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족보(中國 族譜)의 발전(發展)
○ 중국의 보첩은 사마천의 세표(世表)를 중심으로 만들어 진다.
그는 삼황(三皇) 가운데 황제 헌원씨만 다뤘지만,
후대에 이르러 삼황은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황제 유웅씨라 했고,
오제(五帝)는 소호 김천씨, 전욱 고양씨, 제곡 고신씨, 제요 도당씨, 제순 유우씨라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삼대(三代) 하, 상(은), 주로 체계화 했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 들면서 은나라 갑골 문이 발견되고, 청동기에서 금문이
나타나면서 사마천의 세표(世表)는 비판을 받고 있다.
○ 중국의 보첩(譜諜)은 위, 진(魏, 晉)으로 대표되는 남, 북조시대에 문벌제도의
기반으로 정착했다. 남조가 북중국에서 이주해 온 한족(漢族)중심의 왕조였다면,
북조는 북중국에서 그 동안 오랑캐로 불렀던 흉노나 동이(東夷)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문벌과 씨족제가 정착하고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라는 인재등용제도가 발전했다.
구품중정제란 북조인 위나라 왕조가 기존의 한(漢)왕조 지배층을 흡수하기 위한
인사발탁제도로 그 바탕은 출신성분이었기 때문에 씨족들의 장부인 보첩이 중요한
구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만들어진 족보가 진(晉) 송(宋)나라 사이에 가(賈)씨 일가 5대가 만든
“씨족 요장(氏族要狀)” 일명 백가보(百家譜), 성씨부장(姓氏簿狀)이다.
가(賈)씨 일가는 진나라 때 가필(賈弼)이 712권에 이르는 ‘18주 116군보(郡譜)를
지은데 이어 그의 아들 비자(匪子), 손자 희경(希鏡), 중손 집(執), 현손 관(冠)에
이르기까지 5대에 “씨족요장”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족보 일부 서문에는 이 가(賈)씨 일가의 애기가 거명되고 있다.
○ 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나라가 망하고 당(唐) 왕조가 시작되었다.
북조지방에서 출발해 황제가 된, 당나라 농서(隴西) 이(李)씨는 북위 지방
다섯번째 씨족이었던 자신의 성족(姓族)의 순위를 1등으로 개편하기 위하여
태종 때(631) “정관씨족지(貞觀氏族志)”를 만들고,
당 고종 (655년) 때 상인 출신 가문에서 황후가 된 측천무후가 정권을 거머쥐면서
다시 씨족 등위 개정을 위해 만든 것이 “성씨록(姓氏錄)”이다. 이때부터 기존 문벌이
무시되고 새로운 사류와 서민들이 명문씨족의 반열에 끼여들기 시작했다.
- 714년 (당 현종) “성족계록(姓族系錄)” 간행 되고,
- 812년 (당 헌종) 새로운 지방 군현 편제에 따라 군별로 명망있는 씨족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군망씨족분정(郡望氏族分定)을 하였고,
이때 임보(林寶)의 “원화성찬(元和姓簒)”이 간행되었다.
○ 960년 송 왕조(조광윤)가 시작되면서 족보는 관리 임용보다 혼인에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처럼 ‘경종목족(敬宗睦族)’ ‘존조수족(尊祖收族)의 방편
구실을 하게 되었다.
- 송나라 때 소위 삼소(三蘇)라고 불리운 대문장가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3부자에 의하여 방대한 규모의 족보가 편찬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족보는 대부분 “소보(蘇譜)”라고 불리운 이 족보를 표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 명 나라 때 “명황천가성(明皇千家姓)” 나왔고, 또한 명대(明代. 1368-1903) 말
“만성통보(萬姓統譜)가 간행되고, 이(李), 왕(王), 장(張), 유(劉), 진(陣) 의 5대
성씨들이 각각 20책 이상의 개별 성씨 족보를 간행했다.
○ 청말(淸末)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전집(飮氷室全集)” 과 오여윤(吳汝윤.1840 -
1903)이 만든 “심주풍토기(深州風土記)”가 간행되어 그 당시 중국 성씨를 집대성
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족보로 발전 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 한국의 귀화성씨 -성씨로 본 우리민족의 구성 -
(김정호. 진도문화원장. 조선대학교,목포대학교 출강)
* 남, 북조시대 : 진(晉)나라와 수(隋)나라 사이의 시대를 말하며, 그 가운데 유비, 조조,
손권의 삼국시대를 이어 받은,
- 남쪽 왕조 : 오, 서진, 동진, 송, 제, 양, 진,
- 북쪽 왕조 :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