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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정사
 
 
 
카페 게시글
선- 개론,심층고찰 스크랩 禪佛敎 공부 5
원명 원적 추천 0 조회 114 18.09.30 14: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禪佛敎 공부 5


단비구법斷臂求法 팔을 잘라 바치고 법을 구한다.

 

: 제 마음이 平安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제발 제 마음을 安定시켜 주십시요

: 어디 자네 마음이란 걸 내놓아보게. 그러면 내 그것을 鎭靜시켜줌세.


: (한참 동안의 沈黙이 흐른 뒤

     오랫동안 마음이란 걸 찾아보았으나 發見할 수가 없었습니다.


: 내 이미 자네 마음에 平安를 주었네.

 

初祖 達磨2慧加禪問答이다

問答話頭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한다.

 

정문입설도程門立雪圖나라 이후 東洋畵畵題로 많은 畵家들이 즐겨 그려오는 그림이다. 北宋의 거유巨儒 정이천程伊川(정자)과 그의 제자에 얽힌 정문입설程門立雪이라는 古事가 있다.

 

達磨慧加禪問答安心法問이 뜻하는 바를 살펴보자

우선 이 話頭禪宗史에 엄청난 意味를 갖는 새로운 두 가지 기원紀元을 이룩했다


하나는 스승이 제자를 認可하고 을 부촉咐囑法脈을 이어가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전등傳燈이라는 傳統이다. 達磨慧加에게 을 부촉한 것이 最初전등傳燈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의 實體的 存在否定함으로써 禪學典型的 不定法(卽非論理)’誕生시킨 母體가 되었다. 또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다는 安心法問의 심요心要는 훗날 마조 때부터 本格化심지법문心地法門母體가 되었다


慧加가 한사코 찾아내 安定시키려 한 마음은 本來의 참된 마음이 아니고 思惟라는 造作에 의해 생겨난 이른바 妄想, 妄念이다.

 

眞心恒常 平和롭다. 따라서 眞心에는 不安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眞心思惟主體. 그러나 그 主體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고 또 그것에 관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면 眞心이라는 主體는 이미 對象化 되어 버리고 만다

이처럼 對象的 客體가 되어버린 마음은 眞心이 아니다

達磨가 말하고자 하는 心要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가 벌써 진정鎭靜 되었다고 말한 對象慧加가 그러한 생각을 일으키기 전의 眞心을 가리킨다. 그것은 언제나 평화롭기 때문에 진정시키고 말고 할 것이 없이 恒常 고요古謠하고 安定되어 있다. 말하자면 眞心에는 鎭靜이라든가 安心이라든가 하는 것이 필요 없다. 그 본질이 鎭靜이고 安心이기 때문이다.


達磨慧加가 잘못 對象化 하고 있는 마음의 本體를 깨우쳐주기 위해 그 마음이란 것을 내보이라고 요구했다. 達磨慧加가 말하는 마음이 한낱 幻想에 지니지 않는 對象化된 마음이라는 것을 스스로 發見하도록 하기 위해 그 같은 要求를 한 것이다.

 

慧加마음을 끝내 發見할 수 없다不定法을 통해 告白한다.

不定法아니오를 구분하는 單純 不定이 아니다

萬物은 한 뿌리[萬物一體]라는 그것과 不定分別이 없는 絶對肯定을 얻기 위한 通路이다. 論理學에서도 不定不定肯定이 된다.

 

마음이란 없다. 그러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으나 實在하는 絶對肯定性을 갖게 된다.

 

이렇게 絶對肯定到達하기 위한 不定法日本世界的禪學者 스즈키 다이세스는 卽非論理 즉비의 논리라는 이름을 붙여 하나의 禪學用語定立했다.

 

卽非金剛經에 나오는 

반야는 반야가 아니다. 그러므로 반야다[第一破羅密 卽非第一波羅密 是第一波羅密]”

라는 論法을 말한다. AA가 아니다. 그러므로 AA다라는 논리다

卽刻的無限否定을 통해 到達하는 絶對肯定이다

이기 때문에 라는 老莊存在論도 같은 脈絡이다.

 

達磨末後句 

네 마음을 찾을 수 없다면 (妄念의 마음이란 것이 存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네 마음은 이미 平安해졌다

는 엉뚱한 듯한 이 한마디는 慧加潛在해 있던 直觀的 知覺을 일깨웠다

慧加는 그 直觀을 통해 眞心이라는 實體發見, 깨우침에 到達한다.


眞心이란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무심無心이다

善惡, 凡聖, 高低, 長短二分法的으로 區分하는 固定化觀念的 思惟世界를 떠나서 一切分別心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無心이다.

 

그냥 단순히 分別心이 없는 것이 아니다

分別立脚해서 分別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分別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善惡區分執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같은 無心에는 이미 투철透徹(透彻)지성知性이 잠재潛在해 있다는 前提를 잊어서는 안 된다. 즉 마음의 본바탕은 오직 깨끗하고 正義롭고 平和로울 뿐이다


이러한 마음 바탕을 維持하는데는 徹底知性的 認識(认识)判斷이 늘 밑받침되어 있는 것이다. 은 마음을 흔히 虛空比喩한다. 텅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包容하는 虛空本質이 곧 마음의 本性이며 特徵이라는 것이다.

 

慧加達摩에게 마음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고 한 告白은 깨우침의 외마디 소리다

慧加불가득不可得이라는 對答現像界에서 物件을 손에 쥐거나 찾는 次元이 아니다. 마음은 흔히 우리가 日常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고 쇼핑을 하는 것과 같은 可視的, 形相的 發見不可能하다.

 

따라서 慧加對答不可得한 것自體가 마음이라는 깨달음의 表現이다

達摩는 그의 對答現象界不可得次元이었다면 絶對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네 마음은 이미 平安 해졌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達摩安心法問4道信에게까지 이어진다

2慧加3僧瓚問答, 傳燈도 똑같은 구도다.


: 저의 를 깨끗이 씻어 주십시오.

: 참회懺悔할 죄를 어디 한번 내놓아보아라.


: 죄를 찾아보았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 , 이제 자네의 죄를 사했다.

 

40이 넘은 승찬僧瓚慧加를 찾아가 거량한 禪問答이다

승찬조사僧瓚祖師는 당시 나병환자였다. 자신의 병이 罪業 때문이라고 믿는 僧瓚은 그 를 참회를 통해 용서받음으로서 병을 고치고자 했다.


慧加僧瓚問答에서는 達磨慧加問答에 나오는 마음로 바뀌었을 뿐이다.

3僧瓚4道信問答도 역시 같은 構造이다.

 

: 자비慈悲를 베푸시어 속박束縛으로부터 벗어나 解脫에 이르는 法問을 해주십시오.

: 누가 너를 束縛 했느냐?


: 아무도 저를 結縛하지 않았습니다.

: 그렇다면 무슨 解脫을 구하는가. 束縛이 없다면 이미 解脫한 것이다.

 

僧瓚祖師道信祖師問答에서는 마음’ ‘束縛으로 바뀌었다

마음이 온갖 생각으로 束縛되어 있으면 凡夫이고 煩惱妄想의 삶이다

煩惱妄想이라는 마음의 拘束을 풀면 그게 바로 解脫이다.


初祖達磨에서부터 4道信에 이르는 佛法의 요체要諦는 한결같이 심법心法을 전하고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이다.

 


모든 존재는 그림자와 같다.


: 男子 그대로가 男子가 아니고 女子 그대로가 女子가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 이법理法立場에서 보면 男女性別은 전혀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을 나누어놓았을 뿐 男女의 모습에 대한 구별을 超越했기 때문이다. 색정色情에 현혹眩惑된 사람은 이 原理를 모르고 함부로 男女의 모습을 妄想하지만 그것은 眩惑속의 男女에 불과 할 뿐 실제로는 아무런 內容도 없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는 이를 가리켜 

一切存在가 그림자와 같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뛰어난 사람이다

라고 했다.

 

達磨와 한 제자의 問答이다. 達磨說破하고 있는 內容核心男女 分別이란 理法대로 相對를 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환영幻影이며 妄想이라는 것이다.

 

肉體的 構造와 정서情緖등의 現象界로는 분명히 男子女子區別이 있다

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世俗 現實이다.


그래서 達磨男女分別不定하는 前提이법理法明示했다

理法이란 現象界 뒤에 숨어 있는 本體界를 꿰뚫어보는 智慧


그림자에 불과한 森羅萬象現象界를 만들어내는 本體界本性은 공, 무상無常

무작無作, 무생無生, 무소유無所有.


本體 自體이라면 本體의 그림자인 現象界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라고나 할까. 이것이 意味하는 바는 修行者現實生活은 이같은 이라는 바탕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現實生活 속의 修行者 像은 이처럼 모든 分別心을 뛰어넘은 絶對空位置해야 한다.

 

가령 꿈속에서 色慾을 느껴 男女 성애性愛의 즐거움을 만끽하더라도 거기에 실제로 女性은 없다. 지계持戒와 파계破戒라는 것도 꿈속의 일과 같다.

실제로 持戒破戒도 없어야 道人이요 解脫이다.

 

이것이 達磨가 마지막으로 說破

“[지제법여환화知諸法如幻化] 一切存在가 그림자와 같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禪思想은 여기서 부터 만물일여萬物一如만물일체萬物一體思想說破했다.

萬物一如 思想達磨佛敎의 것이기 이전에 이미 中國固有傳統思想이었으며 老子莊者도 거듭 强調한 바 있다.


萬物은 뿌리로 돌아가면 하나이다

, , 持戒破戒根源的 本質에서는 하나이다

하나라는 本體는 공. 이다.

 

達磨引用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탐욕貪慾이 그대로 열반涅槃이라고 說破하고 있다. 煩惱와 보리, 貪慾涅槃根源으로 돌아가면 하나라는 이야기다

유마경이라는 大乘經典도 똑같은 論理展開했다.

 

問答話頭로는 즉남비남卽男非男이라고도 한다. 간단한 問答 같지만 그 속에는 후일 禪思想重要한 기둥을 이루는 공관사상空觀思想, 萬物一切思想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직 問答形式敎學的 說法家風이며 經典依支해 깨우침을 얻으려는

자교오종藉敎悟宗의 단계段階.

 

達磨禪思想1908년 돈황에서 발굴된 약변대승입도사행론略辨大乘入道四行論에 잘 要約되어 있다. 통칭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으로 불리는 이 책은 그의 제자 담림이 서를 붙여 記述한 것으로 達磨說法을 담은 가장 오래 된 唯一文獻이다

통상 達磨語錄이라고도 한다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이외의 記錄들은 後代創作이라고 보아야 한다.


達磨 禪思想核心二入四行論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眞理에 이르는 方法에는 原理的 方法인 이입理入實踐的 方法인 행입行入 두 가지가 있다. 經典依據佛敎 大義把握하는 것[자교오종藉敎悟宗]理入이다.

 

行入의 네 가지 實踐德目은 보원행報怨行, 수연행隨緣行, 무소구행無所求行, 칭법행稱法行이다

 

이입理入實踐은 모든 衆生이 똑같이 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涅槃經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에 바탕한 佛性平等論確信, 面壁坐禪을 통해 作爲를 없애고 적정寂靜에 드는 解脫成就하는 것이다.

 

行入報怨行은 지금 내가 격고 있는 肉體的 苦痛이나 精神的 苦惱가 모두 前生의 죄업[숙앙宿殃] 때문이라고 믿고 결코 怨望하거나 辨明하지 않고 달게 甘受하는 것이다

經典괴로움을 당해도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의 意識은 깊이 根本에 통해 있으니까라고 說破한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서 過去에 지은 에서 생겨난 怨望에 따르는 苦痛甘受하면 怨望을 계기契機로 해서 도에 들어설 수 있다


報怨行過去에 지은 이라는 빚을 갚는다는 論理構造

그래서 禪學에서는 이를 환채사상還債思想 또는 상채사상償債思想이라고도 한다.

敎學的으로는 因果應報說, 業報思想이다. 現世에 겪는 苦痛前生의 숙채宿債(묵은 빚)를 갚는 일로 생각하라는 이야기다. 前生은 자기가 태어나기 이전 아득한 공겁空劫歲月, 祖上代代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禪宗 2慧加祖師가 산적들에게 왼팔을 잘리우고도 그 苦痛을 달게 甘受하며 이겨낸 것은 이러한 還債思想實踐한 하나의 事例이다.

 

둘째 實踐行隨緣行變化無雙한 삶의 條件들과 形便適應하는 규범規範이다

쉽게 말해 現實 收用原理이며 世俗 衆生과 더불어 살아가며 삶을 肯定하는 思想的 밑받침이요 知慧.


敎學的으로 說明하면 諸法無我緣起論이다.

어떠한 權力이나 名譽를 얻더라도 現在 그것을 갖고 있으나 緣分이 다하면 다시 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갖고 조금도 기뻐하거나, 날 뛰지 말아야 한다. 世俗成功失敗는 모두 因緣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자신의 마음 자체에는 아무런 증감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沈黙하는 가운데 眞理到達하는 것이 곧 隨緣行이다.


隨緣行무심無心實踐 倫理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隨緣行 에 맡기면 無心이 정태적靜態的無意識에 머물지 않고 慾心 때문에 煩惱를 낳는 行動을 자제하는 積極的인 구실을 한다. 여기서 無心은 비로서 動的知慧哲學으로 人間行爲倫理性道德性高揚시키는 엔진 役割을 하게 된다.

 

셋째, ‘無所求行一切 存在實體가 없는 이라 보고 모든 物質的 慾心을 버리라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無所有 思想이다.


經典에도 무엇을 바라고 한다는 것은 모두가 괴로울 뿐이며 오직 아무 것도 하는 바가 없는 것이 바른 佛法, 眞理實踐임을 强調한 것이 바로 無所求行이다.

 

넷째, ‘稱法行萬物本質은 원래 청정淸淨하다는 原理를 깨닫고 자리이타自利利他大乘 菩薩行을 행하는 것이다.


萬物의 청정성淸淨性을 있는 그대로의 存在 또는 여여如如라 한다

如如을 살아가는 實踐에는 自己, 相對, 財物이라는 세가지가 본디부터 이라는 공관사상空觀思想이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菩薩行6바라밀 實踐하는 바가 없이 하는 무주無住, 무상無相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達磨二入四行論敎學的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러한 初期 습선기習禪期 禪宗家風4조 도신에 이르러서야 頓悟 禪宗의 길로 들어선다.

 

 

묵연무어黙然無語 말없이 침묵하다.


달마 : 각자가 깨달은 바를 말해 보라.


도부 : 제 생각으론 言語文字執着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그것 없이 지낼 수도 없습니다文字란 도를 깨닫는 道具로만 使用해야 할 줄 압니다.

달마 : 자네는 나의 살갗을 얻었군.


총지 : 지금의 제 堅持로는 아난다가 아크쇼브야의 佛國土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佛國土를 단 한 번 보았을 뿐 다시는 보지 못했으니까요.

달마 : 그대는 나의 살을 얻었도다.


도육 : 4(地水火風)本來 空虛하고 5(眼耳鼻舌身)이 모두 架空的인 것입니다.

世上不變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달마 : 자네는 나의 뼈를 얻었군.


혜가 : (입을 열지 않는다, 다만 공손히 허리만 굽혀 예를 올린 후 자기 자리에 不動姿勢로 서 있다.)

달마 : 그대는 내 골수骨髓를 얻었네.

 

達磨가 자신의 천화遷化를 예감豫感하고 4명의 제자를 불러 각자 깨우친바 得心을 피력披瀝해 보도록 한 問答이다.


원래 禪宗은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네 句節簡明하게 그 宗志를 천명闡明 한다.

經典 밖에 별도別途로 전해오는 바가 있으니, 文字를 통한 說明에 의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 바로 가리켜 원래의 本性을 깨우침으로서 부처를 이룬다는 이야기다

 

이는 禪佛敎特徵說明하는 명구名句 또는 敎宗과의 差別化를 밝히는 禪宗代表的 文句로 자주 引用된다.


慧加對答은 아주 禪的이다. 佛法이란 言說說明할 수 없는 思量分別超越한 언어도단言語道斷世界에 속한다. 그래서 佛敎至極眞理沈黙이나 절[]같은 行動言語를 구사해 表現한다. 慧加가 허리를 굽혀 절을 올린 것은 佛法原點, 根本을 말하며 不動姿勢는 자성본체自性本體象徵한다.

 

이같은 묵연무언黙然無言老莊眞理觀이기도 하다老子達磨보다 훨씬 앞서

지자불언知者不言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언자부지言者不知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라 설파했다.

 

達磨慧加에 대한 平價는 자신의 자리를 慧加에게 물려준다는 宣言이기도 하다.

禪宗傳燈은 전법게傳法偈와 전의부법傳衣付法이라는 또 다른 傳統을 만들어 냈다.

傳法偈란 제자의 實力認定하는 짤막한 를 말하는데 오늘날의 卒業狀 또는 學位受與와 같은 것이다.

 

오본래자토吾本來玆土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전법구미정傳法救迷情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 건질 뿐

일화오개엽一花五開葉 꽃이 피어 다섯 잎 피우면

결과자연성結果自然成 열매가 자연히 맺히리!!!

 

達磨慧加에게 준 傳法偈.

 

셋째 구절 일화개오엽一華開五葉唐末 五代禪宗 전성기에 꽃피운 5(潙仰, 曹洞, 臨濟, 雲門, 法眼宗)豫言한 것이다.

 

꽃과 종자는 땅에서 나고

땅으로부터 종자와 꽃이 나지만

만일 종자를 뿌리는 사람 없으면

꽃도 땅도 생겨나지 않는다.“

 

2慧加3僧瓚에게 내려준 傳法偈이다.


近代 韓國佛敎中興祖 경허선사(1849-1912)1912. 4. 25 함경도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글방 훈장 박난주朴蘭舟의 봄날 양지바른 서당 담 밑에서 홀연히 죽었다

다음은 경허선사의 臨終偈이다.

 

심월고원心月孤圓 마음 달 홀로 둥글어

광탄만상光呑萬像 그 빛 만상을 삼켰구나

광경구망光境俱忘 빛과 경계 다 잊었거늘

복시하물復是何物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


다음은 경허선사의 다비에 법제자 만공이 읊어 바친 偈頌이다.

 

구래시비여여객舊來是非如如客 예로부터 시비가 여여한 객이

난덕산지겁외가難德山止劫外歌 난덕산에서 겁 밖의 노래 그쳤네.

려마소진시모일驢馬燒盡是暮日 나귀와 말 불살라 다한 이 저문 날에

불식두견한소정不食杜鵑恨小鼎 먹지 않은 두견새 솥 적다 한을 하네

 

慧加禪思想명심견성明心見性으로 要約할수 있다.

마음은 생각을 일으키는 主體.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생각[]이 바로 現像이다.

本質이고 염現像이다

現像을 만들어 낸 생각의 本質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 現像에 이끌리지 않고 마음의 性品淸淨性을 따라 行動하는 것이 明心見性이다. 이것이 禪宗 宗志核心이다.

 

두타頭陀, 두수抖數털어 버린다는 뜻이다

, , 에 대한 貪慾愛着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淸靜하게 지키는 修行을 말한다.

 

頭陀行 에는 다음과 같은 12조의 生活戒律이 있다.

 

1. 재아난약처在阿蘭若處 조용한 거처에 머무름

2. 상행걸식常行乞食 언제나 걸식을 할 것

3. 차제걸식次第乞食 걸식하는 집의 가난과 부를 따지지 않음

4. 일수일식법一受一食法 하루 한 끼만 먹음

5. 절량식節量食 발우안의 음식만 먹음

6. 중후부득음장中后不得飮漿 오후에는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음


7. 착폐납의着弊衲衣 폐품으로 버린 천을 모아 만든 옷을 입음

8. 단삼의但三衣 세 벌의 옷 이외 지니지 않음

9. 총간재塚間在 묘지에 주거함

10. 수하지樹下止 나무 아래서는 멈춤

11. 로지좌露地座 공지에 자리 잡음

12. 상좌불와常坐不臥 항상 앉아 있음

 

禪家長坐不臥, 午後不食 등과 같은 규식規式은 이미 慧加頭陀禪에서부터 確立傳統이다.


頭陀行坐禪과 모든 생각을 일으키는 主人公인 마음을 그 本來대로의 淸靜性, 道德性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하려는 明心見性2祖 慧加家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능가종의 습선習禪은 아직도 經典에 의지하는 자교오종藉敎悟宗段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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