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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일환목사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3)
고전13:4~7
2015년 11월 22일 장안중앙교회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설교:
우리는 지난 추수감사절 전, 11월 첫 주와 둘째 주에 사랑이 갖고 있는 특성이 무엇인지를 두주에 걸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6~7절을 살펴보면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이제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합니다.
먼저 첫 주에 살펴본 4절에서 1) 사랑은 오래 참는다. 2)사랑은 온유하다. 3)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4)사랑은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는다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둘째 주에 살펴본 5절에서는 1)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2)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3)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 4)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6~7절을 중심으로 세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보려 합니다. 다 같이 다시 읽어 봅니다.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1. 사랑은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사랑의 열매이기에 아무것에서나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6절을 보세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不義(불의)가 무엇일까요?
불의(不義)라는 말의 뜻은 “의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의 헬라어는 ‘아디키아(ADIKIA)’라는 단어인데 “법을 깨트린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깨트린 것이 불의입니다. 그러기에 불의는 죄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그런 불의(不義)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불의냐?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요즘 한참 문제가 되는 IS의 테러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남자건 여자건 어린아이건 기독교인이면 죽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들이 행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즐거워합니다. 그러니 이들은 사탄의 종입니다.
또 최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회장선거도 문제입니다. 서울대 총학생회 회장을 뽑는데 여성 레즈비언 동성애자가 단독 출마했습니다. 그런데 87%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그 대학에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총학생회에 대표자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부끄러워 숨어서 살던 자들이 이제는 떳떳하게 밝히고 음탕한 짓을 합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공약 중에 하나가 대학교 안에서 외부인의 전도를 금지시키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자유라고 여기고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보호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 죄악과 불의를 보면 애통해 해야 하고 부끄러워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박수치고 격려합니다. 이것이 불의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5장에서 고린도교회에 경고를 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성적 타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들을 묵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경고하나요? 고전 5:2절을 보세요.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왜 안 쫓아냈을까요? 별 문제 없다는 것입니다. 뭘 그 정도 가지고 난리를 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5:6절에 경고합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 죄악, 그 불의를 자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적은 누룩이 온 교회에 퍼져 망할 것을 왜 모르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불의를 범하지도 말아야 하고 불의를 기뻐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애통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빛의 사명을 감당치 못하여 생긴 것으로 알고 슬퍼해야 합니다. 왜냐고요? 그 불의와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불의와 죄악을 보고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불의와 죄악에는 책임이 따르고 심판이 따라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1:7절을 보세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소돔과 고모리만 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웃 도시들도 영향 받아 음란한 짓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악이 아닌 진리와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진리가 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먼저, 진리는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말씀 속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성경 말씀은 복음(福音)입니다. 그 속에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셨다는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約束)입니다. 그러기에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두 번째는,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요14:6절을 다 아시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진리이십니다.
요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아멘?
그래서 요8:36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믿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이 여러분에게 임한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진리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고 그 사랑의 주님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아멘?
벧전 4:13절에서 베드로가 신앙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나 같은 죄인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알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또 마 5:11절 이하를 보세요.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욕을 먹고 박해를 당하고 악한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하라고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왜죠?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기에 우리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불의를 멀리하고 불의로 인해 슬퍼하며 애통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이신 예수님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받은 자의 특성이고 사랑의 모습입니다.
2.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믿는 것입니다.
7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먼저 “모든 것을 참으며” 이 부분은 첫 번째로 “사랑은 오래 참고”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의 참음은 인간관계에서의 인내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분을 삭이면서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고 “덮어준다”는 의미로 참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허물과 약점을 보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고 참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남의 허물과 잘못을 들추어내고 고발하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인간은 남의 허물을 동정하는 대신 들추어내고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며 즐깁니다. 그것을 즐기며 기뻐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지 않나요?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국회 청문회를 보세요. 정말 자격과 능력을 검증하는 청문회인가요? 아닙니다. 사람의 허물과 죄악을 들추어내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망신 주는 것으로 잘못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것은 청문회를 하려는 의원은 먼저 청문회를 통과한 사람만이 참석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방송중계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성은 유전이고 본성입니다. 후천적 습득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을 보세요. 남의 잘못하면 곧바로 찾아와 고자질합니다. 어린 아이들 속에도 타락한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남의 허물을 덮고 참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못합니다. 용서와 사죄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잠언10:12절을 보세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또 잠언17:9절을 보세요.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참 사랑은 덮어주며 참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인내는 모든 것을 참으며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간음하다 붙들려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노라” 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상한 것은 우리의 허물이고 그분이 죽은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참으라 하나요?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 이것이 뭡니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도 참아야 하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도 참아야 합니다. 심지어 사탄이 시험하는 것도 참아야 하고 주님을 섬기면서 겪게 되는 모든 오해, 비난, 조롱도 참아야 합니다. 어떻게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참으셨듯이 우리도 참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주님이 우리가 악을 행했을 때 참지 않으시고 곧 바로 심판하거나 징계하셨다면 오늘의 우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악행과 모든 불의까지도 참으시고 덮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대학교 교수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도시 학교로 전학을 시켜 주었답니다. 그런데 도시로 간 촌놈이 처음 기말고사 시험을 봤는데 성적이 영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말에 집에 갈 때 그 성적표를 위조했답니다. 61명중 51등을 5를 지우고 1등을 위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적표를 본 아버지는 그날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면서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동네잔치를 했답니다.
그 아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정신 차리고 공부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훗날에 대학교 교수가 되었답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사실대로 말하려고 “아버지 저 옛날에 성적표 있잖아요…….” 하는데 아버지가 말을 막으면서 “그만하라 아들 듣는다.” 했답니다. 그 아버지는 옛날에 그 성적표가 조작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들의 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알고도 일부로 돼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그 바람에 아들이 대학교수가 된 것입니다.
사랑은 참는 것입니다. 참데 그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7절 상반부를 다시 보세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은 그냥 맹목적적으로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미덥지 못하고 신뢰하기 어려워도 믿어주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 사랑은 탕자의 아버지 같은 사랑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자식이 유산을 팔아 집을 나갔을 때 성공을 기대하고 보냈을까요? 아닙니다. “혹시 누가 아냐 떼돈을 벌어 성공하고 올지” 하는 마음은 아닙니다. 그 탕자의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허랑방탕하여 버릴지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돌아오기만 해도 된다는 마음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탕자의 아버지는 그를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사람 되어 돌아오기만 하면 다 날려 먹어도 된다는 마음이 있었던 말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을 믿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현재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안 되나 때가 되면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하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 힘드신 분들 있지요?
많이 힘드시죠? 그런데 포기하셨나요? 누가 뵈도 절대로 믿지 않을 것 같아 포기하셨나요? 그러니 포기하지 마세요.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내 남편은 반드시 믿고 돌아올 것입니다” 라고 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아내의 그 믿음은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믿지 못하고 벌써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포기를 못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믿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믿음이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상대방의 최선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믿음은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사랑할 때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사랑치 못하면 포기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기대를 안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믿게 되고 믿게 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어부 베드로를 처음 보셨을 때 그에게 주신 말씀이 뭐죠? “네 이름을 게바라 하리라” 게바가 뭡니까? 반석(盤石)이라는 뜻입니다.
너를 그렇게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는 어부였습니다. 학문이 없는 촌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되었습니까? 실제로 주님은 그렇게 될 것을 믿고 그렇게 부르셨고 제자 삼으셨고 결국 그 이름대로 초대교회 반석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3.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디는 것입니다.
7절 하반 절을 보세요.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 바란다는 말은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희망은 단순히 소원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8:28절을 아시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의 약속도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최선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바라고 하나님 사랑 안에서 견디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롬5:3~4절에서 그것을 설명합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 속에서도 즐거워하는 것, 어렵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왜냐? 그 환난이 환난으로 끝나지 않고 나를 인내하게 하고 그 인내가 나를 단련하고 그 연단이 소망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는 “견딘다.” 했습니다. 이 “견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버티는 것입니다. 비록 희망이 없어 졌을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 사랑은 마지막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에는 국물도 없다.” “너 또 다시 그 짓하면 다리를 부러트린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부모들은 자식에게 협박하고 공갈을 치지만 실제 다리를 부러트린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도 그 말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지를 않습니다. 왜죠? 그 말은 사랑하기에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도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보세요. 그들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나요? 왜 감옥에 갇히고 왜 조롱과 채찍에 맞고 고난을 겪었나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견디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정말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도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은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은 정말 기적을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기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도 그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있다면 우리도 우리 삶속에서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받지만 말고 나누고 베푸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