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북 운산군 북진로동자구에 있는 운산광산.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는 구봉광산은 1971년 폐광되었다. 현재는 삼광광산(운곡), 구봉광산(남양), 청양광산(장평) 등에서 광산촌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김제 일대에는 김제라는 이름부터 시작하여 금구, 금산, 금평, 쇠내 등 금 자가 들어간 이름이 유난히 많다.
1917년경에는 충청남도 직산에 사금 탄광이 있었다. 2003년 3월 대한광업진흥공사는 광물자원조사를 실시한 결과 홍천 등 3곳의 금광을 포함, 잠재가치 8조3000억원 규모의 금·은·규석·석회석 등 산업원료광물 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금광발견지역은 홍천 내촌리 백암광산, 상주 외서리 천봉광산, 해남 황산면 성산광산.
1939년의 우리나라 금 생산량은 29.2 톤으로 세계 금 생산량의 4 퍼센트를 차지했고 금 생산국으로서 여섯째를 차지했다.
역사를 통해서 보자면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전부터 이미 금의 채취와 가공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삼국 시대에서 고려 시대까지는 그 개발이 활기를 띠어 이 땅에 찬란한 금 문화를 꽃피게 했다. 이를테면 금관, 금팔찌, 여래 금불상들이 보여 주는 그 정교함이나 세련미는 우리 나라의 금 가공 기술이나 응용 기술이 그 어느 나라보다도 뛰어났던 사실을 잘 알려 준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 이르러 금 생산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던 만큼 근세에는 이렇다 할 금 문화를 찾기가 어렵다. 그렇게 된 데에는 조선 왕조가 유교를 받들고 불교를 멀리 한 것도 한 까닭이 되겠으나 그보다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나라 안팎으로 끊임없는 난리에 시달림으로써 금을 캐낼 여유가 없었고, 기껏 캐내었다 해도 조공으로 바치는 데에 급급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는 새로이 금에 눈을 뜨게 되었다. 곧 1895년에 덕대 경영을 합법화한 맨 처음의 근대적인 광업법이라고 할 수 있는 '사금 개폐 조례'가 발표되었고 1906년에는 금-은광 채취 허가 따위를 포함한 광업법이 마련되어 광산이 활발하게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우리나라는 두 차례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그 첫째 황금기는 1910년대에 왔다. 곧 1914년에는 제일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915년에 진남포 제련소가 준공되었으며 1917년에는 충청남도 직산의 사금 탄광에서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준설선이 조업을 시작한 것이다. 둘째 황금기는 1930년대 초에서 194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에 맞았다. 곧 줄곧 금 생산을 억제해 오던 법을 고쳐 훨씬 더 자유로이 금을 캘 수 있도록 했으며 금괴 수출에 영향을 받아 금 증산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또 1936년에는 장항 제련소가 문을 열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장항 제련소는 우리나라의 으뜸 가는 금 제련소가 되어 왔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의 두 차례 '황금기'는 모두 우리나라 사람의 살림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를테면 첫째 황금기에는 그 채굴권을 손에 쥔 영국과 미국에 잇속이 돌아갔으며, 둘째 황금기에는 제국주의 일본에 잇속이 돌아갔다. 특히 제국주의 일본은 우리나라의 모든 자원을 쓸어 가면서 금광도 바닥내다시피 했다. 따라서 육십년대에 구봉, 무극, 임천 같은 곳의 금광이 개발되어 금 생산량이 한때 '반짝' 하기도 했으나 칠십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금광들이 수익성있는 광맥을 잃고 하나 둘 문을 닫음에 따라 금 생산은 점차로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칠십년대에 이르러서는 한해의 금 생산량이 일톤 안팎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