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암공(砥巖公) 휘 결(𡐤)의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는 결(𡐤)이고 자(字)는 자수(子守)이고, 자호(自號)를 지암(砥巖)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재령이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도주(道州=청도의 옛지명)에 족대부 휘 아무, 자(字) 아무란 분이 재주와 행실로 당세에 이름나서 사뭇 석유(碩儒=학문이나 덕행이 위대한 선비)의 모범이 있었는데 불행히 요사(夭死)하였다. 내가 후세에 태어나서 미처 공을 친히 보지 못하고 때로 공에 대해 말이 미치면 탄식하고 또한 슬퍼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 경인년(1710년 숙종36) 봄에 족인 경렴(景濂)씨가 선대에서 미처 못하던 일로써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고조부 무덤의 도리솔이 이미 아름드리가 되도록 자랐으되 묘도(墓道)의 돌에 비문(碑文)이 없으니 청컨대 한 마디 말씀을 그 뒤에 적어 주십시요." 한다. 내가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꿇어 앉아 말하였다. "지암공(砥巖公)은 내가 평소에 우러러 흠모(欽慕)하던 바인데, 내가 글을 잘하지 못한다 하여 사양하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 이씨는 본래 월성이씨에서 나왔으니, 시조 알평(謁平)은 신라의 개국공신이며, 높은 벼슬이 대대로 이어졌다. 고려조에 와서 휘 우칭()이 계셨는데, 지위는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친히 부마(駙馬)가 되어 이런 까닭으로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졌으니 우리 이씨가 재령군(載寧郡)을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이 이 때문이다. 원영(元英)은 공부상서(工部尙書)이고, 소봉(小鳳)은 상장군(上將軍)이고, 일선(日善)은 사재령(司宰令)이며, 술(戌)은 사정(司正)이다. 본조(本朝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영중(榮中)이 있었으니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냈다. 감사공은 계손(繼孫)을 낳았는데, 음직(蔭職)으로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군수공은 덕인(德仁)을 낳았는데 일찍이 별세하였으며, 덕인공은 붕(鵬)을 낳았는데 첨사(僉使)이며, 첨사공은 백신(白新)을 낳았는데 첨정(僉正)이니, 두 대가 또한 음덕으로 벼슬하였는데 첨정공은 공의 아버지이시다. 어머니는 성산이씨(星山李氏)로 감찰 (監察) 덕문(德門)의 딸이다. 명종 신유년(1516년)에 공이 금곡리(琴谷里) 본가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아난 자질을 타고났고 장성하여서는 학식이 깊고 넓었으며 또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모부인(母夫人)이 평소에 질병이 있었는데,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고 갓과 띠를 벗지 않았으며 약을 반드시 친히 달이고 감히 스스로 편히 처하지 않으니, 천성이 본디 그러한 것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같이 할 수 있겠는가. 간혹 여력이 있으면 경의(經義)를 강구하여 반드시 사람을 깨우치며 벼슬에 진출하는데에 대해서는 뜻을 두지 않고 개연히 사문(斯文=儒學)에 뜻을 두었다. 한강(寒岡 =鄭逑의 호)의 문하에 종유하여 학문을 더욱 넓혀 사람들에게는 추앙을 받았는데, 김동강(金東岡 =김우옹의 호) 이두암(李竇巖=이기옥의 호)은 특히 사우(師友)로 서로 허여(許與)하여 정분이 가장 친밀하였다. 공은 초명(初名)이 곤(坤)이었는데, 선생(=寒崗)이 그 성품과 행덕이 아름답게 단정하고 깨끗함을 아름답게 여겨 결()자로 고쳤으니, 대개 우장(優奬)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정해년(1587년)에 내간상(內艱喪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죽을 마시고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그 초상과 장사에 애통해 함이 예보다 과도히 하니 군국(郡國)이 그 효행을 일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미처 나라에 아뢰기 전에 선조 27년(1594년) 4월 19일에 새상을 마치니 향년이 34세이다. 묘소는 청도군 북쪽 연지산(蓮池山 묘좌을 등진 좌향(坐向=서향)의 언덕에 있다. 배위는 이씨(李氏)이니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경(磬)의 따님인데 묘소는 공과 같은 언덕이나 각장 묘혈(墓穴)은 다르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종명(宗明)이니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좌윤(漢城左尹)이고, 딸은 박정(朴挺)에게 출가하였는데, 정랑(正郞)이다. 아! 공(公)처럼 어지신 분으로 불행히 세상을 일찍 버렸으니, 하늘이 만일 수명을 주셨다면 그 후생(後生)에게 의표(儀表)가 됨이 어찌 적겠는가? 전후의 문집(文集)이 임진왜변에 다 잃어서 하나도 유전하는 바가 없고, 행장(行狀)의 모든 기록을 군지(郡誌) 및 가첩(家牒)에서 대강을 엿볼 수 있다. 비록 백대의 먼 후세일지라도 전배(前輩)의 재주와 행적을 칭술하는 이는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삼을 것이니, 또한 증명할 만한 문헌이 없음을 어찌 상관 하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性克孝學究精 천성은 효성스럽고, 학문은 정밀하였으니, 自身熏後 자신에게서 행하여 후생을 교화시켰도다. 華山鬱方 화산(華山)은 울창하고, 琴水淡 금수(琴水)는 맑으니, 宛想平生操守 완연히 평생의 지키던 바 지조를 상상하겠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