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12월 17일 금요일.
난징, 창사, 꽝저우, 충칭은 12월 17일부터 12월 20일까지 연휴라서 작정하고 떠나게 되었다. 주머니에는 꽝조우에서 충칭가는 것과 12월 20일 충칭에서 상하이로 오는 비행기표 2장. 상하이역을 출발했나 싶더니 11시 30분 난징역 도착. 먼저 매표소로 가서 창사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정주(鄭州)가는 기차표를 산 후 일단 점심부터 먹어야겠기에 자리를 잡고 기차시간표와 앞뒤를 맞춰보니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상하이를 돌아가는 기차였다. 할 수 없이 다시 기차역으로 가서 환불했다. 이제 믿을 것은 비행기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내 비행기표 예매처로 갔으나 12월 18일 아침 비행기표는 없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창사로 가는 저녁 비행기표라도 사서 불안한 마음으로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난징중의과대학〔南京中醫學院〕금행루(金杏樓)라는 초대소로 갔다. 초대소에서 하루를 유숙하는데 125위엔(元). 아침식사도 가능하다고 해서 수속을 밟았다. 여장을 푼 후 임정관련지역 몇 곳이라도 찾아 볼까하여 천천히 길을 나섰다. 일단 중화문(中華門)근처에 있다는 회청교(淮淸橋), 동관두(東關頭)를 찾아야 했다. 중화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짧은 겨울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중화문에서 기웃기웃해봐도 감이 잡히지 않아 지나가는 몇 사람에게 회청교, 동관두를 물어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오고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아 내일을 기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12월 18일 토요일.
아침에 눈을 뜨니, 7시. 서둘러 몸을 추스리고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친 뒤 길을 나섰다. 막막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까? 광화문(光華門) 근처 남기가(藍기街)를 찾아보기로 하고 택시에 올랐다. 광화문(光華門)사거리에서 아침햇살을 받으며 헤매다가 사거리 동북쪽에 남기가신촌(藍기街新村)라는 표지판이 보여 그곳으로 갔는데 온통 아파트 단지였다. 잠시 허탈한 마음이 일었다. '역사는 우리를 마냥 기다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혹시 허물어진 담장이라도 남아 있을까하여 안쪽 마을로 들어갔더니 남기가 30호-44호까지는 미개발지역으로 허름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겨우 남기가(藍기街) 8호라는 명패를 찾았고 그곳에 지금은 전신공정공사(電信工程公司)라는 신식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 옆은 남경시광화동가소학(南京市光華東街小學) 후문이었다. 난징(南京)에서 임정요인들은 1936년 2월부터 1937년 11월까지 약 2년간 머물렀다. 이기간 중에 일제는 대 중국공세를 나날이 강화시키고 있었고 임정측에서는 사분오열된 단체들을 하나로 묶고자하는 노력이 힘을 얻기 시작하여 마침내 1937년 8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등 여러 단체들에 의해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김구선생은 회청교부근에서 살았으며 광화문부근 남기가(藍기街) 8호에는 다수의 임정요인이 거주했고 중화문부근 동관두 32호에는 한국국민당 청년들이 살았다. 또, 마로가(馬路街)에는 김구선생 어머니가, 교부관(敎敷館)에는 조선혁명당원이 살았다고 한다. 남기가에서 광화문쪽으로 빠져 나오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룬 듯 했다. 다시 중화문을 찾았다. 중화문은 명 태조 주원장이 수십년간의 공사로 이루어 낸 엄청난 건축물이었다. 문 하나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곽을 연상하게 했다. 성곽의 두께도 엄청나고 성문 위는 축구장을 방불케 할만큼 넓었다. 중화문을 벗어나 발길 가는 대로 허름한 시장를 지나 사람들에게 동관두, 회청교를 물었다. 마로가(馬路街)는 지도상에 마도가(馬道街)라고 했다. 길을 뒤져 찾아 나갔으나 상하이만큼 표지판이 잘 배치되어 있지 않아서 찾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부자묘(夫子廟)근처의 고급스런 관광요식업소를 지나 남경 부자묘 대시장을 빠져나가자 드디어 동관두 표지판이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급히 번지수를 확인해 나갔는데 32호는 그냥 시멘트벽에 쓰여있어 스쳐 지나쳤는데 골목 끝까지 나가도 32번지가 없어 되돌아와 그 집에 들어섰는데 초로의 여인 둘이 무엇인가 일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 있는 곳이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으며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로 열심히 설명하고 집을 소개해 주었다. 고맙고, 반가워서 별 것 아니지만 먹을 것을 조금 사주고 나와서 김구선생이 살았다던 회청교를 찾아 나섰다. 부근에 있을 것 같아 물어 가보니 장백로(長白路)와 건강로(建康路) 교차로를 조금 지나쳐 작은 다리가 하나 있었다. 다리아래 시냇물은 너무 지저분하여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다리주위에는 작은 시장이 이루어져 북새통이었다. 아마 이 하천이 과거에는 內 해자 역할을 했던 것 같았다. 다리근처에는 퇴락한 집들이 몇 채 있었지만 김구선생이 정확히 어디에 거주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가까이에 있는 공자묘에 들렀다. 그곳은 걸어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렇게 답사를 마친 후 비행기 이륙시간이 많이 남아 중산릉(中山陵)으로 향했다. 중산이 누구인가? 중국 근대화의 국부이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1921년 11월 세계 최초로 인정한 호법정부의 수장, 손문선생이 아니던가! 중산릉에 입장하면서 흐트러졌던 옷깃을 여미었다. 중산릉은 산비탈에 조성되어 있었는데 정문, 비각, 능의 순으로 품위있게 배치되어 있었고 능에는 손문선생의 민족(民族), 민생(民生), 민권(民權)으로 대변되는 삼민주의의 글귀가 처마 바로 밑에 새겨져 있었다. 능각 안으로 들어서자 손문선생의 동상이 중앙에 있었고 그 뒤로 돌아 들어가니 중앙에 손문선생의 석곽이 모셔져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한바퀴 돌아 감사의 마음을 표한 후 천천히 걸어 나와 전망을 보니 천하 명당답게 탁 트인 풍광이 너무나 시원하여 자리를 뜨기가 아쉬웠다.
그 인근에 있는 명효릉(明孝陵)도 구경했다. 명효릉은 명나라 주원장의 무덤으로 진입하는 곳부터 무참히 파괴된 것을 억지로 끼워 복원한 느낌을 주었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 능에 이르렀는데 산 하나 전부가 무덤인 듯 했다. 거대하기에 숙연해지기보다는 무엇인가 울컥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당시의 백성들은 땅 한 평 없는 자가 태반이었을 텐데 자기는 죽어서도 산 하나를 차지하니 말이다.
그럭저럭 비행기 이륙시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아 다시 시내로 향했다. 오는 도중에 명고궁(明古宮)이란 곳에 들렀는데 시내 한가운데 담으로 둘러처진 옛 고궁터에는 폐허로 남겨진 땅에 쓰레기만 가득하여 역사의 허망함을 느끼게 하였다. 잘 정비하여 시민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리를 잘 몰라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는데 시내에서 상당히 먼 곳에 공항이 위치해 있었다. 공항은 신식 건물로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도 창사에서 꽝저우까지의 기차표를 구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또 택시를 탔는데 역시 불친절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공항에서 도심까지는 왜 또 그리 먼지. 도착하여 요금계산 때문에 결국 실갱이를 하고야 말았다. '우리 나라 택시운전사도 혹시 외국인에게 이렇게 무례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창사역에 가서 이튿날 아침 꽝저우에 도착하는 기차표를 손에 들고, 김구선생이 남목청(南木廳) 9호에서 피격(被擊)되어 몇 달간 입원한 상아병원(湘雅醫院)으로 향했다. 밤인데다 시간도 없고 하여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하고 앞 건물만 들렀다가 다시 나왔다.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며칠이고 머물면서 임정요인 살았던 서원북리(西園北里)나 남목청(南木廳)등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