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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군의 복장과 깃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를 포위, 공격하던 청나라 군사들 중에는 조선인 출신 병사들이 있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를 사령관으로 모시며 모국을 공격해야만 했던 이 조선인 병사들은 명나라 멸망 후, 베이징(北京)부터 난징(南京)까지 중국대륙을 누비며 청나라의 중원정복사업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남의 전쟁에 희생된 이 비운의 병사들은 '조선팔기'라고 불린다. 청나라는 종족에 따라 지배민족이었던 만주족의 만주팔기, 몽골족의 몽골팔기, 투항한 명나라 사람들로 구성된 한인팔기, 조선인 출신들로 구성된 조선팔기 등 팔기군 부대를 운영했다. 조선팔기는 매우 우수한 조총부대로 구성돼있었고 이들은 청나라의 중원지배에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다. 노력을 통해 만든 최정예 조총수들로서 원래는 조선의 서북변방을 수호하던 조선의 병사들이었다. 복잡다단하게 얽힌 명· 청 교체기의 대륙상황과 광해군과 인조정권 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이 정예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변발을 하고 청군의 앞잡이가 돼서 조국을 공격해야만했다. 사르후 전투 묘사도 바로 '사르후전투'와 '이괄의 난'이다. 1619년 벌어진 사르후전투와 5년 뒤 벌어진 이괄의 난은 모두 조선이 청나라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된 사건들이었다. 이 두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을 지키던 병사들이 거꾸로 조선으로 총구를 돌리게 됐기 때문이다. 먼저 사르후전투는 당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바꾼 희대의 전투로 평가되는 전투다. 명나라의 요동정벌 계획에 따라 명군 10만명, 조선군 1만3000명이 동원된 이 전투에서 명군이 참패하면서 청나라는 멸망 위기에서 벗어났고 이후 중원 정벌을 노릴 정도의 국력을 쌓게 된다. 당시 광해군이 이끌던 조정은 임진왜란 때 대병력을 파병해준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1619년 당시 시점까지 명나라는 매우 강력한 나라였으며 청은 명나라의 만리장성 요새를 공략하지 못하고 요동에서 활로를 찾고 있던 시기였다. 다만 명나라 장수들은 평지인 만주에서 싸움에 익숙치 못했고 장수들끼리 협조도 제대로 되지 않아 각개격파당할 위험성이 높았다. 이런 상황을 간파했던 광해군은 파병부대 사령관이었던 강홍립 장군에게 상황을 봐서 이기는 쪽에 투항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사르후 전투 당시 명군 10만명은 4개 부대로 나뉘어 요동으로 진격 중이었고 이에 청 태조 누르하치는 8기군 중 2기로 주요 요새를 방어하고 빠른 기동성을 가진 6기로 명나라 각 부대를 각개격파해 대승을 거뒀다. 전투 결과 명군은 철저히 각개격파됐고 최정예 조총부대로 구성된 조선군도 갑자기 몰아친 바람에 휘말려 조준사격을 제대로 못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8000명의 병력을 잃고 그 자리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훗날 투항한 5000여명의 조선군 중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2000여명 뿐이었으며 나머지는 팔기군에 강제로 편입됐다. 임진왜란 이후 각고의 노력으로 키운 최정예부대를 순식간에 잃은 조선은 당장 방어력이 크게 약해졌다. 키우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이괄이 2만의 서북 수비병력을 이끌고 1624년, 한양으로 진격해 변란을 일으키면서 서북방어는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이괄의 난은 가까스로 진압됐지만 이괄에 가담했던 조선 병사들은 역적으로 몰려 죽을 위기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압록강을 건너 청군에 투항했다. 사르후전투 때 잔류된 조선군과 함께 조선팔기가 창설된 것은 그 이후였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군의 허실을 정확히 꿰뚫고 병자호란 당시 일주일만에 주파할 수 있었던데는 이들의 역할이 컸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명나라의 오랜 경제제재로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사실상 도박과도 같은 전투를 펼친 터였기 때문에 조선군 방어의 허실을 정확히 몰랐다면 승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조총부대는 우수한 능력과 실전경험으로 동아시아 각국에서 유명했다. 사르후 전투 당시 명나라 파병요청 이후에도 청나라 또한 명나라 잔당들을 공격할 때 조선에 조총부대의 파병을 요청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팔기군은 청나라 군대와 함께 중국 전역을 누비게 된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만리장성의 문을 열자 조선팔기군은 만주팔기와 함께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공격했다. 이때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파병된 조선군도 함께 베이징을 공격했다. 이후 조선팔기군은 중원정벌에 동원됐고 일부는 베트남까지 파병된 정황이 발견되기도 했다. 성을 가진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은 자신들이 청나라 군대를 따라 왔던 조선인들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베트남 혁명 시기에 족보가 다 사라져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들의 주장은 신빙성이 높다고 한다. 18세기 말 레 왕조를 무너뜨린 떠이 썬 출신 삼형제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의 팔기군 20만명이 출동했는데, 이 원정군에 포함됐던 조선팔기군 중 일부가 포로로 잡혀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끌려가 전쟁을 치러야했던 조선팔기군은 명·청 교체기 대혼란에 휘말린 한반도에서 벌어진 비극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