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나비

봄날의 나비                                                                                    홍 경 화   마치 수세에 몰려 있는 듯하다. 우주는 영원하지만 그 길에 우리가 머무는 시간은 찰나이기에 무언가에 쫓기듯 하루를 보내곤 한다.   바쁜 것에서 존재감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그간 몰랐던 것을 익히며 대세를 따르며 중뿔난 길을 가는 난 자기만족의 허영심에 물든 거 다름 아닐까.   바쁘지 않을 경우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의 방어기제가, 나한테 작동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쉴 틈을 허락하지 않으니 그리하여 스스로 질병을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어지럼증 피로감 불면증 요통 등이 번갈아 발목을 잡는다. 한밤중의 잠에서는 자주 깨어난다. 몇 해 전부터 허약해진 신체의 이상이 생겼다. 통증이 찾아와도 미뤄놓고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있기를 반복하지 말아야했다. 나중에서야 미련스럽게 병을 키웠다는 걸 알았다. 알기 위한 고통 내지는 알기 위한 시련이라고 여기긴 하면서 앎에 대한 소유욕이 부른 참사일수도 있겠다. 대단한 것도 아닌 그 뭔가를 한답시고 진즉에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만성통증이 밀려올 때마다 자책한다. 통증을 불러오는 육체적 노화는 포기를 쉽게 하게 만드는데 대체 앞으로 잃어버린 삶의 질을 어디에서 찾을꼬. 사람은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데 혹여 이순을 넘긴 나이에도 무언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번잡한 마음으로 발이 닿은 그곳.    동쪽의 동해안으로 가서 서녘 하늘을 바라본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찬바람 부는 해변의 길손이 되어 서성거리며 내 인생 일몰을 상상해 본다. 나의 일몰은 장엄할까, 찬란할까, 수수할까. 다 무슨 상관이랴. 쓸쓸하지만 않으면 감사할 일이다. 저 멀리 장엄하고 찬란하게 붉은빛이 감도는 저물녘 수평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황홀한 일몰이건만 황량함, 상실감을 애써 감추고 싶지 않다.   찻집 산토리니의 해지는 어스름 창밖, 동해바다 겨울바람이 씽씽 파도자락을 몰고 왔다가 몰고 간다. 휴휴암에 들러 차오르는 바닷물이 마냥 신기해 그 앞을 배회하며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언 볼을 감싸 쥐고 안목 카페거리로 옮겨온 것이다. 언젠가 바닷물이 앞마당까지 밀려들어오는 통영 근처 환상적 숙소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육지만 딛고 살다가 방문 열고 나간 마당에 흙 대신 출렁이는 물결이라니, 눈앞의 광경은 놀랍고 미지의 존재를 조우한 듯 가슴이 뛰었다. 우리가 자연에 근거 없이 희망을 기대하는 까닭은 바로 그런 광경을 맞닥뜨릴 때, 사찰 마당에 출렁이는 물결 같은, 휴휴암과의 만남도 그랬다.   그 여운 그대로 가슴에 안고 찾아든 찻집 산토리니는 12월의 바닷가, 매서운 밖의 날씨를 잊게 따스하다. 저 멀리 은은한 붉은 빛 수평선엔 아직 미련을 못 버린 석양빛이 머물고, 규칙적으로 몰려와 해변에 부서지는 포말은 마치 어김없이 밀어닥치는 생의 고단한 풍경이 힘겨운 거품을 토해놓고 사라지는 것 같다.   내 몸속에는 여기저기 뿌리 내린 기억들이 누군가에게서 건네받은 선물처럼 간직되어 있다. 고유한 그 선물들이란 행복했지만 힘겨웠던 지나간 생의 일정을 비롯하여, 괴롭던 시간 벗에게 받는 위안과 위로, 고향 유년의 즐겁고도 쓸쓸했던 추억, 여행지에서 고된 만큼 감동으로 다가왔던 자연의 위대함과 자연이 주는 뜻밖의 여운, 통틀어 귀중한 삶의 기쁨과 슬픔들이다.   현자는 자신의 욕구를 늘리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통의 근원을 늘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욕심을 떨쳐버리지 않고는 마음의 안정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면서 하루에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은 몇 분, 몇 날이나 될까.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기운)은 무엇일까. 안목해변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마주해본다. 그러나 자신의 실체를 관찰하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소리 없이 부서지는 파도를 눈 시리도록 바라보고 있어도 얼른 답이 나오질 않는다. 멍하다.  당연하다. 자연의 에너지를 받아 성장하는 우리는 모든 걸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성장은 바라지 말자. 응대인지 핸드폰의 진동이 때마침 윙윙거린다.   어디니.  어, 산토리니.  어디라구? 지지배. 거긴 또 언제 갔나.   친구는 그리스에 가 있는 줄 아는 것 같았다. 지레 서둘러 전화를 뚝 끊는다.  놀란 친구의 음성을 듣고 보니, 그리스의 화산섬 산토리니는 나를 위해 기대 이상의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돌연 솟는다. 그 옛날 화산이 들끓어 분화하고 남은 잔해가 현재의 아름다운 산토리니라는데, 끓을 대로 끓고 탈만큼 타야만 생산되어지는 그 무엇이라니…,    돌아오는 차 안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봄의 왈츠가 흐르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는데 춤추며 쏟아져 내리는 눈발이 내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누군가가 지휘하듯 휘날리는 눈.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잔잔하게 변화무쌍한 눈발이 물결치듯 허공에 춤을 그린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바람의 지휘 하에 일사분란하게 고요히 내려앉기도 했다. 교향악의 리듬 따라 이리로 저리로 몰려다니는 눈. 기별 없이 찾아온 눈은 바람에 나풀거리는 봄날의 어린 나비를 닮았다. 이순이 넘었지만 나도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