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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 왕조 ┓♥ 스크랩 정조 (正祖) ..건릉
윤대화 추천 0 조회 169 12.09.24 17: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정조                       正祖

 

 

 

 

 

 

 

 

 

 

 

 

조선(朝鮮)의 제22대 왕 정조(正祖)는 지난(至難)한 여정을 거쳐 왕위에 올라, 갖가지 개혁 정치 및 탕평(蕩平)을 통하여 대통합(大統合)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가 재위(在位) 기간에 추진했던 각종 개혁(改革) 정책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정조(正祖)는 1759년(영조 35)에 세손(世孫)으로 책봉될 때까지는 왕가(王家)이 일반적인 절차를 밟으며 순탄한 생(生)을 살았다. 그러나 1762년 생부(生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 .. 후일의 장헌세자. 고종.高宗 때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가 비극적으로 죽게 되면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지난한 여정을 거쳐다. 생부(生父)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던 1762년은 정조(正祖)의 나이 11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영조(英祖)에게 뒤주에 갇힌 생부를 살려 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던 어린 정조(正祖)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正祖의 드라마틱한 등극(登極)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고, 11살의 어린 나이에 영조(英祖)의 대를 이을 동궁(東宮 ..세자)이 되었다. 세자(世子)가 아닌 세손(世孫)으로 동궁(東宮)의 지위에 있던 그는 아버지처럼, 언제, 어떻게 모함을 받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학문 수양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옥죄어오는 세력과 그들의 하수인인 내관(內官)과 궁녀(宮女)들의 감시 속에 편안한 날이 없었고, 더욱이 액정서(掖庭署)의 하인들까지 세손(世孫)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앞잡이가 되어 있었다. 액정서(掖庭署)란 정조(正祖)에게 종이와 붓, 먹물을 공급해주던 곳이었다.

  

 

정조(正祖)는 즉위 후, 어느날  " 이 때에 나는 옷띠도 끌르지 못하고 밤을 지낸 날만 해도 몇 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위태로움과 외로움이 어떠했으며 나라의 형편이 얼마나 간고하였겠는가. 거의 아슬아슬했다고 말 할 수 있다 " 라고 술회하며 궁녀와 액정서(掖庭署)의 하인  108명을 궁궐 밖으로 내 ?았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부인이자 정조(正祖)의 생모(生母)이었던 ' 혜경궁홍씨 (惠慶宮 洪氏)'는 정조(正祖)를 보호하기 위하여 3년간의 생이별도 감수한다.  정조(正祖)는 1775년 (영조52)에 82세의 고령(高齡)이었던 영조(英祖)를 대신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된다. 이 때가 정조(正祖)의 나이 24살이었다. 11살에 동궁이 되어 13년만이었다.  

 

 

이 때까지의 집권(執權)은 사도세자 죽음에 관여한 노론(老論), 홍봉한(洪鳳漢) 계열이었다. 비록 세손(世孫)의 외할아버지이었지만,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들을 정조(正祖)는 가까이 할 수 없었고, 척신(戚臣)정치의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편 그들은 자신들에 적대적(敵對的)인 정조(正祖)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다.

  

 

 

 

 

 

 

 

 

 

 

영조(英祖)가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죽은 후,  정조(正祖)를 앞서 요절(夭絶)한  효장세자(孝章世子)를 후사(後嗣)로 삼아 왕통(王統)을 잇게 하였다. 사실 여부야 어찌 되었든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죄인(罪人)으로 죽음을 맞이 하였으니, 그의 아들 정조(正祖)는 ' 죄인(罪人)의 아들 '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계통을 바꾼다고 해서 장헌세자(莊獻世子)와 정조(正祖)의 부자(父子)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명분상으로는 죄인(罪人)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것은 여러 가지로 허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세손(世孫)이지만 세자(世子)의 지위를 가지고 생활하던 정조(正祖)는 영조(英祖) 말년 경인 1775년 국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다가 다음 해 영조(英祖)가 승하하면서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갖가지 방해공작이 이루어져, 정후겸(鄭厚謙) 등이 정조(正祖)를 해치려고 하였고, 

 

 

그를 비방하는 내용으로 투서(投書)하거나 그가 거처하던 존현각(尊賢閣)에 괴한이 침입하여 염탐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그리고 대리청정(代理聽政)이 결정될 당시에는 홍인한(洪麟漢)이 ' 동궁께서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 ' 라는 이른바 '삼불필지설 (三不必知說) '을 제기하여 세손(世孫)의 권위에 흠집을 내면서 대리청정을 반대한 적도 있었다. 정조(正祖)가 비록 개인적인 불행을 딛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과정은 참로 지난(至難)하였다.      

 

 

 

                                            

 

                                      삼불필지설                    三不必知說

 

 

 

 

 

 

영조(英祖)가 82세에 세손(世孫 ..정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지시하자,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洪麟漢)은  '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 '을 주장하며, 세손의 대리청정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지시하자 세손(世孫)은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심스럽게 조건을 내세운다.

 

 

그 것은 바로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인 수은묘(垂恩墓)를 참배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11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그렇게 잃고, 24살의 장년으로 성장할 때까지 부친의 묘소를 찾아보지 못한 한(恨)을 풀고자 하는 것이었다. 참배하는 날 정조(正祖)는 대성통곡하며 혼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이라 함은...동궁(東宮)은 노론(老論)이나 소론(少論)을 알 필요도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으며, 조정의 일을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동궁의 권능을 무시(無視)하는 동시에 세손(世孫)의 왕위 등극을 저지하고자 하는 의도이었다.  

 

 

영조(英祖)는 홍인한(洪麟漢)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리청정을 강하게 밀어붙여, 정조(正祖)는 영조(英祖)를 대신하여 국사를 맡아 보게 되었으며, 대리청정 두 달만에 영조(英祖)가 죽자, 정조(正祖)는 마침내 22대 조선의 국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홍인한(洪麟漢)은 '정조'가 즉위하고 바로 고금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학습과 훈련, 정치 리더쉽

 

 

 

 

 

 

 

 

 

 

리더쉽은 천부적(天賦的)으로 타고나기도 하지만, 생후(生後)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향상될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제왕학(帝王學)은 정치 리더쉽을 향상시키는 학문체계라고 할 수 있다. 제왕학(帝王學)은 모든 군주가 갖추어야 할 학문을 말한다. 조선시대 군주(君主)들이 학습하는 '제왕학'은 정치의 득실(得失)과 인물의 능력, 민생의 고락(苦樂)을 파악하는 현실적인 학문으로, 학습으로 통하여 터득한 논리는 정치현실에서 실천되어야 하였다.

 

 

정조(正祖)의 경우도 이 같은 제왕학의 학습체계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정조(正祖)는 1752년 출생 이후 원손(元孫)으로 책봉된 이후 왕세손(王世孫) - 동궁(東宮) - 국왕(國王) 등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그 지위가 바뀔 때마다 교육도 내용과 격(격)을 달리하였는데, 보양청(輔養廳) 교육 - 강학청(講學廳) 교육 - 시강원(侍講院) 교육 - 경연(經筵) 교육 등의 네 개 과정이 이에 해당되었다. 성장과정에 지속적인 교육과정이 동반되었다. 정조(正祖)는 이들 과정을 통하여 유교(儒敎)의 주요 경전을 비롯한 역사서와 조선시대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敎科書)라고 할 수 있는 ' 성학집요(聖學輯要) '나 ' 정관정요(貞觀政要) ' 등을 학습하였다. 

 

 

정조(正祖)는 이와 별도로 할아버지 영조(英祖)의 훈육도 받았다. 영조(英祖)는 국왕이 신하에게 교육을 받는 수준에서 벗어나 국왕이 직접 학문을 연마하고 신하(臣下)를 가르치라고 지시한 국왕이었다. 영조(英祖)는 정계(政界)는 물론이고 학계(學界)까지 주도(主導)하는 군주가 되려고 하였으며, 그 이념은 유학(儒學)에서 이상적(理想的)인 사회라 말해지는 삼대(三代)의 군주상(君主像)인 군사(君師 ... 군주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기르고 가르치는 존재)이었다. 영조(英祖)는 보양청(輔養廳) 단계에서부터 정조(正祖)의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1757년 여섯 살인 어린 원손(元孫)을 불러 '동몽선습(童夢先習)'을 외우게 하였고, 이듬해 경연(經筵) 자리에서는 원손(元孫)을 불러 '소학(小學)'을 외우게 함으로써 학습의 진도를 결정하였다. 이후에도 영조(英祖)는 수시로 정조(正祖)를 데리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신하(臣下)들과 토론하도록 하였고, 유교적 덕치(德治)와 군사(君師)로서의 국왕이 위상(位相)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후일 정조(正祖)가 왕위에 올랐을 때, 정조는 여러 방면에서 할아버지인 영조(英祖)의 정치를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정조에 대한 기본적인 사료(史料)는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자신의 일기(日記)인 일성록(日省錄) 그리고 정조가 매일 반성한다는 뜻에서 자신의 언행을 기록케 한 일득록(日得錄) 등이 기본 사료이고, 규장각 일기인 내각일력(內閣日曆)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찬(官纂) 사료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정조실록(正祖實錄)은 정조가 죽은 후, 정치적 반대파인 노론벽파(老論僻派)가 집권하면서 작성한 것이고, 일성록은 일부 내용이 의도적(意圖的)으로 삭제(削除)되었다는 하자가 있다. 물론 정치적 반대파에 의한 의도적인 왜곡(歪曲)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료들은 작성자의 정치적 의도를 염두에 두고 해석하여야 하며, '혜경궁홍씨'의 한중록(恨中錄)이나 정약용의 저술같은 개인 기록으로 보충할 필요가 있다.

 

 

 

 

 

 

                                

 

 

 

                                            

                                                  정조(正祖)의 이해

  

 

 

 

 

정조(正祖)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문제일 것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쪽에서는  죄인(罪人)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 죄인지자,불위군왕 (罪人之子,不爲君王) '이라는 팔자흉언(八字凶言)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래서 영조(英祖)는 세손(世孫 ..正祖)를 죄인(罪人)으로 죽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 아니라, 10살에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아들로 입적(入籍)시켜 정조(正祖)가 " 죄인의 아들 (罪人의 아들) "이라는 허물을 벗겨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正祖) 는 즉위 당일 " 오호라 !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 받도록 명하신 것이다. 정조실록 즉위년 3월10일 " 이라며 스스로를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정조(正祖)는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벽파(老論僻派)를 적대시(敵對視)하는 대신 포용하였다. 그 이유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유훈(遺訓)때문이었다. 영조(英祖)는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는 자는 왕법(王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유훈을 남겼기 때문이다.

 

 

 

 

 

 

  

 

 

 

                                                정조의 절묘한 선택

 

 

 

 

이는 정조(正祖)가 사도세자(思悼世子) 문제를 거론하면, 선왕(先王)의 유훈(遺訓)을 어긴 것으로 반정(反正)의 명분이 될 우려가 컸으며, 또한 그들을 모두 적(敵)으로 돌릴 경우에는 정국 운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정조는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즉위에 성공하는데, 정조(正祖)는 이 점에 착안하여 사도세자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혐의로 '노론벽파'를 처벌하였다. 선왕(先王)인 영조(英祖)의 유훈(遺訓)을 어기지 않으면서, 소기의 정치적 효과를 달성하는 절묘한 선택이었다. 

 

 

 

 

 

 

 

 

 

 

 

 

                                         정조, 세손(世孫)시절 8살 때의 편지.

 

 

 

 

                                   상풍의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을 알기 바라며,

                                   뵈온 지가 오래 되어서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봉서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다고 하시니 기쁩니다.

 

 

 

 

 

      

                                    

 

 

 

                                         

                                                   正祖의 인내 (忍耐)

 

 

 

 

 

그러나 부친을 죽인 원수(怨讐)들과 타협하는 것은 초인적(超人的)인 인내가 필요하였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병석에 누웠을 때  "두통이 많이 있을 때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 오니, 이는 다 화기(火氣)때문이다 " 라고 말한다. 가슴의 화기(火氣)는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얼굴을 맞대고 정치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구선복(具善復)이다.

 

 

 

 

 

 

 

 

 

 

구선복(具善復) ...  그는  영조(英祖)시절부터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있던 숙장(宿將)으로서, 사도세자 사건에 직접적(直接的)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조(正祖)는 그를 계속 훈련대장, 병조판서 등의 군사 요직에 임명하다가, 재위 10년 후에야 다른 역모(逆謀)사건에  연루된 혐으로 처형한 후 정조(正祖)는 이렇게 말한다.

 

 

 

 

 

 

 

 

 

 

 

 

 

역적 구선복(具善復)으로 말하면 홍인한(洪麟漢)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고 하여도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經筵)에 오를 때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兵權)을 손수 쥐고, 그 무리가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다른 사안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 ... 

 

 

 

 

 

 

 

정조는 재위 13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성(華城)으로 옮겨, 현륭원으로 삼고 자주 능행(陵行)하였는데, 참배할 때  '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정조실록 18년 1월20일) '고 할 정도로 부친을 애도하였다.

 

 

 

 

                                    화성능행도                       華城陵行圖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는 정조가 1795년 윤 2월9일부터 16일까지의 여드레 동안 화성(華城)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했을 때 거행된 주요 행사를 그린 8첩병풍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역사적 비극 그리고 사도세자의 명예와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정조(正祖)의 노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정조(正祖)는 왕위에 올라 ' 사도(思悼) '라는 명칭을 폐(廢)하면서 아버지를 ' 장헌(莊獻) '으로 추존(追尊)하였다. 또한 수원부의 관공서를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긴 뒤, 1789년 원래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 화성으로 이장하고 '현륭원'이라 명명하였다. 수원(水原)의 이름도 화성(華城)으로 변경했다.     

 

 

 

 

 

 

 

 

 

 

정조는 왕위에 머무는 동안매년 사도세자 탄일(誕日)을 전후한 1월 말에서 2월 초 사이에 화성(華城)을 찾았다. 정조에게 1795년 '을묘년'은 특별하였다. 동갑이었던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환갑이기 때문이다. 을묘년 윤2월, 정조는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이 묘소에서 전배를 한 후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베풀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환갑잔도 함께 치르면서 사무친 감정을 씻고 싶었을 것이다.

 

 

 

 

 

 

 

 

진한 채색(彩色)으로 완성된 화려하고 장엄한 병풍 그림이다. 웅장한 기와지붕이 건물의 위엄을 과시하고 있고, 등장 인물의 대부분은 궁중 복식을 제대로 갖추었다. 중요한 행사를 기록한 듯, 어느 한군데 소홀함이 없이 모든 사물을 완벽하게 묘사하였다. 문외한이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고귀한기록화(記錄畵), 조선시대 궁중행사도의 백미(白眉)로 평가되고 있다.     

 

 

 

 

                                                  正祖의 진정한 복수

 

 

 

 

그러나  정조(正祖)는 부친을 위한 최고(最高)의 복수(復讐)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조(正祖)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홍씨'가 칠순이 되는 1804년에 왕위를 아들 순조(純祖)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 자격으로 화성으로 가서 사도세자의 추숭(追崇)사업을 하려고 결심한다. 정조 자신은 선왕(先王)의 유훈(遺訓)을 받았으므로 사도세자의 추숭(追崇) 사업에 나설 수 없었지만, 아들 순조(純祖)가 할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추숭사업을 하는 것은 영조(英祖)의 유훈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논리이었다. 

 

 

정조(正祖) " 지금 신하들이 사도세자 추숭(追崇) 사업을 안 하는 것도 의리(義理)이고, 훗날 신하들이 추숭사업을 하는 것도 또한 의리(義理) "라고 말하는데, 이는 자신의 입장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는 세력의 입장도 배려하는 것으로, 바로 이 부분이 정조(正祖)와 집권파 노론(老論)이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이러한 타협을 통하여 조성된 왕권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데, 이점이 정조의 진면목(眞面目)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 지점에서 정조(正祖)의 최대 실책(最大 失策)이 나오게 되는 것인데..... 정조(正祖)의 지나친 자신감이었을까...정조는 아들 순조(純祖)의 부인으로 노론(老論)을 선택한다. 그리고 조선은 멸망의 길을 재촉하게 되는 것이다.

 

 

 

 

 

                        

 

 

 

 

 

 

                   

 

                                   正祖의 독백 (獨白)  .... 노무현의 독백 

 

 

 

 

 

 

이 곳은 나의 생부께서 태어나신 곳   /   어린 시절 생부의 복수를 다짐하며 수도 없이 찾던 곳이다.   /   굳이 이 곳에서 치료를 받겠다고 고집한 이유는   /   새 생명이 태어나듯 새로운 조선을 이끌 강건함을 되찾기 바랐기 때문이다   /   이 아귀같은 풍맞은 곳에서 살아남으려는 이유는   /   이 땅의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하여   /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때문이다.   /   나의 소망은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단단하다.   /    때문에 그 누구도 나를 죽일 수 없다.   /   허나 당쟁은 줄지 않고, 백성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   신료들도 백성들도 나를 탓하기에 바쁘다.  /   나의 간절한 소망을 따랐다는 이유로 소중한 인재들이 죽어 나가고   /   내가 꿈꾸던 새로운 조선은 저만치서 다가오질 않는다.   /   아무리 소름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    난 결코 저들을 이길 수가 없다.   /    저들이 옳아서가 아니라, 내가 백성들을 설득하지 못해 지는 것이다.   /   나의 신념은 현실에 조롱당하고   /   나의 꿈은 안타까운 희생을 키워 가는데   /    포기하지 않는 나는 과연 옳은 것이냐........

 

 

  

 

 

 

 

 

 

 

 

 

 

 

 

 

 

 

 

 

 

 

                             

                              홍국영 (洪國榮)과 세도정치 그리고 말로(末路)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세손(世孫)시절의 정조 또한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지내야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세손을 지켜 준 것은 홍국영(洪國榮)이었다.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세자 시강원(侍講院)의 설서(說書),  즉 세자(世子)의 스승이 되어, 정조의 학문을 깊게 하였으며, 정조(正祖)의 목숨도 여러 차례 구하게 된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면서, 한편 파당(派黨)을 배척하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하여 친위세력을 형성해 나가게 된다. 

 

 

 

 

 

 

 

 

 

 

 

즉위 이후 정조(正祖)는 자신의 정적(政敵)들을 제거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를 홍국영(洪國榮)을 통하여 추진하였다. 동시에 정조(正祖)는 규장각을 설치, 인재 육성과 학문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왕위에 오른지 4년 정도 경과한 시점까지 자신의 정적(政敵)들의 제거에 일단락 성공한 정조는 이후 각종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선왕(先王) 영조(英祖)를 계승하여 탕평(蕩平)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와중에 이른바 ' 청류(淸流) ' 세력을 끌어들였다. 영조(英祖) 중반부터 후반까지 노론(老論)의 우위를 주장하는 척신(戚臣) 세력과 이들을 타파하려는 노선인 '청류(淸流)'를 자처하는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정조(正祖)는 그동안 척신(戚臣) 세력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淸流)를 조정의 중심으로 끌어들여 이른바 탕평(蕩平)을 펼쳤다. 아울러 그동안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남인(南人)세력을 등용하여 정치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 뿐만 아니었다. 최근 공개된 정조(正祖)가 심환지(沈煥之)에게 보낸 어찰(御札)을 통하여 보면, 그는 정적(政敵)이었다고 말해지는 노론벽파(老論僻派) 세력까지도 협력세력으로 포섭ㅎ여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러한 탕평책(蕩平策)의 추진과정에서 정권의 물리력(物理力) 확보를 목적으로 친위부대(親衛部隊)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였다.     

 

 

                                                       

                                                            

                                         정조의 암살(暗殺) 기도

 

 

 

 

 

 

                   

 

 

 

 

 

 

                                               

                                           장용영                壯勇營  

 

 

 

 

 

 

정조(正祖)는 즉위 초에 '홍국영'의 도움 하에 홍인한(洪麟漢) 등 적대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러한 조치 이후에도 정조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홍국영(洪國營)을 숙위대장으로 임명하여 궁궐의 호위체계를 강화한다. 그러나 숙위(宿衛)의 책임자이었던 홍국영이 점차 딴 마음을 품게 되자 정조(正祖)는 정규 군사력 양성을 통하여 호위체계(護衛體係)를 새롭게 하고자 하였다.  

 

 

정조 7년, 정조는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올리는 조치를 취하고 이를 기념하는 과거시험을 보았다. 이 때 무관(武官)으로 뽑은 2,000명 가운데 우수한 자를 국왕 호위의 금군(禁軍)으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이를 토대로 2년 후에는 장용위(壯勇衛)라는 새로운 금군(禁軍)을 조직하고, 점차 인원을 늘려 장헌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는 문제와 관련하여 장용위를 군영으로 확대하여 장용영(壯勇營)을 신설하였다.

 

 

 

 

 

 

                                                  장용영 건물 배치도 (현재 혜화경찰서 위치)

 

 

 

 

장용영은 당초에 근위체제의 강화를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외영(外營)은 화성에 두고 장헌세자의 묘소를 이장할 때와 정조(正祖)가 도성 밖을 행차할 때 호위할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왕권 강화를 위하여 설치, 강화되었던 장용영은 정조(正祖)가 죽으면서 바로 해체된다.

 

 

 

 

 

 

 

 

 

 

 

 

 

 

 

 

 

                                             

                                          규장각                   奎章閣

 

 

 

 

 

 

정조(正祖)가 즉위와 동시에 규장각을 설치한 것은 세자(世子) 시절부터 계획하여 왔던 것으로, 단순한 어제봉안(御製奉安)이나 국립도서관으로서의 기능 외에 보다 큰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규장각은 설치 초기에는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政敵)을 제거할 친위세력의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홍국영의 도움으로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김구주(金龜柱) 등의 척신(戚臣)세력을 제거하고, 또 다른 척신(戚臣)으로 권세유지를 기도한 홍국영(洪國榮)마저 제거한 이후, 1781년 규장각의 체제를 새로이 정비하였다.  

 

 

이후 정조의 개혁정치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정책 연구와 이를 위한 도서의 수집, 그리고 개혁에 동조하는 정치세력의 결집과 재교육 등을 위한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규장각이 정조(正祖)의 개혁정치를 위한 중추기관이었던 까닭에 규장각 각신(閣臣)은 광범한 기능을 가졌다.

 

 

 

 

 

 

     

 

 

정조(正祖)는 규장각(奎章閣)을 통하여 학문정치(學問정治)를 구현하며 인재(人材) 육성을추진, 이를 위해 연소(年少)한 문신(文臣)들을 선발, 교육하여 국가의 동량(棟樑)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세력(親衛勢力)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학문정치의 명분 아래 세손(世孫)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書籍) 간행제도에도 힘을 기울이며 새로운 활자(活字)를 개발하였다.

 

 

또한 규장각(奎章閣) 내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두어, 서얼(庶蘖) 신분인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북학파(北學派)의 대표적인 인물인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인데, 서얼(庶蘖)이라는 신분적인 한계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정조(正祖)는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소통(疏通)을 기대하였다. 

 

 

정조(正祖)는 이밖에도 지방의 인재(人材) 선발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정국이주로 서울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정조(正祖)는 각 지역에 측근들을 파견해 과거(科擧)를 시험보고, 그 결과로 여러 책자를 간행하였다. 교남(嶠南 ..영남), 호남(湖南), 관서(關西)의 빈흥록(賓興錄)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영남(嶺南)이나 호남(湖南)의 인재를 포섭하기 위하여 '영남인물고' 그리고 '호남절의록' 등을 편찬하였다. 이 밖에도 상업적으로는 통공정책(通共政策)을 추진하였다. 통공정책(通共政策)이란, 금난전권(禁亂廛權)의 혁파와 자유상인 즉, 난전(亂廛) 상인의 안정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단행된 상업정책을 말한다. 기존의 특권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도성(都城) 중심의 경제권을 약화(弱化)시킴과 동시에 시장공간(市場空間)의 확대 등을 도모한 정책이었다.          

                                                 

 

 

 

                                                       규장각은 도서관이 아니다

 

 

 

 

각신(閣臣)은 승지(承旨)와 같이 왕과 밀접한 시신(侍臣)으로서의 기능과 언관(言官), 사관(史官), 시관(試官), 경연관(經筵官) 기능 및 왕의 교서나 유서(諭書)를 대찬(代撰)하는 기능을 가졌다. 어제(御製)를 봉안하는 기구로서의 규장각(奎章閣)은 전각(殿閣)제도로서 그 자체가 강력한 왕권을 지향하는 정조의 정치적 지향이 내포된 것이었다. 

 

 

규장각은 장용영(壯勇營)과 함께 정조의 친위세력의 형성을 위하여 설치되었기 때문에 정조가 죽은 뒤에는 장용영의 해체와 함께 그 기능이 현저히 약화되어 단순히 역대 왕들의 어제(御製)와 도서를 보관 관리하는 기능만을 가진 기구로 남았다. 각신직(閣臣職)은 특별한 권한이 모두 철회되어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다.

 

 

1864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어제(御製),어필(御筆),선원보첩(璿源譜牒 .. 조선 왕실의 족보) 등이 종친부(宗親府)로 넘어가면서, 규장각은 도서관리 기능만 남게 되었다. 이후 몇번의 변화를 거쳐 현재는 국립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되어있으며, 도서 15만점, 고문서 7만점, 목판 17,000여점 등 도합 약 25만점이 보관되어 있다.

 

 

 

 

 

 

 

 

 

 

 

 

 

                                                 골초 ... 정조(正祖)

 

 

 

 

담배만큼 유익한 약(약)이 없다. 이 풀이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 담배의 혜택을 백성들과 함께 누리려 한다.... 당황스럽다.   조선(朝鮮)을 ' 담배의 나라 '로 만들겠다고 한다.

 

 

그것도 다름 아닌 조선의 중흥군주(重興君主)라는 정조(正祖)의 어명이다. 1796년 11월 18일의 일이었다. 정조(正祖)는 책문(策文 .. 과거시험의 하나)의 시제로 '담배'를 내걸었다. 나는 수십 년 간 독서와 정무(政務)에 빠지는 바람에 고질병이 깊어졌다. 정사(政事)의 잘잘못과 복잡한 심경을 명확하게 비춰보고 요점(要點)을 잡아낸 것은 모두 담배의 힘이다.

 

 

정조(正祖) 스스로 개혁정치의 원동력을 '담배 덕분'이라고 한 것이다. 정조는 급기야 ' 담배의 출현은 인간을 사랑하는 천지(天地)의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고 선언한다. 황당한 일도 있었다. 1790년 5월, 정조의 명재상 채제공(蔡濟恭)이 ' 못해먹겠다'하며 돌연 사의(辭意)를 표명한다.

 

 

길에서 담배를 피우던 '학당 유생(學堂 儒生 .. 관립 중고생)' 2명에게 ' 담뱃대 좀 빼라 '고 훈계한 것이 빌미가 디었다. 이들은 고희(古稀)를 넘긴 채제공(蔡濟恭)에게 막말을 했다. '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자(채제공을 이름)를 보고 담뱃대를 빼겠나 .. 吾豈見渠而去竹乎   채제공은 막말 청년들을 옥(獄)에 가두었다. 그러나 그날 밤 유생(儒生) 수십명이 옥사(獄舍)로 달려와 옥문을 부술 듯 과격시위를 벌였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국무총리가 중,고생을 훈계하려다 봉변을 당한 격이다. 채제공이 한탄한다. 백주대로에서 담배 꼬나물고 재상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패악질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정조실록)

 

 

 

 

 

                                                  정조(正祖)의 그림 

 

 

 

 

 

조선 후기 최대의 문예부흥기를 이끌었던 정조(正祖)는 서화(書畵)를 즐겼으며, 특히 문인 취향의 사군자와 같은 소재를 주로 그렸다. 아래 그림의 파초도와 국화도는 짝을 이루는 것으로, 바위 옆에서 자라난 파초 한 그루를 그린 간결한 구도의 그림이다. 꾸밈없이 담백한 필치와 농담(濃淡)을 달리한 묵겁에서 문인화(文人畵)의 높은 격조를 느낄 수 있다. 파초는 조선 말기로 이어지면서 사군자, 소나무, 오동나무 등과 함께 8폭 이상의 병풍에 자주 그려지는 소재가 되었다.

 

 

 

 

                                          

                                             파초도 .. 보물 제743호 

 

 

 

 

 

 

 

 

 

 

                                                                  국화도 .. 보물 제744호

 

 

 

 

 

 

 

 

정조(正祖)는 스스로 학문과 예술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온 사회에 문예중흥의 새로운 기운을 크게 진작시켰다. 특히 서화(書畵)에 대한 안목이 매우 높았으며, 스스로 서화의 실기를 닦아서 비범한 작품들을 남겼다. 위의 " 국화도(菊花圖) "는 정조의 유묵 작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작품의 하나이다. 원래 이왕가(李王家) 동경저택에 있었던 그림으로 도꾜에 사는 한교포의 손에 입수되어 동국대학교에 기증된 쌍폭 중의 하나이다.

 

 

이 그림에서 풍기는 높고 맑은 기품은 이 그림이 작가가 분명히 왕자라는 사실을 뒷받침 해 줄 정도이다. 그 원숙한 용묵(用墨)에서 오는 청정한 묵색의 미묘한 변화라든지 묘선에 드러난 비범한 필세와 그 속도감(速度感)있는 붓자국에 스며있는 눈에 안 보이는 기운같은 것은 가히 왕자지풍(王子之風)의 실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살설                   毒殺說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인 정적(政敵)이었던 노론(老論) 벽파(僻派) 세력의 영수 심환지(심환지)에게 비밀로 보냈던 편지가 대량 공개되었다. 당시의 편지를 요즈음의 전화라고 생각할 때에는 별로 대단한 이슈도 아니고 그리고 정조가 심환지에게만 비밀 어찰을 보내어 정치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정도만큼만 화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정조독살설(正祖毒殺說)의 중심에 심환지(沈煥之)가 있었다는 일부 견해 때문에 더욱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즉 심환지에 의한 정조독살설은 이 어찰(御札)로 그 근거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정조(正祖)가 심환지(沈煥之) 일파에게 독살(毒殺)되었다는 의견과 그렇치 않다는 주장은 각각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정황사실이 너무 많아 그 진위(眞僞)를 따져 보기에는 너무 힘들고 어렵다. 그저 조선 500년을 관통하여 왔던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 구조에서, 왕이 신하들을 죽이고, 신하들이 왕을 내?고 그리고 왕실끼리의 살육 등..권력 앞에서 서로의 양보는 없었다.

 

 

 

 

 

 

 

 

 

 

오죽하였으면 조선의 왕 3명 중 1명은 독살(毒殺)되었다든 얘기가 있을 정도이지만, 그 편지의 발견으로 '정조 독살설 (正祖 毒殺說) '의 진위(眞僞를) 따져보는 것보다는 정치란 ? 특히 정조(正祖)의 편지 정치(便紙 政治)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 보는 것이 차라리 의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조(正祖)의 어찰(御札)

 

 

 

 

 

 

정치란 개인이나 집단 그리고 국가 간에 발생하는 이해(利害)의 갈등(葛藤)을 조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정은 매우 어렵다, 현실의 정치가는 사리사욕을 가득찬 살아있는 인간을 앞에 두고,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를 제한된 시간 안에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치에는 힘과 모략과 책략이라는 수단이 동원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정치인은 집단(集團)의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대립할 때에 직위라는 권력(權力), 돈이라는 금력(金力), 군대와 경찰이라는 물리력(物理力)에 의존한다. 이 것이 ' 힘의 정치 '이다. 

 

 

정치가는 또 사실을 날조하고, 경쟁자를 중상모략하고, 대중을 선동하며, 스파이를 활용하고, 약점을 잡아 협박할 수 있다. 이 것이 모략의 정치이다. 모략은 그 자체로는 약하지만, 선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욱 정치적인 수단이다.  정치가는 마지막으로 흥정과 밀실 담합과 사전 절충, 양동 작전, 명분(名分)의 도용(盜用) 등을 동원할 수 있다. 이 것이 책략(策略)의 정치인데, 책략은 그 자체로 선(善)하다고 악(惡)하다고도 말 할 수 없으며, 단지 그 목적이 공적(公的)인 것인가, 사적(私的)인 것인가에 따라 의미를 갖는다,

 

  

 

 

 

 

 

 

 

 

                                     책략의 정치                    策略의 政治

 

 

 

 

정조(正祖)의 친필(親筆) 어찰(御札)이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책략의 정치이다. 정조는 심환지(沈煥之) 뿐만 아니라 많은 인물과  비밀편지를 교환하였다. 현재 발견된 것만 해도 남인(南人)의 채제공에게 보낸 편지들, 외척 홍취영에게 보낸 편지들 정도이었지만 최근 공개된 '정조 어찰(정조 어찰) ' 299통 중에는 심환지 뿐만 아니라, 노론벽파의 어용겸(魚容兼), 서용보(徐龍補),김의순(金義淳) 등 여러 사람과 편지를 교환하였다. 정적(政敵)인 '노론벽파'와 이 정도의 편지를 교환하였다면, 자신의 지지 세력인 남인(南人),소론(少論), 노론시파(老論時派)에는 더 많은 편지가 오고 갔을 것이다. 

 

 

이런 서신교환을 통하여 정조는 정보(情報)를 입수하고, 인사(人事)를 조율하며, 여론(與論)을 조작하고, 막후 협상을 진행하는 책략의 정치를 한 것이다. 왕의 비밀스러운 '친필어찰'이라는 형식 자체가  인재관리(人材管理)의 책략을 보여 준다. 정조(正祖)는 ' 인간 대 인간 (人間 對 人間) '의 접촉이라는 비공식(非公式) 채널의 중요성을 꿰뚤어 보고, 친필 어찰을 받고 감읍(感泣)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만들어 갔다.  

 

  

 

 

 

 

 

 

 

 

                                                  분리하여 통치한다

 

 

 

 

어찰(御札)의 내용 또한 ' Devide And  Role '의 책략을 노골적으로 보여 준다. 즉, 분리하여 통치한다......정조(正祖)는 수신자인 심환지(沈煥之)를 그가 이끄는 노론벽파(老論僻派)로부터 교묘하게 분리시키고 있다. 정조(正祖)는 같은 노론벽파(老論僻派)라 하더라도 심환지의 선,후배 그리고 젊은 세대와도 분리(分離)시키며, 각 서신에서는 수신자를 최대한 배려하는 성의를 보여 주고 있다. 

 

 

그 결과 자전거의 바퀴살처럼 모든 서신 교환자가 정조(正祖) 한 사람에게만 연결되는 네트워크가 성립되었고, 정조는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하여 정보를 독점하여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 정조는 수신자에게 꼭 필요한 정보만을 제공하였고, 수신자의 계파(系派)를 비난하지 않았다. 정조가 편지를 보내면서 그렇게도 보안(保安)을 강조하였던 이유이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였다.

 

 

 

 

 

정조(正祖)는 어찌 보면 교활(狡猾)한, 이러한 편지(便紙) 교환이라는 책략(策略)을 통하여 탕평정치라는 공명정대한 목적을 추구하였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살해한 노론벽파(老論僻派) 세력과 그 세력들을 모두 처형하려는 남인(南人)세력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물과 불의 관계이었다.  

 

 

정조의 책략(策略)은 바로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기 위하여 동원되었다. 그는 개인적인 한(恨)에 매몰되지 않고, 당쟁의 폐해라는 국가적인 과제를 이루고자 하였다. 정조는 국가에 대한 정열과 국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진 대의(大義)의 정치가이었다. 그는 부농(富農)과 상인, 중인층등 서민들의 약진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혼란기에 개혁을 통하여 다양한 계층과 정파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서민의 권익을 옹호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조(正祖)의 비극(悲劇)은 ' 심환지(沈煥之) '를 너무 과소평가(過少評價)한 것에서 시작된다. 정조도 책략가이었지만, '심환지'는 더한 책략가(策略家)이었고, 더욱 노회(老獪)한 마키아벨리즘의 신봉자이었다. 정치의 역학관계(力學關係)와 술책을 꿰뚤어 보고, 정조의 약점까지 간파한 그는 정조 말년 유익한 조언과 값진 봉사를 하며 때를 기다렸다. 

 

 

정조(正祖)가 죽자 심환지(沈煥之)는 권력을 장악하고 정조(正祖)가 구축하였던 탕평(湯平)의 이념과 정책 그리고 각종 제도와 법을 파괴하였고, 정조가 양성하였던 인재(人材)들을 제거하였으며, 국가를 패망에 이르게 할 파벌정치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흔히  위대한 인물들이 역사의 향방을 결정한다고 알고 있지만, 그러나 현실의 정치는 한결 도덕적 가치는 떨어지지만 한층 더 교활(狡猾)한 흑막(黑幕)의 인간에 의하여 좌우되는 비극을 바라보며 살고있는 것이다.

 

 

 

 

 

 

 

 

 

 

정조(正祖)는 침전(寢殿)에 ' 탕탕평평실 (蕩蕩平平室) '이라고 적인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는 ' 탕평의 정치 ' 또는 ' 성왕(성왕)의 정치 '로 요약되는 정조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그대로 드러내는 문구이다.  그는 이를 ' 아침 저녁으로 눈여겨 보면서 나의 영원한 교훈으로 삼고 있다 '고 언급하였다. 샛별이 북극성(北極星)을 에워싸고 돌아가는 것처럼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고 국왕의 위상(位相)을 바로 세우는 것이  바로 정조(正祖)가 말하는 '성왕(聖王)의 정치'이다.  

 

 

 

 

 

                                        유연한 카리스마  ...  세종과 정조

 

 

 

 

 

 

 

 

 

정조는 영조가 죽고 2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생부(生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당쟁의 희생이 된 것처럼, 정조(正祖) 또한 세손(世孫)일때부터 붕당(朋黨) 간 대립구도 속에서 갖은 위협과 어려움을 견뎌냈다.즉위 후 정조는 규장각(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정치, 열린 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일종의 공포정치(恐怖政治)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국정을 장악하였다. 그의 즉위를 반대했던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등은 물론 그의 최측인 점을 이용하여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펼쳤던 홍국영(홍국영)도 무사하지 못했다.

 

 

정조의 백성관은 ' 군민론(君民論)'으로 요약된다. 그는 '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제 배를 타고 이 백성들에게 왔으니 더욱 조심하겠다 '고 말했다. 정조는 민(民)의 소리를 듣는 것을 곧 국정의 출발점으로 여겼다.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세종(世宗)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 부분이다.

 

 

실제 '정조'는 백성과 임금 사이를 막는 사대부(士大夫)를 피해 직접 민(民)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 재위3년 째에는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를 철폐하여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정조(正祖)가 능행(陵行)을 할 때 가능하였는데, '정조실록(正祖實錄)'과 '일성록(日省錄)'에 실린 상언(上言), 격쟁(擊錚)만도 5,000건이 넘는다.

 

 

백성을 중시한 정조의 리더쉽은 종종 세종(世宗)과 비교대상이 된다.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했다는 점과 학식이 깊었다는 점 등도 대표적인 공통점이다. 정조 또한 세종과 마찬가지로 월 5회 이상 신하들과 경연(經筵)을 펼쳤고,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신하들에게 권위(權威)를 행사하였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만들어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등 젊은 학자들과 밤새 학문과 정책에 관한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만들어 36세 이하 젊은 신하들 중 능력이 있는 자를 대상으로 '사서삼경'을 읽히고 시험을 보게 했다. 단지 시험을 보게 하는 것 뿐아니라 칭찬과 꾸지람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직접 시험문제도 내었다. 또한 신하들이 상소문(上疏文)을 올리면, 한자나 올바른 표현 등에 대해 지적하며 다시 돌려주곤 하였다. 경연(經筵)에서도 박학다식(博學多識)함으로 신하들을 압도하였다.

 

 

세종(世宗)이 원로(元老)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인사권(人事權)으로 권위를 확보했다면, 정조(正祖)는 확신 없이는 말 조차 꺼내지 못할 만큼 원로(元老)들의 권위(權威)를 무너뜨림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확보했다. 

 

 

정조는 '카리스마형' 리더로 꼽힌다. 아버지 태종(太宗)이 정적(政敵)들을 이미 다 제거했던 세종(世宗)과 달리 정조(正祖)는 붕당(朋黨) 간  대립구도가 격심한 시기에 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반대세력을 모두 없애기 보다는 일부(一部) 남겨두는 불완전(不完全)한 승리 체제를 유지했다. 강경(强硬) 일변도의 정책이 오히려 반발(反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알았던 것이다. '홍상범'은 죽이되 '홍낙임'은 처단하지 않았고, '김귀주'는 죽여도 배후인 '정순왕후'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는 반대파인 노론벽파(老論僻派)에 대한 강(强)한 경고(警告)인 동시에 정조와 그 측근이 늘 경계태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정치는 ' 열린 정치 '를 추구한 왕으로도 불린다. 당시는 성리학(性理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거세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북학(北學)과 서학(西學 ..천주교)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조는 전통 성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학문을 익히는 신하들이 매우 아꼈다.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는 데 열린 자세를 보인 것이다. 박지원(朴趾源)의 제자인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北學派) 인물들을 대거 기용하였고, 천주교 인재들도 받아들였다. 중인(中人) 신분도 다수 있었으나, 정조(正祖)는 능력에 따라 직책을 부여했다. 이 가운데 문물(文物)의 발전과 혁신(革新)의 결과물이 나오게 됐음은 물론이다.

 

 

 

 

 

 

 

 

 

 

개혁과 통합을 외쳤던 정조(正祖) .. 그가 추진한 개혁은 화성(華城) 건설로 집약된다. 당파정치(黨派政治) 근절과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이 화성(華城)은 과학적(科學的)인 성(城)으로도 평가된다. 정조는 이곳을 자신이 추진했던 모든 개혁(改革)의무대(舞臺)로 삼고자 하였다. 

 

 

축성기술(築城技術)을 도입하여 성(城)을 쌓고 이 일대를 자급자족(自給自足)의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국영(國營) 농장인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선진농법을 적용하려 했다. 자유로운 상행위(商行位)가 가능한 통공정책(通共政策)은 물론이다.

 

 

반면 정조(正祖)가 즉위한 초반, 노론벽파(老論僻派)를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자신의 지지세력을 만들고자 한 점은 ' 통합의 리더쉽 '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당시 '노론벽파'는 70여년간 일당전제(一黨專制)를 통해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하지만 정조는 점진적으로 세력의 균형(均衡)을 이루도록 하지 않고, '노론벽파'를 공개적으로 배척함으로써 오히려 반발을 불러왔다.

 

 

이는 결국 '노론벽파'의 단결을 돕는 역할을 했다. 개혁(改革)의 대표주자로 꼽히지만 개혁(改革)의 속도(速度)에 대한 완급(緩急) 조절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시대가 요구하고 국익(國益)을 위한 결단이라 하더라도 타(他) 세력과의 타협과 공감(共感) 형성을 거치지 못하면 결국 개혁(改革)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개혁 이전 충분한 합의(合議)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정조(正祖)의 개혁은 그 산물(産物)이 만개(滿開)하기도 전에 역사 속으로 퇴장하였다. 현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정조(正祖)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다. 그의 사후(死後) 장용영(壯勇營)이 혁파되었고, 정조(正祖)가 육성하였던 세력들이 대거 축출되는 불운을 겪었다. 서울 중심의 기득권 세력에 의한정치, 사회, 경제적 독점(獨占)은 심화(深化)되었다.  

 

 

 

 

 

                                      군사  정조                  君師 正祖

 

 

 

 

 

 

 

 

 

그렇다면 정조(正祖)가 꿈꾸었던 목표나 이상(理想)은 무엇일까 ? 정조(正祖)는 스스로 군사(君師)로 자처하였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설명에 따르면, 태초에는 백성들이 새 처럼 거처하고 생활이 도리가 구비되지 않았으며, 인문(人文)도 구비되지 못하였고, 임금도 없이 소박한 생활을 하다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분란이 생겼는데, 이때 성인(聖人)이 출현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이 성인(聖人)을 임금으로 삼음으로써 군사(君師)의 직책을 갖게 되었고, 이로써 백성의 생업이 편안해지고 하늘의 질서가 밝아졌다고 하였다. 유교(儒敎)에서 이상적(理想的)인 군주상(君主像)으로 제시하는 ' 요순(堯舜) '이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결국 정조(正祖) 역시도 선왕(先王)인 영조(英祖)가 그랬던 것처럼 군사(君師)가 되기를 원하였고, 개혁(改革)과 대통합(大統合)을 통하여 백성들의 생업(生業)이 편안해지고 질서가 잡힌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다.   

 

 

 

 

 

 

 

 

 

 

 

 

 

                                             만약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

 

 

 

 

 

 

                                             화성                  華城

 

 

 

 

 

 

 

 

 

정조(正祖)가 추진한 개혁(改革)의 총결산은 아마도 화성(華城)의 건설로 모아질 것이다. 화성(華城)은 부친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이장(移葬)을 계기로 조성된 성곽이다.  정조(正祖)는 화성(華城)을 단순한 군사적(軍事的) 기능을 수행하는 성곽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곳을 무대로 자신이 개혁(改革)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를 시험하는 무대(舞臺)로 삼고자 하였다. 

 

 

일단 축성(築城) 과정에서 당시로서는 가장 선진적(先進的)인 축성(築城) 기술을 도입하였고, 그가 죽위 이후 육성하였던 정약용(丁若鏞) 등 측근세력을 대거 투입하여 주도하게 하였다. 또한 화성(華城)을 포함한 수원(水原) 일대를 자급자족(自給自足)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국영(國營) 농장인 ' 둔전 (屯田) '을 설치하고 경작(耕作)을 위한 물의 확보를 위하여 몇 개의 저수지(貯水池)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선진적인 농법(農法) 및 농업 경영방식을 시허먹으로 추진하였다. 통공정책(通工政策)을 통해서 자유로운 상행위(商行爲)가 가능해져 수원(水原) 일대 상인(商人)들 유치가 쉬워졌다. 화성(華城)은 개혁의 시험 무대이자, 개혁의 결과물(結果物)로 응축된 그야말로 정조(正祖) 개혁의 총아(寵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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