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승조전(僧肇傳)』
1.승조가 되다
장조(張肇)는 위진남북조시대(220~589) 후진(後秦)의 징자오(京兆)에서 태어났다. 징자오는 장안(長安)의 옛 이름이며, 현재는 시안(西安)으로 부르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도(古都)다.
장조는 약관 20세가 되기 전에 출가하였고, 이후 승조(僧肇)로 불리게 된다. 장조가 승조로 바뀐 것은 스님들이 출가하면 속가(俗家)의 성을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라는 의미에서 석가모니의 석(釋) 자를 따다 사용하거나, 더 소박하게는 스님이 되었다는 뜻에서 승(僧) 누구라고 하는 승가(僧家)의 관례를 따랐기 때문이다.
요즈음도 우리나라에서 출가자들이 속성(俗性)을 버리고 이런 식으로 법명을 정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작명은 소위 '가(家)' 사상, 즉 문중을 중시하는 중국 전통문화 풍습을 반영한 것이다. 석조 또는 승조식 작명에서 석이나 승은 석 씨 문중 사람, 승가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 속에는 부처님의 제자라는 점을 강조한 면이 있다. 중국의 가문화(家文化)는 단순히 혈족 범위를 넘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가에서 보듯, 학파도 가로 인식하였다. 이 경우 가는, 종교비밀결사에 준하는 지식비밀결사의 성격을 띠게 되며, 각종 의무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지식을 배우는 무리에 소속돼 있다는 것을 천명한다. 일견 소박한 것 같으나 스님들이 차용(借用)한 ‘석’이나 ‘승’에도 중국식 전통문화의 수용이라는 점과 종교비밀결사 또는 지식비밀을 공유한 단체에 속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가 들어있다. 승조(僧肇)는 우리나라 말로 하면 조스님이 된다. 즉 속인이었을 때는 장조였고, 출가한 후에는 승조가 된 것이었다.
장조의 탄생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 이유는 『고승전』에 소개된 「승조전(僧肇傳)」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모순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승조전」 끝부분에 승조가 진(晉)의 의희(義熙) 10년, 414년에 31세의 나이로 천화(遷化)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역추산하면 출생연도가 384년이 된다. 그러나 「승조전」 서두에서는 약관의 20세에 명성을 날리다가 고창(高藏)에 구마라습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며, 401년에 구마라습과 함께 징자오로 돌아왔다고 적혀 있다. 이에 따라 계산하면 그 탄생 연대가 384년 이전이어야 한다. 같은 책에서 저자는 이런 모순을 바로잡지 못하는 오류를 범해 놓았다. 『고승전』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梁: 502-557) 때 승려 혜교(慧皎: 497-554)가 저술한 책이다. 기원후 67년(후한 명제 양평(10년)부터 기원후 518년(양나라 천감 18년)까지 활동했던 257명의 고승에 대한 전기와 200여 고승들의 사적(事跡)이 기록되어 있는데, 출판 연도는 519년이다. 승조는 414년에 열반했으니 사후 백 년이 넘게 경과한 시점에서 전기가 쓰여진 셈이다. 이때 이미 생몰(生歿) 연대에 대한 기록을 정확하게 찾을 수 없는 애로사항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작가가 범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한 것이었다. 덕분에 후세인들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일본의 불교학자 츠카모토젠류(塚本善隆)는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승전』의 승조가 멸한 나이인 31세는 41세를 오사(誤寫)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면서 승조의 탄생 연대를 전진(前秦)의 건원(建元) 10년, 즉 374년으로 계산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손병철(孫炳哲) 씨는 연구논문을 통해 “위대한 진나라의 천왕께서는 …… 그때 학승 5백여 명을 모아서 소요관에서 몸소 한역불전(漢譯佛典)을 들고서 구마라습과 함께 대승경전들의 확정본을 만들었다. …… 나는 부족한 사람인데도 일찍이 훌륭한 모임의 한 귀퉁이에 참석하여 이를 높은 가르침으로 삼는 것을 이때에 시작하였다.” 라는 문장 가운데 “이때 시작하였다(始於時也).” 라는 문구에 근거하여 승조가 구마라습에게 배운 것은 구마라습이 징자오로 온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따라서 31세에 천화한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중국의 쉬캉셩(许抗生)은 이를 인용한 후 승조가 20세에 징자오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경쟁상대와 논쟁했다고 하는데 이때는 홍시(弘始) 5년, 즉 403년이고 구마라습이 징자오에 온 시기는 홍시 3년, 즉 401년이기에 승조가 20세 이후에 다시 고창(姑藏)에 가서 배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고승전』의 승조 전기에서 “구마라습이 고창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승조는 그곳까지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라는 문장은 문제가 있으며,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쉬캉셩은 다시 주석을 달면서 승조가 19세에 구마라습을 만나서 31세에 사망했다는 『조론중오집해(肇論中吳集解)』의 내용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고 밝힌다. 『고승전』의 서두에 실린 승조의 전기가 옳다면 말미에 실린 천화한 나이 31세가 잘못 표기된 것이며, 31세에 천화한 것이 옳다면 승조가 20세 이후에 고창으로 구마라습을 찾아갔다는 내용이 허구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자료가 새롭게 발견되지 않는 이상, 두 가설의 시비를 가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구마라습은 413년에 천화하였고, 승조는 1년 뒤인 414년에 참수당했다는 기록이 우세하게 통용되는 점을 고려하여, 승조가 구마라습을 찾아가서 서로 만난 것이 고창이 아니라 구마라습이 징자오에 도착한 후로 보면, 승조의 출생연도는 사망 연도인 414년에서 31년 전인 384년이 된다. 21세기에 새로 쓰는 『소설 승조전』은 이 가설을 옳다고 보고, 그를 따랐다는 것을 부기(附記)해 둔다.
승조가 되기 전 속인(俗人)이었을 때의 장조는 가세(家勢)가 넉넉하지 않아 학문에만 전념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철이 들면서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는데, 그가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삼은 직업은 필경사(筆耕士)였다. 제지업(製紙業)과 인쇄술이 발달해 있지 않았던 시절, 많은 사람이 필사본(筆寫本)을 통해 독서 욕구를 충족했었기 때문에, 필사는 나름대로 짭짤한 수입이 보장되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책을 베끼어 쓸 때 아무 생각 없이 옮겨 쓰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선행(先行)시키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에, 장조는 책을 한번 필사하고 나면 10번 정도 정독한 것보다 더 필사본의 내용을 잘 요해(了解)하였다.
그리고 때로 장조는 다른 사람들의 주문을 받고 대필(代筆) 작가로도 활동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즈음도 파란만장한 사연이 있는 사람이 자서전(自敍傳)을 출간하려고 할 때 흔히 문장력이 좋은 사람에게 대필을 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그 옛날에도 그런 필요가 있었고, 이에 부응하는 대필 작가도 존재했었다. 집안의 내력인 가승(家承)이나, 마구 써놓은 개인 문집 같은 것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해 주는 대필업은 들은 이야기를 요약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고 문장력이 좋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직업이다.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내용을 전부 메모하는 것이 아니라 요약해서 정리해 두고, 나중에 그것을 보며 기억을 떠올리며 기사를 쓰는 방법을 택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런 수련을 많이 하면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과 문장력이 매우 좋아지게 된다.
그리고 책과 오래도록 같이 놀며 읽고 베끼는 것을 반복하고, 글짓기를 하다 보면 두뇌의 활동이 왕성해진다. 편도체에 대한 제어와 해마 기능의 활성화, 대뇌와 소뇌의 활발한 브레인 네트워킹이 이루어져서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며, 나아가서는 이것이 깨달음의 단초로 작용되기도 한다. 장조가 어린 나이에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고 초견성(初見性)을 한 것은 그의 방대한 독서량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쨌든 나중에 좋은 문장력을 요구하는 역경(譯經) 불사에 종사하게 되는데, 소년 시절의 필경업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찍부터 갈고 다듬은 실력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다.
장조는 『노자』와 『장자』를 많이 필사하였다. 그는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십 대를 보내며, 오랫동안 현학(玄學)을 마음의 의지처로 삼았었다. 그는 『도덕경』 후반부인 덕장을 보다가 “좋기는 좋지만, 마음 수양의 지침으로 기대하기에는 아직 완벽하지 않다.”라고 한탄하여 마지않았다. 이럴 즈음 장조는 『유마경(維摩經)』을 만났다. 『유마경』을 한역한 사람은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라는 쿠차인이었다. 장조가 『유마경』을 만난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장조는 『유마경』을 필사하며 정독한 끝에 환희심을 일으키고, “비로소 귀의할 곳을 찾았다.”라고 말한 뒤, 그는 10대 후반에 출가를 단행하였다. 그에게 출가사문이 되도록 만든 책이 바로『유마경』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마힐이라는 거사의 중도관이 장조로 하여금 승려가 될 결심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중국에서 대승경전의 핵심인 공(空)을 제일 먼저 인식한 사람이 장조다.
두번째는 『유마경』을 한역한 구마라습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장조는 서역의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경전들이 중국어로 제대로 번역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차에 구마라습의 번역본을 만나게 되었고,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비로서 생겼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머리를 깎은 장조는 즉시 구마라습을 만나고 싶었지난 그는 징자오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서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대신 그는 구마라습을 만나러 가지 전에 먼저 서역말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현학보다 새로 전래된 불교에 대한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구마라습이라는 역경(譯經)의 성사(聖師)가 일으킨 바람이었다. 출가하여 장조는 승조가 되었으며, 승조가 하고 싶었던 일은 구마라습 같은 역경불사였다. 제대로 된 부처님 말씀을 접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스승 구마라습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쿠차(龜玆)는 인도와 중국이 교차하는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쿠차의 거점은 타클라마칸 사막 언저리에 있는 오아시스 마을이지만, 문명과 물자가 이동되는 실크 로드의 중심지여서, 일찍부터 신문물의 유입(流入)이 많았고, 이곳은 무엇보다 불교가 전래된 교두보(橋頭堡)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쿠차인들은 중국 본토인들보다 불교를 일찍 받아드려 한때는 대부분의 사람이 불자(佛者)였을 정도지만, 현재는 힌두의 나라가 되었다. 쿠차는 인도와 중국, 아랍, 서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오며 가며, 장사하는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번화한 곳이지 결코 작은 마을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예로부터 국적을 초월하여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인도 카슈미를 태생의 명문 귀족 출신인 쿠마라야나는 쿠차 왕이 갑자기 승하(昇遐)한 후 장례식을 거행할 때 조문 사절로 처음 궁을 방문하였다가 슬픔에 잠겨있는 지바 공주를 보게 되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특히 눈물이 맺혀 있는 큰 눈은 사람을 빨아드리는 매력이 있었다. 귀티가 흐르는 몸매가 이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력 포인트였다. 공주의 오라버니가 새 국왕이 되는 즉위식을 거행할 때 다시 축하사절로 참석했던 쿠마라야나는 쿠차 나라에 닥친 혼돈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된 것을 확인하자 지바와 결혼을 하고 싶은 의사를 밝혔다. 청혼은 별문제 없이 받아 드려졌다. 비록 외국인이지만 분명한 금수저 출신이라는 점과 쿠마라야나의 출중한 외모 등이 높은 점수를 받은 탓이었다. 이곳에서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혈통에 대한 배타심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다.
쿠마라야나와 지바 공주의 결혼은 양가와 국민의 축복 속에 성대하게 치러졌다. 구마라습은 이들 부부의 첫 번째 자식이자 유일한 혈육으로 세상에 왔다. 쿠차국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파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대개 2개국 이상의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정확하게 쓰고 말하며, 원어민처럼 유연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언어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오랜 시간 교육을 받아야 습득할 수 있는 경지다. 공주 시절 지바는 인도로부터 막 전래된 불교 경전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었다. 번역된 경전이 없었기에 지바는 스스로 경전 공부에 필요한 외국어를 습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바 있었다. 그런 지바는 아들을 낳게 되자 자신의 언어 능력을 아들에게 전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혼혈인에게는 자연스럽게 아버지 나라와 어머니 나라의 언어를 습득할 기회가 주어진다. 나중에 역경(譯經) 불사에 매진하게 된 처지에서 보면 구마라습은 출발부터 행운이 따랐던 셈이다.
남부러울 것이 없어서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명문가의 결합이었지만, 그러나 부부는 해로(偕老)하지 못하였다. 구마라습이 7세 되던 해 지바가 돌연 출가하겠다는 선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남편 쿠마라야나는 아내의 심경 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당신에게 뭘 잘못했소?”
“당신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출가하겠다는 결정을 한 것은 아니에요.”
“그럼 무엇 때문이오?”
“당신에게 말씀을 드리지 않았는데, 실은 내가 아들을 임신했을 때 갑자기 지금까지 모르던 당신 나라말을 비롯해 주위 여러 나라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신통력이 생겼던 적이 있어요.”
“그랬소?”
“네, 그런데 아이를 낳으면서 그 신통력이 사라지더이다.”
“그런데요?”
“그런데, 우리 아들이 자라면서 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니까 신통하게도 그때 내가 알아들었던 여러 나라말을 할 줄 알더라고요.”
“태중(胎中)에서 당신의 신통력이 아들에게 옮겨진 모양이오.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아이 같으니 우리가 합심해서 잘 기릅시다.”
“아니요. 나는 우리 아들을 출가시켜 절에서 키우고 싶어요.”
“그게 무슨 말이오?”
“아이의 특별한 재능이 불교를 널리 펴는데 크게 쓰일 거에요. 그렇게 만들기 위해 나는 지금부터 아이를 데리고 절에 가서 살기로 했어요. 출가하여 아들을 잘 길러 보고 싶어요.”
“스님은 속세와의 인연도 끊는다는데, 당신은 수행에 혹이 될 아들을 데리고 출가를 하겠다는 것이오? 혼자보다는 같이 기르는 편이 아이에게 더 좋지 않겠소?”
“나의 출가는 오로지 아들을 위한 것이에요. 어린 아들을 혼자 절로 보낼 수 없어서 같이 가려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그리고 저도 아들이 잘되는 것을 지켜보다가 아들이 더 이상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면, 나도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수행을 해보고 싶어요.”
아내는 좀처럼 뜻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남편은 할 수 없이 모자(母子)의 출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모자는 절로, 아버지는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어머니를 따라 출가한 구마라습은 불문에 든 직후부터 어머니로부터 사가(私家)에 있을 때보다 더 엄격하고 체계적인 지도를 받게 되었다. 지바는 아들에게 원시 경전을 암송시키고, 아비달마 불교를 배우도록 하였다. 또한, 지바는 무엇보다 우선하여 아들에게 외국어 습득에 대한 집중 교육을 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남다른 언어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구마라습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이미 이때 외국말로 된 경전 해득이 가능한 스님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불교의 경전뿐만 아니라 율과 논장까지 달통한 스님이 되기를 원했다. 어머니는 몸소 출가인의 모범을 보이며, 아들을 여법한 스님으로 길렀다. 모자는 함께 출가의 길을 걷는 도반(道伴)이었다. 구마라습이 삼장법사(三藏法師)가 된 것은 어머니가 동반 출가하여 열과 성을 다해 시봉해준 영향이 가장 크다.
구마라습이 아버지 나라로 유학을 떠난 것은 소승 경전들을 다 습득한 후였다. 그리고 그가 귀국할 즈음에는 아버지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쓰고 읽고 번역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 실력을 갖추었다. 유학을 가기 전부터 경전을 읽는 데는 걸림이 없었지만, 유학을 통해 산스크리스트어와 팔리어, 중국어를 비롯하여 불교권 여러 나라의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실력을 확실하게 연마한 것이었다.
구마라습이 귀국한 것은 369년의 일이다. 이삿짐은 온통 대승불교 경전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그가 소승이 아니라 대승의 길을 가는 스님으로 변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장을 풀고 난 후 곧바로 경전 번역에 매진하였다. 그때까지 중국에 소개된 불경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것도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심각한 오류가 발견되었다. 구마라습은 그 오류를 바로잡아야 중국인들이 제대로 된 불교를 배우게 되리라 판단하였다. 구마라습의 노력은 얼마지 않아서 결실을 거뒀다. 그의 노력으로 번역 출간된 경전의 수효가 늘어가는 것과 비례하여, 그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삼장법사(三藏法師)로 추앙하였다. 구마라습은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 등 삼장에 능통한 사람에게 붙여지는 최초의 삼장법사가 된 것이었다. 구마라습은 중국인은 아니다. 중국불교 사상 첫 번째 삼장법사로 회자(膾炙)되는 현장(玄奘)은 그로부터 260년 뒤에 출현한 후학(後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천재적 능력은 중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전진(前秦) 왕 부연(符堅338~385)은 늘어나는 불교도들을 수용하는데, 구마라습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래서 구마라습을 데려오기 위한 선전포고를 단행하였다.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의표(意表)를 찌른다. 요즈음 같으면 인재라고 판단된 구마라습을 스카우트하여 모셔오거나, 안되면 납치를 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는데, 부견은 구마라습을 수하로 부리기 위해 전쟁을 택한 것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다른 꿍꿍이속이 있었다. 실크로드 거점지역을 자기 수중에 넣고 통관세를 징수하려는 속셈이 그것이었다. 어쩌면 구마라습을 중국으로 데려가겠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진짜 목적은 통관세를 징수할 수 있는 요지를 손아귀에 넣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부견의 명을 받고 진격한 여광(呂光)은 쿠차왕 백순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명목상의 전쟁 이유였던 구마라습을 생포하였다. 그러나 여광은 그 즉시 전리품인 구마라습을 중국으로 보내지는 않았다. 이유는 전쟁 중에 전진이 망했기 때문이었다.
384년 여광은 고창(姑藏)지방의 량저우(涼州)를 거점기반으로 삼고 후량(後凉)을 세웠다. 여광은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나라를 키울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생포한 구마라습을 일시적이지만 책사(策士)로 기용하였다. 확산되는 불교도들의 환심을 사고, 국가 경영에 구마라습 같은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광은 종잡을 수 없는 인격의 소유자다. 그는 자기가 최고 권력자라는 자만에 빠져 이내 구마라습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나라는 세웠지만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불안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여광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생고생을 하는 것이 모두 구마라습을 데려가려다가 생긴 일이라며, 그에 따른 화풀이로 구마라습을 구박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구마라습이 결혼을 하지 않고 스님으로 사는 것이 아니꼬운지 폭언을 일삼았다.
“네까짓 중놈이 도교의 도사들보다 더 나은 게 무엇이냐?”
수모를 줘도 대꾸를 하지 않자, 말을 한 필 대령시킨 다음 명령을 내렸다.
“말을 탈 줄 알아야 사내대장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 내 앞에서 말을 한번 멋지게 타 보거라. 말을 잘 타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다.”
구마라습은 승마(乘馬) 경험이 없었다. 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구마라습은 두려움을 감추고 가까스레 말의 등에 올라탔다. 그 직후 여광이 말에게 채찍을 가하였다. 놀란 말은 황급히 내달렸다. 구마라습은 달리는 말 등에서 고삐를 잡고 안간힘을 썼으나 얼마지 않아 떨어지고 만다. 여광은 자지러지게 웃는 것으로 구마라습을 조롱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번은 왕녀를 구마라습 앞에 대령시킨 온 다음 말했다.
“오늘 밤 네가 이 여자를 취하지 않으면 나는 내일 아침에 이 년의 목을 벨 것이다. 그대가 천재라니 씨앗을 받아두어야 나라의 동량으로 쓸 인물을 확보하게 될 것이 아니냐!”
이런 모욕적인 언사는 파계(破戒)를 시키자는 수작에서 하는 것이었다. 구마라습은 죄 없는 여자의 생명을 자신이 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광이 원하는 대로 계율을 어기고 파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구마라습은 스스로 사람들에게 ‘나는 스님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에게서 삼장법사라는 호칭을 회수하지 않았다. 삼장법사 구마라습은 오랫동안 여광의 포로가 되어 혹독하게 인욕(忍辱) 바라밀을 수행하였다.
여광이 쿠차를 속국으로 만든 지 18년이 되었을 때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은 여광을 징벌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명분으로 내건 것은 이번에도 삼장법사인 구마라습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육신사리(肉身舍利)인 구마라습을 얻고자 두 번씩이나 전쟁을 일으킨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다. 쿠차로 진격한 요흥은 401년 눈엣가시 같았던 여광의 목을 벨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여광이 하고 있던 통관세 징수일을 가로채었다. 요흥도 진짜 목적은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 명분은 어디까지나 구마라습을 구해 중국으로 모셔가는 것이었다. 요흥은 징자오로 돌아갈 때 명분으로 내걸었던 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구마라습을 데리고 갔다.
처음 출병했던 전진(前秦)처럼 후진(後秦) 역시 어지러운 국가의 통치이념을 정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인 불교사상의 도입이 필요했었다. 불교를 잘 알면서 동시에 세련된 중국어까지 구사할 줄 알았던 구마라습은 용도 폐기의 대상은 절대 아니었다. 이런 인재를 포로 취급하여 갖은 구박을 다 한 여광은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었다.
401년 처음 징자오에 도착했을 때 구마라습은 왕이 마련해 준 서명각(西明閣) 소요원(逍遙園)에다 여장을 풀었다. 그 후 이름조차 큰 절인 대사(大寺)로 옮긴 것은 요샛말로 하면 ‘범어(梵語)와 한어(漢語) 동시통역학과’에 입학하려는 학승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인들과 어울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구마라습은 겸손하고 섬세했으며 늘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을 발휘하였다.
대사는 큰절이라는 화려한 본래 명칭이 사라지고 초당사(草堂寺)로 이름이 바뀐다. 초당사의 원이름은 장안대사(長安大寺)다. 다음으로 대안정사로 개명했다가 ➔ 대사 ➔ 초당사 순으로 사명(寺名)이 바뀌어 왔다. 초당사는 구마라습이 절의 한갓진 곳에 터를 잡고 벽돌을 쌓아 올려 소박한 초당(草堂)을 짓고 그곳을 거처지로 삼았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는 이곳에서 402년부터 불경을 한역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구마라습은 엄격한 규칙을 갖고 번역에 임하였다. 그가 『십주경(十住經)』을 번역할 때다. 『십주경』은 자신이 가져온 경이 아니었다. 그러니 번역 의뢰를 받았을 때 즉시 작업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십주경』 전문가인 불타야사(佛陀耶舍) 스님을 초청하여 경전의 가르침에 대한 설명을 먼저 듣고, 충분히 경을 이해하게 된 후, 비로소 번역 작업을 시작하였다. 번역할 경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서 번역을 서두르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계산한 접근 방식이었다.
3. 만남
초당사에 머물고 있던 구마라습의 명성은 징자오에 널리 퍼져 나갔다. 올바른 역경이 제대로 된 불교를 중국에 정착시키는 일이라고 판단했던 승조는 역경 불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던 구마라습을 찾아갔다. 두 사람의 만남은 초당사에서 이루어졌다. 구마라습은 나이 어린 승조에게 하대를 하지 않고 깍듯이 존칭을 썼다.
“스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아왔소?”
“인도에서 결집한 경전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이 경전 번역 불사를 대대적으로 하는 곳이니 제대로 찾아온 것이오. 나는 이제부터 『대품반야경』을 번역하려던 참인데, 그럼 그 일을 같이 해보겠소?”
“말씀 낮추어서 하십시오. 제가 스승으로 모시면서 『대품반야경』 역경 불사에 저도 온 힘을 보태겠습니다.”
구마라습은 한눈에 승조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승조는 구마라습과 함께 초당에 머물며 그림자처럼 붙어서 번역일에 매진하였다.
『소품반야경』은 게송 수가 '팔천송(八千頌)'이었는데 비해 『대품반야경』은 '이만오천송(二萬五千頌)'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일명 『이만오천송반야』라고도 부른다.
『대품반야경』이 대승불교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경이 설하고 있는 공사상(空思想)이 대승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학(敎學)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대승불교의 사상을 전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원시반야경』에서부터 설해진 반야바라밀 · 불모사상(不母思想) · 공(空) · 무백성(無白性) · 보살마하살 · 육바라밀 · 대승 · 화타행(和他行) · 재가적(在家的)성격 · 경전의 독송 및 타인을 위해서 설하는 공덕 · 반야바라밀 염송의 공덕 · 경전공양의 공덕 · 삼미(三味 ) · 회향(廻向) 등이 망라되어 있다.
구마라습은 『대품반야경』을 번역하면서 용어를 선택하거나 잘못된 곳을 고칠 때 결코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제자들이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의견을 듣고 나서야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럴 때 승조는 구마라습이 원하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제자였다.
서역의 음이 틀린 곳은 인도어로 고치고, 중국어가 틀린 곳은 글자의 뜻을 교정하였으며,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기록하고, 다른 이름은 올바르게 고쳤는데, 고친 서역의 음이 반 이상이고, 나아가 경전만으로는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고 판단될 때에는 관련된 논서를 찾아 대조하는 과정까지 거쳤다. 구마라습은 1800년 전에 이미 요즈음의 전문 번역가 못지않은 철저한 직업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괜히 삼장법사 칭호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승조는 『대품반야경』을 번역할 당시 20세의 젊은 나이에 이미 대승과 소승 경전에 두루 통달하여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어쩌다 승조와 논쟁을 하게 되면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명쾌한 논리 앞에 모두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승조가 불교계에 끼친 공헌은 불교 본래의 뜻을 중국인들에게 올바로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런 자세는 승조가 스스로 터득한 면도 있고, 스승 구마라습의 가르침을 받는 가운데 생긴 것이기도 하였다.
구마라습은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왜곡을 범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불교 이론을 중국인들의 사상 체계인 노⦁장자에 대입시켜 설명하는 독특한 방법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비롯된 현상이었다. 이것을 격의(格義)라고 부른다. 자신들에게 낯설게 다가온 불교의 뜻(義)을 중국인의 방식으로 헤아리고자(格) 했던 접근 방법은 새로운 문화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를 내기는 하였지만, 정확하게는 진실과 거리가 있으므로, 실제는 적잖은 오류를 범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초기 번역본들은 진실과 부합되지 않은 면이 많았는데, 그것을 바로잡아 제대로 된 번역을 하자는데, 사제(師弟)는 뜻을 같이하였다. 이런 그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중국인들은 불교가 도가나 유학과 구별되는 고유한 철학이자 종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가령 공은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데,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 도가의 논리에도 공은 있었다. 불교의 공을 중국 전래의 현학적인 공에 빗대어 설명하면 그것은 대승불교의 공과는 전혀 다른 중국식 공이 돼버리고 만다. 격의는 진실이 아니라 불교에다 중국적 색채를 가미하는 것이어서 수용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구마라습과 승조는 격의에 의해 덧칠된 것을 벗겨내고 불교의 진면목을 들어내기 위한 노력을 공동으로 기울이며, 『대품반야경』 번역에 임하였다.
『대품반야경』은 404년도에 완성이 되어 출간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런데도 구마라습의 『대품반야경』은 어떤 사람의 번역본보다 정확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불자의 사람을 받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다. 구마라습과 승조같은 세기의 천재들이 동참한 결실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승조는 해박한 지식과 화려한 문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대품반야경』 번역에 임했었고, 그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공에 대한 이해를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구마라습이 제자 승조를 다음과 같이 칭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네가 중국 최초로 공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아주 좋은 문장으로 요약하여 잘 설명하는 업적을 쌓았다.”
『대품반야경』이 책으로 출간되었을 때 요샛말로 하면 출판기념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전진의 왕 요승은 연회를 베풀어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요승은 이 자리에서 구마라습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서 시봉을 드는 승조를 처음 보게 되었다.
요승이 승조에게 관심을 표명하였다.
“스님의 이름은 무엇이오?”
“조라고 하옵니다.”
“외자 이름이오?”
“그렇습니다.”
“조스님, 부처님은 어떤 분이시오?”
“석가모니 부처님은 모든 사물을 아주 진지하게 대하신 분입니다. ”
“그래봤자 평생 동냥을 해서 목숨을 유지한 사람 아니오?”
평생 구걸해서 먹고 산 거지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동냥은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고, 시주자에게는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보시행입니다. 그런 높은 뜻이 있기에 걸식을 나가거나 돌아올 때는 걸음걸이조차도 신중하게 옮겨 놓으셨습니다. 옷을 입을 때나 음식을 먹을 때 자리에 앉을 때 조치도 허겁지겁하지 않으시고 부처님께서는 한 동작 한 동작을 진지하게 하셨던 분입니다.”
“진지했다?”
“네. 주의깊은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주의 깊음’은 마주하는 상대가 목숨을 가졌거나 그렇지 않거나, 크거나 작거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의 깊음’이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입니다.”
요승은 ‘주의 깊음’이라는 말을 머리에 새겼다. 승조가 덧붙였다.
“‘주의 깊음’은 열반으로 가는 길이고, ‘주의 깊지 않음’은 윤회로 가는 길입니다. 주의 깊은 사람은 윤회에 얽매이지 않는데, 주의 깊지 않은 사람은 살아 있어도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진지해야 한다. 경건함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철저하게 몸에 배어 있는 승조는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주의 깊음’이 품어내는 아우라가 깃들어 있었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은 『고승전』보다 훨씬 후대인 송나라 북송 진종 경덕(景德) 원년(1004년)에 황제의 명으로 고승 도언(道彦)이 출판한 책이다. 이 책의 「승조전」에 따르면 당시 구마라습 문하에는 3000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3000명 설은 중국인 특유의 많은 사람을 뜻하는 과장법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실제로 3000를 헤아리는 문하생이 거쳐 갔을 수도 있지만 여러 문헌을 검색해 보면 당시 구마라습 문하(門下)에 상주(常住)하고 있던 역경 종사인은 대략 100명 내외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정도라도 인도에서 출간된 대부분의 불경을 번역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대단히 큰 규모의 역경원(譯經院)이다. 그 중 승조는 도생(道生), 승예(僧叡), 도융(道融)과 함께 4대 철인(四哲)으로 불렸었다. 4대 철인 중에도 승조와 도생은 중국 불교사에 큰 공헌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승조는 불교사에 길이 남을 『대품반야경』 역사가 끝난 직후 혼자서 『유마경』을 번역하여 『주유마힐경(註維摩詰經)』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바 있다. 유마의 이름이 유마힐이다. 그래서 『유마경』이나 『유마힐경』이나 같은 말이다. 스승인 구마라습이 『유마경소(維摩經疏)』를 출간한 일이 있으므로 승조는 책명을 지을 때 차별화를 시켜 『주유마힐경』이라고 한 것이었다. 후대 사람들은 구마라습의 『유마경소』보다 승조의 『주유마힐경』이 더 완벽하다는 평을 한다. 승조의 능력과 입지는 점점 견고해 지고 있었다.
404년 구마라습이 『마하반야바라밀다경』을 번역할 때 다시 스승과 공동 작업을 했었던 승조는 그 작업이 끝난 후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발표하였다, 그것을 스승 구마라습에게 보이니 “내 해석은 너에게 뒤지지 않지만, 문장력만은 내가 너를 따르지 못하겠다.”라는 칭찬을 하였다. 나중에 출간되는 승조의 『조론』에 게재된 네 편의 논문 중에서 「반야무지론」이 가장 먼저 쓰여졌다.
「반야무지론」은 2000자밖에 되지 않는 짧은 논문이지만 공(空)을 격외가 아니라 중국에서 최초로 본래의 의미로 이해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업적을 세운 논문이다. 반야는 지혜 또는 깨달음을 상징하는 지혜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반야바라밀의 반야는 공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혜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후 스승은 승조에게 공을 제일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이 별칭은 원래 붓다의 10대 제자 중 수보리 존자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수보리가 공을 부처님 제자 중에서 제일 잘 이해했기에 붙여 주었던 별칭인데, 공을 이해하는데 일인자라는 해공제일이라는 명예로운 별호가 수보리 다음으로 승조에게 붙여진 것이었다.
4. 혀사리
구마라습은 413년 초당사에서 임종을 지키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전한 것(번역한 불경)에 틀림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若所傳無謬者 當使焚身之後 舌不焦爛)”
구마라습의 유언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고승전』 권2에 보면, ‘사후 다비식을 거행하였는데, 구마라습의 육신은 다 타버렸지만, 혀만은 유언대로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승조를 비롯한 구마라습의 제자들은 스승의 혀부도탑을 만들 때 스승의 고향인 신장위그르 지방에서 여덟 가지 빛깔이 나는 옥돌을 구해다가 팔보옥석탑(八寶玉石塔)으로 조성하였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살다가 묻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제자들은 혀사리탑을 만들 때 스승의 고향인 신장위그르에서 출토된 팔보옥석을 구하는 열의를 보였다. 초당사에 조성된 구마라습의 팔보옥석 혀부도탑은 1800여 년이 흘렀지만,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
구마라습은 살아서 두 번씩이나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는 사리 각축전 같은 것이 발생하지 않았다. 불교사에서 사리의 분쟁역사는 짧지 않다. 붓다의 사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인근 8개 부족국가는 전쟁 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상황을 연출했었다. 극적인 타협을 통해 사리를 팔 등분 하자는데 합의하면서 평화적으로 마무리되긴 하지만. 그런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이 지켜본 아난(阿難)존자는 노파심으로 인하여 ‘당신의 사리 때문에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부족 간의 전쟁을 염려하여 그 누구의 땅도 아닌 갠지스강 한가운데서 임종하여 사리 전쟁을 원천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구마라습의 혀사리탑은 본래 조성되었던 초당사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지만, 그가 번역한 법사리(法舍利)인 금강경은 동아시아 전역으로 분신(分身)해 나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속에는 사리탑을 조각하듯 『금강경』을 목판에 새겨 법사리로 모셨는데, 이것이 그중 하나다. 붓다께서 "법(진리)을 보는 자, 나를 보리라."고 하셨으니, 『금강경』을 읽는 자 역시 구마라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니 『금강경』을 대하면 그것이 곧 구마라습을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구마라습의 불경 번역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불교사에서 길이 남을 공적(功績)이다. 그의 역서 『금강경』은 1800년 동안 당당하게 베스트셀러의 위상을 지켜오고 있다.
중국에서 출간된 경전들은 크게 구마라습과 현장, 이 두 사람에 의해서 번역된 것으로 나뉘는데, 현장이 구마라습 보다 260년 쯤 후대 사람이니 고대 사람인 구마라습보다 현장이 더 알찬 번역을 했을 것으로 여기기 쉬우나, 구마라습이 훨씬 아름다운 번역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장은 보다 인도에 충실하게 직역(直譯)하였는데, 구마라습은 중국인의 감정을 잘 반영하여 의역(意譯)했고, 따라서 중국인들은 직역한 현장보다 의역한 구마라습의 경전을 더 잘 이해하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구마라습은 폐단으로 지목되어온 격의불교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하여 중국인들에게 불교 본모습을 보여 준 공과를 최초로 세웠다. 격의불교는 포교에 유용하기는 했지만, 포교 과정에서 불교 본래의 가르침이 왜곡되는 단점이 많았었다. 구마라습이 이 점을 바로 잡았고, 그 후 역경 불사를 했던 사람들은 구마라습의 노력 때문에 격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었다.
격의 문제에 이어 두 번째로 세운 구마라습의 위업은 운율을 살린 번역을 했다는 점이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謁見)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범어(梵語)를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고승전(梁高僧傳)』 권2에 "천축에서 가장 훌륭한 문학으로 삼는, 찬불가의 가락은,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답다. (근데) 지금 이것을 한문(秦語)으로 옮기려니, 그 뜻은 얻을 수 있는데, 그 말의 이치까지 전할 수는 없도다." 라고, 구마라습이 한탄하는 대목을 적어 놓았다. 구마라습은 운율을 매우 중시여긴 번역가다.
생전에 300권에 달하는 불경을 번역하였으며 그가 번역한 불경은 동아시아에서 손꼽는 발자취를 남겼다. 현장이 천축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갖고 와서 번역한 신역(新譯) 불경이 퍼진 뒤에도 구마라습의 불경은 구역(舊譯)으로 불리며 존중되었고, 오늘날까지 한역 불경의 고전으로 꼽힌다. 그 중 대표적인 번역본만 추려본다.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3권
『불설아미타경』(阿彌陀經) 1권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27권(30권)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권
『유마경』(維摩經) 3권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
『중론』(中論) 4권
그의 번역 불경이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 퍼진 불교 용어, 예를 들어 극락(極樂)이라는 단어는 구마라습이 번역한 그대로 퍼져 쓰이고 있으며,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구마라습에게서 나온 것이다.
또한, 알게 모르게 구마라습은 한국사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의 승려 승랑이 배운 것으로 알려진 삼론종(三論宗)은 구마라습이 번역한 불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하는 불교 종파다. 삼론은 구마라습이 한역한 『대품·소품반야』 등에 들어있는 용수(龍樹)의 『중론(中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 그리고 용수의 제자인 제바(提婆)의 『백론(百論)』 등을 이르는 말이다. 구마라습의 문하생들에 의해 삼론이 연구되면서 삼론학파(三論學派)가 탄생하였고, 이것이 삼론종으로 발전되었다. 반야공(般若空)의 사상을 교리의 근간(根幹)으로 삼고 있어 중관종(中觀宗) 공종(空宗) 무상종(無相宗) 무득정관종(無得正觀宗) 등으로도 불리며, 『열반경』의 여래상을 수용하여 ‘진공묘유(眞空妙有)’ 사상을 전개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김만중은 유학자지만 구마라습의 고뇌를 시공을 초월하여 이해하고 있었다. 『서포만필(西浦漫筆)』 하권에 구마라습의 말을 인용해, ‘문학의 가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음성언어)에서 시작해 글과 노래(즉 시각언어)로 옮겨지기도 하는 것’이라며, 한글로 쓰인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작품을 굳이 칠언고시 같은 중국식으로 번역하려는 것에 대해 자기(조선)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중국)의 말을 배워서 표현해 봤자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이라 비판하고 당시의 민간에서 부르는 노래(즉 한자로 적지 않은 순수한 모국어)가 소위 학자나 사대부가 말하는 시문(詩文)보다 형식이 저속할지는 모르지만, 표현의 진솔함에서는 오히려 그들이 감히 따라올 수도 없다고 적고 있다. 김만중의 이 비평은 구마라습의 번역관을 수용한 것으로서 한문이 아닌 국문으로 제작된 시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으로 한국 문학사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5. 조론
승조는 스승 구라마습이 열반한 후 공(空)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으로 슬픔을 잊는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로 스승 사후 일 년이 지나간 414년에 시대를 초월하여 길이 빛나는 역작 『조론』이 탄생하게 된다. 『조론』은 구마라습이 살아 있을 때 쓰인 것도 있고, 스승 사후에 스승의 가르침이나 문답을 통해 알게 된 바를 정리하여 완성한 것이었다.
대승불교의 영원한 주제인 공(空)에 관한 생각을 집대성한 『조론』은 「물불천론(物不遷論)」 「부진공론(不眞空論)」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 등 네 편의 논문과 두 편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전체를 개괄하는 서문인 「종본의(宗本義)」가 실려 있는데, 이 글은 네 편의 논문을 다 집필한 후 책으로 펴내기 직전에 쓴 ‘작가의 말’ 같은 것으로서, 종본의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가르침의 근본 뜻"이라는 의미다. 네 편의 논문에 관한 내용을 요약한다.
1. 「물불천론」은 경불천(境不遷) · 물불천(物不遷) · 시불천(時不遷) · 인과불천(因果不遷) 등을 통해 제법의 실상이 본래 진공명적(眞空冥寂)하다는 점을 구명해 놓았다.
2. 「부진공론」에서는 유와 무의 양변을 통해 ‘공’의 진정한 의미를 규명하고자 격의불교(格義佛敎) 시대의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고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설명한다.
3. 「반야무지론」은 아홉 번에 걸친 자문자답을 바탕으로 지(知)와 무지(無知)를 상정해 상대적인 앎을 뛰어넘어 일체지(一切智)로서의 무지를 구명하고, 반야의 참뜻을 설명한 내용으로써 네 편의 논문 중 가장 먼저 쓰인 것이다.
4. 「열반무명론」은 유명과 무명의 두 가상 인물이 열아홉 차례에 걸쳐 열반의 실체에 관해 이야기하는 내용을 다뤄서 열반이 언어 밖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밝혀 놓았다.
승조는 번역되기 전의 경전 원본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알고자 했던 중국 최초의 인물이다. 이런 노력은 처음 그의 스승인 구마라습에 의해 시도 되었는데, 구마라습은 엄밀히 말하면 중국인은 아니다. 그래서 승조가 격의 불교에서 벗어나 불교의 중국화에 초석을 놓은 최초의 철인(哲人)으로 꼽히는 것이다. 공(空)과 무(無)의 만남은 바로 중국과 인도의 만남이고, 지인(至人)과 부처의 만남이라 할만하다. 승조는 구마라습이라는 당대의 거장에게 배우는 기회를 통해 중국 전통의 무의 개념을 공으로 녹여 반야와 열반의 참뜻을 제시하는 등 진정한 중국불교를 출발시킨 사상가다.
따라서 사제 간인 구마라습과 승조, 이 두 사람이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를 중국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 공과를 세웠다는 평을 듣는다.
『조론』은 이후 중국의 수많은 학승들의 지침서가 됐고, 선(禪)이나 교학을 중시하는 이들과 재가불자들에 의해 화엄(華嚴)과 선이라는 중국불교의 꽃을 피우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중국 문화 전반에 걸쳐 오늘날까지 깊숙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조론』은 불교사상의 중요한 문제점을 당시 중국 사상계의 중요 문제와 관련해 논술한 것으로 중국불교의 교과서라고 평가되고 나아가 동아시아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책이다.
일반적으로는 승조를 선승으로 보지는 않는다. 조사선이 성립되기 이전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론』을 통해서 제시한 이론과 사상은 이후 선종은 물론 교학에서도 후학들의 나침반이 되었다. 교를 떠난 선, 선을 떠난 교는 있을 수 없다는 면에서 『조론』은 교와 선을 아우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것이다.
이런 『조론』 전체를 해석하는 일은 워낙 방대한 작업이다. 인연 따라 『조론』을 자세히 만나게 되기를 기원하며, 여기서는 ‘작가의 말’ 격인 「종본의」만이라도 번역하여 승조의 사상을 이해하는 발판으로 삼고자 한다.
'논할 바 없는 본래 없음'이 실제 모습이라, 법은 성품이 비어 있어 고정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부차적 요인과 함께하기에 드러난다'는 뜻이다.
부차적 요인과 함께하기에 드러날 뿐이라면, 부차적 요인과 함께하여 드러나기 전에는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부차적 요인과 함께하지 않으면, 스러질 수밖에 없다. 스러진다면, 참으로 있는 게 아니다. 참으로 있다면, 스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다면... 비록 지금 무언가 있다고 알더라도, 그 무언가는 스스로의 성품에 따라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의 성품에 따라 있는 게 아니니, '성품이 비어 있다'고 말한다. 성품이 비어 있어 성품을 말할 수 없지만... '성품이 비어 있어 성품을 말할 수 없는 것'을 두고, 단지 이름하기를 '법의 성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법의 성품을, '실제 모습'이라 일컫는다. 결국, 실제 모습이라는 게 없으니, 없음을 가지고 추측하는 게 아니라, '본래 없음'이라고 이름한다.
'있지 않다' 내지 '없지 않다'는 말은... '이 세계의 실재를 무조건 긍정하거나 이 세계의 이면에 불변하는 실재가 있다는 견해들이 말하는, ‘있음' 혹은 '불법’을 그릇되게 이해하거나 인과를 부정하는 견해들이 말하는, ’없음'과는 같지 않다.
법을 살핌에, ‘있음’으로 ‘있음’인 즉시 ‘없음’으로 ‘없음’이고, 그 ‘없음’도 있는 게 아니면... '마음이란 법'의 '실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있음’을 살피더라도 모습을 취하는 바 없으니, '법의 모습'은 '모습이 없는 모습'일 것이다. 성인의 마음도, 머무는 바 없음에 머문다.
일체 불법은, '성품이 비어 있음'을 살펴 얻는 지혜이다. 성품이 비어 있음이, 법의 실제 모습이다. 법의 실제 모습을 알면, 바르게 살핀 것이다.
만약 불법이 제각각 다른 이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릇된 견해를 가진 것이다. 가령 아함부 경전에서는 반야부 경전의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일체 불법에서, 법을 살피는 일은 다르지 않다. 단지 서원의 크고 작음이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방편반야'는, '큰 지혜'를 칭한다. 법의 실제 모습을 반야라 이름한다. 모습이 아닌 것을 능히 알게 하니, 방편으로서의 공덕이다. 중생을 이롭게 함을 방편이라 이름한다. 중생과 함께 함에 바르기만 하니, 반야로서의 힘이다.
‘방편반야’의 반야로서의 측면으로 비어 있음을 살피면서, ‘방편반야’의 방편으로서의 측면으로 있음을 넘어간다. ‘있음’을 넘어감에 있어, 애초에 허망함에 미혹되지 않으니... ‘있음’만이 드러나도 휘둘리지 않는다. ‘있음’을 꺼리지 않고 비어 ‘있음’을 살피니, 비어 ‘있음’을 논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한 번의 알아차림에 반야와 방편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이름한다.
한 번의 알아차림에, '반야와 방편의 함께 함' 즉 '방편반야'가 갖추어져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열반, 소진됨이란 무엇인가?
단지 속박이 소진되어, 생사가 온전히 스러짐이다. 그래서 '소진했다'고 이름할 뿐, 소진하여 도달할 바는 따로 있지 않다.
6. 공(空)
『조론』은 스승 구마라습 사후 1년 만인 414년에 출간되었다. 이때 승조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지만, 나이는 겨우 31세였다. 당시 중국은 5호 16국이 흥망성쇠를 다투고 있었다. 후진의 태조 요장(姚萇)은 곁에 인재가 없음을 늘 한탄하였다. 요장은 언제부터인가 국가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결정을 할 때면 떠올리는 얼굴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베풀어 준 『대품반야경』 출판기념회 때 구마라습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승조였다. 부처님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은 자신의 질문에 대해 ‘주의 깊은’ 사람이었다고 대답하던 승조는 이때 젊은 나이에 전 중국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요장은 그를 측근으로 삼고 싶었다. 이를테면 요장은 구름같이 많은 불교도의 추앙을 받는 승조를 환속시켜 자기를 보필토록 하고 싶었던 것인데, 공(空)의 도리를 절절히 알았던 승조는 벼슬하는 것을 의미 없는 일이라고 여겼기에, 아무리 간곡하게 권해도 응하지 않았다.
승조는 수행자의 길을 걷겠다며 요장의 거듭된 청을 끝내 거절한다. 이에 화가 난 요장은 어명을 거역한 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 내용이 『경덕전등록』에 적혀 있는데, 이 구절은 다시 분석해 볼 여지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회유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결국 화가 나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지만, 불같이 화가 났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죽이지 않으면 다른 나라의 재상이 되어 자기 나라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을 걱정하는 못난 치자(治者)의 계산도 들어있는 결정이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은 남도 가질 수 없도록 해야 후환을 없앤다. 승조는 그만큼 어느 나라에서나 데려가서 중용하고 싶을 만큼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는 천재였다.
참수형을 집행하기 직전에 어명을 띠고 온 사람은 요흥이다. 요장의 아들인 요흥은 부왕 사후에 보위를 이어 후진의 2대 왕이 된 인물이다.
요흥이 승조에게 말했다.
“마지막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니 그 정도의 인심을 쓰는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승조가 청했다.
“저에게 일주일만 집행을 연기해 주시면 안 되겠소?”
“무슨 이유 때문인가?”
“시간을 주시면 그 기간 책을 한 권 쓰고 싶습니다.”
『경덕전등록』에는 그렇게 해서 주어진 일주일 사이에 승조는 『보장론(寶藏論)』을 썼다고 되어 있다. 죽기 직전 일주일의 말미를 얻어 『보장론』을 썼다는 것은 몇 가지 면에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점이다. 경덕 연간에 쓰인 선사의 일대기를 조명한 『전등록』은 1700개나 되는 공안을 다루다가 보니, 취급한 영역이 방대한 것까지는 좋은데, 적잖은 과장과 각색을 한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무엇보다 『보장론』은 8세기경이나 되어야 중국에 등장하는 ‘본성(本性)’에 대한 이론을 다루고 있는데, 이는 승조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전혀 논의된 바가 없는 생소한 분야다. '본성'이 사람들의 에 거론되기 시작한 뒷날 다른 사람이 써서 집필자를 승조로 바꿔치기했다는 주장이 나올 만한 빌미가 된다.
『전등록』에는 승조가 사형당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썼다는 임종계를 수록해 놓았다.
四大元無主(사대원무주)
五蘊本來空(오온본래공)
將頭臨白刃(장두임백두)
恰似斬春風(흔사참춘풍)
사대(四大)란 원래 없고
오온(五蘊)도 본래 공한 것이니,
하얀 칼날로 목을 친다 해도
봄바람을 베는 것에 불과하다.
이 시는 죽음을 초개처럼 여기며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해탈자의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공을 알면 그럴 수 없다는 점이다. 공은 해탈이라는 초월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기기 쉬우나, 더욱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는 의지를 발동시키는 면이 있다. 이 임종게는 공을 중국식으로 이해한 사람의 글이지, 공을 제대로 알고 있던 『조론(肇論』의 작가 승조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자기의 죽음을 하얀 칼날로 목을 친다해도 봄바람을 베는 것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개관화시켰다는 것도 납득이 안간다. 다른 사람이 승조의 사형에 대하여 그런 분석을 한 것이라고 여기면 무리가 없다. 아마도 승조가 출사 권유를 거절하자 참형을 당한 것까지는 진실이고, 『보장론』을 쓰기 위해 7일의 말미를 얻었다는 부분과 임종게는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 주장이 만만찮다.
『보장론』에 담긴 내용은 승조 생전에는 전혀 논의된 바가 없는 것이고, 임종게는 『조론(肇論』의 저자 승조의 문장력과 정신세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임종게는 승조가 지은 것으로 소개되어 있고, 그 사실을 부인할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그래서 『보장론』은 승조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임종게에 대해서는 승조의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승조는 참수형을 받았다. 망나니가 참수형을 집행할 때 목을 베는 것이 아니라 치는 것이다. 고도로 단련된 무사가 아니면 단칼에 사람의 목을 분리하지 못한다. 망나니는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계속 내리치는 것이 참수형의 실체다.
단칼에 목이 떨어지지 않으면 술을 입에 물고, 절반은 그것을 칼에 품고, 나머지는 목을 축이기 위해 마시며, 그런 다음 특유의 춤사위를 하면서 뜸을 들인다. 이런 짓은 숨통이 채 끊어지지 않은 사형수나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 친지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다. 그래서 사형수의 지인(知人) 중 누군가가, 단번에 보내 달라며 망나니에게 뇌물을 주고는 하였다. 사람의 목숨을 두고 그런 망나니짓을 해서 망나니인 것이다. 세기의 천재 수급(首級)이 그런 칼질을 받아 떨어졌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며온다. 그런 정황을 충분히 예상했을 승조가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그가 공을 정말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승조는 공을 목숨과 바꾸며 공을 입증했는데, 진정으로 그 공이 무엇인지 범인으로서는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상상만으로도 오금 저리는 혹형(酷刑)을 봄날 소풍 가듯 무심히 받아들였는데, 참수형보다 더 무서운 극단적 기개로 공을 지킨 것이다. 애당초 고통받을 몸이 없고 죽어야 할 내가 없는데 아파하고 아쉬워할 까닭이 없다는 논리를 증명해 보인 것이다. 공을 집대성해 놓은 『금강경』에 나오는 붓다의 전생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붓다가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살고 있을 때 가리왕이 그의 팔과 다리를 모두 잘랐지만, 결코 화를 내지 않았었다. 반대로 제석천(帝釋天)이 잘린 팔과 다리를 붙여줬을 때도 그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를 가리켜 양무심(兩無心)이라 하는데, 욕됨을 당하거나 도움을 받았을 때도 둘 다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마음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는 뜻이다. 승조도 인욕선인처럼 아무런 마음을 내지 않은 것이었다.
중생과 부처는 ‘내가’ 있는가, 없는가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난다. 즉 자아와 무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중생은 자아에 집착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화를 내는 나, 기뻐하는 자아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부처는 자아를 텅 비우고 무아와 공의 이치를 깨쳤기 때문에 상대가 그 어떤 시비를 걸어와도 흔들림이 전혀 없다. 승조의 목을 벤 요장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르지만 깨치지 못한 자의 어리석은 오만을 부린 것에 불과하다. 마치 바람을 베어놓고 목을 땃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자아는 무아를, 색(色)은 공(空)을 결코 압도할 수 없다. 아니, 공을 깨친 이에게 이기고 지는 것은 이미 의미 없는 일이다. 『원각경』에 나오는 말이다.
我身本不有(아신본부유)
憎愛何由生(증애하유생)
나의 몸이 본래 있는 게 아닌데,
미움과 사랑이 어디에서 생기겠는가.
승조는 이 도리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인 각자(覺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