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서 지위가 정해집니다. 지위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르고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이 각기 다릅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열심히 생활하다가 죽으면, 그 사람의 생전활동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직위를 명정에 적어 관 위에 덮어 장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증산상제님은 이 세상에 옥황상제님의 위격으로 오시어 신명계와 인간계를 아우르는 천지공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9년동안 천지공사에 수종을 들었지만, 증산상제님의 진면목을 생전에 진정으로 완전하게 이해하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제자들은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부리는 신인(神人) 정도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산상제님께서 1909년 음력 6월 24일 천지공사를 마치시고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증산상제님을 옥황상제의 위격으로 명정을 쓰지 않고 초빈(가묘)에 임시로 모시어 장례를 치렀던 것입니다.
증산상제님의 위격을 처음으로 옳게 밝히신 분이 고판례 수부님이십니다. 증산상제님의 명실상부한 정음정양의 부인으로서, 1910년 9월 초에 증산상제님의 옥체를 모신 구릿골 초빈을 찾아, 증산상제님께서 백로지쪽에다 옥황상제라 써주신 것을 명정으로 대신하여, 옥황상제의 예로 초빈에 제사를 지내셨습니다.
@ 경술년(1910) 9월초 어느날 저녁에 고천후 주문을 읽으시더니, 광명 속에 문듯 대흥리로 부터 구릿골까지 가는 길이 나타나며, 구릿골 뒷산에 초빈(草殯)이 보이고 초빈나래 두모습에 시추물 묻은 것까지 보임으로 크게 의혹하시더니, 그 이튿날 저녁에 문득 증산상제님께서 들어오셔 일러 가라사대 "내가 죽었는데 네가 어찌 나의 묻힌 곳을 찾아 보지 않느냐." 하시거늘, 천후 대하여 가로대 "어찌 상서롭지 못한 말씀으로 희롱하시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죽었노라." 하시고, 손으로 천후의 등을 어루만지시고 손을 잡으시며 이별가 한 곡조를 크게 불으신 뒤에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가시며, 문득 보이지 아니하신지라. 천후 크게 의혹하사 윤경을 안내성의 집에 보내어 경석을 불러오사, 증산상제님의 종적을 물으시고 찾아가자 하시니, 경석이 가로대 "증산상제님께서 며칠 전에 남경으로부터 구릿골로 돌아오사 큰 공사를 보시는데, 다만 한 사람만 출입하며 수종들게 하고 다른 사람은 누구든지 출입을 금하시니, 그러므로 가뵈옵지 못하나이다." 하는지라. 천후 할 일 없어 고민으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에 분 한 갑과 독약 한 봉과 이왕에 증산상제님께서 주신 흰바둑 한 개와 진주 한 개와 총전 칠분과 적은 백로지쪽 마른 것을 담은 엽낭을 가지고, 새벽빛을 타서 아무도 알지 못하게 사립문을 나서시니, 적막한 천지에 어스럼이 남았고 북으로 터진 빈들에 찬 기운만 돌 뿐이라. 삼십평생 첫 출입에 구릿골이 어데인지 방향을 알 바 없고, 오직 전날 밤 광명속에 나타났던 큰길로 초빈 한 곳을 바라보고 가시나, 걸음이 빨라져서 팔십 리를 한나절에 당도하시니라.(천후신정기 pp16-17)
@ 경석은 천후께서 계시지 아니함을 알고, 놀래어 이웃집에 물어도 아는 자가 없고, 뒷들에서 새벽일하든 농부가 말하되 "이른 새벽에 천후께서 정읍통로로 급히 가는 것을 보았노라." 하거늘, 경석이 아우 윤칠과 함께 급히 뒤를 쫒아 태인 도창고개 밑에 이르러 천후를 만나게 된지라. 드디어 천후의 몸을 수색하여 독약을 빼앗고 이에 여쭈어 가로대 "누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시나이까. 증산상제님이 지금 중대한 공사를 보시는 중인데 부르시는 명령이 없이는 절대로 오지말라고 기별하셨으므로, 아우도 이제까지 가뵈옵지 못하고 부르시는 명령이 속히 있기만 고대하는 중이거늘, 이제 졸연히 가 뵈오면 누님은 고사하고 아우에게도 큰 꾸지람이 있으리니 어떻게 감당하시려 하나이까. 바라건데 이길로 돌아가서 일간에 명령이 있기를 기다리사이다." 하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하되, 천후 굳이 듣지 아니하시고 걸음만 계속하시니 경석형제도 할 수 없이 뒤를 따르니라.(천후신정기 p18)
@ 원평에 이르사, 윤칠에게 명하여 약간의 주과포를 준비하여 들리고, 길을 버리고 논두둑과 밭두둑으로 걸어서 솔개봉 위 장탯날에 올라 초빈앞에 당도하사, 윤칠에게 나래를 헤치라고 명하시니, 경석이 가로대 "남의 초빈을 헤치다가 초빈 임자가 바라보고 달려와서 힐란하면 어찌하려나이까. 바라건대 속히 돌아가사이다."하며 굳이 간하되, 천후 들은 체도 아니하시고 몸소 헤치기 시작하시거늘 경석이 할 수 없어 윤칠을 명하여 초빈을 헤치고 널 천개를 떼니, 증산상제님의 용모는 아직 상하지 아니하신지라. 천후 가지고 왔던 진주를 입술 안에 넣고 한삼을 가슴에 덮고 그 위에 백로지쪽('옥황상제'라 썼음)을 덮고 천개를 다시 덮은 뒤에, 준비하여온 주과포로 전을 올리고 초빈을 다시 봉하시니라. 김형렬이 바라보고 종도 십여 인과 함께 나와서 천후를 맞어 들어가니라. 천후 형렬의 집에서 이틀동안 쉬시고, 경석과 윤칠과 함께 고부 와룡 신경수의 집에 이르시니, 마침 시아버지께서 오셨거늘 인하여 수 일동안 머무르시다가 대흥리로 돌아오시니라. (천후신정기 pp18-19)
고수부님이 증산상제님의 옥체에 옥황상제라는 명정을 올려놓고 제사 지내는 장면을 목도한 제자들은, 그동안 증산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수종들면서 나름대로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겠지만, 그제서야 증산상제님이 이 세상에 옥황상제의 위격으로 오셔서 천지공사를 하시고 돌아가셨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입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고수부님으로 하여금 초빈을 헤치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당신의 옥체에 옥황상제라고 쓴 백로지쪽을 명정으로 사용하여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은, 강증산이 명실상부한 옥황상제이심을 천지에 선포하도록 한 것입니다.
고수부님이 강증산을 옥황상제로 제사지낸 이후, 비로소 제자들은 증산상제님을 옥황상제의 위격으로 받들어 모시면서 고수부님의 지도하에 태을주 포교에 전념하게 됩니다.
첫댓글 옥황상제님의 위엄함을 알수 있을것 같습니다.
"1910년 9월 초에 증산상제님의 옥체를 모신 구릿골 초빈을 찾아, 증산상제님께서 백로지쪽에다 옥황상제라 써주신 것을 명정으로 대신하여, 옥황상제의 예로 초빈에 제사를 지내셨습니다. "
"고수부님이 강증산을 옥황상제로 제사지낸 이후, 비로소 제자들은 증산상제님을 옥황상제의 위격으로 받들어 모시면서 고수부님의 지도하에 태을주 포교에 전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