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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Humphrey, "북아시아 샤머니즘에 대한 이론들"
1. 북아시아 샤머니즘의 특성
서구인들은 '샤머니즘'이라고 알고 있지만, 정작 북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특별한 이름을 갖지 않았다. 몽골인의 경우 17세기 이전까지는 '흑신앙'(black faith, xara sasi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그 이후에는 샤머니즘을 비하해서 '사물을 보는 낡고 잘못된 방식'(the old and wrong way of seeing things)으로 불렀을 뿐이다.
또한 다른 종교 관념들이 샤머니즘에 포함된 것도 주목된다. Buryat족이나 순록 Tungus족에의 샤머니즘에서는 라마 신격과 우주론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지역 라마교도 샤마니즘 의례를 사용하거나 스스로 샤먼화하기도 했다.
이처럼 샤머니즘이 복합적, 혼합적 양상을 띤 것은 이 지역의 지정학적, 경제적, 사회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이곳은 유목, 목축을 공통의 경제적 기반으로 했고, 장거리 교역로와 강력한 초원제국이 존재한 까닭에 인적 교류가 매우 활발했다. 따라서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등 세계종교들이 늘 존재했고, 이로 인해 혼합적 종교성이 발현된 것이다.
2. 북아시아 샤머니즘에 대한 이론들
1) Eliade
엘리아데는 샤머니즘을 '인간이 신령과 소통하는 엑스타시 기술', '고대의 접신술'이라고 하고, 샤먼은 종교적 목적을 위해 엑스타시 기술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것은 샤머니즘을 자율적 체계나 그것의 집합체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며, 역사적, 문화적 상황과 관계없이 원초적 종교현상으로 항상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원초적인 고대 샤머니즘에 대한 그의 이해와 관계가 있다. 원초적 고대 샤머니즘은 하늘에 있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샤만의 엑스타시 기술을 통해 하늘과 대지 사이의 구체적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므로 엘리아데는 북아시아에서 '모든 시대'에 존재했던 '초 역사적인' 엑스타시 기술의 현상으로 샤마니즘을 전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험프리에 따르면 샤머니즘의 연행 내용과 그 믿음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어 온 것이 중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엘리아데의 비역사적 해석의 문제가 있다. 험프리는 엘리아데의 견해는 샤머니즘이 하나의 사상체계안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연구하기 어렵게 하며, 어떤 문화적, 역사적 상황에서 유래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또한 엘리아데가 시대적 경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해도 샤머니즘을 사회적 변화속에서도 생존한 유일한 현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발달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결여했고, 사회적, 이념적 기초에 대해서도 분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2) Shirokogoroff
샤머니즘을 다른 믿음, 의례와 관련지어 연구한 쉬로코고로프는 샤머니즘을 퉁구스의 일반적인 '심리-정신적 컴플렉스'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으로 접근했다. 그에 따르면 샤머니즘은 불교 전파에 '자극' 받아 생겨난 후대의 현상이다. 즉 '외래적 기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퉁구스 샤머니즘을 천신숭배나 死者에 대한 고대 의례보다는 외래적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퉁구스의 샤먼 용어 'saman'도 외국에서 온 말이며, 그 현상 자체도 남방적 요소이다. 예를 들면 라마교는 샤머니즘에게 영혼에 대한 숭배라는 영향을 끼쳤다. 쉬로코고로프는 엘리아데와 달리 엑스타시 경험은 인간 조건의 기본이지만 동시에 역사를 통해 변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퉁구스에서 천계의 초월적 존재를 향한 엑스타시적 상승이라는 관념은 점차 샤먼에게 빙의하러 내려오는 영혼에 대한 관념의 영향을 받아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샤머니즘은 천계 숭배, 라마교 등과 공존하며 상호혼합을 겪었다. 퉁구스의 샤먼들은 천계 숭배에 참여하도록 요청받았고, 라마승도 사람들에게 샤만이 되도록 권유하거나 스스로 샤먼화했던 것이다.
험프리는 쉬로코고로프의 분석은 탁월한 민족지이지만 시베리아 샤마니즘이 불교에 의해 자극받았다는 그의 이론은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 견해로는 퉁구스 샤머니즘과, 불교가 깊이 침투할 수 없었던 북극 시베리아나 서시베리아 샤머니즘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편 천계 의례가 소멸한 것 등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해명보다는 논리적 설명을 하고 있을 뿐인 점도 현실유리라는 차원에서 비판되었다.
3) I.M Lewis
샤머니즘에 관한 사회학적 설명을 시도한 루이스는 [Ecstatic Religions]에서 샤머니즘의 형태는 그 사회에 내재한 억압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루이스에 따르면 엑스타시 의례를 창조한 사람들은 사회적인 피억압자이고, 따라서 의례 역시 '주변적','반권위적'이다. 한편 호된 기후 조건, 식량 부족, 질병과 같은 '사회 외적' 곤란을 겪는 퉁구스와 같은 경우의 샤머니즘은 '중심적 도덕 의례'가 되어 정치적인 것과 함께 중심사상이나 가치를 구현한다.
험프리는 이러한 루이스의 접근-전체로서의 인간사회에 관한 일련의 일반화-의 문제점은 특정 문화에는 적용되지 않는 점이라고 비판한다. 예를 들면 북아시아 샤먼 의례의 경우 '중심 도덕 의례'와 '주변적 의례'의 성격을 모두 구현하며, 소규모 퉁구스나, 서부 부리야트의 경우는 샤만적 영혼이 '중심도덕'보다는 더 넓은 영역의 사상과 가치관에 관련된다. 이 사회들에서는 여성이나 불행한 사람들도 샤먼이 될 수 있고, 반면 보다 복잡한 사회인 만주국 같은 경우는 최근까지도 '중심 도덕'과 관련된 황실 샤먼이 존재했던 것이다.
4) Gumilev
구밀레프는 Vanzarov가 샤머니즘은 하늘, 식물, 동물과 인간 자신에 대한 예배에서 생겨난 원초적 종교라고 한 것을 비판하고, 샤머니즘에서 발견되는 신들의 수나 지적인 차이는 역사적으로 종교혼합주의의 결과였다고 지적한다. 몽골의 경우 초기에는 샤머니즘이 아니라 단일한 초월적 존재를 믿었다. 그들은 자연적인 '푸른 하늘'과 추종자들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신으로서의 '영원한 하늘'을 구별했으며, 동시에 'Etugen'이라는 대지의 신을 숭배한 이원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창조적, 섭리적인 신은 천계, 인간계, 지하계로 구성되는 우주관을 가지고 있고, 이 세계의 소통에 샤먼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샤머니즘과 모순되는 것이다. 따라서 샤머니즘과 고대 몽골 종교가 갖는 관계가 문제된다. 이에 대해 구밀레프는 동 타타르가 이슬람을 채택하고 몽골이 불교를 채택하면서 고대 몽골 종교는 사라졌다고 보았다. 바로 이때 다양한 혼합 형태를 가진 샤마니즘 실행의 흐름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연구의 장점은 반자로프의 견해가 갖는 혼란을 해소한 점이고, 시로코고로프보다 더 이른 시기에 샤머니즘의 기원이 있다고 보는 점도 흥미롭다. 그러나 초기 몽골 시대에 샤먼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영혼의 표상인 'ongon'이 반복적으로 언급된 것을 볼 때, 샤머니즘과 'ongon'이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5) Potapov
알타이 민족을 연구한 포타포프는 샤머니즘은 독창적, 자생적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적어도 알타이 지역에서는 샤머니즘 이전에 '산 숭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추상적 생각이 아니라 특정 시기의 경제와 사회에 밀접히 관련된 것이다. 각 聖山이 씨족 영역의 중심에 위치한 것은 그 땅이 특정 집단에 의해 경제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증거이다. 여기서 산 숭배는 종족의 연로자가 일반적으로 맡았지만, 복잡한 의례는 종족을 대표하는 '의례전문가'인 샤만이 맡았다. 그러므로 포타포프는 산 숭배는 본질적으로 前 샤마니즘이라고 했으며, 구밀레프와는 달리 'ongon'이 샤머니즘과 공존했다고 보았다. 이런 포타포프의 견해는 샤머니즘이 북아시아 씨족 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발생했다고 본 것이며, 샤먼의 기능도 과거에는 씨족의 성원들에 의해 수행되다가 부족체계 해체와 함께 특정한 사람에게로 전이되었다고 본 것이다.
6) Vainstein
포타포프의 견해를 지지한 파인슈타인은 씨족체계 해체가 보다 서서히 이루어졌으며 최근까지 전문적 샤먼이 없었던 곳에서 샤먼의 기능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수행되고 있는 것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이런 샤머니즘은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전문화'된 직업이 없었으므로 초기 관찰자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계급사회의 발전과 함께 오래된 씨족 의례가 희미해지면서, 특정한 개인이 샤먼의 역할을 맡았고 더욱 정교화했다고 한다.
험프리는 파인슈타인의 논리가 구체적, 역사적 자료를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회학적으로 '씨족'의 해체를 볼 때, 알타이-투바-부리야트 지역에는 최근까지 씨족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해체의 의미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
7) Zhukovskaya
라마교가 17세기 몽골에 다시 침투해 들어간 시기에 한정해서 연구한 쥬코프스카야는 샤마니즘적 몽골 원주민들은 라마교를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곧 라마교에 항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샤마니즘적 요소가 라마교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라마교는 샤머니즘과 매우 유사한 티벳의 'Bon-po'와 수 세기동안 대립하며 접촉해왔고, 그 결과 라마교와 본-포는 17세기 경에는 상대방의 전형적인 특성을 상호 채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17세기에 몽골에, 한 세기 후에는 부리야트에 도달한 라마교는 이미 어느 정도 혼합적 종교였던 것이다. 한편 몽골의 샤머니즘도 '순수한' 형태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서 라마교와 샤머니즘은 상호혼합의 역사적 경험을 겪게 된 것이다.
쥬코프스카야는 몽골의 경우, 친족에 기초한 사회에서 봉건주의로 변화하면서 샤머니즘이 등장했다고 보았고, 종교적 기능이 한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도 이 시기라고 보았다. 하지만 봉건주의가 정착하고 계급사회가 발전하면서 샤머니즘의 적합성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은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정당화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내세를 기대하며 현실의 불만을 인내하도록 하는 종교가 필요했던 것인데, 그 기능은 불교가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은 사회형태 발전의 차이에 근거해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험프리는 쥬코프스카야가 친족사회에서 봉건사회로의 변화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그리고 왜 이러한 변화가 개별 샤먼의 등장을 초래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연구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비판한다. 구체적으로 봉건주의가 유목목축사회안에서 어떤 것이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맑스주의 유형인 '군사적 민주주의'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이용하여 연구한다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고 했다.
8) 부리야트 사례
동남아시아의 경우와는 달리 북아시아 부리야트 지역의 샤만의 일과 라마승의 일은 구별되지 않았다. 라마승들도 점술가, 중재자, 呪醫, 축귀자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고, 심지어는 라마승의 엑스타시적, 요술적 행위들 중 어떤 것들은 샤만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샤마니즘적 춤인 'tsam'의 경우) 이처럼 샤머니즘과 불교는 사상과 실천에 있어서 상당히 유사하지만 보족적 관계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19세기 후반까지 몽골에는 불교지역과 샤머니즘지역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고, 20세기 초반 중부와 동부 몽골에는 소수의 샤만들만이 남았던 반면, 서부 부리야트는 라마교 선교사들의 지속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흡수된 적이 없다. 이처럼 서부 부리야트는 샤마니즘으로 지속되고, 동부 부리야트는 불교에 흡수된 까닭은 '사회의 차이' 때문이다.
서부 부리야트는 척박한 땅과 인구증가, 러시아 정착민의 유입 등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한정된 토지의 사용권은 부계나 친족적 유대에 의해서 확인되었으므로 조상에 기반한 사회적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런 배경은 행운과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 조상을 강조하게 했고, 샤머니즘의 직업적 수행자도 씨족과 관계하게 했다.
반면 유목 목축에 기초해서 팽창한 사회인 동부 부리야트는 광할한 목축지와 높은 생산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농경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땅의 사용권 역시 엄격히 규정되지 않았다. 한편 유목생활의 특성상 이웃이 사실상의 친족으로 간주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의 유전적 연대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조상과 관계된 유대 역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동부 부리야트는 샤머니즘보다는 보편적이고, 친족에 기초하지 않으며, 직업적 수행자들과 획일적 위계질서를 가진 라마교가 더 부합했던 것이다. 특히 특권계급의 종교적 기대-특권적 지위를 정당화하는 불교적 윤회관-와도 관련이 있다. 따라서 몽골 사회가 위계적 계급구조로 변화되면서 몽골 영주들은 17세기에 불교로 돌아섰던 것이다.
험프리는 이처럼 샤머니즘과 불교가 상호 보완적 종교행위가 아니라 어느 한편에만 수용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샤마니즘이 수행하던 엑스타틱 트랜스, 포제션, 치유를 라마교가 모두 포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라마교의 발전은 위계적, 영역적으로 확대된 사회에 부합할 수 있었고, 반면 샤마니즘의 유지는 조상들의 유언에 따라 땅의 점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세습에 기초한 사회에 부합했다. 하지만 그 위치는 고정적이지 않아서 20세기 초에는 라마교가 샤마니즘 지역으로도 퍼졌고, 따라서 샤머니즘과 라마교는 동일한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게 되었다.
평가
엘리아데에 의해 대표되는 샤머니즘의 심리적 이해는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엑스타시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에 따른다면 어떠한 공간 어떠한 시간, 어떠한 종교와 가치체계라 할지라도 고대적인 샤머니즘 현상이 심층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샤머니즘에 대한 '보편적' 이론의 수립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력을 가지지만, 구체적 문화, 역사, 사회 상황이 갖는 특수성의 발현을 간과하기 쉽게 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샤머니즘을 '종교'로 인식하는 흐름도 마찬가지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샤머니즘에 대한 비하적 해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 교리에 기초해 있고, 제도화되어 있는 종교들과 형태상으로 동일시 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이 역시 종교라는 또 하나의 보편성으로 모든 샤머니즘을 획일화 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반면 험프리의 이론사 개괄에서 얻어지는 것은 샤머니즘은 보편적 이론으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는 다양한 사회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샤머니즘 현상의 복합성을 발견할 뿐이다. 물론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현상에 대한 '최소한의 공통분모'는 형성될 수 있다. 훌트크란츠가 복합적 현상인 샤머니즘의 '기본 성격' 내지 '중심사상'을 네가지로 제시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공통분모가 구체적으로 발현하는 것은 문화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중요하다.
샤머니즘을 심리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종교현상이나, 하나의 안정된 체계를 갖춘 종교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전제라고 한다면, 험프리의 이론사 고찰에서 얻어지는 결론은 특수성에 대한 경험적 연구의 중요성이다. 즉 샤머니즘을 인간의 보편적 종교현상이 아니라 특수하고 복합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하며, 그것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시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제기
'사회적 변동'과 '차이'에 주목한 험프리의 방법론이 갖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샤머니즘 신앙민들의 종교적 태도에 대한 기술, 즉 Geertz가 제시한 '의미체계의 분석'이 보완되어야 하지 않는가?
험프리의 논의가 갖는 장점은 사회적 맥락을 추적함으로써 종교 현상의 변동을 해석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역사적 규명의 유의미성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역사적 변동속에서 신앙민들이 갖는 의미체계의 지속도 주목해야 한다.
기어츠는 기존의 사회인류학의 종교 연구를 비판하면서, 종교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의 작업은 첫째, 종교의 핵심을 구성하는 상징에 구현되어 있는 의미체계의 분석과 둘째, 이러한 체계를 사회-구조적, 심리적 과정에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인류학의 문제점은 전자를 무시한 점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험프리의 보고 중, 러시아 지배시 서부 부리야트 민중이 가졌던 종교적 태도가 보여주는 '의미체계'의 분석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험프리는 사회변동과 종교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많은 부리야트인들이 정교회에 들어간 현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 가입의 이유는 러시아 통치라는 배경에서 개종이 '이득'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부리야트인들의 종교적 태도가 사회적 변동의 반영물이었다는 증거로서만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험프리도 그들의 개종이 '표면적'이었다고 보고하며, 그 예로 개종한 부리야트인들은 정교회 교당을 나가지 않고 빈번히 샤먼과 접촉했으며, 정교회의 니콜라스 성인상도 다산과 행운을 가져오는 온곤으로 이해하며 걸어두었다고 보고한다.
이 현상에 대한 사회인류학적 보고는 의미체계 분석을 통해 보완되어야 한다. 부리야트인들은 사회변동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 속에서 자신들이 가진 샤머니즘 신앙의 의미체계-훌트크란츠의 네가지 주제와 같은-를 보존하며 변화된 상황을 새롭게 해석하고 수용한 것이다. 이는 라마교가 부리야트 전반에 퍼질 수 있었던 것도, 단지 지배계급의 기호때문만이 아니라, 기층 신앙민들이 가진 의미체계의 역동적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게 한다. 지배계급의 지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라마교가 부리야트인들의 의미체계에 부합하지 못했다면 정교회의 '표면성'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마교는 자발적으로 부리야트인들의 샤마니즘적 의미체계를 인정했고, 부리야트인들은 자신들의 의미체계를 보존한 채 라마교를 신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북아시아 샤머니즘에 대한 연구는 에토스, 세계관에 기초한 의미체계의 분석과 사회-구조적,심리적 분석을 통해서 보다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샤머니즘비교연구(2000.3.16), 지도교수 : 김성례, 발표 : 정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