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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마을 ‘국동’, 국화 가득한 집 ‘유화당’ (1)
프롤로그
하늘에서 내려다 본 도남동 모습은 남북으로 길쭉하게 형성된 골짜기 형태를 하고 있다. 남쪽에 국우동행정복지센터가 있고 북쪽에 도남지가 있다. 도남지 못 둑 바로 아래에 마을이 하나 있다. 자연부락명 ‘사창리’, 별칭으로 ‘국동菊洞’이라 불리는 마을이다. 국동은 한자 지명인데 우리말로 하면 ‘국화 마을’이다. 앞서 여러 번 언급한 ‘국동 문중’이 바로 이 국동을 세거지로 하는 문중이다.
국동은 아직도 마을주변에 논과 밭이 있어 시골 느낌이 난다. 하지만 전통마을이라 부르기는 힘들다. 옛 모습을 많이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마을 중심부에는 아직도 두 채의 고가가 남아 있다. 사람들이 인천이씨 ‘재실’ 혹은 ‘종택’이라 부르는 유화당과 남호정사다. 이번에는 이 두 고가 중 인천이씨 재실로 불리는 유화당에 대한 이야기다.
누·정·대·당·재·사·헌·각·묘·사
우리나라 전통건물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궁·전·누·정·대·당·재·사·헌·각·묘·사’ 등이 있다. 이는 건물의 용도에 따른 구분으로 우리나라 전통건물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개념이다. 앞으로 이야기해야 할 유화당·정효각·남호정사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니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궁宮은 왕조국가시대에 왕의 거처와 국정을 집행하는 관청들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전체 규모가 100칸을 훨씬 넘는 대규모 건물로 흔히 궁궐·궁전·대궐이라 부른다.
전殿은 전통건물 중에서 격이 가장 높은 건물이다. 왕이나 대신大神이 머무는 곳으로 규모 역시 크고 웅장하다. 조선시대 국왕의 정전인 근정전, 공자를 모신 대성전,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등이 해당한다.
누樓는 기둥을 세워 건물 바닥을 높이고, 높인 건물 바닥에 마루를 설치한 2층 형태 건물이다. 대체로 지대가 높고 경관이 좋은 곳에 세웠다. 다른 말로 누각·누옥·누관·누대·대각·층루라고도 한다. 누와 비슷한 것으로는 누문도 있다. 1층은 출입문, 2층은 마루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대구 북구에는 산격동 구암서원 연비루, 동변동 원장루 등이 있다.
정亭은 잠시 머물면서 자연을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 건립한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벽 또는 창을 갖춘 형태도 있고, 벽 없이 사방이 툭 트인 형태도 있다. 정자라고도 하고 누와 합쳐 누정이라고도 한다. 대구 북구 검단동 금호강가 압로정, 서변동 서계서원 내 환성정과 서계서원 뒤 백운정 등이 대표적이다.
대臺는 높은 지대에 흙이나 돌 등을 쌓아 사방을 조망할 수 있게 만든 단, 혹은 누정 형식의 건물이다. 산격동 옛 경북도청 앞 신천변 용대龍臺, 사수동 금호강변 관어대 등이 있다.
당堂은 일반적으로 방과 대청 등 주거형식을 모두 갖춘 건물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비슷한 것으로는 별당도 있는데 이는 특별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본체에 별도로 딸린 건물을 말한다. 도남동 유화당, 동호동 낙금당, 서변동 모선당, 산격동 체화당 등이 있다. 그런데 다른 유형들도 마찬가지지만 전통건물 유형은 그 구분이 무 자르듯 정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도남동 유화당은 재실도 되고, 별당도 되고, 서당도 되기 때문이다.
재齋는 용도가 무척 다양한 건물이다. 크게 구분하면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공부방이나 기숙사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다. 주로 성균관·향교·서원 등의 동재·서재처럼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소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산격동 구암서원의 동재 경례재, 서재 누학재 등이 있다. 둘째는 적당한 터에 집을 짓고 한가롭게 거처하는 연거나 교육공간으로 사용하는 경우다. 관음동 관천재와 봉서재 등이 있다. 셋째는 제사를 앞두고 행동과 마음가짐을 조심히 하는 재계齊戒·齋戒, 또는 제사를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다. 읍내동 원모재, 서변동 도례재, 도남동 도남재 등이 있다. 그런데 이처럼 여러 유형의 재실에도 공통점이 하나 있다. 대부분 재실은 특정 인물을 추모하고 기리는 목적에서 건립되었다는 점이다.
정사精舍는 재와 기능이 중복된다. 굳이 구분을 한다면 재계나 제사보다는 연거나 강학에 좀 더 비중을 둔 건물이다. 태전동 매강정사, 사수동 사양정사, 국우동 도남정사, 도남동 남호정사 등이 있다.
헌軒은 대청을 갖춘 큰 건물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과거 행정구역인 군·현 등 고을수령이 사용하는 관아 건물을 가리키기도 하고, 넓은 대청과 창·처마를 갖춘 일반 개인집을 가리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창과 처마가 있는 집을 ‘헌’이라 하고, 큰 마루가 있는 집을 ‘청廳’이라고 한다.
각閣은 석축이나 단상 위에 높게 세운 건물로 건물의 격으로 보면 상당히 높은 건물이다. 하지만 건물의 격이 높다고 해서 건물의 규모도 무조건 큰 것은 아니다. 정려·비·영정 등을 보호하기 위해 건립한 정려각·비각·영각이나 사찰의 산신각처럼 소규모 건물도 많기 때문이다. 노곡동 태충각, 서변동 이우당 내 영정각, 노곡동 황씨동원각 등이 있다.
묘廟·사祠는 신주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이다. 문묘·사당·사우·묘우라고도 한다. 칠곡향교 문묘, 매천동 매양서원 상현사, 서변동 서계서원 숭덕사, 노곡동 화암서원 숭의사, 읍내동 원모재 숭덕묘 등이 있다.
‘○○댁’ · ‘△△당’, 택호와 당호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했던 말 중에 ‘택호宅號’라는 것이 있었다. 진사댁·교리댁·교장댁·웃갓댁·무태댁·옻골댁 같은 것이다. 이는 집주인의 벼슬이나 그 집 안주인의 친정마을 이름 따위를 붙여 집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당호堂號니 헌호軒號니 하는 말도 있다. 특정인이 거주했던 당이나 헌 이름을 택호처럼 사용하거나 아니면 사람의 호로 사용하는 경우다. 우리 지역에서는 관음동 관천재 주인 배석하를 관천재, 서변동 이우당 주인 이경을 이우당, 백운정 주인 이화상을 백운정, 물소재 주인 구재서를 물소재, 금서재 주인 이석규를 금서재라 칭하는 예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택호와 당호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택호가 여성과 일반인을 우선으로 하는 표현이라면 당호는 주로 남성과 상류층을 우선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당호로 불리는 집들은 대체로 그 집 주인 또는 선조가 유명인이었던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벼슬을 했든지 아니면 학문과 덕행 등으로 세상에 이름났던 이들의 집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런데 택호는 좀 다르다. 당호가 유명인의 집 이름이라면 택호는 평범한 사람들의 집 이름이었다. 과거 우리가 사용했던 택호 대부분은 그 집 안주인의 친정마을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예를 들어 산격동에 사는 남자가 도남동에서 시집온 여인과 혼인을 하고 나면, 남들은 그 남자 집은 ‘산격댁’이 아닌 ‘도남댁’이란 택호로 불렀다. 남성 중심 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 한 집을 가리키는 이름이 그 집으로 시집온 여인의 친정 마을이름으로 불린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조선시대를 살다간 우리나라 여인들의 이름은 좀처럼 알기 어렵다. 기록에도 없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름도 없다. 분명 살아생전에는 이름을 사용했을 것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죽고 나면 하나 같이 김해김씨, 안동권씨처럼 ‘본관+성씨’로만 표기된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이름이 알려진 극히 일부 여성도 있긴 하다. 여성군자로 칭송받는 음식디미방 저자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 천재 여류문인으로 알려진 허균의 누나 난설헌 ‘허초희’ 같은 경우다.
여하튼 이런 사례를 참고해보면 택호란 것이 참 묘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여인들은 시댁은 고사하고 친정집 족보에조차 자신의 이름 대신 남편의 성명이 등재되었고, 죽어 땅 속에 묻힐 때도 성명이 아닌 ‘본관+성씨’가 다였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슨 연유로 시집 간 집 이름에는 여성의 친정마을 이름을 붙였던 것일까?
택호에 여성의 친정마을 이름을 붙인 이유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필자 생각으로는 과거 우리나라 전통혼례문화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 초·중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혼례풍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여자가 남자 집으로 시집을 오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를 가서 살았다. 이런 혼례문화를 어려운 말로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사위가 부인 집에서 산다는 뜻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부터 혼례문화가 바뀌게 된다.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가던’ 것이 ‘여자가 남자 집으로 시집오는’ 것으로 바뀐 것. 혼례문화 하나가 바꿨을 뿐인데 이로 인해 조선사회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처가살이가 시댁살이로, 여러 성씨가 모여 살던 각성마을이 동성마을로, 아들·딸 동등하게 재산을 상속 받고, 자녀들이 돌아가며 제사를 모시던 것이 모두 장남 위주로 바뀐 것이다.
택호 역시 여기에서 유래된 것 같다.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던 시절. 아들을 여럿 둔 남자 집에서는 장가 간 아들네를 지칭할 때 어떻게 불렀을까? 혹시 처가동네 이름을 붙인 택호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아들이 세 명 있는데 1남은 안동으로, 2남은 경주로, 3남은 성주로 장가갔다 치자. 남자 집 쪽에서 그들을 지칭할 때 각각 안동댁, 경주댁, 성주댁으로 부르지 않았을까. 그런데 조선 후기 여자가 남자 집으로 시집을 오면서부터 동네에 변화가 생겼다. 여러 성씨가 모여 살던 각성마을이 서서히 한 성씨만 모여 사는 동성마을로 바뀐 것이다. 이때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같은 성씨만 모여 사는 마을에서 특정 집을 지칭할 때, 그 집 안주인 친정마을 이름을 붙인 택호만큼 효율적인 것이 있었을까? 아마 이런 이유로 택호에 그 집 안주인 친정마을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 택호는 이런 효율성 외에도 아주 중요한 상징성이 있다. 택호를 통해 그 집 안주인의 출신 성분과 내력을 한 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택호와 당호의 결정적 차이는 택호는 보통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당호는 사회지도층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족 하나 달아본다. 만약 조선 전기 남자들이 처가살이를 할 때 딸을 여럿 둔 여자 집에서 혼인한 딸들을 지칭할 때 뭐라고 불렀을까?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김실이’, ‘이실이’라 불렀던 것이 그것이다. ‘김씨네로 시집간 딸’, ‘이씨네로 시집간 딸’. 이 문화 역시 택호처럼 사라지고 있는 문화다. 할아버지,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시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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