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일본 침략
원은 1268년 이후 때때로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여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 집권 호죠 도키무네를 중심으로 하는
바쿠후가 이를 거부하자 1274년 두 차례에 걸쳐 원이 일본에 침입했다.
1274년 원의 쿠빌라이(세조)의 명령을
받은 원군 1만 5000명과 고려군 8000명은 쓰시마·이키 연안을
침입하고 북규슈에 상륙했다. 바쿠후는 규슈의 고케닌을 동원하여 원군과 싸웠으나 원군의 집단전법과 화약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폭풍이 불어와 원군은 1만 3000명을 잃고 후퇴했다.
이를 일본에서는 분에이(文永)의
전쟁이라 부른다.
바쿠후는 원이 다시 침입해 올 것에 대비하여 돌로 보루를 쌓고 규슈 북부의 경계를 강화했다. 원은 남송을
멸망시키고 1281년 1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일본에 침입했다.
양군은 2개월 동안 치열한 공방을 거듭했는데, 때마침 다시 폭풍우가
불어와 원군의 배가 대부분 침몰했다. 더구나 일본군이 추격하여 원군은 많은 군사를 잃어 본국으로 돌아간 군사의 수는 4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일본에서는 고안(弘安)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투로 호죠씨의 독재 경향이 강해졌고, 바쿠후의 권력이 관서 지역에 미치게 되었다. 바쿠후는 전쟁 비용 부담으로 재정이 궁핍해졌고,
전쟁에는 이겼지만 무사에게 은상을 주지 못해서 무사의 불만이 높아졌다. 또한 고케닌은 은상에 대한 불만으로 전투 뒤에도 외국 경계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는
것에 대해 고심했다. 그리고 이 때 일어난 폭풍우를 신의 위력으로 일어나는 바람이라는 가미카제(神風)로 생각하는 일본 신국관(神國觀)이 정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