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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스님의 장군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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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가귀감 스크랩 선가귀감 (81~82과)19 청봉선사강설
무애심 추천 0 조회 38 14.04.29 18: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선가귀감(81~82과)19-1-1.zip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선가귀감(禪家龜鑑) 본문(本文)

 

81.

【雲門宗】

馬祖傍傳이니 曰天皇道悟 曰龍潭崇信 曰德山宣鑑 曰雪峰義存 曰雲門文偃 曰雪竇重顯 曰天衣義懷禪師等이니라

 

81.<雲門宗>

마조의 곁갈래로 전해진 천왕 도오-용담 숭신-덕산 선담-설봉 의존-운문 문언-설두 중현-천의 의회 등이니라.

*天王 道悟선사: 14세때 출가하려 하였으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자 하루에 한끼씩만 먹어 몸이 극도로 쇠약 해지자 할 수 없이 출가를 허락했다고 하며, 항주 경산 國一 道欽선사의 회상에 가서 다섯해만에 깨쳤으나 여요의 대매산에서 4년간 숨어 지내다가 마조의 회상에서 2년간 지내고 34세에 남악의 석두화상에 가서 비로소 確徹大悟한 후 10년간 있으며 그의 법을 잇고 석두가 입적하자 탑을 쌓은 뒤 운수행각을 하다가 형주, 성동천왕사의 옛터에 절을 크게 중창하고 교화하였으며 키가 七척이고 풍체가 당당하며 존비귀천을 가리지 않고 방문객을 앉아서 대했으며, 입적을 할 때 며칠을 앓더니 원주를 불러 큰소리로“알겠는가?”물었으나 원주가“모르겠사옵니다”하자 목침을 내동댕이치고 그대로 탈적하였음.

*龍潭 崇信禪師: 어릴때 그의 부모가 천왕사 가까이에서 떡장수를 하였는데 도오화상이 그곳으로 오자 집에서 날마다 떡 열 개씩을 보내드리니 화상이 그중에서 한 개씩을 꼭 남겨 가져온 용담에게 먹으라고 주기에 그가 생각하기를“내가 갖다 드린 떡을 나에게 도로 주는 뜻이 무엇일까?”하여 화상에게 물으니“네가 가져온 것을 다시 네게 돌려주는 것이 무슨 허물인가?”하는 말에 느낀 바가 있어 출가 하였으나 아무것도 가르쳐 주는 것이 없자 하루는 “제가 스님을 모신지 오래 되었으나 마음공부의 요긴한 곳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므로 속이 타옵니다.”하니 화상이“내가 너에게 가르치지 않은 때가 없었는데 무슨 말인가? 네가 밥과 차를 가져오면 너를 위해 받았고 네가 절을 하면 또한 너를 위해 머리를 숙이지 않았는가?”하는 말을 들으며 잠자코 그 뜻을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깨치는 것은 말끝에 곧 깨치는 것인즉 생각해서 알려고 하면 벌써 그르치게 되니라”하는 말에서 깨달은바 있어“어떻게 지켜 가야 하옵니까?”하니 “생각대로 오락가락 인연따라 지내가라, 범부의 생각을 다 할뿐 성스러운 뜻 따로 없노라”하는 말에 대장부 큰일을 비로소 마쳤다 함.

*德山 宣鑑禪師: 성이 周씨로 출가하여 계율을 숭상하고 모든 경에 밝았으며 그중에 금강경에 통달하여 疏(주석)를 쓰기까지 하여 항상 강설하므로 그를 주금강이라 불렀으며 하루는 도반들에게“경에는 육도만행으로 무량겁을 닦아야 성불한다고 했는데, 남방의 못된 것들이‘바로 마음을 가리켜 담박 성불케 한다.”고 하니 내가 가서 그것들을 몽땅 소탕해 버리겠소.”하고 길을 떠나 남방으로 갔는데 점심때가 되어 떡집에 들어가 점심을 달라하니 떡을 파는 노파가“그 걸망에 든 것이 무엇이요?”하고 묻자 의기양양하여 “금강경 疏요”하니 노파가 다시“금강경에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하였는데 스님이 點心을 하시겠다 하니 스님은 어디에다 점을 찍고 点心을 하시려오? 답을 하시면 점심을 공짜로 올리겠으나 답하지 못하면 떡을 드리지 못하겠소.”하였으나 말문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떡을 팔지 않으니 덕산이“이 주위에 큰스님이 계신듯 하니 가르쳐 주시오”하자 숭산에 계시는 용담선사를 찾게 하여 점심도 굶은 채 용담으로가 법당에 들어가 아직 기가 덜꺽인 그가“용담의 소문을 들은지 오래나 와서 보니 용도 없고 못도 보이지 않는군.”하고 큰소리를 치자 숭산이“그대가 참으로 용담에 친히 왔군”하는 말에 또 말문이 막혔으며 그날 밤 방장에 가서 늦도록 법담을 나누다가 객실로 가려고 밖을 나오니 캄캄하여 다시 들어가“바깥이 어둡소이다.”하니 용담이 지초에 불을 켜 덕산에게 내밀자 덕산이 받으려 할 때에 ?불을 훅 불어 꺼 버렸는데 그로 인하여 덕산이 크게 깨치고 공손히 절을 하자“그대가 무엇을 보았기에 절을 하는가?”하니“이제부터 다시는 천하 노화상들의 말을 의심치 않겠나이다.”하였으며, 이튿날, 용담이 법상에 올라가서 이르기를“이 가운데 어떤 자가 있어 어금니는 칼날 같고, 입은 핏동이 같은데 한 방망이 때려도 고개도 돌리지 않느니라. 훗날 외딴 봉우리 정상에서 나의 도를 세우리라”하였으며, 그는 애지중지 메고 다니던 금강경 소초를 법당 앞에서 불살라 버리며“온갖 현묘한 말재주를 다 부리더라도 터럭 하나를 허공에 날린 것 같고, 세상의 온갖 재간을 다 부리더라도 한방울 물을 바다에 던진 것 같도다”하고 용담화상에게 절을 하고 길을 떠나가는 곳마다 설법하는 법전만 세웠으며, 학인을 다스릴 때는 항상 방망이를 써 덕산방 이라는 말이 생겼으며,

그의 법을 이은 三世 白兆 志圓에게서 신라의 惠雲 선사가 나왔으며 유명한 설봉, 암두 등의 제자를 배출하게 되었음.

*雪峰 義存禪師: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종소리를 듣거나 불전에서 쓰는 물건을 보면 좋아했으며, 열두살에 아버지를 따라 옥간사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그길로 출가를 하게 되어 참선을 시작하여 鹽官선사를 찾아갔고 투자선사를 세 번 동산선사를 아홉 번 찾아 갔으나 얻은바가 충분치 못하다가 덕산선사에게 법을 묻다가 한 방망이를 맞고 깨친 바 있었으나 투철하지 못했는데 그 사형되는 암두선사가 꾸짖는데서 비로소 확철하게 깨친 후 덕산의 법을 이어 복주 산골산에 들어가 설봉산이라 이름을 고치고 40여년 교화를 하기를 모인 대중이 항상 1500명이 넘었으며, 법을 이은 제자만도 56인이며 그 가운데는 신라 大無爲선사와 고려 玄訥선사와 靈照선사가 나왔으며 제자 長慶 慧稜선사에게서 신라 龜山화상이 나왔음.

*雪竇 重顯禪師: 20세에 부모를 여의자 곧 출가하여 운문 문언선사를 찾아가“한생각도 일으키지 않아도 허물이 크다고 한 뜻이 무엇입니까?”묻자 그가 가까이 오라하더니 한대 갈겨 주기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또다시 그 입을 때려 그 바람에 크게 깨치고 5년간 모시고 있으면서 그의 법을 받은 후 소주 취봉사에 머물다가 후에 설두산 자성사로 옮겨 30여년 교화하다가 하루는 제자들에게 입적할 것을 알렸더니 한 제자가 남길 임종게송을 원하자 “내가 평생 말을 너무 많이 한 것이 걱정이니라.”하고 그 이튿날 소지품들을 모두 대중에게 나누어 주고 그날 밤에 입적하였으며 그의 법을 이은자가 승속을 합하여 150명이나 되었음.

*天衣 義懷선사: 어부인 아버지의 배에 따라 다니면서 산고기는 몰래 강물에 풀어 주었는데 그러다가 아버지에게 들키면 꾸지람과 매를 맞았지만 항상 그렇게 하다가 출가하여 여러 선지식 회상으로 다니다가 취봉에 가서 중현선사를 모시고 물긷고 나무하며 온갖 고행을 다 하면서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고 지낸 어느날 선사가“이렇다고 할 수 없고 저렇다고도 할 수 없고 이렇다 저렇다 아니라고도 할 수 없노라”라고 하는 말에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한바탕 때려 ?아버리길 네 번이나 하여 어느날 물을 긷다가 물지게가 부러져 쓰러지는데서 크게 깨쳐 그의 법을 이어 가는 곳마다 퇴락한 절을 크게 세웠으며 법을 이은 제자가 80여명이 되었음.

 

 

82.

【?仰宗】

百丈傍傳이니 曰?山靈佑 曰仰山慧寂 曰香嚴智閑 曰南塔光湧 曰芭蕉慧淸 曰郭山景通 曰無着文喜禪師等이니라

 

 

82.<?仰宗>

백장의 곁갈래로 전해진 위산 영우-앙산 혜적-향엄 지한-남탑 광용-파초 혜청-곽산 경통-무착 문희 등이니라.

 

*香嚴 智閑禪師: 키가 칠척이고 총명과 재주가 비상하여 주위에서 관리가 되기를 권했으나 마다하고 출가하여 위산의 회상에 가니 위산선사가 법기임을 알아보고“평생 듣고 본 것을 떠나 그대가 세상에 나오기 전 그대의 본래 면목에 대하여 한마디 말해보라.”하였으나 이리 저리 생각하여 대답을 해 보았으나 모두 아니라고 하기에 자기 처소로 돌아가 지니고 다니던 책들을 모두 펴놓고 아무리 찾아보았으나 듣고 본 것을 제외하고는 말할 수가 없어 다시 위산에게 가서 가르쳐 주기를 간청 했으나 위산은“내가 말 하면 내 見處일 뿐 그대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므로 가지고 있던 책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불법이고 뭐고 더 배울 것이 없으니 되는대로 지내기로 작정하고 울면서 위산을 하직하고 남양에 가서 회충국사의 유적을 돌아보며 머물고 있던 차 하루는 마당을 쓸다가 기왓장을 주워 던진 것이 대숲에 떨어져 딱! 하는 소리에 크게 깨치고 목욕을 하고 향을 사르며 멀리 위산을 향하여 절하고 게송을 읊기를 ‘한번 치는데 아는 것을 잊었으매 다시 닦아 다스릴 것이 없도다.’하고 그 길로 위산으로 가 게송을 지어 바치기를 “지난해 가난은 참가난이 아니요. 금년가난이 참가난이로다. 지난해는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조차 없도다.” 하자, 위산의 법을 이은 앙산이 “사형이 여래선은 깨쳤으나 조사선은 깨치지 못한것 같구려.”하는 말을 듣고 즉시“지금 눈 깜박할 찰나에 그대에게 보이려니 만약 그래도 알지 못한다면 사미라 부르리다.”하여 앙산으로 부터“사형이 참으로 조사선을 깨쳤구려.”하여 인가를 받고 법을 이어 동주 향엄사에서 교화하였음.

*南塔 光湧禪師: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산실에서 이상하게 광명이 비치자 말들이 소리쳤다 하여 광용이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으며, 출가하여 앙산에 가서 오래지않아 깨쳐 향엄의 법을 잇고 남탑에서 교화하였음.

*芭蕉 慧淸禪師: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 가 남탑 관용선사가 법상에 올라 설법하는 것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치고 그 곳에서 5년간 머물다가 파초산으로 가 교화하였음.

*?山 景通禪師: 앙산에게 등나무 주장자로 네 번을 얻어맞고“봉우리 아래 구름이 모이니 천하 大禪인 부처니라”하며 다녔는데 입적을 할 때 들 가운데 마른나무를 쌓아 놓고 신도들에게 “잠시 다녀오겠다” 하고서 스스로 불을 붙여 불속에 서서 마쳤으니 이를 自火葬이라 함.

*無着 文喜선사: 일곱 살에 출가 하여 계율을 숭상하며 수도의 운화사에 가서 진관법사에게 화엄의 교리를 배운 후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으로 들어갔으나 보살의 화현이 여러번 있었어도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선지가 밝은 뒤에 죽 끓이는 죽속에서 문수보살이 나타난 것을 보고“문수는 문수요 무착은 무착이거늘 무슨 상관이랴!”하고 주걱으로 후려 갈겼다 하며 홍주 관음원에서 앙산의 말아래 크게 깨쳤으며 무착이란 이름은 나라에서 지어 올린 법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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