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읍(錦山邑) 아인리(衙仁里)
인삼의 고을로 알려진 금산의 시가지 그 서쪽을 물고 차츰 발전하는 인구 밀집지역으로 조금씩 변화해 가는 지역에 아인리는 자리한다. 서북쪽으로는 진산으로 통하는 지방도로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금천을 경계로 상옥리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중도리와 그리고 서쪽으로는 양지리와 북쪽으로는 상리와 금성면 도곡리, 양전리와 접하며, 옛날부터 금산 고을을 다스리는 관아가 자리하였던 지역이다.
조선시대에 금산군의 행정적 중심지였던 아인리는 임진왜란 때와 갑오 동학란 때 관아가 그들의 손에 의해서 불타버리는 참상을 당하게 되어 고을의 성격으로 보아 고색이 찬란하여야 할 옛 관아의 건물은 현재 상존하지 않는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이전이며 백제 때는 진내군의 지역이었다. 신라 때는 진례군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금주의 고을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태종 13년(1413)부터 금산군에 속했으며 유향으로 그 높은 고을이었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단적으로 정착했던 씨족이 분산하여 전통성을 잃으며 또한 동학란 대에 그 전통성이 무너진 비극의 고장으로 손꼽힌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군일면의 지역으로서 금산군의 관아가 있었으므로 아인(衙仁) 또는 애인, 애인리라고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지리, 박금리 일부를 병합하여 아인리라 하고 금산군 금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10월 1일에 금산면이 금산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금산군 금산읍 아인리가 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충청남도에 편입되어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아인리가 되었다. 리의 면적의 1.94㎢에 1951년 8월 3일에 설립된 금산농업고등학교와 1956년 3월 14일에 설립된 금산여자고등학교, 1951년 9월 31일에 설립된 금산동중학교, 1957년 12월 9일에 설립된 금산여자중학교가 자리한 지역이다.
자연부락(自然部落)
<백김이, 상진말, 아인, 오리정, 용머리, 주거리>
백김이
용머리 서쪽에 있는 마을을 백김이라고 부른다. 서쪽으로 산을 등지고 동쪽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진 자리에 마을이 있다. 마을에 박씨와 김씨가 많이 정착해 사는 마을이라 백김이, 박금리(朴金里)라고 부른다.
백김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으로 이야기된다. 즉 아인리 뒷산을 중심으로 왼쪽의 용머리산(좌청룡)과 오른쪽 야산을 좌우용호로 하고 앞산을 주작으로 하여, 마을이 들어선 자리는 혈처로서 용의 여의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의 머리로 인식되는 용머리산을 건드리면 마을에 환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속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수 형국적 해석은 현재보다 아리에 있었던 예전 마을에 관한 것이라 하는데, 마을 정면에 자리잡은 진악산의 화기(火氣)로 이내 자주 화재가 발생한다고 보아 점차 현재의 위치로 마을이 옮겨졌다고 한다.
상진말
상지리(上旨里)라고도 부른다. 백김이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서남쪽으로는 상진말못이란 못이 있으며 마을 가까이 후곤천이 흘러내린다. 조선시대에 금산군 사직단이 있었던 마을이라 상지리, 상진말이라고 부른다.
아인
백김이 동쪽에 있는 마을을 아인(衙仁), 애인이, 애인리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관아가 있었던 마을이라 애인, 애인리, 애인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오리정
상진말 동쪽에 있는 마을을 오리정이라고 부른다. 금산에서 진산으로 가는 국도변에 자리한 마을로서 옛날에 오리정(五里亭)이라고 부르는 정자가 마을에 있었으므로 오리정이라고 부른다.
용머리
오리정 서남쪽에 있는 마을을 용머리라고 부른다. 마을 뒷산이 형국상 용머리에 해당하는데, 그 아래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용머리 또는 용두리(龍頭里)라고 불렀다 한다. 용머리 산 정상에는 읍치 내 제사시설로서 대개 읍치의 우측(문묘는 좌측)에 설치되었던 사직단이 있었다. 그만큼 용머리산이 금산 읍치에서 갖는 상징성은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읍치의 중심을 북쪽의 소산(비호산)이 아닌 진악산과 조종산으로 볼 경우 용머리산은 동쪽의 호랑이산과 함께 사신사 중 좌우용호(左靑龍右白虎)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 양지리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일제(日帝)는 금산천으로 그 머리를 담그고 있던 용머리산 끝 부분(용의 입?)을 깨트렸다고 한다. 이러한 용머리산의 훼손이 갖는 풍수적 소응은 둘째 치더라도, 그것이 금산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을 충격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산세의 훼손이 단순히 풍수본질적 차원에서만 논의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주거리
오리정 위쪽에 자리한 마을을 주거리라고 부른다. 길가에 마을이 있어서 오고가며 쉬어 가는 주막이 있었던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