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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일환목사
사랑은 영원하고 완전합니다.
고전13:4~7
2015년 11월 29일 장안중앙교회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2)제일은 사랑이라
설교: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세밀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 그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살펴보면서 정리하려 합니다.
사랑은 어떤 것이라 했나요? 이미 설펴본 말씀 4절 5절을 다시 봅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 두절을 두주에 걸쳐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6~7절을 중심으로
1)사랑은 진리(예수님)와 함께 기뻐한다. 2)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믿는다. 3)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딘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정말 대단한 능력이 있고 대단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봉독한 8~13절 말씀을 가지고 사랑은 어떤 위대함이 있는가를 살펴보려 합니다.
1. 사랑은 영원성이 있습니다.
사랑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8절을 다 같이 읽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여기서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되” 할 때의 “떨어진다”는 단어의 헬라어는 “펩토”라는 단어로 쓰이는 것인데 이것은 나무 잎이 “시들어 버린다”할 때 쓰는 단어이고, 무대에서 배우가 “사라진다”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도 시들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1:24절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그렇습니다. 세상 것은 다 변하고 사라집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은 풀의 꽃같이 마르고 시들어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에 대해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고전 13장에서 살펴보는 사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성적인 사랑인 ‘에로스’사랑도 아니고 혈육적인 사랑인 ‘스톨게’사랑도 아니고 우정적인 사랑인 ‘필레오’사랑도 아닙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아가페’사랑, 즉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보니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것이 뭔가요?
원로 연예인들에게 물어보니 ‘인기’라고 합니다.
인기 있는 연예인이 되려고 죽도록 노력하고 뛰었는데 한순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대에서는 화려했고 행복했는데 내려가면 허무하고 외롭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 연예인이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인기도 사라집니다. 박수도 사라집니다. 청중도 사라집니다. 그것이 사라지면 세상은 냉정하고 무섭습니다.
또 원로 정치인들에게 물어보니 ‘권력’이라고 합니다.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세상을 다 갖은 것 같은데 그것을 잃어버리면 다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국회의원이 되어 보려고 난리입니다. 국회의원이 되면 혜택이 많습니다. 국내선 비행기 공짜입니다. 그리고 장관도 총리도 야단치고 모든 공무원들이 급신거리고 하니 그 맛이 대단하답니다.
그런데 권력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권력도 시간이 흐르면 떠나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욕만 남습니다. 그야말로 허무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것 중에 하나, 돈도 그렇습니다.
돈이 대단한 힘이 있어 보입니다. 돈이 있어야 행복해 보이고 돈이 있어야 뭘 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 때문에 인생 망하는 사람도 무척 많습니다. 돈은 결국 떠납니다. 아멘을 안해도 떠납니다. 왜죠? 돈은 가만히 한곳에 머물지 않고 돌아야 하기에 돈입니다. ㅋ ㅋ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것이 뭐라 생각하나요?
건강? 그렇습니다. 지금이 건강해서 백년천년 살것 같은데 세월이 지나면 사하집니다. 세월이기는 장사 없다고 하잖습니까?
남녀사랑? 그것도 영원할 것 같은데 다 소용이 없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일2:17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아멘?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갑니다. 다 사라진단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죠? 그것은 천국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 터키와 그리스 성지를 가보지 못했는데 성지에 가본 사람들 말을 들으면 남아 있는 것은 무너진 건물의 기둥과 터만 있답니다. 옛날 영광은 다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과거 찬란했던 제국들의 영화가 다 사라졌습니다. 로마도 사라지고 근세사에 와서 대영제국의 영광도 시들어 버렸습니다. 저 중국의 화려한 왕국들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고전 13장은 앞에 12장과 뒤에 14장 중간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12장에서는 은사를 말씀합니다. 그러다가 13장에서 사랑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에 대해 말합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들 중에 최고의 은사가 사랑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도 사라진다. /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해진다./ 그런데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랑이다” 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왜 예언이 사라지나요?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점쟁이처럼 앞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이나 옛날 성경이 완성도기 전에는 예언자들 선지들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계시가 완성된 이후로 더 이상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작년에 예언의 은사가 있다는 어떤 여자가 ‘한반도에 12월 며칠에 전쟁이 난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후 연기됐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말만 믿고 동남아로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 수백 명이 넘는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예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예언은 오늘날 설교입니다. 기록된 진리의 말씀으로 설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설교도 잠깐입니다. 천국에 더 이상 설교자는 필요 없습니다. 거기는 모두 구원받은 영화로운 백성만 있으니 왜 설교가 필요하겠습니까?
방언도 그칩니다. 이것도 일시적입니다. 방언은 사실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신 신앙의 표적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에서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고전14:22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일시적이고 결국은 그치는 것입니다.
지식도 그렇습니다. 요즘은 지식 홍수시대입니다. 지식과 정보가 돈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먼 곳에서 나온 정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다 소용없는 유치한 지식이 됩니다. 그러니 세상 지식도 다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지만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중요합니다.
2. 사랑은 완전성이 있습니다.
본문 9절부터 12절까지는 사랑의 완전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은사들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이지만 사랑은 참으로 온전하고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9절~10절을 보세요.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다 부분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부분적인 은사들은 사모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은사인 사랑에는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왜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 부분적이거나 제한적인 것일까요? 이것은 대상이 제한되어 있거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라면 누구에게나 다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예언과 방언을 최고의 것으로 여기고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다 갖게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교만한 것입니까?
마치 옛날 촛불이 전기가 들어오자 전등에 자리를 비켜 주었고 전등도 전자에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마차가 기차에 자리를 내주고 가치는 자동차에 그리고 자동차는 비행기에 자리를 내주었듯이 다른 은사는 부분적이고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변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예전에 환상, 예언, 꿈, 소리로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이제는 말씀이신 아들을 보내자 다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주님이 오셨음에도 있어야 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절에 “온전한 것이 올 때”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오실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듯 분명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가정 온전한 은사인 것입니다.
어린아이 시절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장성하면 이해가 됩니다. 어린아이 때 것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좋아하고 그것을 구하면 유치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젖병을 물로 있어 보세요. 어른이 되었는데도 “엄마~ 아빠~ 맘마 줘” 해보세요. 소름끼칩니다. 그러기에 성장했으면 어린아이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 성장은 무엇으로 측정 할 수 있나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3주에 걸쳐 살펴본 고전 13:4~7절을 보세요.
어린아이가 오래 참나요? 어린아이가 온유한가요? 어린아이가 투기하지 않아요? 어린아이가 자랑하지 않나요? 어린아이는 오래참지도, 온유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투기하고 자랑합니다. 어린아이 특성은 사랑이 없는 자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 예수님은 사랑입니다.
고전13:4절 이하를 이렇게 읽어보세요. ‘사랑’이라는 글자에 ‘예수님’을 대입해서 읽어보세요.
4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예수님은 온유하며, 예수님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예수님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성내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말이 되지요? 이해되지요? 그러기에 예수님이 완전하시듯 사랑도 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자신을 거울 보듯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희미하다’ 했는데 당시 거울은 동으로 만들어서 거울 앞에서도 실체를 희미하게 보고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감출 수 없게 다 보게 됩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감추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비밀이 없고 다 들어냅니다. 그래서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제 아내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사랑해도 완전히는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를 잘 아시고 완전하게 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알고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완전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인간을 자라게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온전한 사람 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도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최대의 명령이고 복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이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언제 받게 되는가요? 십자가 앞에 설 때 누리게 되고 받게 되고 체험하게 됩니다. 십자가 사랑을 모르면 그 사랑은 가짜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랑을 모르면 우리는 아직도 사랑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어 대속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믿으시고 십자가 앞에 서십시오. 그럴 때 우리 사랑이 진짜가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3. 사랑은 우선성이 있습니다.
13절을 보세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 말씀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빛과 희망을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용기와 위로를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믿음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갖게 되면서 소망이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기 최 목사는 예수를 믿으면서 비로소 삶의 의미를 알았고 인생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살아야 할 이유를 몰랐고 그러기에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가 지나온 과거와 내가 겪었던 모든 문제들의 해답이 풀렸습니다. 그 순간 내 인생에 커다란 소망이 내속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완전 바뀌었습니다. 삶의 방향도 삶의 목적도 바뀌었습니다. 소망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도 중요하지만 하나가 더 우선성이 있다고 하십니다. 믿음도 소망도 중요한데 그것보다 더 우선이고 더 귀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일까요? 마22:37절 이하를 보세요.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왜일까요? 왜 사랑이 제일인지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사랑이 없이는 믿음이나 소망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소망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없이는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 기억하시나요? 고전13:2절을 보세요.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 대단하지요? 그럴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소망이란 헛된 꿈이라는 것입니다.
2)믿음과 소망은 방편이지만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이고 소망은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말했습니다. 요일4:7절을 아시지요?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아멘?
성경 그 어디에 “하나님은 믿음이시다.” “하나님은 소망이시다” 하신 적이 있나요? “하나님이 믿으신다.” “하나님이 소망하신다”
영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이것은 말이 됩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믿음이나 소망보다 더 고상하고 차원이 높은 것입니다.
3) 믿음과 소망은 나 중심이지만 사랑은 하나님 중심입니다.
믿음도 내 구원을 위한 것이고 소망도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을 말하고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미 나를 떠나 타인과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사랑은 내가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러기에 결론적으로 말하면 믿음과 소망은 이기적이지만 사랑은 이타적인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최고인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에로스 사랑 속에 태어나고 스톨게 사랑 속에 자라고 필레오 사랑 속에서 성숙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이 있을지라도 아가페 사랑이 없다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사랑은 아가페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랑을 소유하고 살 수 있을까요?
1) 사랑의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생기고 사랑이 우리 속에 생기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사랑은 무의한 것입니다.
2)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인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아시지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입니다. 그 첫째가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성령님이 나를 전인격적으로 지배할 때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3) 사랑이 풍성해 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은 기도로 풍성해 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빌1:9절을 보세요.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무슨 말씀인가요? 사랑은 기도할 때 자란고 더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고정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4)사랑을 실천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받은 사랑은 가지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실천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힘써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제일 큰 장애물은 내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입니다. 그 이기심만 이기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를 않습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이 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수고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대가지불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은 영원하고 사랑은 완전하며 사랑은 최고의 은사인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을 받았다고 말은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 응답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그 사랑이 있나요? 여러분은 그 사랑을 받았나요?
기도합시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