 따랏으니 지금의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허씨(許氏)는 모두 수로왕(首露王)의 자손이라. 그런데 대보공(大輔公) 휘알지(諱閼智)는 한(漢)나라 명제영평(明帝永平) 八년 乙丑 (서기 六五年)에 낳고 수로왕(首露王)은 한(漢)나라 광무제건무(光武帝建武) 十八年 임인(壬寅)(서기 四十二年)에 낳아서 임금이 되었은 즉 그사이가 이십사년의 차(差)가 있으니 대게 동시의 인물이라고는 하겠으나 혹 대보공(大補公)을 수로왕(首露王)뒤라고 하는 것은 무엇에 근거함인지 반드시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오단(誤斷)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