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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조는 그동안의 상황들을 무전기를 통하여 다 들어 알고 있지만 옆조들은 전혀 소식을 모를터인데 숨소리 하나없이 쥐죽은듯 고요하게 떨고 있을 전우들을 생각하니 답답하기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랴 지금 우리는 VC들의 길목 한 가운데 놓여있는 처지에다 상황까지 벌어져 그들이 언제 우리 지역에 나타날지 모를 상황인데 잠복지를 이탈하여 옆조를 마실다니듯 다녀 올 처지도 아니니 연결줄에 의지하며 오늘 밤을 무탈하게 보내기를 기도하는 수 밖에...
이제는 조명탄도 한 발 쏘고 꺼질즈음 또 한 발 올리며 그렇게 3소대 상황이 종료되었나 싶은지 두어시간 쯤 지났을까? 우리 매복지 뒷쪽에서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나 숲을 밟고 지나는 무게감이 분명 사람의 무게감이었다. 짐승이라면 저렇게 조심스럽게 밟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적의 일부 또는 첨병일 것이라 생각했다.
조명탄이 꺼질즘 어둑해지려면 두세 발자국 소리가 나고 조명탄이 다시 터지면 조용한 것을 봐서라도 분명 사람의 발자국 소리였다. 우리들은 기겁을 하여 뒷쪽을 경계하며 아무리 살펴도 잔 나무, 잔 수풀들이 우거진 정글속이라 앞을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조명지뢰나 크레모아를 설치한 앞쪽이 아니고 뒷쪽인지 영 불안하고 미칠지경이다.
나는 중대에 상황보고를 하고 옆조에게 신호를 보내려는데 연결줄을 당겨도 당겨지지도 않고 응답이 없다. 자는것은 분명 아닐텐데 4~5m거리에 있는 옆조에게 연락할 수단이 없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발자국 소리에 온 신경을 쓰며 주시하고 있는데 우리조원 한 명이 옆으로 누웠다 뒤로누웠다 하는 바람에 바닥에 깐 판조우의가 나무잎들과 마찰을 일으키며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한사람의 잘못으로 우리가 노출이 되면 전 분대원들이 그야말로 그들의 밥이 될 지경인데 판초우의의 마찰소리는 왜 그리 크게 들리는지...
이 모습이 한국군 장기작전 군장과 모습이 동일하다.
그날 나는 머리가 선다는 것을 처음으로 체험한 날이다. 일생에 그렇게 공포에 떨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무서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던 나인데 심약한 사람이라면 오줌도 지릴 판국이였으니 그 분대원의 마음은 어떠하였겠는가.
하지만 연속되는 몸부림을 막으려 그의 머리를 쥐어박기도 해 보았으나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부시럭 대기는 마찬가지였다. 발자국 소리는 우리들 가까히 까지 왔는데 말이다.
나는 결심을 했다. 수류탄을 던지기로... 그러나 한 밤중에 정글에서 수류탄을 던지기란 그리 쉽지 않은 노릇이다.
잘못하면 나뭇가지에 걸려 우리조나 옆조로 튕겨 올 소지가 충분했기에 나는 조원들에게 수류탄을 던질 것이니 마대에 몸을 숨기고 업드려 있으라고 알려 주었으나 옆조들에게는 알릴 방법이 없어 잠시 궁리를 하며 밝게 빛난 조명탄의 불빛에 주위의 수류탄 투척 장소를 물색하였다.
어린시절 야구하던 실력으로 대략 소리나는 지점을 가늠하고 나뭇가지가 적은 공간을 보며 하늘을 향해 던지고 나서 옆조에게 알리는 방법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수류탄 던졌다. 수류탄 터지는 쪽으로 마대에 엄폐하고 무차별 사격하라!!!
나는 소리쳐서 그들에게 노출되겠지만 그들은 한국말을 모를것이고 이 방법이 흩어져 있는 분대원들에게 알리고 보호하는 가장 적당한 방법이라 생각해낸 결과였다.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콩복듯 쏴데는 M16 소리가 작난이 아니였다. 큰 작전을 나가서도 이런 상황은 없었다.
그리 3발을 더 던졌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수류탄에 맞은 것인가? 하는 궁금증과 불안한 마음으로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날이 점차 밝아지며 새벽이 찾아왔다.
숨을 죽이고 있던 우리에게 주변 수색을 철저히 하고 3소대 지역으로 가서 합류하여 귀대하라는 중대장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아마도 불안한 우리 분대에 대한 염려로 3소대에 가서 힘이 되어주라는 의중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큰 소리를 내며 옆조에게 알렸다.
"철수다. 내가 길로 나갈테니 크레모아 선을 빼라 주위를 잘 살피며 모든 장비 거둬들이고 모여!."
하고 유리 조원 한명을 데리고 밤새 소리나던 발자국 소리 지점을 찾아보았는데, 아뿔사! 뒤에도 길이 나 있는 것이아닌가. 만약 그들이 우리를 발견하였거나 우리들의 낌새를 눈치챘더라면 그날 우리는 이렇게 서있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연결줄은 설치시 정글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대충 줄을 끌어다 서로의 발목 또는 팔목에 연결하다보니 잔 나무 가지들에 얽히고 설켜 무용지물이 되여 있었다.
천천하면서도 재빠르게 그리고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그들의 흔적이나 짐승들 흔적도 찾지 못하고 그 지역을 빨리 벗어나고파 분대원들을 재촉하여 3소대 지역으로 가려하니 가까운 길을 놔두고 3소대지역으로 간다며 분대원들의 불만이 가득하다.
나 또한 밤새 쪼그리고 앉아 나뭇가지 밟는 발걸음과 싸우느라 한 걸음이 천근인데 이들을 나무랄수 없고 중대장이 원망스러웠다, 바로 귀대하면 좋을텐데...
그렇게 고구마능선을 돌아 3소대 지역에 도달하니 3소대원들이 땅을 파는 작업이 한창이였다.
나는 의아해서 한 3소대원에게 "철수준비를 하지 않고 무슨 작업들이냐" 물었더니 소대장 쪽 눈치를 살피며 볼멘소리를 하는 데 하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혀버렸다.
매복자리를 다시 만드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전날 논 쪽에서 산 밑에 난길을 향해 논바닥에서 일자매복을 섰는데 매복지 뒷편 마을쪽에서 나타난 VC를 소대장과 함께있던 무전병이 뒤늦게 발견하게 되었고 무전기에 기댄채 총이 조금 떨어져 있던 상황이라 총을 들고 있던 소대장에게 신호를 보냈는데 당황한 소대장이 다급하게 단발로 지향사격을 하였고 이에 놀란 VC가 반사적으로 연발로 쏘아대는 바람에 옆조에서 당황해서 일어나 두리번 거리던 신병이 앞쪽으로 한 발 뒷 쪽으로 한발을 맞았고 VC는 도망을 쳤다는 것이었다.
감사가 나온다 하여 감사를 대비해 매복위치를 원형매복처럼 다시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기가막히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사진은 월맹군 세이퍼들
그 때는 건기철이라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나무 한 그루 없는 음페 엄폐물이 없는 논이라는 개활지에서 원형도 아닌 일자매복을 섰다하니 이건 영창을 가서 수십년을 살아도 시원치 않을 장교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는 인간이였다.
일반하사인 내가 보아도 그 자린 매복 위치도 아니였고 오히려 산쪽에서 길과 마을과 논쪽의 개활지를 바라보게 매복지점을 설정했어야 할 장소였다. 굳이 그 자리라면 당연히 원형매복이 되었어야 하는 매복의 기본 수칙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 소대원이 총상을 입고 후송을 간 마당에 저만 살겟다고 밤새 공포에 시달리던 소대원들을 들들 볶아 위장 매복 설치와 허위보고를 할 것을 생각하니 가득이나 미워하던 인물이 더욱 미워지기 시작했다.
미운것은 미운놈이고 3소대 전우들을 생각해서 작업을 마져 도와주고 3소대와 함께 귀대하니 중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후송같다던 그 신참은 헬기안에서 먼 나라 전쟁없는 나라로 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월남에 1년간 근무하는 동안 유일한 전사자가 그 동국댄가 단국댄가 다녔다던 잘 생겼던 3소대 신참 한 명 뿐이다.
나는 그 일들이 아마 죽는 날 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9월인가 다친 허리때문에 작전에서 열외받아 기지에 남게 되었는데 남은 인원들이 무었을 어떻게 하며 지내는지 몰라 본부나 잔류병력들의 일상을 채크하던 중 김치를 담가야 한다는 이야기에 여자라곤 눈을 앃고 찾아봐도 없고 청년들만 모여있는 병영에서 무슨 김치를 어떻게 담그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소대원 2명이 차출되고 본부요원 1명이 물차를 타고 반닌읍에 나가더니 우리나라 배추가 없어 양배추, 무, 파, 고춧가루 등 김치거리를 사왔는데 양배추로 어떻게 김치를 담그냐 물으며 지켜보았더니 양배추을 잘개썰고 무를 잘개 썰어 탄피통에 나누어 소금을 뿌리더니 닫아두는 것이다.
빨리 담지않고 다른 일들을 하기에 물어보니 배추의숨이 죽어야 한다나...
그렇게 1시간여 지나더니 양념에 무쳐대며 맛을 보라며 하나 집어주는데 그야말로 죽여주는 김치가 된 것이었다. 고국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양배추 겉저리가 되었는데 K레이션의 물컹물컹한 누린듯한 김치만 먹다가 시원하고 깔끔한 김치맛에 모여든 소대원들이 맨입으로 여러점들을 집어먹다보니 귀대할 전우들에게 돌아갈 양이 모자라 다음날 더 구입하여 다시 담기도 하였다.
그런데 탄피통에 담궈둔 김치가 다음날 열어보니 탄피통의 국방색 페인트가 우굴우굴 불어 들고 일어나고 요즘같아서는 납중독으로 누가 먹으래도 먹지않을 음식이지만 맛은 끝내주었다. 언제 어디서 김치담그는법을 배웠는지 알수는 없었으나 군대란 무었이던 만들어내는 곳이 아니던가.
더운 기후때문에 3일이 지나면 김치는 식초가 되어있다. 어쨌던 페인트가 녹아내려 납중독이되던 말던 죽기로 작정을 한 전장속의 군인들이 내일의 뒷탈은 아랑곳 없이 맛있게 먹었던 상큼한 김치맛은 아직도 입가에 침을 흘리게 한다.
군에선 계급이나 나이, 학벌을 떠나 고참을 무시하면 큰코를 다친다. 이것은 나의 군생활속에서 터득한 철학이었다. 특히 월남같은 전장(戰場)에선 더욱 그렇다.
그 예를 들어 월남 초기 어느 작전에서 작전 전개중 대정글에서 서너명씩 옹기종기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뭔가가 바람개비 날아가는 소리같이 "슈룩슈룩슈룩" 소리가 나더니 "퍽" 하는 소리에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일어나려니 옆에있던 분대원이 "B40"이닷 하며 일어서려는 나를 낚아채듯 쓰려트려 넘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전 까지 옹기종기 모여있던 중대원들이 보이질 않는것이다. 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보려 일어서려는데 다시 "슈룩슈룩슈룩 퍽" 소리와 함께 다시 나를 낚아채는 바람에 또 쓰러졌다.
쓰러져서 주위를 살펴보니 어느 사람은 조막만한 둘을 들고 엎어드려 있고 어느 사람은 빗물에 파인 고랑같지도 않은 고랑에 엎어져 모두가 겁에 질린것 처럼 숨어있길래 나는 속으로 얘들 장난하는거 같아 웃음이 나올거 같았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흐르자 주섬주섬 장비들을 챙기며 자리를 떠야 한다며 진군이란다.
작전을 마치고 휴식 중 고국에서 중대본부 이발병으로 근무하던 성구용. 일명 용산깡패를 만나 반가움에 한컽.
성구용은 나이가 27~9세로 많았으며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서울서 우연히 만남...
작전을 마친 후에 누더기가 된 첨병복장과 뒤 따르던 병사의 복장부터가 다르다.
나는 영문을 몰라 어라둥절 해 있는데 우리 분대원이 가르키는 3~4m 정도 쪽을 보니 로켓포 같은 물건이 땅에 60도 가량 기우려져 몸통 뒷부분과 꼬리날개가 보이며 밖혀 있었다. 그렇게 옆에 또 한발 두발이 보였는데 나는 그게 왜? 그게 뭔데? 하니 불발된 B40이란다.
B40은 사거리가 100m이내라는 것을 교육을 통해 알고 있었다. 첫발이 불발이면 도망을 가는데 2발이 불발이니 분명 이 근방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거나 그들도 도망을 쳐 다음 작전으로 들어 갔으니 빨리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것이 "퍽"이 아닌 "쾅"이었다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거다.
그런데도 그것은 옛날에 뭍혔있던 물건으로만 여겨졌지 실제 상황으로 여겨지질 않았었다.
그렇게 고참들은 경험으로 유사시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고 은폐, 엄폐물을 찾아 상황을 주시하는데 반해 신참들은 그것을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벌떡 일어나 두리번 거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참들의 피해가 많은 것이고 3소대 신참도 총소리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두리번 거리다 운없게 베트콩이 난사한 두발을 맞은 것이다.
이렇게 고참들의 경험들은 무시못할 소중한 것들이기에 고참에 대한 의식을 존중하고 중요시 해야 한다.
우리 중대의 또다른 어느 큰 작전 중 불안에 떨며 지세웠던 어느 날 밤, 옆중대가 포위를 당햇다는 것이다. 2개 소대가 당햇다며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그 작전에서 우리 중대는 매복지점에서 우리 포대에서 지원해 주는, 포 VC들이 쏘는 포들이 우리위를 지날 때 "슝~~~쾅"이였다. 우리 지역 근방으로 떨어지는 소리는 "슈룩~ 슈룩~ 쾅'이였고 우리 앞쪽에 떨아지는 소리는 "대포소리와 앞 지역에서 쾅 소리와 함께 화염이 인다." 이렇게 각종 포소리들을 감상?해야 했던 일은 잊을 수 없는 악몽 그 자체였다.
어느 포병 출신이 보병작전에는 항상 관측 장교가 따라 다녔다는데 그것은 대대 본부나 연대본부 GOP에 배속되어 따라 다녔지 말단 소총중대에는 분대장, 소대장 또는 중대장이 좌표를 불러주고 포 지원을 받아야 함은 교육 지침에도 나와있고 중대까지 와서 지원하는 관측 장교는 한번도 보도 둗도 못했다.
전장의 형태나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소총 소대나 중대에 지원군이 따라 붙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 말은 소총중대 지휘자들을 욕되게 하고 무시하는 망언이다. 내가 참전했던 작전에선 그러헸다.
그동안 4중대는 어느 큰 작전에서 7부능선쯤 초원에서 3명의 VC들이 식량인듯한 자루들을 어깨에 걸머지고 가는 것을 7.5부능선에서 발견한 우리들의 집중사격끝에 누구 총에 맏았는지도 모를 2명사살 1명 도주, 우리들 총에 수없이 맞아 찌그러지고 망가진 권총 1정 노획의 전과가 있었고.
어는 작전 철수 전 날 랜딩지점 수색중 VC3명 도주와 바위 틈 동굴 속에서 울고 있던 갖난 아기와 아기엄마 체포, 그리고 어느 날 내 앞 4~5m에서 B40 두발 불발 등이 있었고...
첨병조에서 움막을 발견하여 소총 2정을 노획하는 전과가 있었는데 당시 이 건으로 나를 훈장상신하였다 들었는데 나중에 사령부의 착오?라며 이세호 주월군 사령관 표창으로 대신받은 것이 내가 받은 유일한 전공이고 내가 참전했던 우리 중대의 실전 상황들이다.
그런데 얼마 전 월남전 파월한국군전사기록들을 보니...
4중대는 6월 27일 Ea Thour 천 서쪽 592고지 주변을 탐색 중 11시 45분에 제2소대가 이 고지 서쪽 500m 지점에서 강유원 상병이 나무가지와 줄기로 교묘히 위장된 움막을 발견하고 이어 제2분대장 박치국 하사가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를 발견하였다. 소대장 황석영 중위는 적이 아군의 도착 직전에 도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정밀수색을 하던 중 약 20여m 전방에서 도주하는 적 약 1개분대를 발견하였다. 소대장은 곧 M79 유탄발사격을 포함한 소대의 전 화력을 집중시켜 4명을 사살하고 AK소총 1정, 장총 2정을 노획하였다.
6월 29일 중대장 김장근 대위는 다음날 재보급에 대비하여 소대별 탐색을 중단하고 각 소대를 재보급 지점으로 집결시켰다. 등의 기록들이 있는데...
이 기록들은 마치 소설 한편을 보는 것 같다. 한국군 정글 작전에선 작전 병력이라야 소대가 고작 20여 명으로서 중대 전체 약 100여 명 정도의 작전 병력들로서 중대 전체가 첨병, 부첨병, 첨병 분대장, 무전병, 소대장 등 다음이 중대본부, 다음 소대, 다음 소대 등 일렬 종대의 순서를 유지하며 첨병조를 선두로 뱀꼬리 밟기식의 일렬 종대 작전이었기 때문에 소대별 탐색이란 있을 수도 없을뿐 아니라 있지도 않았었다.
또한 그날의 작전상황은 고영덕 첨병, 강유원 부첨병, 박치국 첨병분대장이 작전 진군 중 낮은 능선위에 2평 정도의 정글의 풀이나 목재료들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아주 작은 움막을 발견하여 소대장에게 보고를 한 다음 나뭇가지를 줄에 연결하여 입구의 부비츄랩 유무를 확인하고 사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던 컴컴한 움막속을 뒤지다가 너무 오래되어 녹이쓸고 달라붙어 노리쇠조차 작동이 안되는 구구식 장총 2정을 발견하였을 뿐 다른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담배꽁초는 보지도 냄새도 맞지 못했었다.
2차대전 때 또는 프랑스 군 점령시절 섰을 것 같은 그 구구식 장총 2정을 취득 후 더 진군하다 휴식시간에 중대는 약간의 작전 상황을 연출하였고 우리 첨병조는 냇가에서 녹이 쓸어 전혀 작동을 할 수 없는 총을 진흙을 풀에 묻혀 닦고 치고 흔들며 수입 하여 겨우 작동할 수 있게 하여 탄알도 없는 구구식 총을 노획물로 올렸을 뿐이었다.
"박쥐26호작전, 제 4중대는 움막쪽으로 도망오는 적을 제3소대 첨병분대장 김재도 하사가 단숨에 2명을사살하여다. 이어 제2소대 1분데장 조남희 하사가 적을 발견 고영덕 상병과 포위하여 적 3명 사살 소총 2정을 노획.
나는 이 자료를 보고 중대 행정병들의 허위 작성한 내력들을 확인 할 수 있었고 내가 얼마나 행정병들에게 잘못보였나를 가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의 의지와는 달리 내가 본부로 발령나려는 것을 얼마나 방해하였는지 설명 되는 내용들이며 일부 장기하사 및 소총수들의 주머니를 털어 제 주머니로 몰아간 결과이기도 하다.
당시 전상이던 전공이던 휴가던 모든 행정이 돈으로 해결되던 시절이였으나 나는 명예도 돈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 공들이 장기하사관들에게 돌아가 그들의 긴나긴 군 생황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파월한국군 전사야 말로 다시는 이런 국가를 파괴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자료로 삼아야 할 역사적 사료인 것이다.
장기하사관들은 전공과 진급을 얻어야 하는 입장이여서 작전 나가기 몇 일 전 부터 AK소총을 어떻게 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50불이면 언제고 구입할 수 있다며 사들고 작전에 임해 잠시 연출을 하여 전공을 올리던 시절이였다.
사회생활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래도 훈장이나 하나 받았으면 하는 속 마음은 있었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훈장은 커녕 고국휴가? 작전 후 간다는 휴양지 한 번, 반닌 읍내 구경도 못했으니 요령부족이라 한다면 이해하겟으나 행정반에 미운털이 많이 박혀 있었던 것이 사실임을 알수 있는 것이다.
나는 수용연대 시절부터 각 부대를 옮길때 마다 인사담당들의 주요 표적이 되었던 것은 기록카드상으로 당시로선 높은 학력과 특A라는 커다란 붉은 도장 덕이란 걸 잘 안다.
만약 내게 금전적 여유라던가 주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군생활도 편했을 것도 나의 인생의 향로도 활짝 열렸을 것이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러한 조건들이 없었기에 오히려 의타심없이 꿋꿋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이 되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기록으로 인해 피해를 보리라곤 생각지도 않았었다.
자존심만 강하고 고지식했던 나는 짜옹(정확한 뜻은 모르나 뇌물을 당시 우리들은 이렇게 불렀었다.)도 안하던 내가 9,10월 경 큰 작전 중에 꼬리뼈를 다쳐 후송을 보내 달라고 해도, 조기 귀국을 시켜달래도 대기자가 많아 기다리라는 등 갖은 변명들로 미뤄왔고 제대말련 꾀병이라는 소문까지 들으며 몇날 몇일을 고민하다 몸고생 마음고생을 하면서 누구를 대상으로 폭팔시킬 수도 마음을 달랠길도 없었고 모든 중대원들도 미웠고 그땐 정말 죽고싶은 마음뿐이었다.
11월 경인가 분대원들이 도로경계 나갔다가 사다 준 고량주 한수통을 마시고 오밤중에 총을 난사하며 사단장 만나러 가겠다며 물차 운전병을 찾아 다니던 기억을 그 사건으로 피해를 본 당사자(나 때문에 피해자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 그에게는 내가 죽는 날까지 마음의 빛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가 나타나 퍼즐 조각 맞추듯 찾다보니 여기까지 찾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에 나라에까지 와서 총을들고 적들과 싸웠던 이유는 훈장을 받고 명예를 얻고 상을 받고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내 한몸바쳐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위함이었지 남의 희생을 담보로 나의 욕심을 채우는데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나라에 충성하고 명에 따르며 내 분대원들 나아가 우리 전우들에게 도움이 되는 군인이 되려 임무에 충실하는것 뿐이었다.
이렇게 전우들을 위해 서로 꺼리는 첨병을 자처하여 살신성인의 정신을 보였는데 행정병들의 파렴치한 행위들을 확인하고 보니 그들이 가련한 생각도 들지만 결국엔 아픈 허리를 사회생활에 지장 받을까봐 숨기며 병원 한번 가보지도 못하고 오리궁뎅이가 되여 아픔의 고통속에 괴로워했던 나날들을 생각하니 그들의 행위가 괘심하기 짝이 없이 미워진다. 그들이 지금도 그때 소총수들에게서 긁어 모은 돈으로 끝발날리며 잘 살고 있는지 자식들 교육은 잘 시켜는지도 궁금하다.
말단 소총중대에 2년 이나 연장근무하며 중대원들 호주머니를 털어 제 주머니로 긁어 모았던 까만 피부에 깡마르고 턱이 뾰족히 나오고 앞니가 튀어나온 부산의 45년생 노00을 비롯하여...몹쓸 놈들.... 나쁜 놈들...
당시 나는 썩을대로 썩은 한국군대 그 속에서 생활하고 지켜봤다.
미군 한 감찰관이 한국군은 하루에 속옷을 200벌씩 갈아 입을 정도로 청결하냐는 죠크는 유명하였던 이야기다.
우리 분대원들 중 도로경계나가면 C레이션을 사먹던 분대원들이 있었다. 보급품을 트레일러채 해 먹는다는 등 각 계층으로 부터 다 뜯기고 말단 소총수들에게 돌아 오는 것은 보급품 부족이란다, 총을 들고 적과 마주 싸우는 우리 소총병들이 불상하고 안타까울때가 많았으나 힘없는 말단 분대장이 어쪄랴 같이 울분을 삭힐 수 밖에...
9, 10월? 경 어느 날 각 분대 막사에 SP Box가 분배되어 전 중대원들의 눈이 튀어 나온 일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새로 부임한 중대장(전관 대위, 월남생활 중 전관 중대장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음)이 각 병사들의 몫을 원칙대로 내 준 것이다.
볼펜이나 노트 담배 등 부질없는 물품을 낯개로 몇개씩만 받아보았을뿐 말로만 듯던 SP Box는 약 50cm×50cm×50cm정도의 육면체 크기로 기억되는데 처음보는 Box였다. 그 안에는 카메라, 달러시계, 담배, 볼펜, 등 등 먹는 것을 제외한 누구나 탐낼 미국제 물건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분대원들의 눈들이 휘둥그레지고 서로 좋은 물건을 챙기려 다툼이 벌어지기도 해 나는 어느 고참을 지정해 알아서 나누어 갖도록 배려를 하고 뒤로 빠진 일들은 그동안 중대에서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빼돌렸는지 짐작이 가는 일이였다.
그리고 그 중대장이 나의 소동으로 사정을 알게 되었고 바로 조기귀국 시켜준 나에겐 감사한 분이 였다는 것을, 또한 나 뿐이 아니라 전 중대원들의 모든 문제를 알뜰히 보살펴준 분이란 것도 당시 서무를 보던 경산의 전우를 만나게 되어 그 전우의 아픔과 함께 내가 몰랐던 이야기도 들으며, 전사기록들을 보며 38년간을 속아 살아왔다는 것들을 알게 되었고 이에 울분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혼바산의 청룡바위
1대대 지역 봉로만
1대대 지역 봉로만
1대대 지역 봉로만
1대대 지역 봉로만
소총병들은 각 분대별로 막사에서 각기 다른 성품을 지닌 젊음들이 생활하며 옆분대와도 환경이 다르고 옆 소대는 물론, 작전에 임하는 분위기도 중대장, 소대장의 인품에 따라 각기 다르고 특히 본인들의 기준에 따라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 판이한데
책상머리에 앉아 잔머리 굴리며 적과 싸움도 해 보지 못하고 꽁가이에, 휴양지에 유람다니듯 관광이나 다니듯 하던 참전자가 제 자신만의 참전 경험이 기준인양, 스텐다드인양 총알받이들의 꾸밈없는 글에 대해 나무라는 꼴에...
이권단체 만들어 잇속이나 챙기려 비리들을 저지르는 무리들을 보고 들을때...
참전자들을 홀대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에서 위정자들의 앞잡이가 되어 환갑,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반성은 커녕 제 명령에 목숨을 바쳤던 제 부하들의 공적을 조작하고 도적질 하고 총알받이들의 명예는 아랑곳 없이 제자신의 영달만을 쫒는 놈들을 볼때...
그들의 명성을 팔고 그들의 보호를 받고 쬐그만한 이익을 추구하려 제 전우들에 이 나라 심장에 대못을 박아대는 군상들을 볼때...
지들의 잘못을 숨기고 합리화하기 위해 지난 날들의 부끄러움을 자기얼굴에 침뱃기라며 들추지 못하게 하는 무리들을 볼때...
나는 지난 날들의 젊은 피가 다시 끓어 오른다.
전에 어느 직장 에서 후배가 내가 어떤 모략에 빠졌었던지... 나를 찾아와...
"박선배, 박선배 말은 다 맞아... 그리고 다 옳아....그런데... 그런데...
아~ 시발... 하여간 박선배는 돈키호테야...."
ㅎㅎㅎㅎ 나도 잘 알고 있네....ㅎㅎ 시봉.
글을 마치며...
내가 왜 이런 글을 쓰냐면 이런 행태들이 아직까지 이 나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있었던 그대로의 글이다. 이 글은 어떤 대상을 모략하고 그들을 쓰러트리려 함이 아니다.
이 글을 쓰면서 일부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다 늙어 일가를 이루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혹여 누가 미치지 아니할가 하는 마음에서다.
이글은 하늘에 맹세코 거짓이 없으며 허위 날조 투성이인 파월전사기록 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내가 직장생활에서 많이 느낀점은 열심히 일 잘하는 사람들을 질시하고 문제를 야기시키는 사람들 대부분이 실력이 모자라는 사람, 정통성을 인정받기 힘든사람들이 아부와 언변으로 상대를 격하시키고 문제를 야기시켜 실력있는 사람들을 몰아내는 꼴들을 보곤했다.
그런데 이 꼴들을 정리하고 해결하여 공정한 조직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배를 채우려 위상을 높이려 공정치 못한 행태들로 사회를 바르지 않은쪽으로 가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이다.
권투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여 우승을 하였는데, 감독은 물론, 코치, 통신담당, 행정담당, 의료, 팀의 주요 담당들은 금메달을 목에걸고 정작 피터지게 싸웠던 선수는 외면당했다면 그 사회가 공정한 사회인가?
올림픽에 출전한 팀이 선수는 홀대하고 팀의 주요 간부 및 지원팀원들만 강력한 행정력으로 혜택을 받는 꼴이 대한민국 6.25전쟁 참전자분들이나 월남전쟁 참전자용사들을 관리하는 현실이다.
전쟁터란 사람을 죽이는 살육의 현장이다. 사람을 향해 총탄을 퍼부어도 죄의식이란 느껴보지도 못했다. 적을 향해 총을 쏘는 행위는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추는 일이지 사람을 죽인다는 등의 죄의식따위는 느끼질 못했다. 다만 내가 적의 총탄에 맞아 죽는다면 적의 전과를 올려주어 적의 사기를 올려주는 결과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전쟁터에서의 죽음은 패배자이다.
그러나 이 나라 대한민국은 형식을 갖춰 전사한 장병들은 숭고하고 애국적인 영웅들이며 살아 돌아 온 승리자들은 훈장이던 표창이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깡통들에 불과하며 못난 위인들이나 골치아픈 정도의 파렴치한이나 살인마들로 매도된다.
대한민국은 그것이 미안한지 아무런 혜택도 주지않는 무늬만 유공자라며 참전자들 즉 진정한 영웅들과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진정한 영웅들을 홀대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다.
좋은 집안 또는 명석한 두뇌로 좋은 보직 편한 행정직을 맏아 적들과 마주치지 않고 월남전장을 유람다니듯 공판치고 꽁까이 찾아 다니고 잇속만 챙기며 지휘관의 눈에 들으려 전과를 조작하고 보급품을 빼돌리며 말단 전투병들의 몫을, 말단 전투병들을 저희들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던 행정병, 특히 막강 세력들에 아부하며 충성을 바치고 있는 무리들이 참전단체를 만들어 수익사업 등 단체의 영리와 지휘부의 배만 불리지 전 참전자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또한 모든 참전자들을 위하고 이 나라의 틀을 바르게 만들어가는데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다....
죽엄이라는 막장앞에 총을 들고 돌진해야 하는 전투병들의 극한 상황을 가늠 하지도 못할 위인들이, 전쟁후유증이라는 트라우마가 무었이고 어떤 것인지도 알리도 없는 그들이 사회에나와 환갑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득권자들의 그늘에서 참전단체를 만들어 한자리 꿰어차고 전투병들이 받아야 할 대우마저 가로채 호위호식하며 저희들이 참전용사라며 위정자들의 놀이개가 되어 진정한 참전용사인 전투병들이 받아야 할 권리마져 박탈하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이기적인 삶들로 부정과 부패로 가득찼던 6~70년대 월남파병용사들의 행정직이나 상급 고급부대원들이나 지휘관들의 부정축재를 돕고 그들의 보호속에 호위호식했던 그들이 환갑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버릇 그대로 그 사회 그대로를 답습하며 살아가는 꼴들을 볼때 왜 대한민국이 정의롭고 화목한 국가가 아닌 혼란과 혼돈의 세상속을 헤메고 있는 주요 원인이라는 것을 알려야 하고 뉘우치게 하고 하루 빨리 고쳐야 한다.
이런 일들이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실력이 모라라고 인정받지 못할 위치의 사람들이 저를 지켜주고 저희 가족을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바쳐 전쟁터에 나갔던 저의 이웃을, 저의 친척들을 용병이라 몰아세우며 살인마라 몰아세우며 대한민국을 파멸시켜 자신의 이득을 보려는 이기주위, 기회주의만이 가득한 자들에 먹잇감이 되어간다는 것쯤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뉘우치지도 않고 자신들만을 합리화시키며 잇속챙기기에 혈안이고 나아가 그 욕심의 끝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눈이 뒤집혀 정글을 누비던 꿈을 꾸다 벌떡 일어나 않아 눈물을 흘려야 하고 내 가족의 생사를 몰라 몸부림치시던 부모님 생각에 벌떡 일어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온통 불의와 부정과 부패만이 난립하는 현실이 안타까와 또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0년 초 모 방송의 지원을 받아 촬영차 전적지 여행을 하던 어느 포병출신 전우가 정글수색도 다녀보지도 못한듯 영상에나와 제 경험담인듯 그 거머리는 살에 붙어 떼어내면 잘 떨어지지도 않고 떼어내면 잇빨(?)이 밖혀있어 고통을 당한다는 거짓말을 하며 허세를 부리는 것을 보며 실소를 했는데 거머리가 잇빨이 있다는 상식밖의 무식함도 역겨운 일이지만 그런 거짓말들로 전체참전자들을 대변하는듯 아부와 허구로 제욕심만 챙기려는 목불인견의 전우들이 있어 가슴아프다.
그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부정과 비리의 온상을 키워 온 비리의 원조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당시 참전용사들이 귀국을 하면 때부자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국민들로부터 눈총을 받아 온 원인이기도 하며 용병이니 심지어 학살자라는 누명을 씌우며 날뛰는 친북주의자들의 먹잇감이 되기도한 원인이기도, 국가에서 홀대받는 원인이기도 한 것이 현실이다.
죽엄을 무릅쓰고 눈이 뒤집혀 적을 향해 총을 들고 돌진해 보았는가? 그것이 진정 전투병이고 그래서 모든 나라들은 그 노고를 외면하지 않고 있는데 오직 대한민국만이 당신들 때문에 그 노고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일세.
이 글을 보는 참전자들은 수치스럽고 부정적인 면을 그려 참전자 얼굴에 먹칠한다는 시각으로 보지 말고 이 글을 통해 자신들의 뒤를 한 번 돌아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는 오늘날 까지 살아오며 많은 아픔 많은 상처 많은 배신도 받아보았다. 그러나 또한 사랑과 배려로 많은 도움도 받아보았다. 하지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지금의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한 짧은 수단일뿐 그들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한국사람들이란걸 잘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정이 많고 의협심이 강하고 세계에서 제일 좋은 두뇌를 이어 받은 민족이란걸 살아오며 느끼고 또 느꼈다.
1990년경 수원 기흥연수원에서 직장 각 부서들을 서로 섞어 10여명씩 조를 짜 분임토의를 할때 토의가 자신들의 부서 문제점 및 이해사항등으로 지루해지자 내가 나서서 현실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앞으로의 5년 10년 뒤 우리직장의 환경변화를 예상해 보고 세계적 흐름등을 논의해 보자는 제안에 한 조원이 선배님은 앞으로의 흐름을 어떻게 보는지 먼저 제시해 달라는 말에 나는 현재의 세상이 온라인 세상으로 바뀌어 나가는 것에 각자가 적응해야 할 것과 그 후 한민족이 지구상에 주축이 되리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한민족이 지구상의 주축이라는 말에 눈들이 휘둥그헤지면서 그 예를 들어보라했다. 이에 우리나라 현실이 선진국에 비해 관료주의적 사고와 많은 규제, 제약, 견제들이 걷혀지면 세계 일류국가 못지않는 수 많은 인재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 날 것이고 그 예로 국내에서 보다 외국으로 나가 많은 업적들을 일구워 낸 우리 민족들 중 유리시스템즈의 김사장 등을 열거하였고 사심에 연연하지도 않고 잘 하는 사람들을 인정할 줄 알고 무조건 내 밑으로 깔아 뭉개려는 심뽀나 이기심을 내세우지 않고 어머니 같이 자식사랑으로 자신의 생을 다하시는 뚝심있는 여성들이 대한민국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도 해 조원들에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었다.
나는 그 쓰라린 상처들을 간직하고 살아 오며 즐거움과 고마움을 항상 먼저 생각했고 그 마음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사회나 직장에서 힘들게 하는 것은 동료들이었고 주위 사람들이었다. 일만 하자면 나도 남들에 뒤질 것이 없었고 아마도 세계적인 인물이 될 수도 항상 즐거움으로 생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견제 심술 심통들이 나를 힘들게 했고 삶에 많은 장애가 되어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착하고 머리좋고 훌륭한 민족을 이토록 힘들게 살아가게 하는 주 원인은 그 좋은 머리로 뜨지도 못할 조그마한 간장 종지로 물을 길어 항아리를 채우겠다는 욕심과 야망에 시로잡혀있는 지도자들 때문이라 생각한다. 언제고 큰 그릇의 지도자가 나타날때 그때는 이 나라가 세상의 축이 될 것이란걸 나는 잘 알고있다.
우리 모두 지난 일들을 곱씹어보고 반성할 건 반성하여 이 나라에 이 세상에 우리 후손들에겐 더 좋은 세상, 마음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억들로 채울 수있는 그런 세상. 사싱누각같은 이 나라를 화강암 보다 더 단단한 반석위에 올려 질 수있는 응고제가 서로 되여 튼튼하고 살기좋은 대한민국으로 만들어 주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 끝 -
불숙 불숙, 옛기억들이 떠 오를때면 오탈자를 바로잡으며 내용을 첨부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전우님이 참된 전우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