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경제일보 사진부 이세환 부장님은 초년기자 시절, 나의 인생여정을 인도하신 등대와도 같은 분이다.
당시 같은 부서에 근무하던 김경문 기자(현 순복음 부천중동교회 담임목사)와 ‘이세환 국장님께서 구순이 넘으셨는데 조만간 찾아뵈자’ 며 경기도 용인에 계시는 사모님께 통화를 드렸더니 아뿔싸, 지난해 정초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고 하셨다.
사모님이 다리가 불편해 매일 이국장님이 아파트 아래 내려가 쓰레기를 버리시곤 했는데 그날도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서려는데 그냥 주저앉으시며 용인 세브란스 병원서 고관절을 수술을 받고 이틀만인 1월2일 소천하셨다고 하셨다.
사모님은 전화주어 너무 반갑다 고 하시며 현대경제일보 시절을 그렇게 아름다운 인생의 추억으로 남기며 돌아가셨다 하셨다. 자신도 88세 건강이 안 좋아 교회도 못나가고 거동은 못하지만 오로지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매일 바치고 있다 시며 김 목사와 사진부 식구들의 안부도 전하셨다.
10년 전 봄, 경기도 양평 갤러리 ‘와’에서 김수환 추기경님 추모 3주기 전시회를 열고 그동안 고마우신 은인 분들을 찾아뵈며 전시장으로 모신적이 있었다. 마침 사진전을 열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동아일보 전민조 선배와 필자와 같은 동네 성당서 사진 봉사 하시던 경향신문 조명동 선배도 함께 모셨다. 이국장님은 한국일보, 경향신문에서도 근무하셨는데 모처럼 신문사 후배들과 오붓한 자리가 되신것이다.
이국장님은 팔순이 지나셨는데도 담배를 피울 정도로 건강하시고 단신이지만 목소리는 예전처럼 쩡쩡 울리셨다. 역전의 노장답게 롤라이 휴대용 카메라를 목에 두르고 전시장 입구 김수환 추기경님 흉상을 이런저런 각도로 촬영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원래 이국장님은 1959년 한국일보 기자 입사이전엔 공군사관학교 생도로 파일럿이 꿈이셨다. 그런데 6.25전쟁이 나자 1개월 만에 공군특무대로 차출되어 특수교육을 받고 첩보작전을 지휘하는 최전방 분견대장으로 이북 원산 앞 영흥만의 모도와 함경북도 성진 앞 양도에서 위험한 첩보작전을 수행하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었다. [저자 이세환, 다규멘타리_동무! 나 국군이요, 예서원 2004‘ 중에서]
이국장님은 전시장 2층 갤러리 카페에서 일행과 담소를 나누다 갑자기 안주머니 지갑을 여시더니 “이게 전쟁이 끝난 후 50년 만에 찾은 참전유공자 증입니다. 이제 가족과 후손들에게도 6.25 참전 용사였음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 기쁩니다.” 며 「참전 유공자 증」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셨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다해바친 전쟁영웅들이 「참전 유공자 증」 하나 받질 못하고 하직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이국장님은 살아있는 옛 전우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백방노력 끝에 여러 인우보증과 증거자료를 찾아내 함께 소원을 풀어낸 것이었다.
평소 조국통일의 염원을 늘 가슴에 품고계신 이 국장님은 같은 공군동기생인 조종사 김동진 소령이 조종하는 T-33기에 동승해 국내최초이자 유일한 휴전선 고공촬영에 성공한 바 있다.
1965년 1월1일자 경향신문 1면에 실린 서해 강화도부터 동해 속초까지 4만5천 피트 상공에서 휴전선 일대 155마일을 한눈에 보이도록 촬영해 특종사진을 남긴 것이다. 사선을 넘나든 전쟁터에서 젊음을 불사른 이국장님은 남다른 국가관과 기자로서의 소명의식이 남달랐다.
196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재봉 살인사건 직후 넉달만에 처형되는 인천 부평 산골짜기 사형장에 농사꾼으로 변장해 총살당하는 모습을 직접 촬영한 가슴 섬뜻한 일화 등 취재경험담도 털어놓으셨다. 보통인의 기지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직업관이야말로 과거 전쟁시 생사를 넘나든 특무대 대장으로서 강단에서 나온것이라 짐작됐다.
이 국장님은 매우 가정적인 분이셨다. 리라유치원 노랑색 유니폼을 입은 막내따님 현아 양을 직접 출근길 찝차에 태우고 출근하셨는데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편집국 사무실을 울릴때면 아~ 이쁜이 현아가 왔구나 하며 편집국 직원들이 근무하다 시선을 쏟으며 잠시 편안한 웃음을 선사했다.
퇴근 시엔 삼각지 유명한 곱창 집에서 회식을 종종 열 곤하셨는데 회식이 끝나면 국장님의 1245찝차에 사진부 6식구가 눌러 타고 노래를 부르며 대방동 백양메리야스 공장 옆(지금 구로디지털 역 인근) 2층 붉은 건물 자택으로 향하곤 했다. 지금도 국장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통로에 길게 내걸린 산악사진가 이훈태 선배의 록클라이밍 흑백사진이 되살아난다.
1970년 초 당시엔 실력도 실력이지만 백이 통하던 세상 였다, 공채제도가 시작되는 무렵이지만 사진부는 지인을 통해 아름아름 채용되던 시절이었다. 선후배 서열이 엄격한 언론사 환경에서 자칫 부서내 분란을 초래할 수 있는 사안들이 도사리고 있었으나 국장님 특유의 친화력으로 직원들을 다독이며 사진부가 타부서로 부터 위상이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이셨다.
특히 가정사정으로 공부할 시기를 놓친 필자가 당시 바쁜 신문사 생활 속에서 야간학교를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내질 못했을 텐데 국장님은 “인생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한다” 며 기꺼히 허락해주셨다. 특히 시험기간에는 한 시간 일찍 퇴근해야 되기에 소속 부장과 선배들께 인사드리는 것도 죄송했는데 번거롭게 하지 말고 눈치껏 알아서 퇴근하라며 배려해주셨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사진도 열심히 배웠지만 이 부장님의 친화력은 바른말 잘하고 직설적인 나의 직장생활을 유연하게 변화시키셨다고 본다.
실력만으론 성공할 수 없다. 대인관계도 능력이다. 동료를 이해해주고 품어주고 아껴주는 포용적 리더십이야말로 최상의 리더자란 것을 일깨워주신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