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해년(1911) 9월 29일 아침에 형렬이 와서 천후께 딸 죽은 일을 아뢰거늘, 천후 치성비를 후히 주시고 태인 도듭실 유응화에게서 족도리와 원삼을 빌어다가 새롭게 단장하시고, 사인교를 타시고 약장과 모든 물건을 짐꾼에게 지워 앞세우고 대흥리로 돌아오사, (천후 방에다 증산상제님이 쓰시던) 약장과 궤며 약방기구 일체를 모시고 부벽서는 벽에다 붙이시고 벽 발랐던 종이는 뭉쳐서 천반자 속에 갊어두시니,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놀래어 이상히 여기더라. 이에 천후 친자종도들을 소집하여 교단창립을 선언하시고 여러 종도들에게 명하사 포교에 종사케 하시고, 신경원과 김병욱에게 명하사 태인장에서 큰 소 한 마리를 사다가 기르시면서 신정을 행하시니라. (천후신정기 pp24-25)
===
증산상제님께서 '태을 천상원군'의 성령을 응기하여 구릿골에서 여신 만국의원 광제국 약장을 고수부님이 인수하시어, 상제님의 제자들을 모아 포덕천하와 광제창생을 위한 '태을 천상원군의 도(태을도)'의 교문을 여시어, 비로소 처음으로 태을주 포정(布政)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시면서, 고수부님께서는 포정소 책임자인 차경석 성도에게 "나는 낙종물(落種)을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물(移種)을 맡으라. 추수할 자는 다시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수부님의 명에 따라 증산상제님 제자들의 헌신적인 태을주 포교활동으로 교세가 번창하였습니다.
@ 친자종도들은 원래 증산상제님을 모셔 좋은 세상을 만나서 영화와 복록을 누리려는 희망으로 상제님을 따르다가, 뜻밖에 상제님께서 화천하시므로 모두 크게 실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신해년(1911) 구월부터 고후비님께서 신도로써 포정소 문을 열으심에, 모두 다시 발심하여 대흥리로 모여와서 고후비님을 모시고 교단을 창립한 뒤에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포교에 힘쓰니, 이로부터 교세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그뒤 삼 년동안에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와 서남해중 모든 섬 일대에는 거의 태을주 소리가 연하게 된지라. 갑인년(1914) 봄에 순천 장기동의 의연(義捐)으로 교실을 지어 비로소 본소의 면목을 세우니, 이에 교세가 날로 흥왕하니라. (천후신정기 pp26-27)
'태을도'의 교문이 고수부님에 의해 열린 당시에는 '태을도' 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해, 단순히 '태을교'라고 불렸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 내신 '태을 천상원군의 도' 가 1911년 태을교로부터 출발하여, 증산상제님 9인 제자의 교단분열과 성장을 통해, 무인년(1998) '태을도'로 수렴 결실맺게 된 것입니다.
첫댓글 "증산상제님께서 내신 '태을 천상원군의 도' 가 1911년 태을교로부터 출발하여, 증산상제님 9인 제자의 교단분열과 성장을 통해, 무인년(1998) '태을도'로 수렴 결실맺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