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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대승론 상권
1. 의지승상(依止勝相)
1.3. 인증품(引證品)
[아리야식을 알 수 있는 법]
이 아리야식을 이미 여러 가지 이름과 체상으로 말미암아 성립시켰다.
어떻게 이와 같은 여러 이름과 체상으로써 아리야식을 알 수 있는가?
여래께서 체상을 설하신 것도 역시 이러하며, 생기식을 설하지 않으셨다.
만약 이 이름과 상에 의해 세워진 아리야식을 떠난다면,
부정품과 정품 등이 모두 성취되지 않으며,
번뇌의 부정품ㆍ업의 부정품ㆍ생의 부정품ㆍ세간의 정품ㆍ출세간의 정품 등이 모두 성취되지 않는다.
1) 번뇌의 부정품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찌하여 번뇌의 부정품이 성취되지 않는가?
근본번뇌와 작은 부분의 번뇌에 의해 만들어지는 훈습종자는 6식에서는 성취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안식은 탐욕 등의 크고 작은 두 가지 혹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한다.
이 안식은 혹에 의해 훈습되어서 종자를 성립시킨다. 그 밖의 다른 식은 그러하지 않다.
안식이 이미 멸하고 혹은 그 밖의 다른 식이 사이에 일어나면 훈습과 훈습의 의지는 모두 얻을 수 없다.
안식이 앞에서 이미 끊어져 현재 체가 없으며, 혹은 그 밖의 다른 식이 사이에 끼여들어서 이미 멸하여 없는 법으로부터 탐욕이 함께 생함이 있다는 것은 성취될 수 없다.
비유하건대 과거에 사라져 없어져버린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할 수 없음과 같다.
또한 안식이 탐욕 등과 함께 동시에 생한다고 하더라도 훈습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 종자는 탐욕 가운데서는 머무를 수 없으니, 탐욕은 식을 의지하기 때문이며, 탐욕은 서로 이어져서 견고하게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탐욕은 그 밖의 다른 식에서는 역시 훈습이 없다. 의지가 다르기 때문이며, 나머지 모든 식이 같이 생하고 같이 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종류는 같은 종류와 더불어 서로 훈습하지 못한다.
일시에 같이 생하고 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식은 탐욕 등의 크고 작은 모든 혹(或)에 의해 훈습되지 않으며, 역시 같은 종류의 식에 의해 훈습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안식을 사량(思量)한다면 나머지 모든 식도 역시 이와 같이 사량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중생이 무상천(無想天) 이상으로부터 물러나 타락하여 하계(下界)의 생을 받는다면, 크고 작은 혹에 오염된 최초의 식, 이 식이 생할 때에는 종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이 혹의 훈습은 의지와 더불어 함께 이미 지나가서 멸하여 남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혹을 대하여 다스리는 식[對治識]이 이미 생하여 나머지 세간의 모든 식이 모두 사라져 다하였다.
만약 아리야식이 없다면 이 대치식은 크고 작은 혹의 종자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자성해탈이기 때문이며, 무류심은 혹과 더불어 함께 생하고 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에 관(觀)에서 나와 세간심을 일으킬 때 모든 혹의 훈습이 오래 전에 이미 끊어져 없어졌으니, 유류(有流)의 의식은 종자가 없이 생하는 것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연유로 아리야식을 떠나 번뇌의 오염은 이루어질 수 없다.
2) 업의 부정품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어찌하여 업의 염오가 성립될 수 없는가?
행을 연하여 식이 생한다는 부분이 논리를 이룰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논리가 없다면 취(取)를 연하여 유(有)가 있다는 것도 역시 논리를 성립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업의 염오는 성립하지 않는다.
3) 생의 부정품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어찌하여 생의 염오라는 이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가?
결생(結生)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부정지(不靜地)로 물러나 타락하여 마음이 중음(中陰) 가운데에 있어서 염오의 식을 일으키므로, 마침내 생을 받을 수 있다. 이 염오가 있는 식은 중음 가운데에서 멸한다. 이 식은 모태 가운데서 가라라(柯羅邏)에 의탁하여 변이하고 화합하여 생을 받는다.
만약 단지 의식이 변이하여 가라라 등을 이룬다면 이 의식을 의지하여 모태 가운데서 다른 의식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이러한 정의는 없다. 모태 가운데서 일시에 두 가지 의식이 함께 일어난다는 이러한 정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변이한 의식은 의식으로 성립될 수 없다.
의지가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오랜 시간 경계를 연하기 때문이며, 연하여지는 경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의식이 이미 변이하였다면 이 때의 의식은 가라라를 이루어서 이 식이 되니 일체법의 종자이며, 이 식을 의지하여 그 밖의 다른 식을 생하게 되니 일체법의 종자가 된다.
네가 만약 이미 변이한 식을 이름하여 일체종자식이라고 집착한다면 이는 곧 아리야식이다.
너는 스스로 다른 이름을 세워 일컬음으로써 의식이라고 말한다.
만약 네가 의지의 주체인 식[能依止識]이 일체종자식이라고 집착한다면 이런 연유로 이 식은 의지함으로 말미암아서 다른 것의 인을 이룬다.
이 의지처인 식이 일체종자식이 아니라면, 의지의 주체인 식을 일체종자식이라고 하는 정의는 옳지 않다.
따라서 이 식은 의탁하여 생하며 변이하여 가라라를 이루니, 의식이 아니다. 단지 과보이며 역시 일체종자라는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만약 중생이 이미 의탁하여 생하며, 나머지 색근(色根)을 잡아 유지할 수 있다면 과보식을 떠나서는 얻을 수 없다. 왜냐 하면 나머지 모든 식이 결정코 다른 의지가 있으며, 오래 견고하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색근에 잡아 지니는 식[執持識]이 없다면 역시 색근은 성립될 수 없으며, 또한 마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함께 일어서듯이 이 식과 명색(名色)은 번갈아 서로 의지하므로 이 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과보식을 떠나서는 일체의 생하려고 하거나 이미 생한 중생의 식식을 이룰 수 없다. 왜냐 하면 만약 과보식을 떠나 안식 등 가운데의 어느 하나의 식을 따른다면 삼계 가운데서 생을 받은 중생은 식사(食事)를 짓게 되는 공능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이 생으로부터 명(命)을 버리고 상정지(上靜地)에 태어난다면 산동(散動)의 염오의식으로 말미암아 그것에서 생을 받는다. 이 염오의 산동식은 정지(靜地) 가운데서 과보식을 떠나서 그 밖의 다른 종자가 있다고 하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만약 중생이 무색계에 태어나서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 염오심(染汚心)과 선심(善心)을 생한다면 곧 종자와 의지가 없으므로 염오와 선, 두 가지 식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
무색계에서 만약 무류심을 일으키면 나머지 세간심이 이미 멸하여 다하니, 문득 이 도(道:趣)를 버려야 한다.
만약 중생이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 가운데 생하여 불용처심(不用處心)과 무류심을 일으킨다면, 곧 두 처(處)를 버린다.
왜냐 하면 무류심은 출세심이기 때문에 비상비비상도(非想非非想道)는 그것의 의지가 아니며,
불용처도(不用處道)도 그것의 의지가 아니다.
곧바로 향하는 열반도 의지가 아니다.
또한 사람이 이미 선업을 짓거나 또는 악업으로써 수명(壽命)을 바르게 버린다면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혹은 상향으로 혹은 하향으로 순차적인 의지의 냉촉(冷觸)이 이루어질 수 없어야 한다.
이런 연유로 생의 염오는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서는 세울 수 없다.
4) 세간의 정품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세간의 정품이 성립하지 않는가?
중생이 만약 욕계(欲界)의 욕을 떠나지 못하면 색계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먼저 욕계의 선심을 일으켜서 욕계의 욕을 떠나기를 구하여 마음을 관하는 것을 닦아 행한다. 이 욕계의 가행심은 색계심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지 않기 때문에 훈습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욕계의 선심은 색계의 선심의 종자가 아니다.
과거의 색계심이 헤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밖의 다른 생과 다른 마음에 의해 사이가 가로막혀서, 나중에 정식(淨識)의 종자를 세울 수 없게 된다. 이미 있지 않기 때문이니, 이런 연유로 이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즉 색계정심(色界靜心)의 일체종자가 과보식에 차례로 전래하여 인연을 세우게 되며, 이 가행의 선심이 증상연(增上緣)을 세우게 된다. 이와 같이 일체의 이욕지(離欲地) 가운데서 이와 같은 세간청정품이라는 정의를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서는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출세간의 정품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찌하여 출세간의 정품을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세울 수 없다고 하는가?
불세존께서 “타음(他音)을 들음과 스스로의 정사유(正思惟), 이 두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서 정견이 생함을 얻는다”고 설하셨다.
이 타음을 들음과 정사유는 이식(耳識)과 의식, 혹은 이(耳)ㆍ의(意) 두 가지 식을 훈습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만약 사람이 듣는 대로 해석하고 정사유하면 이때 이식(耳識)이 생할 수 없으며, 의식도 역시 생할 수 없다.
그 밖의 다른 산동분별식(散動分別識)이 사이에 끼여들기 때문이다.
만약 정사유와 더불어 상응하여 생한다면 이 의식은 오래 전에 이미 끊어져 멸하였으며,
문혜에 의해 훈습된 것은 훈습과 함께 이미 없다.
어찌하여 나중에 앞의 식이 종자가 되어 뒤의 식을 생할 수 있겠는가?
또한 세간심은 정사유와 상응하고, 출세정심(出世淨心)은 정견과 더불어 상응하여 어느 때건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한다.
따라서 이 세간심은 정심(淨心)에 의해 훈습되는 것과 관계가 없다.
이미 훈습이 없으니, 출세간의 종자를 이룰 수 없어야 한다.
따라서 만약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난다면 출세간의 정심은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가운데의 문혜와 사혜의 훈습에는 출세간의 훈습종자를 섭지할 수 있다는 논리가 없다.
만약 염탁(染濁)을 대하여 다스리는 출세간의 정심의 인을 지을 수 있다면 어찌하여 일체종자인 과보식이 부정품을 이루는가?
이 출세심은 예로부터 일찍이 습(習)을 생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결코 훈습이 없다.
만약 훈습이 없다면 이 출세심은 무슨 인(因)으로부터 생하는가?
너는 이제 답하여야 한다.
가장 청정한 법계(法界)의 흐름[所流]인 바른 문훈습(聞熏習)이 종자가 되기 때문에 출세심이 생할 수 있다.
이 문혜의 훈습은 아리야식과 같은 성질인가? 다른 성질인가?
만약 아리야식의 성질이라면 어찌하여 이 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종자를 이룰 수 있으며,
만약 같은 성질이 아니라면 이 문혜의 종자는 무슨 법으로써 의지를 삼는가?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보리(菩提)의 위계에 이르러서는 이 문혜가 훈습을 생하여 하나의 의지처를 따라 존재한다. 이 가운데서 과보식과 더불어 함께 생한다.
비유하건대 물과 우유와 같아서, 이 문훈습이 곧 본식은 아니지만 이미 이 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종자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하품의 훈습에 의지하여, 중품의 훈습을 생하고 중품의 훈습을 의지하여 상품의 훈습을 생한다.
왜냐 하면 거듭거듭 문(聞)과 사(思)와 수(修)를 가행하기 때문이다.
이 문훈습이 하품과 중품과 상품이라 하더라도 법신의 종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리야식을 대하여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생한다.
따라서 아리야식의 성질에 들어가 포섭되지 않는다.
출세간의 가장 청정한 법계가 흘러나오기 때문에, 비록 다시 세간법이지만 출세심을 이룬다.
왜냐 하면 이 종자는 출세간의 정심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일체의 상심(上心)의 혹을 대하여 다스리고,
일체의 악도에 생하는 것을 대하여 다스리며,
일체의 악행(惡行)을 썩혀서 무너뜨려 대치하며,
이끌어 상속하여 이 처(處)에 생하게 할 수 있어서,
모든 불보살을 좇아 따르며 받들어 섬기게 한다.
문훈습이 비록 세간법이지만 처음으로 관(觀)을 닦는 보살이 얻은 것이라도 이 법은 법신이 섭지하는 것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성문과 연각(緣覺)에 의해 얻어진 것이, 해탈신이 섭지함에 속한다면 이 문훈습은 아리야식이 아니고 법신과 해탈신이 섭지함에 속하여, 이와 같이 하품으로부터 중품, 상품으로 차례로 점차 증상하고, 이와 같이 과보식은 차례로 점차 감소하여 의지가 곧 바뀐다.
만약 의지가 한결같이 바뀐다면 이 종자가 있는 과보식은 곧 종자가 없어져서 일체가 모두 멸하여 없어진다.
만약 마치 물과 우유가 화합하는 것과 같이, 본식이 본식이 아닌 것과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한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본식은 멸하고 본식이 아닌 것은 멸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마치 물오리가 우유를 마시는 것과 같다.
마치 세간에서 탐욕을 떠날 때에 부정지(不靜地)의 훈습은 멸하고, 정지의 훈습이 증가하여 세간의 전의(轉依)라는 논리가 이루어지듯이, 출세간의 전의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사람이 멸심정(滅心定)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식이 신을 떠나지 않는다고 설하였으니, 과보식은 정(定) 가운데서도 신을 떠나지 않음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 하면 멸심정은 이 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는가?
만약 이 정(定)으로부터 나온다면 식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왜냐 하면 이 과보식은 서로 이어짐이 이미 끊어졌으니, 의탁하여 생함을 떠났을 때에는 다시 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멸심정에 마음이 있다고 설한다면 이 사람이 설하는 것은 곧 마음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 하면 정(定)이라는 정의가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상(相)과 경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며,
선근과 더불어 서로 응한다는 허물 때문이며,
악 및 무기와 더불어 서로 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상(想)과 수(受)가 생하여 일어난다는 허물 때문이며,
세 가지가 화합함에 있어서 반드시 촉(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정에도 공능이 있기 때문이며,
단지 상(想)을 멸할 따름이라는 허물 때문이며,
신(信) 등의 선근을 작의(作意)하여 생하여 일어난다는 허물 때문이며,
의지의 주체를 뽑아 제거하는 것은 의지처를 떠나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비유가 있기 때문이며,
일체행이 아닌 것처럼 일체행은 이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색심(色心)이 차례로 생하는 것은 모든 법의 종자라고 집착한다면, 이 집착은 옳지 않다.
왜냐 하면 이미 앞의 과오가 있으면서 다시 다른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허물이란,
만약 사람이 무상천으로부터 퇴타하거나 멸심정에서 나온다면 이 가운데서 집착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며, 아라한의 최후심도 역시 성립할 수 없다.
만약 차제연(次第緣)을 떠난다면 이 집착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약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서는 정ㆍ부정품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마음이 있다는 정의가 성취되므로 앞에 설하여진 상을 믿어 알아야 한다.
이제 다시 게송을 짓는다.
보살은 선식(善識)에서
그 밖의 다른 5식(識)을 떠나
다른 마음이 없다면
전의(轉依)는 무슨 방편으로 지을 수 있는가?
만약 대치(對治)가 전의라고 한다면
멸함이 아니므로 성립하지 않는다.
과와 인이 멸(滅)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는 것은 곧 허물이다.
종자도 없고 법도 없음이,
전의가 된다고 편든다면
무(無)에 있어서 두 가지가 없기 때문에
전의라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