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2024.3.29.금요일)
막15:16-32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본질은 십자가이고,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 무형의 교회들은 십자가 위에 세워져야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믿어야할 십자가와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믿어야할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에게는 지고 가야할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16:24절‘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것이니라’하셨습니다. 또 마10:38절‘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씀하셨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자기 십자가 지고’입니다.
구원의 십자가는 오직 주님만 지실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앞서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야 합니다. 이날은 예수님의 생애 중 고난이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례지낸바 되었습니다.
1. 희롱 받으신 예수
십자가형이 결정되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로마 군인들로부터 희롱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다음에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외치면서 경례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가장시키기 위해 왕의 옷인 자색 옷을 입히고 왕관 대신 가시관과 왕권의 상징인 홀 대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렸습니다. 이런 희롱은 고대 사형집행에서 흔히 있었습니다. 야만인이 취하는 가혹한 장난이었습니다. 예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습니다. 이렇게 희롱한 후에 자색 옷을 벗기고 그의 옷을 도로 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로마군인과 유대인들에게 희롱당하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오히려 나의 왕으로 경배해야 합니다. 왕이시지만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고 심지어는 제자들에게까지도 버림을 받고 이방인들에게 희롱과 능욕을 당하셨지만, 참고 인내하신 주님 때문에 제가 죄 사함을 받고 왕의 백성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고난을 기억하며 나도 끝까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나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주님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성금요일 새벽에 이렇게 결단하시고 기도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 골고다까지 가시는 예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걸으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골고다까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신 길을‘비아 돌로롯사’ 즉 고난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십자가 지시고 가시다가 예수께서 쉬신 곳을 14장소로 나뉘고 구레네 시몬을 만난 곳을 5장소라고 합니다.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 자는 그 형틀을 자기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만 했지만 예수님은 몸이 약해서 지고 갈 수 없어 구레네 시몬을 만나 억지로 십자가를 지워서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내게 주어진 십자가 억지로라도 지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동북편에 있는 도시로 이곳에 일찍이 유대인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구레네인의 회당이 있었으므로(행 2:10, 6:9, 11:20) 시몬도 그 회당에 속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생애에 큰 결심을 하고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려 올라왔다가 난데없는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보리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십자가를 지운 로마 군인과 십자가를 지고 가던 그 죄인을 미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마가복음 기록한 마가는 시몬을 알렉산더 루포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막 15:21). 바울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를 높였는데(롬 16:13) 루포는 시몬의 아들이요 그 어머니란 그의 아내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시몬은 예수님을 보고 그의 미움이 믿음과 존경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시몬이 억지로 주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뒤따른 축복입니다.
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두 사람의 강도와 함께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로 간 것입니다. 골고다는 해골을 의미하는 말인데 라틴어로 갈보리(Calvaria)입니다. 아마도 대머리 모양을 한 벌거숭이 언덕을 가리켰던 것 같습니다. 이 언덕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예루살렘 북쪽이나 서북쪽에 성벽과 기드론 및 힌놈의 두 골짜기 사이에 펼쳐 있는 언덕 속에 있었습니다. 드디어 형장에 도달하여 유대의 관례대로 마시면 취하는 아주 강한 향기 나는 포도주를 예수님께 드려 마시게 했으나 예수님은 혀끝을 술그릇에 대보고 마시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포도주는 감격을 잃게 하기 위해 주는 것이므로 이 같은 진정제는 예수님의 높은 성격에 맞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맑은 정신으로 목숨을 버리고 자기가 바라는 죽음을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두 개의 통나무로 묶어 만든 십자가를 세우고 그 다음에 죄수의 손에 못을 박고 발에도 못을 박았습니다. 한 조각 나무 때기가 십자가 기둥의 중간쯤에 건너질러 붙여져 있어서 죄수를 받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끔찍스러운 일들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십자가상의 칠언(七言)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눅 23:34).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눅 23:43). 어머니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보라 내 어머니다(요 19:26∼27).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내가 목마르다(요 19:28). 다 이루었다(요 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눅 23:46). 제자들은 도망가고 없었고 요한은 십자가 밑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확실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며 섬겨 온 갈릴리의 신실한 여자들이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십자가 밑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4. 무덤에 묻히신 예수
예수께서 숨을 거둔 것은 오후 3시경이 이었습니다. 유대의 율법은 형 집행일 저녁이 지나도록 시체를 십자가에 달아 두는 것은 금지하였습니다. 그 이튿날이 안식일이었고 특별히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거룩한 날이 그러한 광경으로 더럽혀 지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로마 당국이 세 죄수를 빨리 죽게 하여 십자가에서 떼어버 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령을 받은 로마 병사들이 다리를 꺾는 형을 두 도둑에게 가하였습니다. 이러한 형은 노예나 포로에게 흔히 가하는 형이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정말 죽었는지 확인하고 아직 숨이 있으면 완전히 죽게 하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 목숨이 끊어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그의 뼈가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을 이루려 한 것입니다.
유대의 법률로는 저녁에 형틀에서 내려 사형수의 무덤으로 되어 있는 곳에 집어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달아났으나 그의 제자라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존경하던 유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요 존경받는 사람이요 의회의 의원으로 그날 밤 총독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었는가? 한편 놀랐고, 형을 집행한 백부장을 불러 예수가 죽었는가를 다짐하고 나서 요셉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마태는 이 무덤을 요셉의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 새 무덤 속에 넣고는 돌을 문에 굴러다 막고 돌아갔습니다. 여인들은 시체가 잘 놓였나 살펴보고 집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 금요일입니다. 그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겸비한 자기인식을, 몰약을 탄 포도주, 곧 진통제를 거부하며 우리의 죄값을 온몸으로 감당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사랑하는 독생자를 혐오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잠시 버려두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발견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