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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한자) | 안회(安𡼾) | 본 관 (한자) | 죽산(竹山) | 자(한자) | 경운(景雲) |
호(한 자) | 미상 | 생 몰 년 대 | 1627년(인조 5) ~ 1668년(현종 9) 1월 6일 | ||
출생지 (거주지) |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마을 | ||||
주 요 경 력 | ●1651년(효종 2) 신묘(辛卯) 별시(別試) 무과에 급제함. ●1653년(효종 4)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됨. ●1661(현종 2)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에 임명됨. ●1662(현종 3) 호남수군 우후(湖南水軍虞候)에 임명됨. ●1667(현종 8)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임명됨. | ||||
출전(出典) 및 주요저서 | ●《죽산안씨족보(1994년)》 ● 조태억(趙泰億,1675~1728)의 문집《겸재집(謙齋集)》 ●《신묘 별시 문[무]과 방목(辛卯別試文[武]科榜目)》 | ||||
기 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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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자 | 족후손 안재중(011-628-5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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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 과거 및 취재 / 무과
안회(安)
[무과] 효종(孝宗) 2년(1651) 신묘(辛卯) 별시(別試) 병과(丙科) 140위(171/1236)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548D68CFFFFB1627X0
자 경운(景雲)
생년 정묘(丁卯) 1627년(인조 5)
졸년 무신(戊申) 1668년(현종 9)
합격연령 25세
본관 죽산(竹山[新])
거주지 보성(寶城)
[관련정보]
[이력사항]
전력 교생(校生)
관직 호남수군우후(湖南水軍虞侯)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가족사항]
[부]
성명 : 안후지(安厚之)
관직 : 유학(幼學)
증직 : 증좌승지(贈左承旨)
[처부]
성명 : 최정(崔湞)
본관 : 해주(海州)
[형]
성명 : 안전(安峑)
성명 : 안음(安崟)
[출전]
《신묘 별시 문[무]과 방목(辛卯別試文[武]科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K 2291.7 1748 (1651.2)])
《죽산안씨족보(1994)》
자(字) 경운(景雲)
생(生) 인조 정묘(仁祖丁卯, 1627, 인조 5)
○무과(武科) 형조 좌랑(刑曹佐郞)
졸(卒) 현종 무신(顯宗戊申, 1668, 현종 9)
배(配) 淑人 海州崔氏 父 通德郞 湞 祖 郡守 有建 曾祖 府使 遇 外祖 通德郞 淸州 韓恪
배위는 숙인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부는 통덕랑을 지낸 최정(崔湞), 조는 군수를 지낸 최유건(崔有建), 증조는 부사를 지낸 최우(崔遇), 외조는 통덕랑을 지낸 청주 한각(韓恪)이다.
○忌 正月六日
묘(墓) 尺紗先兆左麓庚坐合窆
조태억(趙泰億, 1675~1728)의 문집『겸재집(謙齋集)』36권에 안회(安,1627~1668) 의 묘표(墓表) 기록이 남아 있다.
형조좌랑 안공묘표(刑曹佐郞安公墓表) a_190_092d
公諱。字景雲。其先竹山人。國初。有諱挺生。直提學。高祖諱舳。歷侍從。終牧使。曾祖諱重寬。僉樞。生諱邦俊。爲叔父進士諱重敦後。是爲牛山先生。以學行風節。有士林重望。累徵至工曹參議贈吏曹參判。寔生諱厚之。贈左承旨。卽公考也。妣昌寧成公滄浪先生文濬女。牛溪先生之孫也。以天啓丁卯生公。二十五。擢武科。癸巳。拜宣傳官。未幾。棄官歸養。前後凡三拜 是職。辛丑。陞都摠府都事。壬寅。除湖南水軍虞候。癸卯夏。承旨公有疾。乞暇歸省。甲辰秋。遭憂。居制過毁。乙巳。服闋。遂絶意仕宦。投閑養痾。爲終焉計。丁未。除刑曹佐郞。亦辭不赴。明年正月三日。竟卒于家。得年四十二。葬于寶城沙兒山負庚之原。公爲人莊重恬靖。尤篤于內行。自以夙失所恃。爲終身痛。見禽鳥子母相樂。輒泫然而涕。每値諱日。號痛如初喪。事承旨公。一以孝敬。視庶母甚謹。與庶弟同居。友愛深至。平居端飭無惰容。人不敢以戱慢相加。一見可知其爲法家子弟。淑人海州崔氏。文獻公冲之後。通德郞湞之女 也。資性明惠。率禮無愆。事親治家。咸得其宜。公歿。喪祭克致其誠。生後公一年。歿後公四年。祔于公墓。男壽相。有文行不仕。女適生貟吳大寬。孫男世濟。亦佳士。次世敎。女士人林芑。吳一男德胄。女士人白時謙。 |
(번역문)
공의 휘는 회(), 자는 경운(景雲), 그의 선대는 죽산인(竹山人)이다.
조선 초 휘 정생(挺生)은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고조 휘 축(舳,1500~1572)은 임금을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는 관직을 거쳐 목사(牧使)를 지냈고, 증조 휘 중관(重寬,1524~1605)은 수직으로 첨추(僉樞)를 지냈으며, 휘 방준(邦俊,1573~1654)을 낳아 숙부 되는 진사(進士) 휘 중돈(重敦,1541~1565)의 뒤를 이었는데, 이분이 우산 선생으로 학행(學行, 학문과 덕행)과 풍절(風節, 풍모와 절개)로써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얻어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아 공조 참의에 이르렀고 훗날 이조 참판을 증직 받았다. 이분이 낳은 휘 후지(厚之,1590~1664)는 좌승지(左承旨)를 증직 받았는데 곧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成氏,1591~1627)는 창랑 선생 성문준(成文濬,1559~1626)의 따님으로 우계 선생(성혼成渾,1535~1598)의 손녀가 된다.
천계[天啓, 명 희종(熹宗)의 연호로 1621~1627년] 정묘년(1627)에 공을 낳았다. 25세(1651)에 무과에 등용되어 계사년(1653)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아버님 봉양하기를 전후로 3번이나 청했으나 이 관직을 제수 받았다. 신축년(1661)에는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에 올랐고, 임인년(1662)에는 호남수군우후(湖南水軍虞候)를 제수 받았다. 계묘년(1663) 여름에 승지공(承旨公)께서 질환을 얻자 급히 시간을 내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갑진년(1664) 가을에 친상을 당하자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슬픔이 지나쳐 건강을 해치고야 말았다. 을사년[1665 → 병오년(1666)]에 상복을 벗은 후 마침내 벼슬살이의 뜻은 접었으나 병든 자신의 몸 요양을 등한(等閑)히 해 마지막이 되었으니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정미년(1667)에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이듬해(1668) 정월 3일에 마침내 집에서 생을 마치니 향년 42세로, 보성 사아산(沙兒山)의 경지원(庚之原)에 장사를 지냈다.
공은 사람됨이 장엄(莊嚴)·정중(鄭重)하고 조용함·편안함을 좋아해서, 우암(尤庵, 宋時烈,1607~1689)이 방문했을 때 스스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티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그리고 평생 동안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날짐승 새의 새끼와 어미가 서로 즐거워하는 것만 보아도 번번히 눈물 흘리며 울었고, 매번 어머니 휘일(諱日, 돌아가신 날)이 돌아오면 초상(初喪)치를 때처럼 울면서 슬퍼했다. 승지공(承旨公, 安厚之,1590~1664)을 대함에도 역시 한 뜻으로 잘 섬기고 공경하여 이것을 본 서모(庶母)도 극진하게 대했고, 서제(庶弟)와 한 집에 살 때 우애(友愛)가 깊었다. 평상시에도 용모를 단정하게 갖출 뿐 아니라 희롱(戱弄, 장난 삼아 놀리는 것)하지도 않았고 거만(倨慢)하지도 않았다. 그 하나만 봐도 예를 숭상하는 집안의 자제(子弟)라는 것을 가히 알 수 있으리라.
배위 숙인(淑人) 해주 최씨(海州崔氏,1628~1672)는 문헌공(文獻公) 최충(崔冲,984∼1068)의 후예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최정(崔湞)의 따님이다. 타고난 성품이 똑똑하고 슬기로워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고 어버이를 섬기고 집안일을 맡아 다스림에 모두 다 고맙게 여겼다. 공이 돌아가신 후 상례와 제례에 정성을 다했다. 공보다 1년을 늦게 태어나서, 공보다 4년 뒤 돌아가셨고, 공의 묘소에 합장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어 아들 수상(壽相,1665~1729)은 문행(文行)이 있었지만 벼슬에 나서지 않았고, 딸은 생원 오대관(吳大寬,1656~?)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2남 1녀를 두어 큰손자 세제(世濟)도 품행이 단정한 선비였고, 둘째는 세교(世敎)이며, 손녀딸은 사인 임기(林芑)에게 출가했다. 오씨 집안의 외손으로 1남 1녀를 두었는데 외손자는 오덕주(吳德胄)이고 외손녀는 사인 백시겸(白時謙)에게 출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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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억(趙泰億, 1675∼172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대년(大年), 호는 겸재(謙齋) · 태록당(胎祿堂). 형조판서 계원(啓遠)의 손자로, 이조참의 가석(嘉錫)의 아들이다. 태구(泰耉) · 태채(泰采)의 종제이다. 최석정(崔錫鼎)의 문인이다. 1693년(숙종 19) 진사가 되고, 170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 · 지평 · 정언 등을 지냈다. 170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08년 이조정랑을 거쳐 우부승지를 지내고, 다음해 철원부사로 나갔다가 1710년 대사성에 오르고, 통신사로 차출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이조참의 ·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1712년 왜인의 국서(國書)가 격식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관작이 삭탈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왔다. 1714년 다시 기용되어 이듬해 공조참의가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717년 여주목사로 나갔다가 1719년 장례원판결사가 되었다. 1720년 다시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21년(경종 1) 호조참판으로 기용되고, 같은 해 대사성 · 세제우부빈객이 되었다. 이어 부제학 · 형조판서 · 지경연사(知經筵事) · 우빈객(右賓客)을 거쳐 1722년 대제학이 되었고, 공조판서 · 예조판서 등을 거쳐 1724년 호조판서에 올랐다. 그해 영조가 즉위하자, 즉위의 반교문(頒敎文)을 지었고,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출사(出仕) 8일 만에 복상(卜相)이 있어 이조판서 이조(李肇)의 추천으로 우의정에 올랐다. 같은 날 호위대장(扈衛大將)을 제수 받았고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725년(영조 1) 사간 이봉익(李鳳翼), 지평 유복명(柳復明) 등의 청에 의하여 판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가 이어 삭출(削黜)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좌의정에 복직되었다가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전임하였다. 1721년 호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조태구 · 최석항(崔錫恒) · 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세제(世弟: 뒤의 영조) 책봉과 대리청정을 반대하여 철회시켰으며, 소론정권에 참여하여 크게 기용되었다. 온건파에 속하였고, 영조 즉위 후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 과격파의 국문 때 책임관이 되었는바, 위관(委官)의 직책을 매우 불안히 여겨 왕의 친국을 청하기도 하였다. 초서(草書) · 예서를 잘 썼으며 영모(翎毛)를 잘 그렸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겸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