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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2일 예불문 제2강 (至心歸命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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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불문禮佛文 제 2강/2006년 12월 12일 강의분>
至心歸命禮지심귀명례
三界導師삼계도사 四生慈父사생자부
是我本師시아본사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
至心歸命禮지심귀명례
十方三世시방삼세 帝網刹海제망찰해
常住一切상주일체 佛陀耶衆불타야중
至心歸命禮지심귀명례
十方三世시방삼세 帝網刹海제망찰해
常住一切상주일체 達磨耶衆달마야중
至心歸命禮지심귀명례
大智文殊舍利菩薩대지문수사리보살 大行普賢菩薩대행보현보살
大悲觀世音菩薩대비관세음보살 大願本尊地藏菩薩摩訶薩대원본존지장보살마하살
반갑습니다. 오늘 방송진행이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강의만 할 줄 알았지 기술적인 이런 문제에는 익숙하질 못해 쉽지가 않네요. 어제는 처음인데도 그런대로 잘 이끌어 왔는데 오늘은 애로가 조금 있었습니다. 한 5분 남짓 지연되었지만 이렇게 시작할 수 있게 되어서 참 다행입니다.
어제는 예불문 중 ‘옴 바아라 도비야 훔’까지 했습니다. 오늘 배우실 내용은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내용은 삼보입니다만, 흔히 칠정례라 합니다. 부처님께 두 번, 가르침에 한 번, 사대보살과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그리고 역대전등 제대조사, 일체 승가야중에 네 번, 이렇게 해서 칠정례가 되는 거지요.
이것을 뭉뚱그리면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되지요. 또 이런 염불을 외지 않더라도 부처님께 가서 삼배를 올리면 삼보께 귀의, 예배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삼배를 하는 뜻은 삼보께 귀의하는 의미입니다.
덕이 높은 스님께 삼배를 올릴 때에도 그 삼배의 의미는 불법승 삼보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큰스님께 삼배를 올리면 세 번의 절이 다 큰스님께 가겠지만 원래 삼배의 뜻은 불법승 삼보에게 예경을 올리는 것이 주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 첫 부분,
至心歸命禮지심귀명례 三界導師삼계도사 四生慈父사생자부 是我本師시아본사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
이 부분은 삼계대사, 삼계도사 또는 삼계대도사 이렇게 약간씩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심귀명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해서 귀의하고 예배드립니다.
누구에게? 삼계의 도사요, 사생의 자부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지요.
욕계, 색계, 무색계, 이 세상 전체를 삼계라 표현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 드넓은 세상의 미혹한 사람들을 모두 인도하는 사람, 그러니까 대도사라 하든지 도사라 하든지 그때의 도사는 인도할 도導자 스승 사師자입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는 사람, 이런 뜻이지요.
그리고 사생의 자비하신 아버지란 뜻은
‘태胎 ․ 란卵 ․ 습濕 ․ 화化- 태로 난 중생, 알로 난 중생, 변화로 난 중생, 습기에서 난 중생을 말하며 다종다양한 그러한 여러 중생들, 여러 생명들의 자비하신 아버지이시고, 우리들의 본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하옵니다.’
이런 뜻이지요.
그러니까,
‘삼계의 도사이시요, 사생의 자부이시요, 또 우리들의 근본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우리가 먼저 예경을 드리고 귀의합니다’라는 그런 내용이지요.
다 아는 내용이지만 석가모니부처님은 불교를 창시한 교주이시지요.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께 먼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찰에 오시더라도 맨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놓은 대웅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에 관음전에 가든지 지장전에 가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법당으로 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스님을 찾아 뵐 때도 먼저 대웅전에 가서 석가모니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난 뒤에 찾아뵙는 것이 순서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불교는 역사가 오래이지요. 부처님 가르침 속에는 수많은 불보살님이 계시고 또 그것을 형상화해서 법당에 모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대 조사스님, 현존의 큰 스님들이 계시지만 모두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석가모니께서는 근본이 되는 본사本師 스승님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을 마음에 잘 새겨야 됩니다. 아무리 큰스님이 존경스럽고, 또 역사 속의 위대한 조사스님이 설사 내 마음을 움직였다손 치더라도, 또 관세음보살님이나 지장보살님의 자비와 원력이, 문수보살의 지혜와 보현보살의 실천이 우리를 감동케 해서 그분들의 삶을 본받고 싶다 치더라도 그분들의 그 마음과 가르침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출생했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사本師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본 스승님입니다.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그 많은 스승님을 소개받았고, 역대조사가 계시고 또 현존하는 덕 높은 큰스님과 많은 도반들이 있고 그렇습니다.
모든 불교적인 것- 성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외 다른 어떤 의식이라든지 불교에 사용되는 일체 모든 도구라든지 이런 것까지도 전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생긴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해서 잘 아셔야 하고 거기에 대한 존경을 최우선으로 해야 됩니다.
우리는 편하게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을 찾는 예가 많은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와 사상, 그분의 수행, 이력에 대해 소상히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생애라든지 이런 것을 잘 알아야 되는 거지요. 모든 가르침이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꼭 우리가 여러 번 주입을 시켜서라도 실천을 하도록 해야 될 그런 대목입니다.
불교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통해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여러 불자님들을 살펴보면 뭐 칠성각에 가고, 산신각에 가는 분들은 설사 제외한다손 치더라도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아미타여래, 또는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셔놓은 비로전, 심지어 당신의 조상을 모셔놓은 영단 같은 데에 너무 치우쳐서 마음을 쓰는 사례들이 많지요, 많이 봅니다.
다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근본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근본이 없이 어찌 지엽이 있겠습니까!
부디 근본을 잊지 마시고 근본스승이신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한 깊은 이해, 넓은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꼭 대웅전에 먼저 참배 드린 후에 다른 법당을 가심이 바른 순서라는 것을 아울러 말씀드립니다.
그 다음,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누구에게?
十方三世시방삼세 帝網刹海제망찰해 常住一切상주일체 佛陀耶衆불타야중
그렇게 되어 있지요.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은 불교의 창시자이시고 역사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만, 대승적인 관점,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에 의거한 불타관의 깊은 이해에 입각하여 본다면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말씀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동서남북 사유상하, 시방 어디에도 다 있고 또 있어야 되고, 있기도 한, 그리고 현세뿐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다 걸쳐서 있는데 얼마나 많이 계시냐 하면,
제망찰해帝網刹海라고 했습니다.
제망帝網이라는 것은 제석천의 궁전을 덮고 있는 그물인데 그 그물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아주 영롱한 구슬로 짜여져 있습니다. 수 억만 개의 구슬로 된 그물로 궁전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제석천을 덮었지요.
요즘도 서양 여자들은 파티에 나올 때 보면 아름다운 천으로 얼굴을 슬쩍 그물 덮듯이 가리고 나오는 모습을 영화나 T.V를 통해서 볼 수가 있지요.
그처럼 제석천 하늘 궁전을 그렇게 구슬그물로써 덮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물에 달려있는 구슬과 구슬이 서로 반사되어서 그 하나의 구슬 속에는 수많은 다른 구슬이 비치고 또 옆에 있는 구슬에는 주변의 구슬이 되비치는 거지요.
그래서 제석천의 그물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비유가 됩니다.
여기서는 그렇게 많은 구슬처럼 있는 세계, 그 세계는 저 드넓은 바다처럼 넓다는 것이지요.
그런 많고 많은 부처님, 그것도 어느 한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삼세三世라고 했고, 상주常住라고 했습니다, 항상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했습니다.
그 중衆자가 무리 중자이지요. 인도말로 부처님을 불타, 붓다라 발음하는데 여기서 야耶자는 무슨 이유에서 쓰였는가 하면, 이건 위격爲格이라 해서 범어梵語로 ‘~에게’라는 뜻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중야衆耶 이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이 야耶자는 범어입니다. 불타도 범어이지요. 그런가하면 중衆자는 한자입니다. 복수를 나타내는 무리중자는 뒤에 오게 되고, 위격爲格인 ‘~에게’라고 하는 글자는 그 앞에 와서 불타야중佛陀耶衆,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들께 라는 뜻이지요.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시방세계에 많고 많은 모든 부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다해서 귀의하고 예배드립니다.’ 그런 뜻이지요.
거기까지가 불보에 해당되는 것이고 그 다음이 삼보 중 법보인데,
至心歸命禮지심귀명례 十方三世시방삼세 帝網刹海제망찰해 常住一切상주일체 達磨耶衆달마야중
부처님만 그렇게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가르침 역시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하시는 달마’라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는 달마達磨를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 참 좋아요.
달마라는 말은 물론 진리를 뜻하는 것이지만, 그 진리를 깨달으시고 그것을 가르쳐 주신 부처님의 가르침과 진리를 둘로 나누어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달마 혹은 법이라고 할 때는 진리 그 자체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그 가르침을 함께 포함해서 법, 또는 달마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 진리와 진리의 가르침이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한 가지 법일 수 있겠습니까?
‘많고 많은 법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하고 예배드립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 다음입니다.
불법승 삼보로 나누어 볼 때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모든 보살들은 승보僧寶에 해당됩니다. 사대보살이라고 해서,
至心歸命禮지심귀명례 大智文殊舍利菩薩대지문수사리보살 大行普賢菩薩대행보현보살
大悲觀世音菩薩대비관세음보살 大願本尊地藏菩薩摩訶薩대원본존지장보살마하살
이라 했는데 문수보살은 물론 지혜를 뜻하고 보현보살은 행行- 큰 실천을 의미하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하신 분이란 뜻이며 지장보살님은 큰 원력의 근본 어른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선 석가모니부처님은 역사적인 인물이라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만 그 외의 사대보살님을 위시해서 수많은 부처님이나 여러 보살들은 도대체 어떤 분이냐? 역사적인 인물이냐, 아니면 갑자기 한번씩 신통으로 나타나는 성인들이냐에 대해 궁금하지요.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계신다’, 혹은 ‘관음도량에는 관세음보살님이 계신다’는 별별 이야기가 불교 안에 많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어 애매모호하지만 그렇다고 증명할 길도 없지요.
본 사람은 간혹 있다고 하는데 그건 만 명, 십만 명 중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한 일이고 대다수의 불자들은 이 보살의 실재에 대해서,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 이외의 많은 부처님들의 실재에 대해서 확신이 없으니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갑갑하지요.
‘삼천불명호경’이 있어서 삼천불을 모신 삼천불전도 곳곳에 많고 천불을 모신 천불전도 많고, 심지어는 ‘만불명호경’까지 있습니다. 만 부처님의 이름을 다 기록해 놓은 그런 경전도 있거든요.
그런 많은 부처님과 보살들, 보살들의 수는 만 명, 이 만 명 정도가 아니지요. 화엄경에 등장하는 보살의 수만 하더라도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많고 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이럴 때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어름하게 회피할 이유도 아니지요.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경전 상에 나타난 부처님과 보살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마음의 일부를 모습을 갖추어서 형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한 불보살님이거든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할 때 본사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런 데에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 그 깨달음의 세계는 우리는 감히 상상을 못합니다. 얼마나 자비로운 마음이 있고, 얼마나 지혜로운 마음이 있으며 중생을 위한 실천의 마음이 얼마만한지, 지장보살과 같은 원력의 마음이 얼마인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 마음속에는 별별 마음이 다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아주 성스럽고 우수하고 뛰어난 마음들을 이렇게 상징적 실재로써 나타내 보이는 것이 사대보살입니다. 그들이 설법도 하고 온갖 역사도 일으켜가고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돼요.
그러면 그 분들이 어디에 있었던 역사도 있지 않습니까? 예, 있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으신 마음속에는 별별 것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 존재하는 것을 좀 더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지혜의 입장에서는 문수보살을, 실천의 입장으로써 보현보살을, 자비의 입장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원력의 입장에서는 지장보살을 이렇게 드러내서 인물로써 형상화 해 놓으니 얼마나 뚜렷합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의 그 깊고 넓은 마음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런 인물들을 없애고, 그 분들을 구체적인 인물로 등장시키지 않고 그냥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신 분이다, 부처님은 큰 행이 뛰어나신 분이다, 무슨 원력이, 지혜가 뛰어나신 분이다.’ 라고 이렇게 한 분에게 모든 짐을 지운다면(물론 부처님의 마음속에는 다 있습니다마는), 모든 뛰어난 내용을 한 분에게 다 포함시킨다면 설명하기가 참 복잡하고, 또 우리에게 얼른 와 닿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거기 있는 내용의 부분 부분들을 따로 떼어서 확실하게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그런 의미로써 사대보살, 천불, 만불, 그리고 수많은 보살들을 등장시켜서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이 뜻하는 바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비단 부처님이 아닌 보통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들은 마음속에 그리는 어떤 이상적인 사람이 있을 겁니다. 얼마든지 그게 가능하지요. 그런데 그분들을 형상화한다면 이와 같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속에는 얼마나 크고 큰 세계가 펼쳐져 있겠습니까!
그 성스러운 위대한 마음들을 이렇게 보살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불교적 안목으로는 무엇이든지 있다, 없다 하는 문제를 함부로 말하지 않지요. 불교공부를 좀 하신 분들은 눈에 안 보인다고 섣불리 ‘없다’ 못하지요, 또 눈에 보인다고 ‘있다’ 못합니다. 이런 말을 불자들은 다 알아 들을 겁니다.
그럼 관세음보살님이 ‘있다’, ‘없다’를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건 석가모니 부처님 깨달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대자대비의 심성을 인물로써 부각시겼다고 했으니 ‘없다’고 말 못하지요. 그렇다고 ‘있다’라고 하는 것도 또한 편협한 소견이고 치우친 소견이라서 중도의 원리에 맞지 않지요.
석가모니부처님이라 해도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니 석가모니는 옛날 분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자신도 그렇습니다.
불교적인 상식을 가지고 우리 이야기합시다.
제 자신이 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없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 못합니다.
역사적으로 실존인물인 석가모니도 마찬가지로 있다고도 말 못하고, 없다고도 말 못합니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있는 입장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깊고 넓은 깨달음의 마음속에 성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하는 어떤 마음을, 상념을, 인물로써 드러낸다는 것은 아주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없다고 말합니까?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니 화현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리는 불보살에 대한 이해, 석가모니부처님 이외의 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잘 해야 됩니다.
‘아이고, 그냥 중생들을 달래려고, 유혹하려고 방편으로 하는 말씀이지’하고 몰아부쳐서도 안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꼭 실재하는 것처럼 믿고 들어가는 그것도 사실은 좀 곤란합니다.
그 의미를 잘 알아야 됩니다.
우리 마음도 잘 다듬으면 결국엔 부처님 마음속에 있는 관세음보살적인 대자대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현존하는 인물들 중에서도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를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대로 관세음보살이지요.
우리는 관세음보살에 대해서 그렇게 이해해야 하며 문수, 보현, 지장보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이 설법을 하고, 지장보살 , 문수 , 보현보살이 설법을 하는 사례들이 경전에 보면 많이 나와 있지요. 아미타경에서는 아미타불이 설법을 하기도 하고 법화경을 보면 다보여래가 설법하기도 하는 등 석가모니부처님 이외의 불보살이 설법하는 그런 내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두가 다 석가모니 자신의 마음의 상징적 실재로써 부처님이나 보살들을 등장시켜서 설법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지요?
석가모니께서 설법 하시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들이 다른 부처님과 보살로써 이렇게 등장해서 설법을 하시기도 하는 것이지요.
화엄경은 39품 중 두 품만 석가모니께서 설하시고 나머지는 전부 보살들이 설했지만, 그 보살들은 결국은 부처님의 마음의 한 부분들이지요.
그런데 특정보살로 등장을 시켜놓으니까 얼마나 뚜렷하고 확실합니까!
그 부분을 석가모니부처님 혼자서 담당한다면 효력이 훨씬 떨어질 것입니다. 인물로 등장시켜 부각을 시키니까 효과가 뛰어나 우리 중생들이 의지하기가 아주 좋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사대보살을 이해해야 할 또 한 면이 있습니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그 상대적인 행으로 보현보살을 등장시켰는데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는 표현을 하지요.
어쨌든지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내게 지혜가 있으면 더욱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경전과 가르침과 훌륭한 법문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지요. 지혜만 있으면 그야말로 밝은 눈을 갖추는 것과 같습니다.
밝은 눈을 갖추었으면 걸어서 앞으로 나아가야지요. 그 나아가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보현보살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런데 밝은 눈이 없이 덮어놓고 다리가 튼튼하다고 막 걸어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하고 전봇대에 부딪쳐서 상처가 나기도 하고, 차와 부딪치기도 하고 담벼락에 가서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위험하지요.
그래서 지혜를 우선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가 앞에 있습니다.
또 눈은 있지만 다리가 없어 구체적인 실천의 행위가 없으면 그것도 곤란하지요. 그 둘이 잘 갖추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문수보살이 정신적인 문제를 뜻하고 있다면 보현보살은 육체적인, 구체적인 행위로서의 의미를 뜻하고 있지요.
그 다음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은 어떤 관계이냐 하면,
관세음보살은 현생적인 중생제도의 담당으로서 존재하고, 지장보살은 다음 생, 또는 유명幽冥세계, 현실 저 너머의 세계에 있는 중생들의 일들을 담당하고 있는 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사찰에서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할 때는 관세음보살에게 하고, 돌아가신 분들의 다음 생의 문제라든지 또는 돌아가신 분이 지금 살아있는 사람에게 문제를 일으켰을 때, 그걸 구체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야기하면 영가가 붙어 병을 앓는다든지 하는 영가의 문제로 일이 생겼을 경우에는 지장보살에게 기도하지요.
현실의 문제는 관세음보살, 비현실적인 문제는 지장보살, 이렇게 상대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문수와 보현이 그렇게 조화를 이루고 있듯이 관음과 지장이 이렇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 해서 ‘큰 원력의 근본어른’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정말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꿈과 희망을 가지고 생명력 넘치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된다는 입장에서 볼 때, 지장보살의 원력은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지장보살이라 하면 무슨 돌아가신 분의 어떤 영혼을 천도한다,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현재 산사람에게 의지를 해서 무슨 병고를 앓고 있다는 이런 것들을 연관시켜서 많이들 생각하는데 그런 입장보다는 지장보살께 우리가 배울 것은 원력願力입니다.
얼마나 강한 원력입니까?
정말 ‘지옥미공地獄未空 서불성불誓不成佛’이라고 ‘지옥이 텅 비기 전에는 내가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이런 크나큰 원력願力을 세우신 분이 바로 지장보살님이거든요.
원력은 곧 생명력입니다.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어도 짹 소리를 하고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뭔가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 좀 강하게, 용기 있게, 씩씩하게,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자기의 생명을 자기 의지로써 연소시키면서 살아가는 그런 마음가짐이야말로 지장보살님에게서 배울 만한 것입니다.
뭐 이래저래 핑계 거리야 살아가면서 많지요. 병이 들었다든지, 나이를 먹었다든지, 여러 가지 조건이 안 된다든지, 가난하다든지, 주변 환경이 어떻다든지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다 핑계인 것이지요.
그런 거 저런 거 다 무시하고 정말 우리가 지장보살에게 배워야 할 것은 강인한 원력願力입니다.
생명력을 한껏 북돋우면서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 가지 핑계거리 다 무시하고 자기 발전을 위해서, 또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겠다는 그런 원력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꼭 필요합니다.
지옥에 가서 어떻게 지옥중생을 제도하겠습니까? 지옥에 가서 그곳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일 아니겠습니까? 보통 생각하면 그렇지요.
그런데 지장보살님은 어떻습니까?
보통 사람들을 제도하는 이런 일은 딴 사람에게 맡기고, 정말 나쁜 놈들, 정말 성품이 악해서 나쁜 짓 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내가 제도하겠다는 이런 원력을 가지신 분이 지장보살님이거든요. 이 역시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의 마음속에 있는 부분을 지장보살로써 부각시킨 것입니다.
지옥을 악조건이라 생각하면 지옥에 가있는 중생들을 우리가 어떻게 제도하겠습니까? 그런데 지장보살님은 그게 아니에요, ‘아, 그런 중생들이야말로 내가 제도해야 할 중생들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처지가 어떠하다는 것을 자꾸 핑계대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내 삶에 뭔가 유익하게 활용하려면 다른 가르침도 많지만 오늘 지장보살에게서 큰 원력을 배워 우리의 열악한 조건- 나이, 지능, 학벌, 환경, 처지, 팔자 이런 것들을 다 극복하고 정말 자기 발전을 위해서, 또 다른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그런 바람직한 삶을 살아야겠고, 죽는 순간까지도 활기차고 씩씩하게 살 수 있는 그러한 삶을 불교에서 배워야겠지요.
부모 천도하는일, 좋습니다. 기도해서 자녀들 좋은 학교 보내는 일, 다 좋습니다만 그것보다도 참으로 불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자기 처지, 나이 이런 것들을 모두 극복하고 정말 씩씩하고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고, 늘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자기 생명을 스스로 불태울 줄 아는 그런 용기 있는 사람으로 살다가 가는 것, 이것을 불교에서 건졌으면 합니다.
불교와 인연 맺으면서 꼭 권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금강경에 보면 수자상을 없애라는 말이 나옵니다. 수자상 떼기가 제일 쉽다고 했지요, 나이에 관한 관념들 다 털어버리고 지금이라도 한글을 배우시든지 컴퓨터, 영어, 한문, 뭐든지 자기 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할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불교에서 배워야 할 점, 건져야 할 점, 얻어야할 득이 많지만 지장보살의 원력에서 우리가 힘찬 삶을 사는 그런 모습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고 오신 분들 이름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채팅창에 들어와 있는 회원님 이름을 축원장 읽으시듯 한 분 한 분 불러주심)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동참하셨습니다. 지금 일흔두 분이 방송을 듣고 계시네요. 오늘 강의는 처음에 방송 진행이 좀 매끄럽지 못해 죄송합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예불문 제2강 녹취정리:na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