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중가요계를 보면 인형을 빼다 박은 것 같은 가수들이 인기를 휩쓸며 활동하고 있다. 한때 ‘꽃미남’이란 별칭과 함께 10대 소녀는 물론 3~40대 여성들까지 열광하던 남성 아이돌 가수들이 주춤한 사이 외모가 빼어난 걸그룹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해서 노래만으로 승부한다는 말은 아득히 잊힌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의 가사 같다는 생각이다. 연예기획사들이 예쁘고 춤 잘 추는 청소년들을 꼽아 가수로 데뷔시키면 또래의 청소년 대중은 그렇게 이미지화된 걸그룹을 보면서자신의 외모도 그들에게 맞추려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요즘 청소년 세대의 유행이 그렇단 얘기다.
이런 외모 지상주의 시대에 노래만 잘하는 가수가 살아남기는 무척 힘들다. 더구나 그 가수가 장애인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을 거 같다.
외국의 가요계를 보면 다른 가수들에게 존경받는 장애인 음악인이 많고 지금도 활동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오지 오스본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랜디 로즈(Randy Rhoads)는 소아마비였지만 그는 기타 하나로 당대 최고의 보컬리스트였던 오지 오스본과 함께 그룹을 만들고 연주했다. 시각장애인도 많다. 지금까지도 음악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각뿐 아니라 미각까지도 잃었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선 세계적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는 가수가 됐다. 레이 찰스(Ray Charles)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과 흑인, 시각장애인이란 한계에도 백인을 능가하는 가창력으로 미국 팝계를 사로잡았다.
한국엔 장애인 가수가 누가 있나? 몇 명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소아마비 가수로는 조덕배가 있고 시각장애인인 이용복씨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싸이키델릭(록)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가창력을 인정받은 가수 윤용균에 대해선 아마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다.
6~70년대 신중현은 한국 록음악의 대부였다. 서울맹학교 졸업반이던 윤용균은 무조건 신중현을 찾아갔고, 그의 노래 실력을 인정한 신중현은 윤에게 세곡의 노래를 준다. 그 가운데 ‘내 곁에 있어주오’가 상당히 인기를 모았다. 당시 최고의 잡지인 <선데이 서울>에 그의 스토리가 실리면서 신중현 사단에서 윤용균의 시대를 알렸다. 그리고 드디어 73년 그는 첫 음반인 ‘내 곁에 있어주오’를 발표한다. 당시로선 파격으로 LP의 B면 전체를 차지한 23분짜리 대곡 ‘거짓말이야’를 덧붙여 모두 6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음반은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윤용균은 재기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야 했다.
그가 재기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당시 유신정권의 사회정화 차원에서 벌어진 이른바 ‘신중현 대마초사건’이었다. 자신의 노래를 알아주던 신중현이 무대에서 사라지자 더 이상 윤용균을 위해 노래를 지어줄 작곡가는 없었다. 무대는 트로트 일색으로 변했다. 게다가 사회정화는 노래뿐 아니라 장애인 가수들의 활동을 옥좼다. 그의 서울맹학교 2년 후배인 이용복 등 시각장애인 가수들이 미풍양속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더 이상 방송무대에 설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유명한 이용복도 설 수 없는 무대라면 당시 신인가수였던 윤용균에게 높은 장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경향은 80년대 전두환 정권까지 지속된 현상이었다. 그리고 9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중음악계에 외모 중시 풍조가 고착되면서 장애인 가수가 선 무대는 더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