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불던 날 나는
박봉환
새벽 3시 반. 때 아닌 전화벨 소리에 나는 단잠을 깨야 했다. 청 내에서 심각한 상황이 발생해 급히 출근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는 운전기사의 다급한 전화였다. "무슨 일이냐?"라는 나의 질문에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그는 "집 앞에 나와서 기다리세요. 곧 가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는 허겁지겁 전화를 끊었다. 전에 없던 상황에 나는 매우 당황해 하며, 급히 옷을 챙겨 입고 대문을 나섰다.
잠시 후 차가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직원들을 급히 청 내로 데리고 오라는 지시만 받았을 뿐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며 빨리 차에 오르기를 재촉했다.
나를 실은 승용차는 동대문을 거쳐 종로를 향해 질주했다. 나는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밤사이 유신 반대 시위를 하는 학생들과 진압군, 또는 경찰과의 유혈 충돌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제저녁 유신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대통령 재가서류를 작성하느라 밤늦게까지 근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정도의 일로는 꼭두새벽에 비상을 걸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내 나의 추측은 좀 더 심각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었다. '김신조 사건 같은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남북 전면전일지도 몰라?
승용차가 중앙청 앞을 지나갔다. 평소와 달리 전차들이 광화문 앞 길가에 즐비하게 배치돼 있었다. 굴뚝같이 툭 튀어나온 장엄한 포신 사이사이에 중무장한 병사들이 경계 상태로 서 있었다. 얼굴에 새까만 숯검정을 칠한 병사들이 살기 어린 눈동자로 내가 탄 차를 주시하고 있었다. 섬뜩하다 못해 살벌했다.
청와대 정문에 도달하자 무장한 경호 요원들이 차를 가로막았다. 그들은 나의 가슴에 달린 비표를 떼어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수신호를 했다. 평소에는 생략되었던 절차가 까다롭게 준수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더욱 마음을 졸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청 내로 조심조심 들어가 당직 근무자 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당직 근무자인 김 서기관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며 자정 때쯤 다급하게 청 내로 들어온 비서실장의 지시로 각 수석비서관 회의가 긴급 소집되었고, 약 10여 분간의 회의 후 그들은 자신에게 직원들의 비상 호출을 지시하고는 아무런 설명 없이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는 것이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김 서기관을 뒤로하고 나는 나의 사무실로 발길을 재촉했다. 사무실에는 이미 몇몇 동료 직원들이 와 있었다. 그들도 내가 당직실에서 들은 것 이상의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새벽 6시경 내가 근무하고 있던 부서의 수장인 정무1수석 비서관이 급히 사무실로 들어왔다. 우리는 그의 집무실로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어정쩡한 자세로 의자에 반쯤 걸쳐 앉았다. 그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는 깊은 쉼 호흡을 몇 번 되풀이 하였다. 우리는 초조하게 그가 말문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갔다. 그는 자세를 바로잡더니 "엄청난 일이 벌어졌어요. 모두 경거망동하지 말고 사무실에서 대기 하세요"라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 두 마디를 남기고서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얼마나 큰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정무, 경제, 민정, 사정, 총무 비서실과 각 특보실의 직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새로운 정보를 얻고자 타 부서의 동료나 선, 후배를 찾아다녔지만, 헛수고였다. 온갖 추측들만 난무했다. 아침 7시가 되었다. 나는 아침 뉴스를 듣고자 라디오를 켰다.
'대통령 유고.'
라디오 뉴스의 아나운서는 대통령 유고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동료를 쳐다봤다. 그도 나를 물끄러미 쳐다 볼 뿐 놀라 아무 말이 없었다. 이때 수석 비서관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
"각하께서 큰일을 당하셨어요. 엄청난 일이지만 모두 당황하지 말고 각자의 업무를 총리실로 이관할 준비를 해 주세요.”
우리는 비상사태 행동요령에 따라 각자의 방에서 캐비닛을 열고 서류들을 꺼내 하나 둘씩 파쇄(破碎)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1급, 2급, 3급 비밀 그리고 대외비 등 심혈을 기해 작성했던 서류들을 나 스스로 갈가리 찢어 없애야 했던 것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각 부서에서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글자 한 획, 한 구절에 세심한 주의를 가하며 정성을 다해 만들었던 것들 아니던가! 잘 보관하여 역사의 기록이 되게 하기는커녕, 내가 만든 서류를 내 손으로 찢어 없애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참담했다.
내가 작성한 서류를 대통령이 직접 검토한다는 긴장감 속에서 완벽한 서류를 만들고자 지새웠던 숱한 밤들의 추억과, 대통령이 내가 만든 서류에 자신의 생각과 지시사항을 만년필 글씨로 적어놓은 것을 보았을 때에 느꼈던 희열감이 서류와 같이 찢기어 나가는 느낌이었다. 오후가 되자 우리는 급히 준비된 검정 양복과 검정 넥타이를 지급받아 갈아입고 청 내에 마련된 빈소에서 조문객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청 밖의 대로변까지 길게 줄을 이었고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10명을 한 조로 하여 같이 문상하게 하고, 문상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끝내도록 조문객들을 설득해 보았지만, 그 많은 사람을 감당하기에는 청 내가 너무 비좁았다. 빈소를 중앙청 광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한 조를 30명 또는 50명 단위로 늘렸다. 국민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몰려들었다.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은 엄숙하게 거행되었고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다. 신부님의 기도에 이어 목사님의 기도, 그리고 스님의 목탁소리와 불경… 국민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시대의 영웅과 이별했다.
그렇게 태풍은 지나갔다. 태풍이 지나간 언저리에 서 있던 우리에게는 또 한 차례의 세찬 바람이 몰려 왔다. 청와대 비서실 조직은 와해되었고, 직원들은 역사적 시련의 파장을 감내해야 했다. 나도 이에 예외는 아니어서 그때부터 한동안 깊은 나락에 빠져서 헤어날 수 없었다.
박봉환
. 건국대학교 법학과, 육군대학 졸업
. 『자유문예』에서 소설, 『만다라문학』에서 수필로 등단
. 전 청와대 정무비서실 안보담당관
. 자유문인협회 부회장
. 문집 『꼬마각시와 꼬마신랑』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