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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樣年華의 季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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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이란 “ 榮辱의 삶 속에서 오고 또 어디로 흘러 사라져 간다. 또한 세월이란 永劫의 線上에서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자서전이란 명제를 말하기조차 미혹하지만, 지내온 삶의 끄트머리에 서서 省察과 補贖으로, 告白 聖事를 보는 심정으로 지내온 삶을 回顧하여 이 글을 쓴다.
나의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시! 상주시에서도 奧地에 속하는 중동면 금당리 235번지, 속명으로 “질 말”(길마을)이란 동네가 나의 安胎고향이다. 낙동강이 가로 놓여 상주에서는 “섬나라”라고 이름한 외진 곳이다. 東으로는 의성군과 서북쪽으로는 예천군과 접하고 있는 산골 마을이다. 금당리는 이웃 동네 “동작”과 “다래”를 합하여 “금당리”의 행정구역이다.
하지만, 마을 앞으로는 작은 도랑이 흐르고 그 갯가에는 복숭아, 살구나무가 있어 봄이면 도리행화(桃李杏花) 만발하여 홍난파 곡의 “고향의 봄” 노래만 불러도 아득한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잊을 수 없다. 또한 마을 입구에는 80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마을의 수호신으로 어릴 때는 매년 정월에 소를 잡아 제물로 하여 洞祭를 지냈으며, 단옷날에는 그네를 달아서 그네뛰기 대회를 열었던 곳이다. 아낙네들은 치마폭을 날리면서 담 넘어 있는 샘(우물)이 보이면 그네가 멀리 올라갔으니, 그네를 뛰면서 “샘 봤니”라고 하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바로 내 집 우물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에서 한 채 밖에 없는 기와집을 사 이사 오고, 살던 집은 형님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이곳 느티나무 아래에는 여름철엔 어른들의 쉼터였고,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였다. 지금은 아이들이 없으니, 어른들의 쉼터일 뿐이다. 느티나무는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여름이면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무에 비하면 인생 100년도 수유(須臾) 이던가! 그리고 뛰어놀던 뒷동산, 물놀이하던 앞 시냇가, 비가 많이 와서 홍수로 집안이 온통 물바다가 된 일들, 앞동산에 모여 단체로 줄지어 학교 가든 追憶은 그때 그 시절에만 있었던 풍경이리라. 질 마을(길마을)에는 礪山(여간)宋가 일족만으로 60여 호가 30 世를 이어져 사는 전통적인 씨족 마을이다. 씨족사회의 단면은 이웃하고 있는 “신암리”에는 순흥안씨 집성촌이며 윗마을 “다래”에는 “김 씨”의 집성촌이다. 그래서 모두가 할아버지, 아저씨, 형 조카 등 혈족으로 항렬을 이룬다. 항렬로 돌림자는 증조부는 “會”. 조부는 “必”. 父는“燮 또는” 達“字를 썼으며 나는”善“字이니 할아버지께서는 끝 자” 祥“字를 제게 지어 주시어 내 인생을 ? 살아오게 하였다. 농촌의 생활은 농사가 전부였으니 당시로서는 가난을 면치 못했을 뿐 아니라 春窮期를 겪어야 하는 困窮한 생활 그 자체였다. “동무 동무 씨동무 - 2 -
보리 나도록 사세”라는 노래를 부른 것도 그때쯤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동네 공사”라 하여 마을 총회가 열리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크게 싸우듯 고함소리 요란하여 진행도 무질서하여 서로 자기 주장만을 앞세우다 보니 결론 없는 말다툼으로 회의를 끝내곤 하였나 보였다. 어린 나에게 비추어진 단상이다. 닷새 만에 한 번씩 열리는 시골 장날에는 별 볼 일 없이도 장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이 장가니 거름 지고 장관 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듯 이웃집 “철수”할아바지는 “라이터 돌” 사러 장 간다고 하며 사람들은 놀려 대곤 하였는데 아마도 장날이면 으레 두루마기 걸치고 장 보러 다닌 것이다. 또 看過 할 수 없는 장면은 장이 서는 날 저녁 풍경이다. 해 질 무렵 장을 보고 돌아오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취객들의 행태 또한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요란스레 소란을 피웠다. 평소 삶에 지친 촌부들은 술의 힘을 빌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렇게 술 좋아하시던 아저씨 할아버지들 육십도 되기 전에 일찌감치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음력 정월의 세시 풍습은 일 년 중 가장 풍성하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농악놀이였는데 꽹과리, 징, 북 등 악기가 동원되어 동네는 시끌벅적 큰 잔치를 벌인다. 아이들 좋아라 그 뒤를 따르고 집마다 방문하여 福을 빌고 豊年을 祈願하는 한바탕 풍악 놀이를 펼친다. 농악꾼 중에는 재주가 뛰어나 열두 줄 상모 줄을 돌리는 것은 단연 인기 독차지다.* 할머니를 추억한다.
나에게 있어 할머니에 대한 추억은 거의 없다. 아버지가 나의 배다른 형님을 낳고 또 여자아이를 출산 했다는데 아마도 출산과 함께 아이도 아내도 잃어버린 슬픔을 겪었다. 그래서 막내아들인 나의 아버지를 돌보느라 할머니는 우리 집에 계셨고. 나는 아버지가 서른여섯 살 나이에 태어나 온갖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자랐다.
내가 아장아장 걸을 나이에 할머니 등에 업혀 놀다가 입에 물고 있듯 꼬챙이에 찔려 울었든 기억은 어렴풋하다. 할머니는 朱 씨 집안에서 시집와서 할아버지 宅號를 “반말네”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할머니 사시던 동네의 俗名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네다섯 살쯤 되었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喪輿가 집을 나가 저만치 갔을 무렵 울면서 뒤 쫓아갔는데 고종사촌 누나인 “순자” 누나가 나를 업고 달래준 기억은 아득한 전설이 되고, 나의 할머니는 지금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이라도 할머니 산소에
벌초하고 성묘하기를 나의 할머니에 대한 작은 孝心이라 생각되어 實踐하려 자기만 맘대로 되질 않음은 나의 정성이 부족함이라 자책하곤 한다. - 天主敎 信仰과 幼年 시절 - 할아버지는 30대 나이에 세례를 받고 천 - 3 -
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아버지에게서 들어 왔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세례를 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할아버지는 삼 형제분이었는데 위로 형님이 한 분 있으며, 아래로도 동생이 있었는데 형님인 큰 할아버지는 상주시니, 근교에 살고 있었는데 아마 형님으로부터 세례를 권유받으시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지 아니면 할아버지가 먼저 세례를 받고 큰할아버지가 나중에 세례를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할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거의 같은 무렵에 세례를 받아 천주교에 입교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형제를 비롯하여 자녀들은 당연히 세례를 받았으며, 할아버지 출생이 1870년생(?)으로, 어쩌면 30세 되시기 전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해 본다. 나의 아버지가 1906년생으로 幼兒 洗禮를 받았으니 말이다.
긴 기도문을 참 잘도 암송했다. 저녁기도는 식구들 다 함께 잠들기 전에 했는데, 기도 중에도 졸음이 와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특히 아버지는 舍廊 채에서 나와 함께 기거(起居)하였는데 새벽 일찍 나가서 소죽을 끓이면서 아침기도를 하곤 하였는데. 새벽의 고요를 깨우는 祈禱 소리는 나의 자장가였으며 아버지를 追憶하는 鄕愁로 남아있다. 주일마다 公訴(공소-神父가 없는 곳)에는 기도문 朗誦이 이웃에게 들릴 만큼 크게 들려서 이웃 비신자들은 “구신 믿는 소리”라 비아냥대기도 했다. 공소에는 신부(神父)가 없기에 봄가을로 판공성사(判功聖事)를 하였는데 그때 공소신자(公所信者)들은 큰일을 치르는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察考라 하여 교리시험을 구두로 치려는 형식으로 교리에 대한 지식을 묻는 것이다. 어른, 아이 다들 가슴 두 근 하여 신부 앞에서 초조했던 것은 아득한 그때의 초대 교회 풍습으로 신앙생활의 한 斷面이었다. 나는 신부가 오는 날에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신부님의 뒤를 따라다녔다. 왜냐하면 신부님은 사냥총을 가지고 와서 뒷산으로 사냥하러 가곤 하였던 것이다. 물론 저녁때에 가서 “판공성사”를 주었으니까, 또래 사촌들과 함께 꿩사냥 하는 신부님의 뒤를 쫓으며 한 마리 잡기를 기대해 보지만 잡은 기억은 없다. 판공성사가 끝나고 저녁에는 어린이들을 불러 놓고 “나비야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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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리 날라 오너라”의 동요를 가르쳐 주시던 그때의 기억은 아득하지만 새롭기만 하다. 이러한 信仰生活 속에서 자란 나로서는 객지 생활인 중학교 留學 시절(고향 집에서 40여 리 떨어진 상주시네) 에서도 週日이면 성당에 가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그때 堅振聖事(견진성사)를 보았다. 견 견성사를 집도한 이는 대구교구“서정길” 대주교였는데 키는 육척장신에 깡마른 체구로 주교 복장으로 미사를 집전했던 모습은 한마디로 偶像이었다. 철없던 나이에 견진성사가 무엇 인도 모르고 성사를 보았으니, 지금으로는 가당찮은 일이기도 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원서를 서울에 있는 소신학교인 성신고등학교에 지원했다. 시험일을 며칠 앞두고 나보다 13살 위 형님께서 나의 하숙집으로 오셨다. 그 당시 사촌 형님께서는 面議員을 하셨고, 정치적으로 천주교 탄압이 심했던 터라 큰집에는 경찰서의 형사가 거의 날마다 찾아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집안의 동태를 살피곤 하였다. 이에 怯을 먹은 형님은 신학교 가는 것은 집안에 큰 禍가 될 것이라고 만류하셨다. 나 역시 신학교에 대한 進學의 확신이 없었기에 쉽게 형의 뜻을 따라 시내 가까운 고등학교로(지금의 상주대학) 진학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온 신앙의 뿌리는 130여 년의 시간 속에서도 綿綿이 이어져 와 후손들은 물론 많은 지인들로 하여금 신앙으로 인도 하였으며 몇 해 전에는 從孫 子가 神品을 받아 聖職者가 되는 榮光도 얻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사랑채에 書堂을 열어 젊은 청소년들에게 천자문, 소학 명심보감 등 가르쳤다. 내가 유치원 다닐 나이쯤 되었을 무렵 할아버지 서당에는 글 읽는 젊은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웃 몇 개 동네에서 젊은이들이 몰려왔으며, 수업료로는 여름철에는 보리 한 말, 가을에는 나락 한 말 정도였다. 저녁 후에는 손자들을 불러 천자문과 붓글씨를 가르치시곤 하였는데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들에게 먹(墨)을 갈게 하거나 담배를 넣는 일을 곧장 시켜서 나는 먹 가 는 것이 엄청이나 지루하고 싫었던 것이었다. 천자문을 공부할 때도 붓으로 쓰도록 가르쳐 주었으며 공부가 끝나고 나면, 으레 숨겨둔 과일(배, 감)이나 먹을 것을 주셨는데 나보다 2살 위인 사촌 형을 더 많이 챙기곤 해서, 어린 나이에 기분이 별로 였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사촌 집은 사는 게 우리보다 어렵게 지내는 것을 어여삐 본 모양이다. 나는 6~7세 무렵 천자문을 다 떼고 나니 어머니께서는 책걸이 떡을 해서 할아버지 서당으로 가져왔다. 그 이후 할아버지 서당에서 더 이상 배우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또 할아버지 연세도 80 고령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국어 시간에 한글을 가르쳤는데 이 시간은 나에게 엄청이나 지 - 5 -
루하고 따분한 시간이었다. 천자문을 다 외운 것은 한글 공부도 덤으로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국어 시간은 또래들과는 배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삼 학년 때 8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 소꿉친구들- 날이 새면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이란 한 살 위 혹은 아래 형 조카들이다. 놀이터는 뒷동산, 앞 시냇가, 겨울철이면 앞 논에서 얼음지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니 손에 凍傷 걸리기도 하였는데, 동생과 함께 늦도록 스케이트 타고 와서 화롯가에 손 녹이니 손이 뚱뚱 부어 凍傷이 甚
해져서 아버지는 온갖 민간요법으로 동상 치료에 고생하였다. 콩주머니에 넣기도 하며, 소의 胃 주머니에 담그기도 하였지만 완치되지 않아 손가락이 굵어지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원인지 동생은 관절염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새로운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新東국민학교”이다. 학교를 중심으로 남쪽 동네는 신암리, 동쪽으로는 우물리(이곳은 하회 류씨가 살던 곳), 그리고 북쪽의 내가 사는 금당리이다. 아마 금술이 있어서 지어진 이름인가 했지만, 금 굴은 없는가 보니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우물리에 사는 친구들은 학교에 올 때 “자라”를 잡아 오기도 하였는데 강을 건너서 오기 때문에 강가에서 잡아 온 것이었다. 학교생활은 즐거운 놀이터였지만 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가서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수꼴을 뜯는다거나 소를 몰고 소먹이로, 들로 가는 것이 유일한 일손을 돕는 것 중의 하나였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수꼴을 베여오거나 소먹이로, 야산으로 가서 방목하였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집으로 오는 것이다. 우리 집 소는 큰 황소로 아주 잘생긴 멋진 놈이었는데 친구는 자기 소가 더 좋다고 자랑하다 그러면 싸움 붙여 보자고 해 정말 “청도 소싸움 못지않은 싸움을 붙였는데 결과는 친구 소가 도망가 승리의 기쁨을 맛 보았다. 친구는 나보다 한 살 위였는데 싸움도 잘하고 친구들 사이에 대장 노릇을 한터라 그날은 자존심이 엄청이나 상했는지 애무한 소에게 화풀이로 회초리로 갈기며 사라졌다.
학교에서 2km 떨어진 곳에 비행기 사격장이 있었는데 비행장 가까이 사는 친구들은 그곳에 가서 美軍 人들이 쓰다 버린 물건들을 가끔 보여 주곤 하였는데, 도루코 면도날이라든가 쪼크렛, 껌 등 생활용품들을 가져 오기도 하였다. 가난한 시절이라 그들이 쓰다 남은 것도 한국 사람 둘에게는 당시에는 귀한 것들이었다. 어느 날 安某 한 반 친구는 조그만 쇠뭉치를 가져와 두드리다 폭발해서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후 담임 선생님은 비행장 근처에 가는 것을 말라셨는데, 어느 날 낙동강 모래사장에 경비행기가 불시착 하여 점심시간에 7-8명이 구경갔다가 돌아와 담임 선생님께 엎드려 뻣쳐해서 엉등이를 몽둥
-6- 이로 두들겨 맞은 것은 “선생님 무척 禍 많이 나셨구나”돌이켜 보면 철없던 시절이었다. * 나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는 슬하에 사람 참여를 두었는데 나의 아버지는 네 아들 중에 막내로 태어났으며 위로는 형님 세 분과 누나 한 분이다. 아래로 여동생 두 분이 나의 고모님 되는 분으로 “예천 고모”님과 “풍양고 모”이다. 우리들(사촌들)끼리는 그렇게 고모님의 호칭을 불렀고, 언제나 다정하게 이뻐해 주시는 고모님을 잘 따랐다. 어느 날 사촌 누나인 “정선(성숙)”이 누나는 나보다 4~5세 위인데 십여 리 이상이나 되는 풍향 고모 댁에 놀러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철없이 따라나서 고모 댁으로 간 적이 몇 번이나 된 듯하다. 그때마다 고모님은 몇 푼의 용돈을 주었는데 우리는 그 돈으로 가게에서 군것질하거나, 포켓 깊숙이 간직 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사촌 누나는 고모님의 용돈 주시는 것 때문에 고모를 잘 따른 것도 같다. 장터 입구에 자리한 고모님 댁은 시장 보러온 사람들과 장사꾼들이 오가는 길목이어서 장날이면 더욱 붐비는 곳이다. 구석에는 마소들이 또 삐 메어 여물통을 흩고 있는가 하면, 대청마루 봄볕에는 아지랑이, 벽에 걸 바인 괘종시계는 정오를 알리는데 열두 번의 치는 소리를 나는 세워보고 시계가 신기하기도 했다.
또 예천의 큰고모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불행한 젊은 시절을 사신 분이다. 20세쯤 결혼 하여 아들 하나를 낳고 고모부가 돌아 가서 靑孀寡婦로 살게 되었다. 생계가 막막한지라 친정집에 자주 와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아마도 나의 아버지께서도 사랑하는 여동생의 안타까움 때문에 물심양면으로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내가 서너 살 무렵 고모님의 외아들인 고종사촌 형님은 방학 동안은 으레 외갓집인 우리 집에서 보냈으며 심지어는 대학(고려대학교) 친구들까지 데려와 며칠간을 묵고 가기도 했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고모는 아버지께 많은 도움을 바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모님은 집에서 밀주를 담가서 파는 술장사를 하였는데 술 단속을 나온 술 조사원이 들이닥쳤으나 마침 방학이라 집에 내려와 있던 고려대학생 아들을 보고 그냥 돌아갔다고 하는 逸話는 대학생인 형님의 간곡한 설득인지도 모른다. 든든한 아들 하나를 둔 고모님께서는 얼마나 자랑스러워했을까! 홀로 아들 하나만을 믿으며 온갖 어려움 다 겪고 살아온 고모를 나는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당시로서는 서울대학교 보다 더 인기 있었던 고려대 학생을 둔 어머니는 어려움도 어려운 모르고 아들 잘 둔 즐거움으로 살았겠다고 여겨진다. 시골 촌놈이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학위와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아들을 둔 엄마로서 외 아들 홀로 키우며 많은 모진 고생 그 얼마나 컸을까? 그래서 나의 고모이기 전에 한 여인으로서 삶이 존경스럽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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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울 某 대학의 敎授에서 대학원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고모는 평생을 한번
도 아들 집에서 신세를 지지 않고 고향 예천에서 구십 세를 넘기면서도 정정하게 사시다가 타계하였다. 아들을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아들에게 신세 지지 않으려고 홀로 지낸 어머니의 표상을 나의 고모에게서 본다. 타계 하기 십수 년 전 80 고령에도 친정 조카를 찾아와 이틀 밤을 보내고 가던 뒷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모두를 다 주고 간 것이다.
아버지는 누이동생에 대한 애정도 컸지만, 형제지간의 情 또한 남달라서 가난했던 둘째 형님과의 사랑은 “管鮑之交” 이상 그것이었다. 큰아버지는 젊은 시절 附子(부자)를 잘못 복용해 하체가 痲痺(마비) 되고 말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형님(나의 큰아버지)의 온갖 수발을 들게 되었는데, 원거리 갈려면 말꼬 삐자고 말에다 형님을 태워서 마부 일 하였으니 힘든 일을 할 때마다 직접 와서 도와야 했기에 다른 형제들보다 함께한 날이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손재주가 뛰어났던 큰아버지는 목수일 뿐 아니라 金銀 細工일 대장간 풀무에서 연장 만드는 일등 뛰어난 재주꾼이었다. 그래서 큰아버지 댁은 많은 사람들로 언제나 붐볐다 하지만 가난은 면치 못하여 아버지는 가끔 보리쌀이나 밀가루 등을 가져다주었다. 때로는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함께 가기도 하였는데 아버지에게 나는 특별히 귀한 아들이었으리라.
* 李 相三 선생님을 追憶한다. 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 삼 학년 교실, 라일락 향기 풍기는 따스한 봄날, 쉬는 시간이라 창밖을 보고 있노라니, 멀리 운동장 안으로 멋진 청년 한 분이 씩씩한 걸음으로 걸어 와 교무실로 들어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분이 나와의 오랜 因緣을 맺게 된 이상 삼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좀 늦은 나이에 대구 師範 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학교로 첫 부임 하시게 되었는데, 나와는 4학년이 되어서야 담임으로 뵙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20대의 멋진 청년 선생님이셨다. 학교에는 여자 선생님도 한 분 계셨는데 예쁘긴 하지만 정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교장선생님과는 잘 만나는 듯했지만, 멋쟁이 이 선생님과는 거리를 둔 듯 보였는데 어느 날 이 선생님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 선생님을 좋아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다소 경계의 대상인 것처럼 네게 얘기한 적이 있다. 해가 바뀌어 4학년이 되었을 무렵 선생님은 우리 동네, 나의 옆집에 방을 얻어 自炊를 하게 되었다. 자취 생활 몇 개월이 지났을 무렵 선생님이 손수 자취생활 하는 걸 안타까이 본 나의 부모님은 우리 집에 와서 기거하라고 청하여 흔쾌히 허락하였으며, 어머니는 빈방을 내주었다. 식사는 거의 나와 겸상했는데 처음에는 불편했으나 선생님은 언제나 편안하게 대하여 주었기에 잘 지낼 수가 있었다. 학교에 갈 때는 으레 도시락 두 개를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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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교무실에 갖다 드리고는 했으며, 학교를 마칠 때에도 선생님의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며 기다렸다가 함께 귀가 하곤 하였다. 선생님은 언제나 내 이름을 끝 자 한자만 “祥아!”라고 불러주어서 더욱 情感을 느끼게 하였다. 선생님은 어린 나에게 동화 이야기라던 지 만화에서 본 애정 스토리도 들려주었는데, “난 옥 씨 백 년을 같이 살아요! 아니요, 천년만년을 ! ” 이렇게 애정 섞인 만화 이야기를 자주 해 줄 때는 홀로 외롭게 지내는 청춘이 쓸쓸해 보이기보다는 나와 놀아주는 시간이 즐거웠다. 내가 어렸으니까! 앞집에 사는 “옥화”와 나는 같은 반이라 자주 만나서 선생님의 자취방을 방문 하였는데, 그때 옥화는 제법 살림할 줄을 아는 소녀였다. 그래서 선생님의 방 청소도 하고 반찬도 챙겨다 주고는 하였다. 어느 날 선생님이 심한 몸살로 누워 앓고 있었는데, 나와 옥화는 뜻밖의 병시중을 맡게 되었다. 선생님 홀로 自炊 방에서 앓고 있는데 대야에 물 떠와 수건으로 적시어 이마에 대고 열을 식히고, 간병을 극진히 하였다. 선생님은 며칠간이나 앓고 나서 쾌차하였는데 나처럼 옥화를 이뻐해 주셨다. 옥화는 나의 앞집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서 어머니에게도 이쁜 소녀였다. 뜨개질 솜씨가 있어 겨울철에는 양말을 떠 주기도 하고, 방학이 되어 집에 있을 때는 우리 집에 와서 많은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寸數로 따지면 姪女 벌이지만 우리는 소꿉친구였다. 세월이 흘러서 그때의 옥화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이리저리 수소문해 봐도 알 길이 없으니, 맘속에만 남아있는 추억 속의 소녀일 뿐이다. 옥화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酒癖이 심하여 아침 밥상을 마당에 팽개치기 일수 였으니 어린 옥화는 어머니마저 일찍 여의고 계모 밑에서 숱한 설움 견디며 살아온 착하디착한 어린 소녀다. 옥화의 마음! 그 상처 얼마나 컸을꼬! . 하지만 밖에 나와서는 그런 티 하나 없이 밝은 모습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내가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할 따름이다. 풍문에 의하면 시집가서 서울에 살고 있으며 남편 잘 만나서 열심히 살아온 덕에 아주 부자로 잘 산다고 한다. 부디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릴 때의 보상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니 ? “ 언제나 성실했던 옥화는 잘 살 거야 ”라고 믿어본다.
내가 육 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인사 발령을 받고 “낙동 서부 초등학교”로 轉勤을 갔다. 선생님과의 이별은 나뿐 아니라 반원 전체가 설움과 아쉬움으로 惜別의 情을 나뉘었다. 그 후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선생님의 고향인 낙동면 용포리 골짜기를 찾아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는데 차도 다닐 수 없을 만큼 오지 마을이었다. 사모님은 나를 따스하게 맞아 주었으며, 손님으로 맛있는 음식과 친절로 대해 주었다. 그토록 대구 시내로 轉勤 오고 싶으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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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지만 끝내 尙州 시내에서 교직을 끝으로 停年을 마쳤다. 오랫동안 소식을 끊
고 지내든 어느 날, 내 나이 오십팔 세 일 때다. 초등 동기생인 여자 친구가 선생님의 근황을 알려 왔는데, “대구의 가까운 병원”에 무릎 수술받고 입원 중이란 것이었다. 너무 반가워 단숨에 달려가서 오십여 년 만에 재회의 기쁨을 가졌다. 金一封 외에 과일 등으로 예를 표하니 선생님 또한 깊은 感懷에 할 말을 잊은 듯 한동안 손만 잡고 침묵이 흘렀다. 이게 선생님과의 마지막이었다 몇 번의 전화를 했으나 목소리 들을 수 없었으며 다만 사모님과 통화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요양병원에 계신다는 것이었다. 나의 腦裏에는 언제나 멋진 모습으로, 나의 어린 시절을 잘도 보듬어 주신 恩師님이었으며 때 묻지 않는 교육자로서의 表象을 보여 준 분 이였다. 作故 하였으리라 생각되지만 내 마음에는 언제나 나의 스승으로 남아있다. 마음으로라도 삼가 선생님의 靈前에 꽃 한 송이라도 올려 드리고 저세상에서 회복하시라 冥福을 빌어본다.
* 나의 형님 - 나의 부모님은 膝下에 3남 3녀를 두었다. 위로는 나보다 열세 살이나 많은 형님이, 아래로 여동생 셋에다 남동생 하나로 1950년대 출산율로 는 적당한 자녀를 둔 가정이다. 산아제한 없던 시기라 십 남매를 둔 가정도 허다했던 때였다. 그야말로 여자는 결혼하고 나면 십수 년 동안을 출산의 연속이라 할 수 있었으니 그 고통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부모님은 여느 가정처럼 자녀들을 성장기에서부터 출가할 때까지 온 정성 다해 자녀들 뒷바라지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 하면 농사일이나 하던 시절에 상급학교 진학시켜 뒷바라지하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아버지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尊敬하고 싶은 表象이었으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模範을 보임으로써 자녀 교육을 실천하신 분이다. 형님은 아버지의 첫 장가를 가서 얻은 아들이며 나를 비롯한 아우들은 아버지가 상처하고 새장가를 가 얻은 자녀들이다. 어머니는 시집와 첫 번째 자식이 나이고 두세 살 터울로 여동생, 남동생 또 여동생 둘을 두어 우리는 오 남에다 배다른 형님을 포함해 삼남 삼녀가 되어 대가족이 되었다. 형님은 내가 여섯 살 무렵 결혼하였는데 형수 되는 새색시는 족두리를 쓴 채 연지 붉게 바르고 큰방에서 고개 숙여 있었는데 잔치 손님 틈에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수님은 결혼 후 일 년 만에 첫 친정을 가게 되었는데 십여 리나 되는 시골길을 내가 함께 가게 되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새댁이었던 형수님과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고개를 넘고 또 고개를 넘어 친정집이 가까워져 왔을 무렵 갑자기 형수님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철없던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왜 울까 하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그리운 부모님 생각에 감격의 눈물일 거라 세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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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른 뒤에야 알 것 같았다. 초등학교 2학년 되었을 때 아버지는 형님 대신 새로
집을 사서 분가를 했다. 그 집은 동네에서 한 채뿐인 기와집이었으며 대문도 대갓집처럼 큰 대문이 달려 있어 사람들은 대문집, 혹은 기와집이라고 불렀다. 또 형님은 체구가 다구 지고 성격도 원만하여 어린 동생들을 잘 챙겨 주었는데 특히 나에 대한 애착이 크셨던 것 같다. 물론 장가를 간 후로는 슬하에 자녀들이 생기고 나니 나에게서 점점 멀어 지기는 했지만, 형제지간의 우의는 남들 못지않게 두터웠다. 하지만 성년이 된 후로는 賭博에 빠져 부모님의 속 썪이는 날이 많았다. 농한기가 시작될 즈음이면 또래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니면서 화투 도박을 하였는데 농가의 토지 문서를 놓고 벌일 정도로 그 규모는 말로 표현할 수 없어라 만치 대단한 것이었다. 동네에서만이 아니고 이웃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하는 遠程賭博으로 하루가 멀다고 꼬박 날이 새는 경우도 많았다.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도박 빚을 갚아주느라 나락 두지(벼 창고)를 열어 절도(?) 행각을 벌여야 했다. 당시 도박은 어느 농촌 할 것 없이 성행하였으나 나라에서도 도박 단속은 있었으나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였다.
아버지 還甲 잔치를 하루 앞두고 형님과 사촌 형, 그리고 나, 셋이 시골 장터에 가서 돼지 한 마리를 사 리어카에 싣고 오는 도중에 “미주 굴”이란 동네 주막에 들른 형님은 또 도박꾼들과 어울려 한판을 벌인 것이다. 해가 저도 오지 않자 찾아갔더니 돈뭉치를 앞에 두고 열전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만두고 가자 했지만, 형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한동안 잠잠했지만, 완전히 도박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병역 문제로 신체검사에서 乙種 불합격을 두 번 받고 그다음 合格통지를 받았으나 忌避하는 바람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날마다 형사가 찾아와 아버지를 못살게 굴기도 하고, (이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이리저리 탐문하기도 하였지만 형님은 낮에는 뒷산에서 밤이면 몰래 집으로 들어와 불안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逃避 生活은 1961년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國土建設 隊에 입대하여(철도 공사) 나라 부역 일을 하고 나서야 병역의무를 마칠 수 있었으니 병역 문제로 십여 년간을 맘고생, 몸고생하며 사신 것 같다.
이후 가정생활뿐이 아니고 동네에서도 열심히 한 젊은 시절을 보내셨다. 기계에 손재주가 있었던 지라 여름철이면 양수기 고장으로 형님을 부르는 곳이 많아 바쁘게 다녔고, 그로 인해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위 탈공마져 생겨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통통 방앗간을 운영하였는데, 동네는 물론 이웃 마을에서도 찾아와 방앗간은 成市를 이루었다. 하지만 통통 방아는 잦은 고장을 일으켜 수리하느라 고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촌과 나는 사랑채에서 함께 기거한데
겨울철이면 드럼통에 수수료로 모아둔 쌀을 몰래 퍼다가 이웃집 구멍가게에다 주고 군것질을 하기도 하였지만 한 번도 아버지나 형님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형님은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으며 열심히 노력한 결과 농촌에서 유복한 노후를 보내었다.
* 나의 학창 시절 * 초등학교 입학은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전쟁 후라 폐허가 된 교실은 초가지붕으로 가을이면 동네마다 공동으로 지붕이어서 교체일을 했으며 교실이 부족해서 칠판을 들고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 나무 그늘에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 담임이셨던 姜 선생님은 “ 이렇게 고생해서 공부하여도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나올 수 있다”라고 하신 얘기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생생하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우리 반에서 언제나 일등을 한 安ㅇㅇ은 서울 명문대학교 교수로 또 다른 金ㅇㅇ은 지방대학 학장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옛것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지만,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지식은 어둡다고 한 말이, 나이 들고 보니 딱 맞는 말이다. 내가 복지관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강의하는 나 역시도, 수강생들 또한 한두 번의 강의로는 한쪽 귀로 들으면 다른 한쪽 귀로 빠져나가는 잠재 기억 능력이 떨어져 있음을 절감한다. 그래서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고들 하는가 보다. 그러나 꾸준한 학습으로 두뇌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퇴보는 안 되게 현상 유지할 수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중학교는 고향에서 40여 리나 떨어진 읍내로 가게 되었다. 상주중학교. 나의 소년 시절을 보낸 - 11 -
곳이 중학생 시절이라 남다른 애착과 함께 많은 추억을 있게 한 곳이었으며 수업 시간마다 다른 선생님들과의 만남도 즐거운 시간이었으며 새로운 친구들과의 사귐도 고향 시골과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校歌는 歌詞부터 마음에 다가와 입학식, 졸업식 때 외에도 자주 불렀다. “ 천봉산 빼낸 정기 온전히 타고 尙州 伐 첫 마루에 터전을 잡아 單成으로 이룩된 學園尙中에 높은 이상 품에 안고 모여든 우리 씩씩하게 바르게 배워 나가자. 한배 님의 거룩한 피 물리어 받고 새로 산 이 나라의 선구자 되고…? ” 교가는 교장으로 계셨던 김철기 교장선생님이 작사하였고, 작곡은 음악 선생님이셨던 “김삼수” 선생님이 곡을 붙였다. 교장선생님은 내가 입학할 무렵 전근 가셨고, 음악을 가르시던 김삼수 선생님은 졸업 때까지 週 한 시간의 音樂을 지도 하였는데 나는
선생님의 음악 시간이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헤어스타일은 예술가 머리로 長髮을 하였으며, 키는 팔척장신에 꾸부정한 모습으로 지휘봉을 잡고 학생들을 자기도 하여 주셨다. 주로 외국민요를 많이 가르쳐 주셨는데 음악에 소질이 없어 선천적인 音癡에 가까운 나에게는 그래도 그때 배운 가곡이나 외국 민요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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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도 즐겨 부르곤 한다. “산타루치아, 돌아오라 쏘렌토로, 이목동아, 메기의 추
억, 스와니강, 켄터키 옛집, 가고 싶어” 등 많은 곡을 지도해 주셔서 음악 하면 잊을 수 없는 恩師 중의 한 분이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선생님은 젊은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교직을 그만두시고 대구로 떠났다는 것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40대의 젊은 교사와 어린 여학생과의 로맨스는 사람들의 指彈을 받기도 했지만 두 사람만의 뜨거운 사랑을 제삼자들이 어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 나는 초등학교 성적이 뛰어나서 중학교 입학금도 면제받아 입학하였는데 학급의 석차는 5등을 넘어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항상 5~6등의 순위를 지키며 부모님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지 않게 학교생활에 적응해 갔다. 가난한 농촌의 출신인지라 처음 두 달은 먼 친척 집에서 下宿을 하다가 고향 친구를 만나 함께 自炊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학교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네였는데 어린 나이에 밥하는 것부터 불 때는 것 모두가 서투른 생활이 계속되었는데 주인아주머니께서 “ 뭘 먹고 학교 다니느냐?”라며 거의 날마다 반찬을 조금씩 갔다가 주시곤 했다. 반찬은 거의 없이 밥과 김치 혹은 고추장이었으나 때로는 콩 반찬을 해와서 많이 먹었는데 영양실조가 되니 얼굴에는 버짐이 피어나고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 어느 날은 기운이 없고 머리에 열이 심하게 나는 바람에 결석하였는데 담임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뇌염이 유행하던 시기라 걱정이 되셨나 보다. 나는 班에서 키가 좀 큰 편이라 운동은 못 하지만 운동하는 친구들이랑 잘 어울려 다녔다. 그중에는 교내 기계체조 선수·육상선수가 있었는데 삼 학년이 되어서는 이 친구들의 하숙집이나, 학교 서무실 등에서 밤늦기까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자취 생활은 중2 때까지 이어져서, 주인댁 식구들과도 친분이 쌓여 갔을 무렵 저렴하게 하숙하라는 제안에 감사히 받아들여서 졸업 때까지 한식구처럼 지낼 수 있었다. 주인 아들은 나와 동갑이었으나 한해 선배였으며 생일이 정월이라 나보다 먼저 학교에 입학 하게 되었다. 나와는 친한 친구로서 언제나 친형제처럼 중학교 생활을 보냈다. 주인아주머니도 나의 어머니와 동갑이셨는데, 친절하고 사려 깊은 분이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두어 번 하숙집에 들르셨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귀한 손님 대접을 받으셨다. 주인아주머니는 서둘러 술상을 준비해 아버지께 손님 대접에 정성을 다해 주셨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께서는 주인아주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친절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누구나 하숙 생활의 에피소드와 추억은 있겠지만 거의 삼 년이란 긴 시간을 한집에서 보낸다는 것은 한 가족이 되었으며, 때로는 가까운 산으로 가서 버섯을 따기도 하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곤 하여 남의 집 같지 않은 하숙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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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는 “規律”이란 제도가 있어 “ 학생 선도”를 하였는데 나도 “규율”에
뽑혀 3학년 내내 규율부 학생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학생 지도과장 선생님은 규율의 선발기준을 성적과 품행이 우수한 학생을 대상으로 하여서, 아마도 선생님 보시기에 나를 착한 학생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규율의 활동은 주로 아침 등교 시간대에 교문에 서서 학생들의 복장 단속이나 질서 등을 지적해 주어 시정토록 일러 주기도 하고, 지각생에 대한 단속이었는데 후배들은 규율 앞에서는 쩔쩔매기 일쑤였다. 졸업 후 대부분 진학하는 학생들은 서울 쪽을 가고 지방으로 가는 경우는 성적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처음 원서를 내었던 성신고등학교(소신학교)를 포기하고 지방에 있는 전통 있는 상주 농잠 고등학교로 원서를 내었다. 농잠 고등학교는 일제 강점기부터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역사 깊은 학교다. 농업 학교였지만 대학 진학률도 높아 서울 명문대 입학생도 있었고, 특히 육군 사관학교와 공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이 많았다. 육사 재학생이던 선배는 휴가 중
모교에 들려 육사 생활에 대해 얘기하였는데 식사는 “직각 식사” 말에 웃음이 나왔다. 공군 파일럿으로 공군에 근무하는 선배는 학교 상공을 비행할 때면 간단한 선물을 학교 운동장에 낙하시키고 가기도 하여 담임 선생님은 졸업생들을 자랑스럽게 여겨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던 나에게는 멋진 육사 생도의 유니폼과 깔끔한 몸매에다 자신 있어 보이는 그의 태도에 엄청이나 부러워 보였다.
고등학생이 되어 정들었던 중학 시절의 하숙집에서 복용동 최 모색으로 옮겼다. 이유는 학교가 멀기 때문이었으며 고등학교의 새로운 친구가 생겨서 같이 하숙 하기로 하였다. 이 집은 某 신문 지국을 하고, 나의 고등학교 동창회장댁이었다. 가족으로는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 두 분, 올드미스로 인물이 미인인 따님, 유치원생인 손자, 손녀가 사는 대가족이다. 아들은 두 분이었는데, 두 분 다 군인이었다. 당시 큰아들은 육군 대령, 작은아들은 육군 중위였는데 가끔 집에 들리곤 하였는데 인물이 잘생기고 품격을 갖춘 덕망이 있어 보였다. 주인아저씨는 첩을 두어 한집에 살고 있는데 가정의 주도권은 업되는 분이 쥐고서 가정을 통치하는 것이다. 본처의 손자 손녀도 본인이 끼고 큰방을 차지하고 호령을 한다. 그러나 가족 중 누구도 불평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 내 눈에는 너무나 이상할 정도였다. 본처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한다. 가족뿐 아니라 하숙생들의 식사 준비까지 하는 것이 완전 하인이었다. 성품은 착하고 마음 여린 여인이다. 외동딸 또한 엄마처럼 순하며 착한 데다 완전 미인이라 어쩌다 방 청소를 하러 오면 한참 누나뻘인데도 여성의 매력을 풍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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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었다. 때로는 남자 친구 얘기라던 지, 애인과 여행한 추억담을 들려주곤 하여 그저 흥미 있게 들은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 하고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하숙집 아저씨를 만났는데 “아들 보러 간다.” 하시며 아들이 “대구의 00부대장”이라며 자랑삼아 내게 도움을 주겠다는 언질까지 주었지만, 그 뒤 한 번도 만나지는 않았다. * “도시락 절도사건과 우정”- 점심시간이 되었다. 하숙집에서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펴보니 몰래 누군가가 다 먹어버렸다. 장난이었으나 너무나 화가 났다. 짐작이 가는 반 친구를 추궁하는 바람에 한바탕 교실 안은 소란했다. 상대는 나보다 두 살 위였고 복싱선수로, 품행이 별로 좋지 않은 L 군으로서 나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왜소한 상태라 일방적으로 한방을 얻어맞았다. 이에 격분한 나는 눈에 보이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그를 상대해 주었고, 창 너머 도망가는 것까지 추격했으나 잡지 못하고 수업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진정할 수가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의 중재로 도시락 촌극의 한판은 마무리가 되었다. 이 일로 인해 L 군은 점점 더 가까이 내게 다가왔으며 심지어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집까지 놀러 오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당시 나는 중학생·초등학생 두 명을 가르치는 알바를 하고 있었다. 평소 운동을 하며 불량 학생으로 인식되었던 터라 거리를 두었었는데 가까이 지내다 보니 성실하기도 할 뿐 아니라 순수한 인간미가 있었다. 수업 중에 몰랐던 문제를 물어보기도 하고 함께 공부하는 성실성도 있었다. 때로는 자기 집에 초대하여 맛있는 음식을 내어놓기도 할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 파티할라치면 으레 나를 불러 주었고, 단둘이서 선생님 댁을 방문 하여 많은 조언과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학교생활뿐 아니라 교외에서도 함께 생활하는 단짝이 되어 다른 친구들과는 다른 특별한 우정을 쌓아 갔다. 졸업 후 그의 성품대로 경찰이 되었고, 정년 이후에는 고향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만남과 헤어짐의 인연도 참으로 많지만, 출생의 인연을 빼고 나면 학연의 만남이 커다란 업보가 아닐까 ! “소매 끝만 스쳐도 五百生의 因緣”이란 부처님의 말처럼 우리는 날마다 많은 인연을 맺으며 살고 있다. 일생을 살면서 초중고 대학을 합치면 16년을 학교에서 많은 만남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직장에서 30년을 보내고 나면 인생 후반 30년을 살면서 또 다른 만나게 되지만 인생은 홀로 왔다가 외롭게 홀로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것을 흙에서 나와 다시 한 줌의 부토로 돌아가 자연과 합치한다는 평범한 자연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 해군사관학교에 응시하다. - 입학 시험이 다른 일반 대학보다 빠른시기에 치러진 해군사관학교에 응시원서를 제출했다. 원서 입시요강도 까다로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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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 3명의 추천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 유지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동창회장, 경찰서장, 그리고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
데 학과 시험전에 미리 체력단련 실기시험을 치르야했다. 사전에 충분한 입시정보를 파악하지도 못하여 준비도 안된 상태라 힘든 실기시험을 치렀는데, 50m 달리기 왕복6회 300m를 달리인 것으로 기록적 수안에 들어야 했다. 부진한 점수를 알면서도 필기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렸지만,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모든 일에는 충분한 사전 정보와 지식을 준비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경험이었다. “知彼知己면 百戰不殆”란 손자병법의 교훈을 되뇌어 본다.
* 4H 농촌 계몽운동에 힘쓴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농촌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체력으로나 성향에 맞지 않아 힘든 일이 많은 농사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대안이 없이 그대로 시간은 흘러갔다. 부모님께서 고등학교까지라도 시켜 주신 것에 감사드리지만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암울한 시기를 보낸 것이다. 때는 5.16 직후라 새마을 사업이 전국 곳곳에서 성행되고 4H 운동이 확산하여 농촌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농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젊은이가 일기 시작했다. 우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농촌 계몽운동과 그 과제 등에 관한 공부에 전념했다. 농촌진흥원에서 일 주간의 교육을 받고 돌아와 동네의 젊은 청년 20여 명을 규합해 4H 클럽을 조직하고 작은 일부터 하나씩 해 가기로 하였다. 주인 없는 야산을 개간하여 소득을 창출하기도 하고, 동네의 새마을 사업에도 일조하는 등 활성화를 가져왔으며 매월 마을회관에서 정기 모임을 하고 변화하는 농촌 건설에 우리만을 가꾸기를 위한 세미나도 열었다. 그러나 가을 추수가 끝나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중 고등학교 동기생인 H 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 준비를 하고 있으니 한번 내려오라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구행 버스에 올랐다. 대구시 동구 신암동 언덕배기 판잣집에서 자취하며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모처럼의 만남에 반가움의 회포를 소주잔 기울이며 밤새는 줄 모르고 시간을 보냈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상의하고 진학하라는 허락을 겨우 받아내고 며칠 후 4H 클럽 회장직을 부회장에게 넘기고 미련 없이 친구가 있는 대구로 향했다.
신암동 언덕배기 판자촌에는 집마다 수도가 없어 동네 어귀에 있는 공동수도를 사용하였는데, 물 바에서 들고 물 받아오기가 여간 어려움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이면 물동이가 2~30개씩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차례가 되면 받아오는데 동네 처녀들이 많아 부끄러워 물 받으러 가기가 싫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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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이 늘어 눈인사도 나누게도 되어 물동이 나르는 일도 예사로워졌다. 학원에 등록하고 강의를 듣는데도 전쟁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은 시간에는 뒤에서 서서
들을 정도로 입시 학원은 성시를 이루었으며, 이름있는 강사는 수강생으로 넘쳐 흘렀다. 나는 필수과목인 영수 두 과목을 신청하여 수강하였는데 일 년 동안 책을 덮어둔 상태라 입시를 위한 정리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 친구와 나는 Y 대학, K 대학에 입학하여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 대학생이 되다.- 1964년 봄 입학식을 마치고, 전공과목인 경제학과 선배들로부터 신입생 환영회를 시작으로 낯선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교양학부 합동 강의 시간도 낯선 풍경이었으며 교양 영어 Freshman English 시간이 비로소 대학 신입생임을 알려 주는 신호였다. 전공과 목에서 내가 감당하기 힘든 과목은 경제 수학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수학 시간은 참으로 힘든 과목이었는데 또 어려운 수학 공부를 해야 한다니 나는 수학 머리가 되지 않음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수학 머리(두뇌)와 어학 머리로 구분되며 또 수학 어학 다 잘하는 머리가 있다고 한다. 두 가지를 다 잘하는 두뇌를 가진 사람을 천재라고 부른다. 나는 어학 분야에는 좀 소질이 있나 보다. 고등학교 영어 수업 시간에는 언제나 수업받기 시작과 동시에 나에게 먼저 선도(Reading)를 시켰으니까!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여 보니 공부 잘하는 반 친구들에 비하니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영어 실력이 말이 아니다. 어려운 영어신문을 들고 다니며 해독할 정도였으니 나로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는…. 경제 원장 시간에는 ( 원어 교재 수업) 모르는 단어가 페이지당 수두룩하였으니 콘사이스 찾기가 바쁠 정도로 시골 학교 출신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실감하게 하였다. 분발하여 겨우 따라가기는 하였지만 성적은 B 학점 이상 맞아본 적은 없다. 대학 생활은 써클 활동으로서 각종 동아리 모임을 가졌는데, 12인 클럽(12인당이라고 함)에 반 친구 소개로 들어가 선배들과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12인 클럽은 학년마다 12인으로 구성되어 4학년까지 48명이었다. 따뜻한 봄날 전당대회를 한다고 모였는데 법학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사회의 여야 정치인들의 전당대회를 모방한 듯한 모습이었다. 선배 중에는 재건학교(불우 학생 교육) 교장을 비롯해 글 쓰는 시인( ?), 총학생회 간부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뒷날 신문사 사장, 중견 기업체 사장, 시의회 의원 등 지방에서 알려진 인물들이 나오기도 했다. 대학 생활은 강의 시간 외에 도서관(주로 시험기 때)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끼리 술 파티로 나름대로 개똥철학을 운운하면서 논제를 정하면 열띤 토론으로 술자리는 길어져 갔다.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의 야망과 꿈을 향한 넋두리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省察 하자면 미래를 위한 좀 더 치밀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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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와 좋아하는 전공을 찾아 邁進하지 못한 후회스러움 또한 크다. 누구나 인생을 다시 살라 하면 지나온 과거처럼 어리석게는 살지 않으리라고 말하지만
막상 그때가 오면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철학자 키엘 캐 골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란 책에서 “ 그대 결혼 하여 보라 그러면 후회할 것이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아도 후회할 것이다”라고 한 구절은 인생을 어떻게 살면 지혜롭게 후회 없이 살 수 있을까 하는 명제는 소인들에게는 그 答을 찾기가 쉽지만은 않다.
대학생들의 단골 술집이 있었는데 동인동의 “둥굴관” 횟집, 그리고 옛 l 군인극장 옆에 있었던 “돌체”가 젊은이들의 아지트였다…. 이곳에서는 젊음이 있고, 철학이 있고, 사랑이 있고, 낭만이 있었다. 돌체의 여사장은 “魚頭鳳尾의 철학을 설파한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이 무엇인가? 그것을 놓치면 후회할 것이라고”맛 중에서 물고기는 머리가, 새 중에는 꼬리가 맛의 으뜸이란 것이다. 무엇이 인생에서 으뜸으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가를 일깨워 주는 얘기인 것 같다. 인생을 살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느냐에 따라 결과는 엄청이나 괘도를 달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높이 날 수 있는 나래를 펴지도 못하고, 뜬구름 잡으려는 부푼 꿈의 망상으로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문득 1960년대 思想界 잡지에 실린 詩句가 생각난다. “저 멀리 하늘을 파듯 소리 들리는 근처에 무엇인가 所重한 물건을 나는 잃어버리고 온 모양이다. 透明한 過去의 停車場에
서 遺失物 界 앞에 섰더니 나는 도리어 슬퍼지고 말았다.”
* 수성못에서 만난사랑! 중간고사를 마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친구와 수성못 가는 버스에 올랐다. 날이 가물어 수성못의 물은 메말라 물 한 방울도 없이 바닥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못인 바닥을 걷고 있는 여학생으로 보이는 여인을 보았다. 원피스 차림의 여인은 알맞은 키에 늘씬한 몸매로 시선을 끌 만했다. 나는 주제넘게 말을 걸었다. “왜 못 안게 들어가 괜찮냐?” 며, 하니 미소를 지으며 “자기도 시험 끝나고 울적하여 나왔노라”며 솔직한 대화가 쉽게 이루어져 집으로 오는 버스를 같이 타게 되었으며 나는 하숙집인 사촌 형님 댁이 있는 동인 로터리 내리고 그녀는 지저동이 집이라 헤어지게 되었다. 며칠 후 초인종이 울려서 형수님이 나가 보았는데 뜻 밖에도 그녀가 찾아온 것이 아닌가? ! 어떻게 된 일이냐 물을 것 없이 그녀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동촌의 방천을 걸으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집은 내가 버스를 내려갈 때 몰래 함께 내려 알아 두었던 것이라 했다. 나에 대한 관심이 컸는가 보다. 그때 나의 사촌 형은 가축병원을 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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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활동을 한지라 인맥이 넓혀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도 나의 형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며, 그녀의 할머니와 언니들도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 집과
상호 통하는 부분이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글 쓰는 솜씨가 뛰어나 신문에 그녀의 詩가 실리기도 하였으며, 가끔 멋진 글솜씨를 보여 시적 감각이 있는 편지 보내오기도 하였다. 여고 시
절에는 규율부장을 할 만큼 활달한 성격으로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아 친구들의 모임에 나를 초청 하기도 하였는데 친구들과 내가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본 후로는 한 번도 나를 불러 주지는 않았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 후 그녀의 편지를 모두 불살라 버리는 통에 지금은 追憶 속의 여인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녀를 만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입대하게 되었다. 외로운 군 생활 속에서도 나에게 오아시스가 되어준 것은 오로지 잊지 않고 정성으로 보내준 그녀의 편지였다. 사랑의 스토리를 엮어가며 세상의 뉴스에서부터 학교생활까지 많은 것을 알려 주었는데 “누구누구는 결혼했다”는 대목에서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졸업하면 결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부모님이 혼사 문제를 거론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월남에서 귀국하여 잔여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면회를 왔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입대 전보다 성숙해진 그녀의 모습에서 멋진 여인상을 보았다. 그녀는 결혼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부모님이 결혼하라는 것이었는데 나의 의중을 물어왔다. 결혼이란 나에게 있어서는 저만치 멀리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법한 얘기인데 나는 어쩌란 말이냐?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다. 남은 군 생활을 마쳐야 했고, 학교도 마쳐야 했으며, 또 취업도 안 된 미숙아가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앞날이 너무나 멀기만 하였다. 그 뒤 장문의 편지에 솔직한 내 심중을 담아 보냈다. 찻집에서 마지막 이별의 커피를 마시면서 3년이란 절대 짧지만은 않는 惜別의 情을 나누게 되는 아픔을 안고옛사랑이 더 애틋한 그리움은 追憶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닐진대 .* 625의 피난길 斷想 ! - 초여름 어느 무덥든 날이었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부역 일을 나갔다가 일도 하지 않고 돌아오시어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가야 한다고 하셨다. 다음날 큰아버지 댁에서 돼지를 잡아 몇 집이 나누어 먹고 피난을 각기 알아서 피난길에 올랐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물어보았더니 우선 尙州를 벗어나 義城땅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돗자리 하나를 들고 나섰으며, 어머니는 출생한 지 두어 달 밖에 안된 어린 동생을 보자기에 싸서 안고 삼십여 리 떨어져 있는 외갓집으로 산을 넘고 넘어 찾아가 방 한 칸을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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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에는 우리 말고도 두 집이 더 와서 시끌벅적하였다. 아버지는 밤이면 몰래 산을 넘어 마을 앞산 꼭대기에서 마을을 점령하고 있는 인민군의 동태를 살펴서, 사랑보다 더 큰 우정이라 변명이라도 하며 아픈 가슴을 달래야 했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는 게 일과였다. 왜냐하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피난 가시지 않고 집에 머물러 계셨기에 더 궁금해하셨으리라 생각된다. 외갓집의 피난 생활은 장기간 폐를 끼칠 수 없다는 판단에 선지 한 달이 채 되지도 않아 철수하여 집이 보이는 냇가 밤 숲으로 옮겼다. 채소밭 둑에 세 그루의 밤나무가 있었는데 여름이라 숲이 우거져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 가족 여덟 식구는 이곳에서 취사는 물론 잠자리까지 해결하였다. 밤술 옆에는 시냇물이 흐르는 냇가가 있어 물놀이 겸 목욕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한번은 냇가에서 놀고 있는데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내 머리 위로 나는 게 아닌가! 놀라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는데 “엎드려 !”하는 고함이 들려 왔다. 어머니였다. 아마도 적군이 아닌가 해서 확인하려고 저공 비행한 듯 보인다. 낙동강 전투가 치열하던 때라 비행기 폭격하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불꽃과 함께 轟音을 내고 있었다. 625 전투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전투지역이 낙동강을 사수해야 하는 절명의 낙동강 전투와 다부동 전투를 꼽을 수 있다. 지금도 다부동 전투의 결전장이었던 유학산에는 전사자의 유골과 유품이 발견되기도 한다. 우리 가족들은 치열한 낙동강 전투 상황을 보면서도 보름여 만에 밤술 피난 생활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인민군 소대 병력으로 보이는 패잔병(?)들이 총 개머리판을 질질 끌면서 지나기도 하고, 집으로 들어와 밥을 해 달라고 하였는데 그들의 이동 병역 숫자가 십 명을 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았다. 그를 때마다 이웃집 몇몇 집이 합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하루는 느티나무 정자에 동민들이 쉬고 있을 때 인민군 몇 명이 쳐들어와 “저기 메어 놓은 소를 잡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 그소는 바로 우리 소였다. 소 주인을 묻지도 않고 총으로 살해하여 잡는다는 것이다. 이에 놀란 아버지는 사정을 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어쩔 수 없이 堂叔 父 댁에 있는 송아지로, 대체 하기로 합의를 보아 송아지를 대령하게 되었다. 무덥던 어느 날 아버지는 들에 물꼬를 보러 갔는데 지나가는 인 민군 일개 분대에 잡혀가 “기관총”을 메고 십여 리를 가다가 어느 동네를 지나가다가 또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돌아오셨다. 때는 戰勢가 인민군이 불리하여 퇴각하는 거로 짐작이 된다. 인민군 병사 중에는 총을 메면 총이 땅에 닿을 만큼이나 어린 소년들이 군에 동원되어 앳된 얼굴도 많았다. 북한의 남조선 통일이라는 야욕 때문에 애꿎은 백성들만 희생되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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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일 년이 지날 무렵에 돌아온 이도 있었으니 웃지 못할 풍경들도 많았다. 남편과 아내 따로 피난 간 똘이네 삼촌은 아내를 기다리다 재혼을 하는가 하면, 형제가 함께 피난을 갔다가 경찰서에 잡혀 현역 입대를 하여 가족들이 생사를 확인하느라 고심하던 중 군사우편 한 통이 날아 오는 바람에 한숨짓는 일도 있었다. 중학교 동기생 중 한 명은 아버지가 인민군의 앞잡이로 같은 동네 주민을 못살게 고발하고 재산을 수탈하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고 화가 난 동민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마치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을 보는 느낌이었다.
* 군인 아저씨가 되다. - 대학 2학년을 마쳤을 무렵 군 소집 영장이 나왔다. 형님의 군 기피 생활을 뼈아프게 보아온 나에게는 당당하게 병역의무를 해야겠다는 각오로 대구 00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하게 되었다. 까까머리 훈련병으로 입소 하던 날 낯설기만 한 연병장과 병영 막사. 호랑이처럼 날 세워 굳은 표정의 기간 사병은 신병들의 氣를 완전히 꺾어 주눅 들게 했다. 입소 하던 날 3소대에 배정되어 향도 및 분대장을 선임해 주었는데 나에게는 “향도”라는 직책이 부여 되었다. 소대의 반장인 셈이다. 첫날 밤이 되었다. 10시에 소등과 취침이다. 계급이 “하사”인 내무반장(반을 통솔하는 책임자)이 향도와 분대장을 기상시켜, 침상에 엎드려 “빳다”를 치는데 향도는 다섯 대, 분대장은 세 대를 맞았다. 어이없이 당하고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닿아와 있었지만 “이것이 군대로구나” 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 없는 폭력이다. 그런데, 잠시 후 자리에 앉히고 침상 아래서 막걸리 반 바케스를 올려 술 파티를 벌리는 게 아닌가! 당황한 나머지 무슨 일 이냐, 뭐 물었더니 “신고식, 매.이니 넘 맘에 담아 두지 말고 6주 교육 기간 간부로서 잘하라는 뜻이라며 우리를 달래어 주었다. 얼큰히 취한 상태로 첫날밤을 무사히 잘 지냈다.
향도가 하는 일 중에는 인원 점검부터 사역병, 취사병을 동원하는 것 외에 저녁 일석점호 보고였는데 네 개 소대장에서 내가 제일 잘한다고 기간 사병은 칭찬해 주었다. 군입대를 호적이 나와 비슷해 같이 입대한 사촌 동생이 있어 걱정되었다. 동생은 1소대에 소속이었기에 소대 향도에게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하였다. 1소대 향도는 김 某某였는데 대구의 H 호텔과 H 극장 사장의 아들이었으며, 가톨릭 신학교를 다녔다는 후문을 들었는데 사실인지는 나도 모른다. 군대에 들어오면 다들 자기 집에 금송아지 있다는 자랑하는 자 많으니까! 그런데 6주간의 훈련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보이지 않았다. 훈련병 생활은 익숙해져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식사에도 적응되어 군대의 누룽지에다, 도루묵국이나, 콩나물국도 맛 들여져 갔고, 어려운 사격 훈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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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각개 전투 훈련도 잘 소화해 내며, 6주간의 훈병으로의 생활이 끝났다. 情 들자, 이별이라더니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대로 머물고 싶을 만큼 동료들과도, 훈련장과도 깊은 정이 들었다. 드디어 퇴소식을 마치고 각자의 다음 교육장으로 命을 받아 떠나 들 갔다. 만남은 헤어짐의 약속이라 했던가!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 듯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만남의 緣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이다. 좋은 만남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이가 있는 반면에, 나쁜 악연의
만남으로 인해 인생을 그러치는 예는 너무나 많다. 나는 육군 군의 학교로 命을 받았다. 일요일 오후 늦은 시간에 버스를 타고, 낯선 부대로 들어왔다. 안내 병의 지시대로 숙소를 배정받아 마치 이방인이나 된 것처럼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신고식을 마치고 군의학교 교육생이 되었다. 식사 시간에는 줄을 서서 식당으로 가면서 軍歌를 불렀는데 인솔자가 “군가는 < 진짜 사나이> ! 군가 시작”하면 노래를 부르며 식당으로 향한다. 이것 또한 일상이니 잘 적응되어 갔다. 교육은 학과와 실습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으며 학과는 교실에서 실습은 야외에서 하였는데 이곳의 교육은 훈련소에 비하면 紳士 생활이다. 간호학 시간에는 이뿐 간호 장교가 강의할 때면 다들 기분 좋은 표정이다. 얼굴도 예쁘지만, 탐스러운 耳目口鼻는 한창 물오른 여인으로 보였으니까! 적어도 청춘 교육생들의 눈에는 그리 했으리라. 야외 실습 시간은 응급처치나, 들것 훈련 등이었는데, 이 시간은 더 기대된다. 왜냐하면 휴식 시간이면 移動 주보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계란에서부터 찹쌀떡 같은 간식을 파는 민간인들이 교육장 가까이 접근해 와 장사를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교육생들에게는 반가운 존재가 되었다. 군의학교의 분위기는 마치 사회생활과 별로 차이 없는 듯하였는데, 토요일 오전 일과가 끝나고 나면 부대 내에는 면회를 온 민간인들로 붐볐다. 의무 사령부 내에는 관련 부대가 있었는데, 육군 군의학교를 비롯해 간호학교, 시험대, 간호장교 숙소 등이었다.. 특히 식당은 민간인이 부대에 들어와 운영하고 있어서 사회의 일반 식당과 다름없었다. 토요일 오후부터는 고기 굽는 냄새가 넓은 식당에 풍기고, 술과 함께 면회객들로 성시를 이루고 보니 이곳이 군부대인가를 錯覺할 정도이다. 하지만 월요일이 되면 분위기는 軍으로 돌아간다. 군의 학교의 피교육자 생활도 익숙해 갈 무렵이면 훈련소에서도 그랬듯이 6주간의 교육은 마무리가 된다. 충원이 하달된 곳 중에서 내가 원하는 곳을 선택하여 갈 수 있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졸업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사계 사병이 나를 불러내어 수도 육군병원으로 발령을 내려 하는데 어떠냐고 했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알짜배기 희망지였으나 次順으로 00 통신부대 의무 중대를 희망 근무지로 선택받아 발령해 줄 것을 원했다. 원하던 대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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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이 났다. 졸업식을 마치고 함께 교육받든 동기생들은 발령이 된 대로 각자가 자기 부대를 찾아 떠났다. 한강 이남은 단 3명뿐이었다. 대구에 있는 00 통신부대 전입 신고를 마치고 다음 날 또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 대전과 광주 두 곳이었는데, 인사장교인 文某 중위는 같이 온 동기생을 대전으로 발령을 내는 바람에 나는 광주로 가게 되었다. 동기생의 姓이 文氏였기 때문이다. 대구 지역 사람들은 멀리 광주 가기를 엄청이나 싫어 꺼리는 곳 중의 하나가 광
주였다. 광주 “尙武臺” 하면 軍紀가 세기로 병사들 사이에는 이름나 있다. 陸軍 二等兵 초년병에게는 光州란 곳은 異邦人의 낯선 世上이었다. 이튿날 光州 行 버스를 타고 비포장 된 도로를 달려 춘향이의 고향이란 남원을 거쳐 낯선 광주 땅을 밟은 것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일과가 끝난 시간이라 몇몇 병사들이 내게 다가와 新兵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꼬치꼬치 케어 물었다. “고향이 어디냐?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냐? 애인이 있냐? ? ” 그리고 신고식이라며 코끼리 쳇바퀴 도는 훈련까지 시키는데 군 생활의 自愧感마저 들었다. 선배 병사들이 후배들을 다스리는 방법은 모든 것이 선배들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군부대의 나쁜 殘在 物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日帝의 무력 통치로 시작된 사무라이 정신이 깃든 비인도적 弊習으로 보인다. 세월이 흘러 國軍의 나이도 七旬을 넘어 兵營 文化도 선진국 버금갈 정도로 刷新되었다니 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尙武臺 안에는 많은 군소부대들이 있다. 포병학교, 기갑학교, 보병학교. 그리고 군소 위성부대가 많아 전국에서 별(star)이 가장 많은 곳으로, 사령관이쓰리스타, 학교장이 준장 ! 이래서 합하면 십여 개가 넘는다고 하니 상무대 내의 軍紀는 으뜸이라고 소문이 나 있다. 한번은 외출을 나갔다가 복장 위반으로 헌병대에 잡혀간 일이 있었는데, 헌병대 취재 실의 높은 단상에서 몽둥이 들고 어를 는 거라며 위반하여 잡혀 온 병사들을 위협하는 그 군사경찰의 꼴이 마치 “일본 순사”가 죄인 다루는 모습을 聯想하게 했다.
* 한밤중에 일어난 下剋上 단막 - 光州에 온 지 4개월쯤 되는 어느 날 子正이 넘은 시간 증대 본부 내무반에는 십여 명의 병사들이 취침 중이었는데, 선임병 4~5명이 營外 술집에서 거나하게 취하여 전원을 起床시켰다. 팬티 바람으로 통로에 군번 순으로 집합을 시키고는 차례로 “빳다”를 쳐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유 없는 트집으로 선임병으로서 위세를 후임 병사에게 보이려고, 또한 선임병의 위치를 굳힘과 동시에 잘 모셔(?)달라는 일종의 쿠데타였다.. 빳다는 내 차례까지와 나의 엉덩이를 힘껏 후려쳤다. 瞬間 하늘이 핑 돌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사물함의 야전삽을 잡아 “용서할 수 없다.” 대항하여 선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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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몸통을 갈겼다. 선임병들은 怯이나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문밖으로 모두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내 아래 병사들은 “매”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생각으로 초조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상급 선임병한테 대항한 “下剋上”으로 불려 가 큰 禍가 닥칠 거라 戰戰兢兢 하고 있었는데, 被服을 취급하는 어제 그 先任 兵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작업복 한 벌을 주겠다.”
며 선심을 베푸는 게 아닌가? ! 선임병들은 “宋一兵은 건드려서는 큰일 내겠다.” 싶었는지 이후 누구도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한 사람은 없었다. 이래서 어젯밤 下剋上 사건은 有也無也식으로 마무리되면서 이후 光州 尙武臺의 兵營生活은 안정이 되어 갔다.
* 따불 빽 도난 사건 - 병영에서 나의 임무는 환자가 발생하면 병원으로 이송한다든가, 아니면 간단한 응급 처치를 하는 일 외에, 소화제, 두통약 등 일반의약품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월 한 번씩은 大田의 상급 부대 의무 중대에 가서 한 달가량 필요한 藥을 수령해 오는 일이었다. 대전으로 약품 수령을 위한 출장은 군용열차를 이용하였는데, 군용열차는 주로 야간에 운행되었다. 그날도 약품을 수령해 다 불 빽에다 넣어 열차 선반 위에다 두고 잠을 청하였다. 목적지 역인 광주 송정리역에 도착하기 전에 약품 빽을 찾으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당황하여 이리저리 찾았지만 찾을수 없어서, 업무수행을 제대로 하지못한 책임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왔다. 군용 열차에는 이동헌병과 군의 중요한 문서를 전달하는 傳令이 항상 탑승하고 있었는데, 급히 전령에게 분실사실을 알렸더니, 전령은 이동헌병과 무었인가를 속삭이고는 내 약품자루를 내어 주는 것이 아닌가 ! 내가 속한 부대가 통신부대라 전령 또한 통신부대 소속이였으므로 정기적으로 한번씩 부대에 와서 봉급을 수령하기도 하고 출장업무 보고를 해야하는 임무를 가졌기 때문에 열차내의 문서 연락병은 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즉각 이동헌병과 상의 하여 처리 하여 주었던 것 같다.
移動 憲兵의 임무는 병사들을 보호하고, 열차 내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무가 있는데, 오히려 범죄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나 할까! 이러한 일들은 60년대 우리 軍隊의 自畵像이었다고나 해야 할까 ?
* 戰爭 터로 가다. - 1967년 화창한 봄날이었다. 광주에서의 軍 생활 일 년이 되어 갈 무렵이었다. 군 장비(통신부대의 장비) 검열이 있었던 후 수고 했다며 중대장은 며칠간의 휴가를 내주었다. 시골에 들러 부모님도 뵈옵고, 친척들도 찾아 인사도 할 겸 며칠을 머물다 대구에 오니 군부대에서 형님 댁으로 연락이 왔는데 빨리 본대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휴가 중에 대구 본부로 인사 발령을 난 것이 아닌가? ! 내심 반가웠지만 이곳 광주에서의 병영생활도 보람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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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며 동료 선후배들과도 情이 쌓여서 떠나기는 아쉬움이 많았다. 처음 광주행은 불안한 시작이였지만 일 년이 지난 이제는 그런대로 할만한 소소한 일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지역마다 다 그렇지만 이곳에 들어온 병사들 대부분이 전라도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전라도 사투리와 전라도 동료 병사들과의 괴리감도 없지 않았지만 가까이 지내보니 또다른 매력을 주는 친구들도 많았다. 휴가를
다녀오면 맛있는 음식을 가져와 내무반에서 파티를 열기도 하고, 전라도의 풍물이라던 지, 학교(전남대) 다닐 때의 써클 활동이며, 심지어는 여자 친구 자랑 등 깊은 우정을 나눈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전우들도 있었으니, 사람은 지역의 차별이 아니라 교감의 문제이며 소통의 문제일 뿐이다. 情이 들어갈 무렵 인사 명령에 따라 이곳 광주를 떠나 다시 通信 團 본부가 있는 대구로 왔다. 낯선 醫務小隊에 신고하고 새로운 병영생활이 시작되었다. 때는 越南戰이 절정에 있을 무렵이어서 많은 병사가 播越되어 월남 전선으로 갔다. 특히 醫務병사들이 많은 差出로 越南戰에 가게 되었는데 보병 다음으로 많은 犧牲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병들과 행사를 같이 하면서 그들에 대한 응급처치를 담당해야 했었기 때문에 보병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醫務小隊에 오자마자 소대에서 한 명을 보내야 한다는 군의관의 말을 듣고서 며칠을 고민하며 눈치를 살펴보았다. 다들 가기 싫어하는 것은 當然之事였다. 당시로서는 전쟁이 치열하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라 가족들은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 전쟁터에 보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눈치를 보니 금방 온 나를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제대가 몇 개월 남지 않은 古參 병을 보낼 수도 없었으며, 이등병 졸병을 보내기도 민망스러운 지경이 되었다. 다음날 나는 결심을 굳히고 “派越”하겠다는 선언을 의무 소대장에게 보고했다. 軍醫官인 의무장교 金大尉는 “큰 결심을 했다”라며 위로해 주었다. 며칠 후 파월 장병이 거처야 하는 특별훈련을 위해 강원도 춘천을 지나 “오음리”라는 부대로 배속되어 갔다.
이곳에는 각부대에서 差出되어온 많은 병사가 새로운 출발을 위해 4주간의 특수훈련을 받는곳이였다. 훈련이 끝나면 다시 새로운 後輩期가 입소하여 循環的으로 훈련이 이어지는 것이다. 훈련은 09부터 18시까지로 마치고 영내로 올 때쯤이면 배고픔을 못 이겨 식사도 하기 전에 민간인 야전 식당에 가서 “라면” 한 그릇을 뚝딱해 치우고 식당으로 가서 배식이 된 식사를 한다. 라면이 처음 나온 때라 그것이 라면인지도 모른 채 口味를 당기는 신비로운 맛이었다. 훈련을 마칠 때쯤 월급은 일 년 치를 한꺼번에 수령하였는데, 이후 월남에서의 봉급은 미국에서 지급되기 때문이란 것이다. 공동 목욕탕에서 깨끗이 씻고 월남에서 입을 정글 복으로 갈아입었다. 훈련소의 위생 상태는 한마디로 빵점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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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하지 않는 모포와 침구는 이(lice) 득실거렸다. 또 다른 진풍이 있었는데, 부대를 끼고 장사하는 모든 식당은 거의 外商장사 여섯 훈련을 마치고 壯途에 오르는 날 (월남으로 출발 하는 날) 앞을 가리고 외상값 달라는 아낙들이 아우성을 치기도 했다. 가난했던 1960년대의 우리 군의 한 단면이었다. 걸어서 오음리를 떠나 재(陵)를 넘어 수송 트럭을 타고 춘천역에 도착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춘천에서 출발하여 청량리역에서 20분가량을 머물러 있었는데, 사전에 연락을 병사들은 가족들이 창밖에서 준비한 먹거리를 창으로 넣어 주기도 하며, 손을 잡고 놓을 줄 모르는 안타까운 장면이 이어졌다. 나의 부모님은 아들이 월남 간다는 소식도 모른 채 잘 계시리라 생각하며, 미리 부모님께 연락을 한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뿐 아니라 달라질 것 또한 아무것도 없으니 굳이 알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舜天百姓으로 오직 농사만을 천직으로 살아온 농사꾼인 아버지께 미리 걱정을 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다.
날이 새자, 열차는 부산역에 도착, 이어서 부산 제3부두에 정박해 있는 25만 톤급 수송선에 올랐다. 오전 10시 환송식이 열렸다. 부산 시내 몇몇 학교 학생들과 시민들, 가족들이 나와서 석별의 환송식은, 여학생들의 “맹호부대 노래”를 열창하는 가운데 끝이 나고 배는 출항하였다.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맘 먹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 불효한 자식 부모님께 일자상서도 없이 먼 월남 땅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많은 병사가 다 함께 가고 있습니다. 다들 한 집안의 귀한 아들들입니다. 일 년간의 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몸 건강히 지내서 십이오 ”라는 짤막한 편지를 써서 수송선 내의 우편함에 붙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배는 한국 땅을 멀리 한 채 남지나 해협을 거쳐 필립핀 근해를 지난다. 갑판 위에 올라 보니 수평선이 원형을 이룬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바다밖에는 없다. 이따금 화물선이 밴 구동 소리 없이 지나고, 부둣가의 갈매기도 보이질 않는 그야말로 망망대해(茫茫大海)이다. 바다 구경 한번 못하고 자란 시골 촌놈이 처음 바다를 구경한 것이 중학교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거쳐 영덕으로 동해를 본 것이 고작이었는데, 이렇게 넓고 넓은 대양을 여행할 줄이야 생각만 해도 꿈같은 시간이었다.
선실(船室)은 4층 규모로 맨 아래층은 기계실이고, 나머지는 휴게실, 헬스장 .영화관이 있으며, 2, 3층은 침실과 식당으로 이루어져, 모든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식사는 밥과 양식 두 종류로 나왔는데, 아침은 빵과 계란 우유 과일 등으로 비교적 간단한 메뉴였으나 점심, 저녁은 고기와 밥이 함께 맛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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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제공되었다. 한국에서 먹던 것에 비하면 고급스러워서 만족한 편 이였다. 선실 내 PX(군영 내 편의점)에는 한국군 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일반 물건들이 있었는데, 일본의 소니, 내셔널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당시 인기 품목으로 우리 한국군의 눈길을 만족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PX는 직원 1명만이 근무하는 슈퍼마켓으로 운영되는데 한국군 병사 한 사람이 실수하는 바람에 선실마다 경고 메시지가 날아왔다. 근무병이 모르는 줄 알고 물건을 슬쩍 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 한국군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불상사를 가져왔다. 일주일이나 걸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을 이제 이틀간의 항해로 인해 멀미를 심하게 하는 병사들이 늘어나자 “다 본”이라는 멀미약을 선실마다 나눠 주었는데 이 약을 먹고 나면 잠이 많이 와 침실에는 낮잠 자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멀미하지 않는 병사들은 영화관이나 헬스장에서 지루한 항해 시간을 보낸다. 나도 약간의 멀미는 했지만 견딜 만하여 갑판 위를 오르내리기도 하며 영화를 보러 한 시간씩을 보낸다. 밤이 되면 취침 시간을 지켜야 하지만 낮잠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 편지를 쓰거나 침실 동료와 앞으로 닥쳐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선배들로부터 주워들은 경험담을 통해 위로를 삼기도 한다. 지루한 항해는 일주일이나 걸려서 베트남의 남녘 항구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병사들은 다소 피로를 느꼈으나 새로운 환경에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착잡한 심경들이었다. 월남이라는 나라는 그 당시 우리나라처럼 남쪽은 월남이 북쪽은 월맹이 차지하고 월남은 티우 정권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공산 월맹은 胡志明이 통치하고 있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월남전에다 많은 인적, 물적 지원을 쏟아붓고 빠른 시일 안에 전쟁을 끝내려 했다. 우리나라는 비전투요원부대인 비둘기부대를 필두로, 전투부대인 청룡부대, 다음으로 육군 맹호부대, 이어서 백마부대까지 많은 한국군이 증파되었다. 총알이 빗발치고, 포성이 못지않은 전쟁터에서 죽고 사는 것은 兵家常事라 지만 멀리 이국땅에서 왜 싸워야 하며 또 싸우다가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意味는 무엇인가 ? 가난한 나라 백성이기에 남의 전쟁 대신하려 이곳에 팔려 온 것이 아닌가? ! 그래서 봉급은 나라에서 가져가고 일부만 지급했던 가난한 나라 백성의 설움이 아니었던가 ! 월남 도착 적응훈련이 있던 날 훈련소장인 육군 K 중령은 이렇게 당부의 말을 병사들에게 전한다 “ 우리는 이국땅에서 남의 나라 전쟁하러 왔으니 죽지 말고 전원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기를 바란다”라는 격려의 말에 다들 숙연해 비로소 전쟁터가 바로 여기로 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 이국땅 월남에서의 첫날밤이다. 나는 야간 전화 당직을 섰다. 자정이 조금 지났을 무렵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서 포 쏘는 소리와 함께 야간 照明彈이 하늘을 밝히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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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놀라고 두려운 맘이 들었지만, 여기는 전쟁터이니 늘 이런가보다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날이 새고 이곳에 들어온 정보는 심각한 상태였다. 맹호부대 00중대가 베트콩의 야간 기습을 받아 상당수의 아군 피해가 발생하여 밤이 새도록 포사격과 함께 수색 작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 아버지를 그리며 * (아버지 忌日에) -1993.12.17.일 기장에서 - 아버님! 당신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아버님 생전의 그 모습은 이 불효한 자식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 더해가고 있음은 어인 일이 옵니까 ? 生前에 제게 주시었던 사랑이 너무 크시옵고, 깊었던 까닭이 옵니까! 일평생 성낸 얼굴 한 번도 않으셨던 당신께선 우리 여섯 남매를 위해 온 정성 다 쏟으시고 그 큰사랑 주시고 가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남매 모두 무던히도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지요. 특히나 姑婦 간의 갈등 속에서 아픈 맘 다스리시며 가정만을 위해 祈禱하셨지요. 이른 새벽 일어나시어 소(牛)죽솥에 불을 지피시고는 아침기도와 珠신공까지 다 하셨지요. 지금도 아버님의 그 祈禱 소리 귀에 쟁쟁하여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 더해갑니다.
어느 날 아버님은 “건어물”논을 갈고 계셨지요. 신작로 길을 따라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소 몰아 논 가는 아버님의 찌렁찌렁한 목소리는 얼마나 우렁찼는지 산울림이 되어 골짜기를 메우셨지요. 이후 저는 더 멀리에서도 아버님의 목소리는 들으며, 우리 아버지가 너무 자랑스러웠답니다.
아버님! 제 나이 불혹을 넘어 지천명이 되어 갑니다. 세상에 태어나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아 실천하라는 나이가 된 셈이지요. 하지만 아직도 아버님께 미치기는 너무나 未熟합니다. 평소 아내는 “아버님을 좀 닮으세요”라며 생전에 아버님께서 진지 드시든 “수저”를 챙겨와 제게 사용하게 했지요. 성인은 못되어도 君子답게 사시다가 하느님 품에 가신 아버님 모습 닮으며 훗날 아버님 뵐 그날까지 당신이 주신 무언의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아버님의 幽 宅은 형님의 반대에도 생전에 원하셨던 큰아버지 옆에 모셨습니다. 하느님의 품속에서 永眠하시기를 기원하며 연도(煉禱)를 바칩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여서 자랑스럽습니다. - 찬바람 불어오는 새벽에 -
달성공원 탐방 ! - 공원에서 멀지도 않은 지역에 살면서 언제나 맘만 먹으면 들릴 수 있는 곳이 이곳 달성공원이다. 그러나 오늘(2024.06.12.) 내가 찾은 달성공원은 평소와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깊은 감회와 함께 이곳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 오늘 함께한 解說 士로부터 달성공원의 역사와 유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겪어온 온갖 풍상과 애환을 들을 수 있어 그 意味가 새롭다.
1970년대 어린아이들 손잡고 입구에 들어서면 守門將으로 공원의 상징과도 같았던 키다리 아저씨가 門을 지키고 있었으며, 賞春客 인파에 공원은 언제나 붐비곤 하였다. 지금은 입장료도 없는 무료 개방으로 언제나 들릴 수 있으니 아침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기 위해 들러는 주민들 대부분이 이용객으로 되었으니 동네 공원이나 다를 바 없다.
오늘 해설사의 자세한 해설과 함께, 아울러 歷史觀을 들러보고 나서야 이곳이 達成 徐氏의 遺虛地였다는 사실과 초기에는 밭과 언덕으로 이루어진 토성으로, 보잘것없는 곳이었으나 백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온갖 풍상과 애환을 겪으며 오늘날 이렇게 잘 가꾸어진 멋진 작품을 유산으로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桑田碧海라고 해야 할까 !
慶尙監營이 尙州에서 大口(大邱)로 옮기게 되니 바로 지금의 “관풍루”라 한다. 이곳을 그토록 많이 오르고 했건만 역사의 자취도 無知한 것, 부끄러울 뿐이다. 역사관을 둘러보고는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痕迹이 있었으니, 순종의 달성공원 행차는 왕의 “지방 순례”란 의미에서 대단한 사건임은 틀림없겠으나 일제의 청치야 욕을 위한 수단의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점을 看過한다면 결코 영광스러운 행차라고는 볼 수 없는 아픔의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달성공원이 일제 神社參拜의 장으로 사용된 사적 기록을 사진으로 확인하는 순간 “이 나라 백성들의 가슴속에 맺힌 한 또 얼마나 했을까 ?” “나라 잃은 설움의 상처가 이곳에도 있었구나” 놀라울 뿐이다. 이제 시련의 역사를 고이 간직한 채 묵묵히 잘도 버티어온 달성공원! 이제는 역사의 아픔을 씻고, 명품공원으로 손색없는 대구의 자랑이 되었다. 잘 정돈된 공원의 잔디와 백 년도 더 될법한 향나무 수십 그루는 누가 이렇게 잘도 가꾸어 놓았으며 “오롯이 너만은 공원의 역사를 아는 듯”威風堂堂이다.
공원 오른편 언덕배기를 오르니 사슴“우리” 앞에 이른다. 귀 쫑껒 반기는 모습에 나그네 발길 한참이나 머물게 한다. 먹이를 주어도 별 반응이 없으니 이젠 방문객들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조금 더 오르니 “관풍루”의 “樓閣”을 만난다. 이곳이 “경상감영”이었다는 사실 외에 더 이상 역사의 모습은 알 수가
없었다. 대구의 초여름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겉옷 벗어들고 관풍루를 지나 綠陰 짙은 土城 길로 접어들라면 숲은 左右로 드리워져,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다. 이따금 불어오는 솔바람 함께 벤치에 앉아 이마에 흐른 땀 씻고 있노라면, 지나버린 그날의 追憶이 아른거린다. “그 어느 무덥던 어느 여름날 이곳 이 자리 벤치에서 냉커피 한잔 마시며 요란스러운 매미의 교향곡을 들으며 한낮의 피서를 함께 했던 옛 친구가 그리워진다.”
토성을 지나 다시 내려오면 바다사자 놀이터, 이어서 호랑이, 코끼리 외에 원숭이 재주부리는 동물원이 달성공원의 명물들이다. 이곳에 갇혀 있는 동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애잔한 마음 그지없다. 넓디넓은 바다에서, 아프리카 대 초원에서 활보하지도 못한 채, “우리”에서 갇혀 사는 운명이라니 어쩌면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순리를 逆行하는 죄악은 아닐까 ?” 하는 넋두리를 해 본다.
동물원을 지나 일제의 蠻行에 저항한 애국지사 旺山 許 蔿 선생의 殉國 記念碑 앞에 서니 그분의 忠節! 그 용기에 고개 숙여진다. 그 옆에 李相龍 구국 기념비, 그리고 詩人 李相和 詩碑가 있다. 나라를 위해 義와 忠을 다 하신 기념비 앞에서 肅然함만 더할 뿐이다. 亂世의 英雄이라 했던가! 暗鬱했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오롯이 나를 犧牲했던 사람 중에서도 대구가 낳은 英雄들을 여기 碑石에서나마 만날 수 있음에, 그 感懷가 새롭다. 시인은 일제의 아픔을 詩로써 恨을 노래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 나라 모든 이가 역사의 아픈 기억을 더 많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달성공원의 탐방을 마치고 “고운” 시인의 “화살”이란 詩가 가슴에 박혀와 여기에 옮겨 본다.
-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
(성공한 혁명은 화려해 보이지만 그 뿌리는 언제 어디서나 참혹한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먼저 일어나 싸운 사람들의 희생에 닿아 있다. 자기 자신은 승리의 과일을 맛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인생을 걸고 싸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이만큼 인권과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위의 시를 읽으면서 많은 영웅을 생각하게 한다. 이순신, 유관순, 안중근,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