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연결)와 서론
지난 시간에는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과 재림의 소망을 주신것에 범사의 감사와 믿음의 근원"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하박국의 감사"제목으로 하박국 3:16-19 말씀으로 교훈과 은혜를 받고저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주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해야하는 행위이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는 구원받은 영혼(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고귀한 신앙고백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에는 매우 성숙한 감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의 하박국이 보여주는 감사는 단순히 조건적인 감사이거나, 의무적으로 드리는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감사는 시련과 환란과 가난함 속에서 이루어진 고차원의 감사였습니다.
하박국은 앗수르가 세계의 지배권을 잡고 있다가 그 주도권이 바벨론으로 넘어가는 시대적 전환기에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바벨론이 세계의 주도국으로 떠오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바벨론이 침공할 것이라는 불길한 전쟁의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문이 백성들을 더욱 불안하게 했던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국내적 상황은 이를 막을 만한 군사력도 없었거니와 도덕적, 종교적인 타락으로 인하여 심하게 부패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불의한 자가 더 잘 살고, 악한 자가 더 잘 되고, 교활한 자가 더 인정받는 불의한 사회를 보면서
하박국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 것과 같은 불안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백성조차 추스릴 수 없는 상황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국외적으로는 전쟁의 소문이 감도는 풍전등화의 상황이 엄습해 오고,
국내적으로는 타락과 불의로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대 앞에서 당신은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무너질 것 같은 절망의 물결 앞에서 감사할 자 누구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박국은 여기서 같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연하게 일어섰습니다.
그는 3장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을 향하며 짜릿하리만큼 강렬한 감사의 고백을 드립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와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러한 하박국의 감사는 조건의 감사가 아닙니다.
현실을 억지로 외면하기 위하여 자기를 기만하는 감사도 아닙니다.
그의 감사는 철저하게 자신이 처한 고통스럽고 감사할 수 없는 현실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하면서도,
그 현실에 매이지 않고 떨쳐 일어나 하나님을 향하여 도약하는 신앙의 차원으로 고백되는 감사였습니다.
그의 감사는 더 이상 인간적인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감사는 하나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감사를 드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모든 것이 다 무어져 내린 잿더미 앞에서 드렸던 그의 유명한 고백을 다시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모든 것이 다 무어져도 하나님을 향한 감사하는 믿음은 무너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에도 이러한 감사의 고백을 드린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그는 아시는 바와 같이, 여수 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이 공산당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비보를 접해들은 손목사님은 통곡하며 원망하며 울부짖었지만,
정작 장례식장에서 그는 하나님께 고백하기를
"못난 집안에 둘이나 순교자를 내심을 감사합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그보다 더 좋은 천국에 유학시키심을 감사 합니다."
이처럼 욥이나 손양원 목사님이나 하박국의 감사에서 보여지는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하박국의 고백처럼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우리에 양떼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는, 그야말로 "없고, 없고, 없고"에서의 감사라는 것입니다.
모든 필수품이 다 떨어지고,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지고, 살 소망이 모두 없는 상태에서 감사의 고백을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감사를 빼앗아 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지난주로 지구의 인구가 70억을 돌파했습니다.
이 가운데 굶어서 죽어 가는 영혼이 30억이며, 영양실조에 걸린 자가 10억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전국의 쓰레기장에 버려지는 쓰레기의 양을 돈으로 환산하면 8조원이 넘습니다.
우리는 욥처럼 집을 잃고 가족을 잃는 슬픔까지 이르지 아니했습니다.
하박국처럼 모든 것이 다 없어져 굶어죽을 지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바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은 자전거 하나를 가지면, 자동차를 가지고 싶어집니다.
자동차를 사게되면, 더 큰 자동차를 사고 싶습니다.
월세에서 살다가 전세로 옮기면, 처음에는 만족스럽지만 얼마 되지않아 좀 더 넓은 집으로 옮기고 싶어집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소유에 대한 욕망에 붙잡혀 그때 그때마다 감사하기보다는 또 다른 욕망에 사로잡혀 불평과 원망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내 집에 있는 모든 것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없다 없다 해도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가재도구들을 하나 하나 헤아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물건들이 여러분의 집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없다 없다"하지 말고, 있는 것을 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박국의 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의 감사의 근원은 하나님이었습니다.
18절에서 그는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무너진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우리의 주변에 무엇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셔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나의 구원자 되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어죽으신 어머니가 감사하다-재물이 없어도 생명(나)를 존재하게 하심에)
그러므로 감사는 신앙입니다.
감사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너무 과분하게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둘째는 갈수록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사람이요,
셋째는 갈수록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요,
넷째는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사람입니다.
결론 적용 호소 결심-마치면서
불만과 불평과 원망의 근본원인은 첫째로 욕심(이기심)이며 둘째로 교만이다
감사하며 살지 못하는 자는 인생의 70%를 실패한 것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자는 인생을 사는 에너지가 고갈된 사람입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감사하십시오.
능히 이기고 극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곧 나를 구원하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감사의 고백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17,18 환경을 초월하는 믿음과 기쁨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박해와 고통을 당하고 궁핍과 고난을 견딜지라도 그들은 죽도록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엘리야를 보호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희생을 당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한 사람도 지나쳐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호에 주실 것이며,
기근의 때에도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다.
악한 자들이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갈 동안 천사들은 의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것이다.
“의롭게 행하는 자”들에게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이 있다.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사 33:15, 16; 41:17).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것이다(합 3:17, 18)
인용(쟁투 629). 신길교회/이신웅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