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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 욜 2:28-32
지난 태풍 매미로 인해서 어제까지 통계를 보니까 사망과 실종이 130명, 재산피해자 4조 7천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손실이 있었습니다. 우리 동포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전국적으로, 그리고 우리 감리교회 전체가, 중부연회가 힘을 써서 선발대를 보내고 1진부터 이제 벌써 5진, 6진까지 남부수해지역으로 파견을 해서 작지만 정성과 마음을 담은 사랑의 손길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 평안의 교회도 이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고 여러분들도 거의 기도로 혹은 물질로 혹은 몸으로 함께 하는 사랑의 손길에 모두가 동참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로 우리 가족의 일이고, 바로 형제자매의 일이고, 우리 이웃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의 한 부분이 어려움을 처하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그런 상황을 기억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은혜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과수원을 했던 분들은 사과와 배가 다 땅바닥에 떨어져서 바닥이 배 밭은 황금 밭으로 변했다고 할 정도로 추수할 것이 없는 그런 심각한 상황이 되었고, 한 상자에 5만원은 족히 받아야할 과일들이 3천원씩 과일주스 만드는 회사에 덤핑으로 넘겨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농부들이, 과수원의 여러 일꾼들이 과일주스 만드는 회사에 물건을 다 실어 보내고 둘러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니까 참으로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의 어려움들을 우리가 인식하면서, 도시에서는 도시대로, 삶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 모양으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위로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오늘 말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여기서 만민이라고 하는 의미는 히브리어의 본래의 의미는 모든 육체라는 뜻입니다. 육체라고 말하면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영과 혼과 몸이라고 하는 구별된 의미로서의 육체를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육체에게 내 신을 부어주리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여러분 실감이 나시나요?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고,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다’ 늙었다고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말하면 이제는 인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늙은이들은 인생의 꿈을 갖지 못하고 이제는 내 인생이 끝났구나 하고 서글퍼하는 것이지요.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이상을 본다고 하는 것은 젊은이들이 보이는 것,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 영원한 것에 꿈을 꾸고 비전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늙은이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이 이상을 본다고 하는 것은 현재 보이는 그들의 삶이 종말이 아니고, 끝이 아니고, 새로운 세계가 그들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고 하는 희망적인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내 신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라’ 사실 이 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잘 못된 거예요. 육체에 부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창세기 6장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후에 아담과 하와를 마지막으로 창조하시고 모든 에덴의 동산의 것들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땅을 다스려라.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주셨습니다. 그 한 마디에 세상에 모든 우상이라고 하는 개념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예배의 대상이라고 하는 말인데 하나님 외에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만물을 다스리는 권리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외에는 엎드려야 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큰 바위에 엎드리고, 큰 소나무에 엎드리고, 사람이 손으로 만든 돌이나 나무나 그런 형상에 엎드린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무지해서 그런 것이지요.
관료사회에서 장관과 도지사와 시장과 군수가 있다고 하면 그들 나름대로의 그들 나름대로의 권리와 권세가 구별되어져 있습니다. 겸손한 것과 자기의 권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하겠지요? 예를 들어 시장이 겸손하다고 해서 군수 앞에서 혹은 이장 앞에서 쩔쩔매고, 자기가 거기에 절을 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그를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바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물의 영장으로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는데 오히려 그 앞에 절을 하게 한다면 얼마나 무지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하는 거지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특권을 주시고, 은혜를 주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남자들에게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하셨고, 여자들에게 해산의 고통을 주셔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즘은 여성들도 해산의 고통을 줄여 보려고, 수술로 낳는 분들이 많습니다만은, 우리 수술하신 분들은 용서하고 들으세요. 사실은 자연분만이 좋습니다. 세계적으로 제왕절개의 범위가 가장 많다고 그래요. 그나마 산모들의 잘못보다는 의사들의 잘못이 클 것입니다. 병원을 운영하는 측면에서 병원비가 많이 나오는 것을 택하기 때문에 자꾸 수술을 권합니다. 알에서 깨어나는 생명체는 그 속에서 발버둥을 치지만, 그것이 안타깝다고 껍질을 깨주면 그 생명체는 정상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생명을 걸고 몸부림치면서 껍질을 깨고 나오면서 날개에도 힘이 생기고, 팔다리에도 힘이 생기고 자신이 그 일을 했다고 하는 강력한 자부심에서 그 생명체는 당당하게 살아나가는 거예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앞으로 아이를 낳아야 할 분들이 가능하면 자연분만을 하셔야 합니다. 거기에서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에 어머니와 자식에 그 정이 그 고통 속에서 거기서 느껴지고 책임된다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웬만큼 권면해도 죄송하지만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병원 경영의 차원에서 산모들을 너무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여기 의사들이 계시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제 판단이 아니라 정확한 통계에 의한 진단이고 평가입니다.
제가 잘 아는 회사의 한 사장님이 출장을 가는 동안에 아내가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늘 병원을 가까이 다녔는데 출장 간 사이에 아내가 해산을 했어요. 다녀와 보니까 아이를 낳았습니다. 병원을 막 가는 중에 간호사를 만났어요. ‘어이구, 사장님 웬일입니까?’ 잘 아는 간호사를 만났어요. ‘아, 우리 집사람이 여기 병원에서 수술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제가 출장 갔다가 와서 지금 오는 길입니다’ ‘아이구, 사장님 사모님인 줄 알았으면 수술 안 해도 되는건데...’ 그 간호사가 그러더랍니다. 멀쩡한 사람 수술 시키는 일이 많다는 이야기지요.
자, 어쨌든 우리가 주님이 주신 것은 수용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의학적으로 위태하고 위험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기본적으로 해산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남자들도 땀 흘려야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방법입니다.
요즘 우리 시대가 로또 복권에 인생을 거는, 목을 거는 시대가 됐어요. 여러분들 중에도 복권을 사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재미로 한두장 사는 것은 제가 뭐라 그러겠습니까? 하지만 거기다가 목을 걸지 마세요. 인생역전, 그리고 거기다가 목을 걸지 마세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냥 재미로 사는 것은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거기에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정신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많이 잘 못된 것입니다. 땀 흘려야 합니다. 땀 흘려서 얻은 소득이 그것이 보람이 있고, 그것이 가치가 있고 내게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삶의 법칙입니다. 땀 흘려서 내가 소득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혼자 남자가 벌어서 어렵잖아요? 부부가 버는 시대가 됐습니다. 삶의 질이 높아졌기 때문에 21세기 삶의 질에 맞추려니까 부부가 벌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옛날처럼 밥이나 먹고 사는 시대처럼 살려면 지금도 남자들만 벌어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잖아요? 아주 쉬운 예를 들어서 다섯 식구가 사는 집이면 휴대폰이 다섯 개입니다. 동의하시지요? 아무리 절약하는 요금제를 선택해도 최소한 3만원은 나오시지요? 그럼 15만원, 평균 20만원은 나올 것입니다. 20만원이면 쪼들리게 살면서 5식구가 한 달 살 수 있어요. 옛날 같으면 한 달 사는 생활비입니다.
이제는 전화요금 휴대폰 값으로 20만원 내보내지요? 집에 KT전화는 따로 놓고, 옛날 같으면 그 휴대폰 다섯 대 필요 없잖아요. 집에 전화기 한 대면 충분한 것입니다. 제가 30년 전에 본 교회에서 교회요람을 만들 때 성도들 이름과 생일들 끝부분에는 전화번호 했는데, 그 때도 본 교회가 1000여명 가까이 됐는데 그 많은 성도들 중에 전화번호 있는 집이 열 손가락이 안 됐어요. 전화 있으면 굉장히 부자였습니다. 학교 가면 전화 있는 사람 그렇게 조사했어요. 텔레비전 있는 사람, 라디오 있는 사람, 30년 전만 해도 그런 거 조사해서 ‘아유 테레비 있어?’ ‘전화기 있어?’ 그리고 굉장히 부자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아니잖아요. 지금은 옆에다 전화기 두고도 핸드폰으로 전화 걸잖아요. 편리하니까.... 그만큼 삶의 질이 달라진 거예요. 그거 보충하려니까 아내도 벌어야 되고, 자식도 벌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옛날보다 살기가 힘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질이 높아졌기 때문에 많이 벌어야 되는 거예요. 한 가지 예만 들었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이 뒤돌아보면 사실은 우리의 삶의 질을 위해서 지출되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땀 흘려야 소득이 있게 하는 그 법칙과 고통으로 생명을 낳는 법칙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가슴 아픈 일들을 사람들이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6장 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아들과 딸이란 개념은 크게 신경 쓰지 마시구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의 자녀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들을 삼고, 딸을 삼고, 사위를 삼고, 며느리를 삼았어요. 아름다움을 보고, 어떤 아름다움입니까? 인격적인 내면의 아름다움인가요? 그것이 아니지요. 육체의 아름다움.
요즘은 젊은이들이 고민을 많이 해요. 왜냐하면 회사에 이력서를 내도 실력이나 경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외모가 중요하다는 거지요. 그래서 외모가 받쳐주지 않으면 취직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갑니까? 정형외과, 성형외과를 가는 거지요. 성형수술을 해서 예쁘게 고친다는 거지요. 코 고치는 데 얼마, 턱 고치는 데 얼마, 이런 식으로 해서 고쳐서야 취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 시대에 만연된다는 것인데, 사실은 창세기 6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는다는 거지요. 외형적인 것, 보이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는 시대, 지금의 시대가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아주 중요한 말씀이 여기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주지 않겠다고 약속했느냐? 이것은 큰 저주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축복인 줄 믿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 보다 큰 저주가 어디 있어요? 내가 너희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 ‘저희가 육체가 됨이니라’
이렇게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인생들을 보시고 영을 부어주시지 않겠다고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요엘서 2장 28절에 보니까 내가 내 신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파격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선포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 제가 파격적이라는 말을 썼지만 얼마나 여러분들의 마음에 파격적인 은혜로 실감이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굉장히 흥분이 되었어요. ‘야,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고 육체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내 신을 부어주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내 신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겠다고,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의 사랑인가?
일시적인 성령의 부으심이 아니라 과거의 먼 역사 속에서의 저주까지 풀어주심을 의미하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120년이 되리라. 육체로 전락한 인간의 소욕으로 빠져 들어간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120년으로 인생을 제한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제한해 주신 생명도 다 살지 못하고 있지요? 지난 주 통계에 여성들의 평균수명이 80세를 드디어 넘어섰고, 남성들은 아직 74세 놀라운 일이잖아요? 우리 여성들의 평균수명이 80에 올라섰습니다. 80까지 사시는 것은 이제 너나 나나 다 사는 거예요. 장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균이예요. 여성들의 평균연령이 80에 들어섰습니다. 80까지는 꼭 사시기 바랍니다. 평균 사는 거예요. 많이 산거 아니예요. 90쯤 살면 장수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분들은 80해도 괜찮습니다. 많이 산거예요. 평균보다 한 6년 더 사신 것입니다.
앞으로 노령화사회, 장수시대가 열려서 이제 우리 다음세대는 100세를 사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게, 아주 어렵지 않다고 하는 의학적 보고가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평균 한 100세들을 살 것 같아요. 벌써 21세기 초반에 평균 80을 넘어섰어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합방한 이후에 처음으로 인구 조사를 할 때 남한에 북한에 그 인구가 정확하지 않았어요. 조선시대 인구가 얼마인지를 몰랐습니다. 처음으로 인구조사를 했을 때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40세가 안 됐어요. 1910년 이야기니까 얼마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거의 갑절이나 생명이 연장이 되었어요.
자,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인간이 동물과 다름없는 단순한 육체로 전락한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셨고, 두 번째는 인간의 수명을 제한하셨고, 세 번째는 결국 그들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6장 이후에 인간들의 삶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게 하나님의 영이 돌아오심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축복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줄 믿습니다. 특별히 영적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29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28절이나 29절이나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 때에, 그 후에 우리가 금식하며 예배를 회복하며 회개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돌이킬 때에 그런 말씀입니다. 분명한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으로 회복되어 질 때에 거룩한 자녀로서의 그 모습을 회복할 그 때에 내 신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리라.
어느 목회자 모임에서 남자목사님이 조금 남성 중심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서 여성 목회자들에게 조금 마음에 언짢은 이야기를 했더니 어느 한 여자 목사님이 손을 들고 이야기 합니다. 요엘 2장 2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또 남종과 여종에게 내 신을 부어주었다고 그랬는데 남자만 목사입니까? 여자도 목사지. 그러면서 대들더라구요.
말씀의 그 근거가 아주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여기의 말씀은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보통 과거에 보면 사람들의 삶에 계층이 있고, 신분이 있었습니다. 왕족이 있고, 귀족이 있고, 평민이 있고, 그리고 노예계층이 있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콜로세움이 있는데 거기도 보면 왕족들이 앉는 층이 있고, 그 다음에는 귀족층, 그 다음에는 평민들,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이나 종들이 구경할 수 있는 층이 있었습니다. 그 개념이 영국에도 그대로 있구요.
여러분, 우리들은 서양의 문화를 그대로 들여왔기 때문에 국립극장이나 예술회관이나 그런데 가면 서양식의 대형 문화센터들을 만들어 놓고, 콘서트나 뮤지컬들을 하는데 보면 우리는 S석 10만원, A석 7만원, B석 5만원, C석 3만원 이런 식으로 구별을 해 놓았지요? 그게 현대판 돈으로 매겨놓은 신분제도입니다. 맨 앞에 앉는 자리가 왕족이 앉는 자리예요. 그게 지금의 S석입니다. 그 다음에 귀족이 앉는 자리가 A석이예요. 돈 없는 사람들은 맨 뒤에 발코니 C석, D석입니다. 저 무대에서 움직이는 배우들이 얼굴이 잘 안 보여요. 망원경 갖다가 봐야 합니다. 과거에 신분제도 스타일을 전부 그대로 갖다가 써 놓았어요. 돈으로만 그것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그런 신분제도가 철저한 사회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남종과 여종에게 일반 평민도 아니고 노예들에게까지 그것도 남자 노예나 여자 노예나 구별하지 않고, 그러면 왕족부터 노예까지니까 모든 사람, 모든 계층이 다 포함되는 거지요? ‘내가 내 신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라’ 모든 사람에게, 어떤 계층이던지 관계없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그 이야기입니다.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리라고 하는 말씀, 그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제는 모든 사람들 이방인들까지, 바울 사도는 그 표현을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까지 당시에 아주 변방에 무식하고 야만스럽다고 했던 스구리아인까지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느니라. 바울은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시대마다 언어는 다르지만 그 말씀의 내용은 같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경우에도 차별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차별이 있다고 하면 이미 그것은 교회가 아니예요. 진정한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교회는 아니라고 하는 거지요. 교회는 세상 지위가 의미가 없는 곳입니다. 아마 그래서 세상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꺼려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과장쯤 되는 분을 전도 했더니 그 분이 하는 말이 내가 혹 가고는 싶은데 그 교회는 우리 회사 부하직원이 있어서 창피해서 못 가겠다는 거예요. 조그만 회사의 과장이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어요. 아마 세상 사람들의 개념이 그런 거 같아요. 좀 권세가 있고, 돈 좀 있으면 내가 뭐가 아쉬워서 교회 가서 쭈그리고 앉아있냐. 뭐, 그런 생각인 거 같아요. 그러나 분명히 깨달을 것은 그것은 너무나 무지한 너무나 어리석은 모습이예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겸허하게, 겸손하게 서지 않으면 안 될 줄로 믿습니다.
30절에서 31절은 그 전에 선포되었던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상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적은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피와 불과 연기기둥이라’ 큰 심판의 상황을 말하는데, 그 때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 엄청난 여호와의 날, 심판의 때에 어느 누가 여호와의 심판에서 피할 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32절에는 이 여호와의 날, 심판의 때에 오히려 심판으로 멸망하고 저주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은혜와 축복을 누릴수 있는 사람들, 그 방법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2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지금 여호와의 날, 심판의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이 시급한데, 그 탈출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인 줄 믿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에 구원을 받으리라는 거예요.
평범할 때, 그냥 조용할 때 여호와여! 그렇게 불러보는 게 아닙니다. 심판의 날, 해가 변하고 달빛이 핏빛이 되는 그 심판의 아마겟돈의 그 날에 사느냐, 죽느냐 하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절규하는 거예요. 여호와여,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여기 있나이다. 여러분 가정에서 생명의 심각한 이제는 인간의 방법으로 그 생명을 살릴 수 없다고 하는 그 상황에서 주의 종을 초청해서 기도하면서 사랑하는 성도들이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그 때의 절규 하나님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의 모든 방법은 이제는 없습니다’ 그런 절규의 기도를 해 본 사람들은 오늘 이 말씀이 정말 실감이 날 거예요.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두 번째 구원의 도피처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도피처가 어디입니까?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이니, 우리의 영원한 도피처는 시온산 곧 예루살렘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성전이예요. 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식처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에서 너희에게 기도하면 내가 들으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에서 간구하면 내가 응답하리라’고 약속하셨는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시온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그 시온산 영적인 의미에서 영원한 도피처가 된 거예요. 오늘 여러분들이 교회를 중심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 중에서 부르심을 받을 자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구원에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32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부르심을 받는 대상은 오직 하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부르는 자인 줄 믿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그냥 무차별적으로 부르시는 게 아니예요. 이사야서에서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하기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제가 우리 집사님 지나가는데, 여기 앞자리 우리 집사님이 앉아계신데, ‘아주머니’ 그렇게 부르면 어떨까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집사님, 혹은 권사님 그러면 조금은 가깝게 다가올 것입니다. 거기다가 윤 권사님, 이 집사님 이렇게 성을 붙이면 훨씬 더 가까워질 거예요. 여러분, 아이들을 쓰다듬어 줄 때에도 ‘이 녀석 참 아빠 닮아서 잘 생겼네’ 그러면 괜히 기분이 좋지요. 자기가 잘 생긴 것처럼 들려지요. ‘그 녀석 3층에서 떨어진 메주같이 생겼네’ 그러면 얼마나 부모가 화가 나겠어요. 근데 그 아이를 쓰다듬어 줄 때도 그냥 그렇게 좋은 덕담을 하는 것도 좋지만 이름을 불러주면 훨씬 더 좋아요. ‘아, 우리 예은이 참 잘 생겼네. 참 지혜롭게 생겼네’
우리 성도들이 많아지기 전에는 제가 성도들, 가족들, 아이들 이름까지 다 외웠는데, 요즘은 식구가 많아지면서 이제 이름을 좀 못 외우는 경우가 생겼어요. 어느 때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야 되는데, 이름이 얼른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아, 주여 용서하옵소서’ 너무 마음이 아파요. 아, 참 착하구나. 예쁘구나. 덕담을 해 주지만, 거기에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 집사님 아들 같으면 ‘우리 성은이 잘 생겼네. 아빠 닮아서 그런가?’이러면 좋은데, 그냥 잘 생겼다고 그러면 그 의미는 50%이하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름이 중요합니다.
자기 사역에서 이름이 중요해요. 우리 윤석범 성가대장님은요, 우리 할렐루야 70명의 성가대원이름 다 외우셔야 돼요. 다 외우고 있지요? 조금 더 나아가면 그 성가대원의 배우자도 아셔야 됩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면 그 성가대원의 자녀들 이름도 알면 더 좋아요. 그것을 금상첨화라고 그래요.
우리 지역장님 같으면 자기 지역에 속장님, 강사님, 속도원들 이름 다 아셔야 하고, 조금 더 나아가면 배우자 이름, 자녀이름까지 알면 일등 도속장님이 되요. 우리 전도사님들은 각 교구장님들은 각 교구에 있는 성도님들 그 성도들, 남편들, 아내들, 자녀까지 이름을 알면 일등 교구장님이예요. 이름을 모르면 아무 것도 시작이 되지 않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우리에게 그렇게 지명해서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다가오시는 줄 믿습니다. 도매급으로 하는 법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나 같은 존재를 하나님이 기억하실까? 나같은 존재를 하나님이 알아주실까?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르는 자, 구원의 은혜를 입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스바냐서에는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그랬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 한 가지 소원이 생깁니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 내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내가 주님 앞에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나를 생각만 해도 그저 웃음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고, 자랑하고 싶고, 칭찬하고 싶고, 주님 앞에 기쁨 되는 그런 소원을 가졌던 찬송가 가사의 고백처럼 오늘 우리를 통해서 모든 육체에게 주의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하는 것, 그것이 남종과 여종 어떠한 신분의 간격도 주님께서 제한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부족하다고 느끼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에게까지 주님의 은혜가 임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여러분들이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구원의 기쁨을 얻기 원합니다.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에 영원한 도피처를 우리에게 주시사 시온산, 예루살렘을 주시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사오니 언제나 주의 성호 높이 들어 찬양하는 성도들의 삶 되게 하시고, 주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시는 그 은혜를 입기에 언제나 우리의 소원 주님의 기쁨 되는 성도의 생활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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