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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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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개론,심층고찰 스크랩 禪佛敎 공부 4
원명 원적 추천 0 조회 103 18.09.30 14: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禪佛敎 공부 4


무위진인無位眞人 진짜 자유인

 

여기 빨간 고깃덩이 안에 한 自由人(無位眞人)이 있어 恒常 여러분의 눈. . . 입 등을 통해 出入한다.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은 똑똑히 보아라.

 

臨濟의현 禪師有名上堂法語

法語禪宗史에서 차지하는 比重은 참으로 엄청나다

無位眞人이라는 話頭의 의미 천착은 뒤로 미루고 우선 法語에 이어진 거량擧揚을 보자.


法門이 끝나자 한 중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차별 없는 참사람[無位眞人] 입니까?”

 

臨濟는 법상法床에서 내려와 質問한 중의 멱살을 움켜잡고 욱박질렀다.

말해봐라! 말해봐라!”


중이 무슨 말을 꺼내려 하자 臨濟는 그를 밀쳐버리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無位眞人이란 무슨 똥 막대기 인가."

 

臨濟는 이렇게 이른 후 곧장 方丈으로 돌아가 버렸다.


無位眞人이란 차별 없는 참사람, 自由人, 萬民平等을 뜻하는 말이다

位階家門重視하는 當時 中國社會에서의 이같은 發言은 매우 革命的社會思想含蓄한다.

 

禪學的으로는 自覺하는 자기를 無位眞人이라 한다

自覺한 자기야말로 참된 人格者

無位眞人人格事物區分하지 않고 자신과 모든 事物이 함께 연기緣起하고 손님과 主人關係相互 交換하는 世界에서 산다.

다시 말해 人間自然이라는 相對的 區分 같은 게 전혀 없다.


臨濟禪思想眞人이라는 이 한마디로 壓縮된다

너와 나라는 相對的 區分을 넘어선 絶對的 主體로서의 絶對自我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主體性이기도 하다. 臨濟一生동안 이 眞我弟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고함소리[]와 몽둥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원래 眞人이란 장자莊子에 자주 등장하는데 理想的 人間像, 고매한 人格을 뜻하는 말이다.

 

無位眞人이라는 話頭臨濟革命家的 氣質을 거울처럼 드러내 보여준다

그의 革命性살아 펄떡펄떡 뛴다[활발발지活鱍鱍地]’라는 話頭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아주 自由롭고 싶다면 지금 내 說法을 듣고 있는 그대들이라는 人間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정해진 形態나 모습이 없고 意志하는바 없고, 머르는 곳 없이 살아 펄떡펄떡 뛰며 

그치는 일이 없다.

 

話頭 活鱍鱍地가 뜻하는 바는 主體行動사이에 分裂이란 있을 수 없으며 정해진 形態法則性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旣成의 틀을 단호히 拒否하는 革命的 熱情이 가득하다.


臨濟法問 뒤 거량을 살펴보자

중이 묻고 있는 無位眞人眞人에 대한 一般的 정의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眞人을 보여 달라는 要請이다. 臨濟는 각자의 얼굴 위에서 眞人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는 네놈은 쓸모없는 똥 막대기에 지나지 않는 무지렁이라고 질타叱咤한다.

 

우리 俗談에 아주 無價値하고 卑賤存在똥친 막대기라고 하지 않는가

臨濟이 무슨 똥 막대기인가라는 호통 속에는 네가 바로 無位眞人이다라는 소식이 들어 있다.


臨濟가 돌아간 방장은 조실이나 주지의 居室을 말한다

에서는 本來의 마음자리, 歸依處, 적정寂靜, 本來面目 등을 象徵한다따라서 임제의 방장 歸還無心境界로 돌아가 宇宙大肯定하는 道人安住를 뜻한다.

 

 

수처작주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 어디서고 주인이 되라

 

함께 를 닦는 벗들이여 佛法人爲的造作이 필요 없다

꾸밈이 없는 平常의 자유로움, 있는 그대로의 삶, 便所에 가고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疲困하면 쉬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고 웃지만 智慧로운 사람은 꾸밈없는 日常의 소중함을 안다. … (중략) … 


求道者 여러분

어느 場所에서든 主體的일 수만 있다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境界에서도 잘못에 이끌리지 않을 것이다. 또 종래의 나쁜 습기習氣無間地獄에 떨어지는 카르마()가 있더라도 삶은 자연히 解脫의 큰 바다로 변한다.

 

臨濟上堂 法問이다

수처작주隨處作州 입처개진立處開眞이라는 話頭는 엄숙嚴肅佛敎 法問이 아니더라도 흔히 듣는 이야기다. 代表的인 예의 하나가 우리 俗談가운데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精神만 차리면 산다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主體的 自覺이 없는 人間은 사람으로서의 存在價値가 없다는 것이다.

 

臨濟隨處作州 立處開眞은 전적으로 實存主義一致한다.

자기 本體를 굳건히 지켜 나가는 것이 實存主義. 自己 本體絶對自由

絶對自由放蕩混沌해서는 안 된다. 放蕩이 아닌 絶對自由의 주춧돌은 主體性이다.

 

다시 말해 人間은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立場確實히 짚어나갈 때, 분수를 알 때, 시쳇말로 자신의 主題正確把握할 때에만 그에 相應하는 自由를 누릴 수 있다

 

法問 中의 

아시송뇨屙屎送尿 대소변 보고, 착의끽반着衣喫飯 옷 입고 밥 먹는 일

은 누구라도 每日하는 動作이고 平凡日常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는 意識的努力이 필요 없다.


屙屎送尿 着衣喫飯과 같은 日常事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서는 아무 일도 못한다.

훌륭한 政治, 玄學的인 고담준론高談峻論, 고매한 聖人人格도 이 平常事 이후의 일이다.

 

眞理觀念的理論이나 玄學的 論理說明하기를 拒否한다

그리고 眞理가 저 강 건너 彼岸에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우리의 平凡日常生活속에 모든 眞理가 묻혀 있다는 立場眞理觀이다.

 

위부魏府의 화엄華嚴장로는 이렇게 說破 하였다.

佛法은 나날의 生活 自體이다

그대들이 행주좌와行住坐臥, 보통의 다반사茶飯事, 친구와 만나는 일들이 바로 佛法이다."

 

'道'란 먼 데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앞에 展開되고 있는 사사물물事事物物 속에 眞理가 들어있다

聖人도 먼 곳에 있거나 구름 속에서 이슬을 먹고 사는 存在가 아니다

깨달으면 바로 聖人이다. 이것이 東洋哲學傳統的으로 追求해 온 眞理觀이다.


어느 곳에서든 主人이 되어서 서 있는 곳마다 眞理가 되게 하라

 

어떤 境遇에도 自信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모든 것이 참되다는 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구마라즙의 4대 제자중 수제자인 승조(383-414)법사의 유명한 부진공론不眞空論에서부터 이같은 불교의 眞理觀强調 되어왔다

승조는 이같이 說破 하였다.

 

聖人은 모든 變化를 따르면서도 변하지 않고 한없는 束縛도 스스로 빠져 나간다

萬物은 그 自體이라는 道理通達해 있기 때문이다.”

 

凡夫의 일을 나타내면서 도법道法을 버리지 않는 것이 聖人이다

道法이란 主人意識’, 區分 할 수 있는 主體的 自覺을 뜻한다.

 

臨濟自覺하는 自己, 을 깨닫는 主體로서의 自己理想的人格으로 設定하고 그 같은 참된 人格者無位眞人이라 했다.


어떠한 階級 身分에도 하지 않는, 높고 낮은 身分上區別을 뛰어넘은 無位眞人의 삶이 바로 隨處作州 立處開眞이다

 

眞人自己와 남이 모두 무상성無常性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만이 아닌 모두가 無常性을 함께 벗어나기를 바라는 카루나(karuna 同悲感情)를 갖는다

왜냐하면 眞人은 늘 自己와 모든 事物이 함께 生成되고 그 주객主客關係를 서로 바꿔가질 수 있는 世界에서 살고 있지 절대로 혼자 떨어져 隱遁하거나 逃避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비감정同悲感情自覺하는 自己智慧他人에 대한 同情心에서 생겨난다. ‘自覺이란 생멸전화生滅轉化를 떠난 永遠不滅은 어디에도 存在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無常生滅轉化 自體가 바로 眞理라는 이야기다

태어났으면 죽어야 한다

肉體的 生命永遠性이란 거짓말이다

그러나 時限性克復하는 한 가지 方法이 있다

바로 삶과 죽음이 本質的으로는 똑같은 것이고 根源은 한 뿌리라는 생사일여관生死一如觀이다. 은 사기꾼처럼 生命永遠性을 팔아 먹는 궤변詭辯을 거부拒否 한다.

 

그래서 禪師들은 간절懇切同悲感情으로 모든 森羅萬象存在가 생이 있으면 반드시 사가 있다는 無常性自覺하길 바란다.

단 한 번밖에 없는 人生이요 삶이다

삶이란 오직 지금 당장의 일을 順序대로 잘 處理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臨濟는 또 이렇게 喝破 하였다.

 

일체처시도류귀사처一切處是道流歸舍處

이 삶 그대로가 모든 求道者들이 돌아가 쉬는 眞理故鄕이다.”


진정한 見解를 가지고 자기 눈앞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現在를 살고 있는 사람이 자유롭게 살고 있는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日常主義(Everdayism)'誤解해선 안 된다

臨濟가 말하는 自由人은 매일 매일의 日常事에 시달리면서도 그것들에 迷惑당하는 일이 없는 무사인無事人이다. 이것이 바로 無念無常이다.

 

明代修身書로 지금도 , , 3국에서 많이 읽히는 채근담菜根譚無念無常을 아주 明瞭하게 說破한다.

 

지난 일의 생각[前念]에 얽매여 끙끙거리지 않고 未來에 닥쳐올 일들에 대한 생각[後念]을 맞이하길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차례로 整理해 나갈 수 있다면 저절로 無念無常境地에 들어갈 수 있다

 

老子가 말하는 무위無爲도 바로 이런 것이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無爲가 아니다

오히려 無爲는 한없이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日常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모두 일이 아닌가

밥 먹는일 오줌 누는 일 등 모두가 일이다.

 

다만 를 따라 自然에 모든 것을 맡기고 어떠한 人爲的 造作도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自然란 배고프면 밥 먹는 것이다. 배불리 食事한 후에는 밥을 더 먹을 수도 없고 먹어서도 안된다. 흔히 말하는 順理대로 사는 것이다.

 

自然順理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무사無事는 엉뚱한 妄念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無間地獄父母殺害, 阿羅漢 殺害, 佛身毁損, 僧團和合 破壞등 패륜적悖倫的인 오무간업五無間業을 지으면 떨어지는 곳이다. 臨濟는 이러한 大逆罪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깨달음만은 얻고야 말겠다는 積極的意志强調하고 있다.

 

 

임제도금우臨濟到金牛 임제가 금우선사를 찾아갔다

 

임제도금우臨濟到金牛 臨濟가 어느 날 金牛禪師를 찾아 갔다.

金牛臨濟가 오는 것을 보고는 주장자拄杖子를 가로 뉘어 막고서 문에 걸터앉았다.

臨濟는 손으로 拄杖子를 세 번 두드리고 난 후 방으로 들어가 上席에 앉았다.

 

金牛가 방으로 들어와 臨濟에게 말했다.

주인과 손님의 만남에는 禮儀가 있는 법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리도 無禮한가


臨濟가 말하였다

老和尙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金牛가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려 하자 臨濟가 그대로 후려쳤다

金牛가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臨濟는 다시 한 번 더 후려쳤다


金牛가 말하였다.

오늘은 내게 이득이 없구나!”

 

훗날 潙山靈祐禪師仰山慧寂에게 물었다.

이 두 큰스님 중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느냐?”


仰山이 말했다.

이긴 자는 철저히 이겼고 진 자는 철저하게 졌습니다.”

 

진주 金牛禪師臨濟가 거량한 臨濟到金牛라는 話頭내용이다.

 

全體性, 自發性, 無條件性을 높은 價値認定하고 追求한다.

仰山對答이 외치는 結論은 간단하다

이기고 진 것이 문제가 아니다


두 사람 다 이 높은 價値認定하는 無條件性(勝敗執着을 버림)全體性指向하는 沒入境地差異가 없다는 것이다. 結局無勝負世俗이 말하는 形式的勝敗에선 一考價値도 없다. 은 삶을, 人生을 크게 고민苦悶하지 않는다

하나의 려정旅程으로 볼 뿐이다.

 

금우반통金牛飯桶 금우화상의 밥통

 

은 밥 먹는 것을 人間自然攝理에 따르는 가장 確實眞理의 하나로 본다

6慧能 以後禪宗平常日常事를 모두 佛法作用으로 認定, 世間을 떠난 깨달음을 배격排擊한다. 慧能祖師무상송無相頌은 이렇게 읊조린다.

 

불법재세간佛法在世間 불법佛法本來世間속에 있나니

불리세간각不離世間覺 世間을 떠나지 않고 깨달아야한다.

 

世間을 떠나 보리를 찾는 것은 마치 토끼에서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

 

확연무성廓然無聖 성스러운 것이란 없다.

 

: 내가 卽位한 이래 많은 절을 짓고 많은 經典寫經하고 수많은 僧侶에게 供養을 해왔소이 모든 것들이 얼마만큼의 功德이 되겠소?


: 전혀 功德이 되지 않습니다.(無功德) 이러한 것들은 인천人天 속에서의 조그만 行爲이고 과보果報가 겨우 새어나오는 옹달샘에 불과 합니다. 형체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그것들은 그냥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것에 불과 할 뿐입니다. 그림자란 存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實在하는게 아니지요.


: 그러면 진정한 功德이란 어떤 거요?

: 진정한 功德淸淨智慧를 파악把握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智慧本質은 말이 없고 공적空寂한 것입니다.

이런 功德俗世方法으로는 追求할 수 없습니다.


: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 중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 아무 성스러울 것도 없는[廓然無聖] 커다란 공입니다.


: 그러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요?

: 不識 모르겠습니다.

 

信心이 돈독敦篤佛心天子라는 평을 듣던 양나라 무제(464-549)와 동아시아 仙佛敎創始者인 초조初祖 보리달마의 問答이다. 梁 武帝가 묻고 達磨가 대답했다

禪問答話頭로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 한다.

 

우선 이 문답은 歷史的 실제성보다는 동아시아 禪思想人格化를 위해 後代에 만들어진 傳說的 性格을 갖고 있다는 점을 有意必要가 있다. 歷史宗敎는 언제나 나름의 正統性을 갖기위 해 神話傳說을 꾸며낸다. 실제로 神話傳說이 없는 歷史宗敎無味乾燥하고 재미도 없다.

 

達磨는 서천西天(인도불교) 28祖師고 동토東土(중국선불교)初代 祖師.

達磨가 무제의 물음에 대한 답을 통해 밝힌 禪思想無功德, 廓然無聖, 不識으로 요약할 수 있다. 無功德은 흔히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어떠한 布施功德을 했다 하더라도 執着하거나 내세우지 말고 깨끗이 잊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執着하는 것은 올바른 佛法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는 涅槃에도 머물지 말아야 하고[不住涅槃], 깨달음을 얻었다는 생각조차도 버리는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야 禪思想의 본령인 절대공絶對空到達할 수 있다. 깨달음, 涅槃, 解脫까지도 완전히 버리는 無所有만이 진정한 解脫이다.

 

내가 善行을 했거니 하는 생각을 가지면 유루복有漏福이고 善行을 하고서도 이를 마음에 남겨두지 않으면 무루복無漏福功德인 것이다.


無漏福이란 煩惱를 모두 떨쳐버리고 涅槃으로 나아가는 , 즉 성도聖道, 출세간도出世間道를 말한다. 이러한 은 계, , 혜라는 무루인無漏因을 통한 깨달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有漏福煩惱를 더욱 增加 시키는 을 말한다.

 

다음은 확연무성廓然無聖이다.

佛法核心은 크게 비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重要하지 않다는 것이다

크게 마음을 비우고 어떤 것에도 執着하지 않는 것이 참되게 사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범과 성, 貴賤을 구분하는 分別心을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하얀 캔버스로 남아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다른 그림을 그려야 한다


人生이 그렇다

지금 以後의 삶을 위하여는 마음을 비워놓아야 또 다른 내일의 삶이 자리할 수 있다

이것이 廓然無聖이다.


양무제는 佛法核心이 무엇이냐는 質問을 통해 

우리 모두가 善惡分別 속에서 이렇게 살고 있지 않는가

라고 世俗 現實을 드러내 보인다


이에 대한 達摩의 대답 廓然無聖區分하는 二分法的分別心을 버리고 저 善惡이 한 뿌리인 根源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쳐준 한 소식인 것이다.

 

善惡分別을 뛰어 넘었다는 達摩는 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다그치는 양 무제의 마지막 

물음에는 아직도 俗氣가 철철 흘러넘친다.

達摩는 한마디로 모른다고 내뱉는다

超越眞理, 佛法道理를 말로는 說明할 수 없다는 宣言이다


老子는 일찍이 득의이망언得意而忘言 뜻을 얻으면 말을 잊는다라고 했다

無功德’ ‘廓然無聖을 통해 그처럼 친절히 가르쳐주었건만 양 무제는 아직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俗人으로, 凡夫로 머물러 있다

이쯤이면 화가 나서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佛法 또는 眞理란 모르는 것일 수밖에 없다

광역廣域에 속하는 宇宙攝理人間意識으론 理解할 수 없다

그저 감지感知할 뿐이다


俗談모르는 것이 약이다란 말이 있다

佛法이나 廣大無邊眞理理論化하고 槪念化하는 꾀를 부리기 시작하면 그것이 바로 妄想이요 煩惱가 된다.

 

인도의 선자禪子 라즈니쉬(1931-1990)達磨의 마지막 대답 모른다[不識]’人類 歷史上 가장 偉大對答이라고 격찬激讚했다.

 

불식不識言語道斷의 깨우침에 의해서만 可能眞理當體體得强調하는 禪家慣用語. 不識現在의 어떤 것과도 絶對 交涉될 수 없는 眞理에 대한 認識이다.

 

馬祖禪師의 제자 대주혜해大珠慧海는 저서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文에서 

나는 을 잘 모르며 내게는 줄 가르침도 없다

고 했다


實存 哲學者 하이데거는 

광역廣域이나 회역懷域(眞如, 自性, 佛法, 佛性)은 우리가 原則的으로 理解할 수 없다

喝破 했다.


비트겐슈타인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沈黙해야 한다

說破, 眞如當體에 대한 言說的 說明限界性을 밝혔다.

 

達磨는 양 무제와 對話를 해보고 나서 도저히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만한 그릇이 못 된다고 確信했다.


을 바라보는 벽관壁觀은 흔히 말하는 묵조선黙照禪이다

이 갖는 象徵性은 앞이 꽉 막혀 妄想이 더 이상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壁觀은 침묵沈黙이다

沈黙이다

을 바라봄으로서 一切 煩惱限界를 깨닫고 마음을 비워 本來의 마음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黙照禪이요, 壁關이다.

 

達磨實存 人物이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南印度王子였는지는 確實치가 않다

어쨌던 그는 마하가섭으로부터 시작된 印度禪28祖師였고 中國에 온 最初印度 禪僧이었다그가 中國에 온 것은 서기 520년에서 525년 사이로 추정推定된다.

 

元來 坐禪는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念不起], 외적인 善惡 區別의 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뜻한다. ‘自己 本性을 깨닫는 것, 내적인 自性省察을 뜻한다. 그러니까 坐禪이란 일어난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종의 대증요법對症療法이다. 흝어진 마음을 制御하는 기술이고 응병여약應病與藥으로 에 대한 投藥을 하는 것이 곧 坐禪이다.

 

이것이 바로 北宗禪을 비판批判, 南宗禪 天下를 이룩한 1功臣 하택신회선사荷澤神會禪師(670-762)가 그의 有名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達磨南宗定是非論에서 밝힌 坐禪의 정의이다.

 

達磨壁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見物生心으로부터 일어나는 객진客塵이라는 煩惱人爲的作爲性을 가리키는 위망僞妄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을 象徵한다. 外部로부터 불어 닥치는 風塵을 막아주는 家屋도 이같은 遮斷의 역활을 한다.


達磨壁觀은 모든 煩惱妄想이 들어갈 수 없는 內面的인 마음의 緊張統一을 뜻한다. 여기에서는 , 나와 너라는 一切相對的 分別對立이 없어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本來 마음의 世界가 펼쳐진다.

 

內外의 모든 因緣을 끊고 內心에 근심이 없어져 마음이 障壁과 같이 本來 그대로의 平溫安心狀態가 바로 壁觀指向하는 目標.

 

한마디로 壁觀이란 安心이다

禪學은 이러한 흔들림이 없는 不道의 마음을 본래심本來心, 또는 心不起, 염불기念不起라 한다. 壁觀安心 狀態에 들어가는 實踐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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