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채기
이원배(경제학과 71학번)
울며 그녀를 떠나던 몇 해 전 여름, 태양은 너무 뜨거웠다. 나는 그녀보다 더 큰 가슴에 안겨 그녀를 잊기 시작했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면서 현재를 내 미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꾸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태양이 고개를 숙이는 계절이 오면서, 잊고 있었던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비에 젖어 내 가슴에 흘러내린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고개를 저어도 소용이 없다. 재채기처럼 그건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다.
밴쿠버의 가을은 빗방울로부터 시작된다. 9월 중엽까지는 ‘여름아. 좀 더 있으라’ 하는 이슬비가 내리다가 10월 들어서면 ‘여름아. 이제 그만 가라, 가라’하는 가랑비가 내린다. 반쯤 물들기 시작하는 가로수 단풍잎이 비에 젖어 처연하다. 지구마을 이 동리, 저 동리에서 날아온 이방인들의 어깨도 처연하게 늘어지는 계절. 짧은 해가 비구름에 가려 저녁을 재촉한다.
이맘때쯤이면 짐짓 잊은 척 하던 사람들도 향수에 잠긴다. 가을비가 향수를 부른다. 몸도 마음도 서늘해진다.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재채기처럼 터져 나온다. 삶이 힘들수록 추억은 아름답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돌아보면 눈물겹도록 화려했던 그 시절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나는 늙지 않으리라는 착각 속에 살았다. 언제였던가. 내가 ‘첫사랑 그녀’를 떠나려고 작정했던 날. 내 착각이 여지없이 부셔져 버렸던 때. 이전에 나는 항상 푸르고 그녀는 항상 내 곁에 있을 줄 알았었다. 몸도 마음도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녀와 지낸 내 푸르렀던 시절을 결코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녀는 내 인생의 전부였다. 아름답고 화려했으며 가난했지만 기죽지 않았다. 내 젊음을 부추기며 내 모든 것을 그녀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새벽잠 깨어 일어나 바라보던 그녀의 수려함에 나는 ‘눈 들어 눈을 들어 앞을 보면서’ 그녀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까지도 바치리라고 맹서했었다.
그러나 나는 잠시 한눈을 팔았고, 그녀 이외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내 가슴 속에 일기 시작한 하찮은 바람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어느덧 나는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 이러하니 저러하니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내 눈동자는 어느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왜 곁에 늘상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내 손이 닿지 않아 가지지 못하는 것들만 내게 귀한 것이라고 여길까. 그것이 보통사람들의 욕심일까.
그뿐이었다. 단언컨대 나는 추호도 그녀 곁을 떠날 계획이 없었다. 내 배반의 일탈을 그녀가 눈치 채었을까. 그녀가 나를 멀리 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내가 무엇을 잘 못 했는가. 왜 나를 멀리하려 하는가. 수없이 많은 밤을 그녀의 변신에 대한 고뇌로 지새웠다. 그녀는 단호했다. 여전히 푸르른 그녀는 어느 무더운 한여름 밤 내게 말했다. 당신은 늙어가고 있어요. 한때 나는 당신의 젊음이 필요했지만 이제 당신은 나를 위해 헌신할 젊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은 이제 내겐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 이예요.
아아.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세월이었다. 나는 그녀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철저히 외면했다. 늙어가는 육신은 더 이상 그녀에게는 효용가치가 없었다. 내가 늙었다고? 당신인들 늙음을 피할 수 있을 줄 알아? 세상모르는 젊은이들 틈에서 균형감각을 잃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허둥대는 당신은 영원히 푸르름을 간직할 수 있을 줄 알아? 나는 그녀를 향해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빈 가슴속에서 허무한 메아리로 되돌아 올 뿐이었다. 나는 단지 내가 떠나야 할 때, 그녀를 떠나는 구실을 그녀에게서 찾으려고 했었다. 그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내 오랜 ‘바람기’는 그냥 모르는 척 감추어 버렸다.
울며 그녀를 떠나던 몇 해 전 여름, 태양은 너무 뜨거웠다. 나는 그녀보다 더 큰 가슴에 안겨 그녀를 잊기 시작했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면서 현재를 내 미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꾸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찾은 내 바람기의 대상은 늙어가는 나를 괘념치 않았다. 그녀처럼 사시사철 변덕스럽지도 않았고 화려하거나 호들갑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고 재미도 없지만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고 너그럽고 여유로운 치마폭으로 나의 잔잔한 슬픔을 감추어 주었다.
그러나 태양이 고개를 숙이는 계절이 오면서, 잊고 있었던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비에 젖어 내 가슴에 흘러내린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고개를 저어도 소용이 없다. 재채기처럼 그건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다.
내 영원한 그리움이 머무는 곳… 그녀는 내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이다.
이원배
. 건국대학교 00000학과 71학번
. 캐나다 재중
. 한국문인협회 캐나다 지부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