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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8일 예불문 제5강 (怡山慧然禪師 發願文이산혜연선사 발원문)
출처 : 염화실
예불문 제5강 /2006년 12월18일 강의분
怡山慧然禪師 發願文(이산혜연선사 발원문)
十方 三世(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法寶(법보)와 보살 성문
스님네께
至誠 歸依(지성귀의) 하옵나니 慈悲(자비)하신 願力(원력)으로 굽어
살펴 주옵소서.
저희들이 참된성품 등지옵고 無明(무명)속에 뛰어들어
나고 죽는 물결 따라 빛과 소리 물이 들고 심술궂고 욕심내어
온갖 번뇌 쌓았으며 보고 듣고 맛봄으로 한량없는 罪(죄)를 지어
잘못된 길 갈팡질팡 生死苦海(생사고해) 헤매면서
나와 남을 執着(집착)하고 그른 길만 찾아다녀
여러 생에 지은業障(업장) 크고 작은 많은 허물
三寶前(삼보전)에 원력 빌어 一心懺悔(일심참회) 하옵나니
바라옵건대 부처님이 이끄시고 菩薩(보살)님네 살피옵서
苦痛(고통)바다 헤어나서 涅槃(열반)언덕 가사이다.
이 세상에 命(명)과 福(복)은 기리기리 昌盛(창성)하고
오는 世上(세상) 佛法智慧(불법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
날 적마다 좋은 國土(국토) 밝은 스승 만나오며
바른 信心(신심) 굳게 내고 아이로서 出家(출가)하여
귀와 눈이 聰明(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世上(세상)일에 물 안 들고 淸淨梵行(청정범행) 닦고 닦아
서리같이 嚴(엄)한 戒律(계율) 털끝인들 犯(범)하리까
점잖은 거동으로 모든 중생 사랑하여 이내 목숨 버리어도 지성으로
보호 하리
三災八難(삼재팔난) 만나잖고 불법인연 구족하여
般若智慧(반야지혜) 드러나고 보살(菩薩)마음 堅固(견고)하야
諸佛正法(제불정법) 잘 배워서 大乘眞理(대승진리) 깨달은 뒤
六波羅蜜(육바라밀) 行(행)을 닦아 阿僧祗劫(아승지겁) 뛰어넘고
곳곳마다 說法(설법)으로 천겹만겹 疑心(의심)끊고
魔軍衆(마군중)을 降伏(항복)받고 三寶(삼보)를 잇사올제
十方諸佛(시방제불) 섬기는 일 잠깐인들 쉬오리까.
온갖 法門(법문) 다 배워서 모다 통달 하옵거든
福(복)과 智慧(지혜) 함께 늘어 無量衆生(무량중생) 濟度(제도)하며
여섯 가지 神通(신통)얻고 無生法印(무생법인) 이룬 뒤에
觀音菩薩(관음보살) 大慈悲(대자비)로 十方法界(시방법계) 다니면서
普賢菩薩(보현보살) 行願(행원)으로 많은 衆生(중생) 건지올제
여러 갈래 몸을 나퉈 微妙法門(미묘법문) 演說(연설)하고
地獄餓鬼(지옥아귀) 나쁜 곳엔 광명(光明)놓고 神通(신통)보여
내 모양을 보는 이나 내 이름을 듣는 이는 보리마음 모두 내어
輪廻苦(윤회고)를 벗어나되
火湯地獄(화탕지옥) 끓는 물은 甘露水(감로수)로 變(변)해지고
劒樹刀山(검수도산) 날 쎈 칼날 연꽃으로 化(화)하여서
苦痛(고통)받던 저 衆生(중생)들 極樂世界(극락세계) 往生(왕생)하며
나는 새와 기는 짐승 원수 맺고 빚진 이들
갖은 苦痛(고통) 벗어나서 좋은 福樂(복락) 누려지다.
모진 疾病(질병) 돌 적에는 藥(약)풀되어 治療(치료)하고
凶年(흉년)드는 세상에는 쌀이 되어 救濟(구제)하되
여러 중생 利益(이익)한 일 한 가진들 빼 오리까
千劫萬劫(천겁만겁) 내려오던 원수거나 친한 이나
이 세상 眷屬(권속)들도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얽히었던 愛情(애정)끊고 三界苦海(삼계고해) 뛰어나서
十方世界(시방세계) 衆生(중생)들이 모다 成佛(성불)하사이다.
虛空(허공)끝이 있사온들 이내 所願(소원) 다 하리까
有情(유정)들도 無情(무정)들도 一切種智(일체종지) 이루어지이다.
반갑습니다. 12월 18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흔히 사찰에서 행선축원을 예불문 뒤에 많이 하기 때문에
예불문에 이어 행선축원문을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행선축원과 함께 [이산혜연선사발원문怡山慧然禪師發願文]을 읽는 사찰
이 많아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신중단의 예불을 끝에 잠
깐 살펴볼까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무엇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가하면 다 잘 알고 계시지
만 희망이고, 꿈이고, 기대감이고, 발원입니다.
우리 어릴 때 흔히 하는 말로,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
니다.
불교의 발원문發願文, 축원문祝願文, 또는 서원誓願, 원력願力, 이런 것들이 전부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꿈이요, 희망이요, 기대감이지요.
그것은 곧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고 그렇습니다.
음식물을 필요한 만치는 먹어야 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실은 사람은
기대감을 먹고 살고, 꿈을 먹고 살고, 원願을 먹고 삽니다.
원願이란 게 우리말로 하면 꿈이지요.
사람은 그런 것을 가지고 삽니다. 또 그게 없으면 살아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지요.
예불을 드릴 때는 기껏 칠정례 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원이 많습니다.
또, 우리가 부처님 앞에 삼배 만을 하더라도 속으로 바라는 원이 참 많지요.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삼배를 하고는 이것저것 축원을 하도 주워섬기다 보니까
끝도 없어요. 자기 원도 해야지, 집안 식구들 일일이 다 소원이 있으니 그것도 원
을 해야지요, 또 한 사람에게 한 가지씩만 있는 게 아니지요? 건강이다 뭐다해서
몇 가지씩 원이 있으니 주워섬기다가 보니 도저히 안 되겠어서,
‘부처님, 뭐 굳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아실 것 아닙니까?’
이렇게 뭉뚱그려서 도축을 했다는 것입니다.
‘제 마음 다 아시니 소원성취 시켜 주십시오.’ 하는 그런 축원을 했다는 우스개 말
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부처님은 중생들이 일일이 말을 안 해도 중생의 소원을 훤히 알고 계
십니다.
그렇게 뭉뚱그려 하는 것을 도축이라 하지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절 삼배를 하고도 원이 그렇게 많고 또 아
침예불을 하고도 원이 이렇게 많습니다.
그리고 불공을 올리는데도 얼마나 많은 축원문이 있습니까?
축원문을 보면 그 속에 바라는 원이 너무나 크지요. 체면 없이 많은 원을 붙여 놓
고는 바랍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조그마한 불공을 드리고는 원을 이루겠다는 그런 의미라기보다
는 마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개인불공(독불공이라 하지요)을 하는데 소위 독불공獨佛供을 일일이 다
했습니다. 정초나 중요한 재일, 초파일 같은 때면 백 명이 됐든지, 이백 명이 됐든
지 간에 독불공을 다 해드렸어요. 요즘은 관음재일이나 지장재일, 또는 초하루 보
름 등을 정해서 신도들이 한꺼번에 불공을 올리는 그런 의식으로 거의 전환이 되
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독불공이 없습니다.
한꺼번에 몇 번씩 불공을 올리니까 따로 독불공을 할 일이 없는데, 예전 우리 어
릴 때 보면 정초에는 전부 절에 가서 독불공을 했습니다.
시골 할머니들은 일년 중 정초나 동지, 초파일 등 기껏해야 두세 번 절에 오거든
요.
그럴 때면 아주 정성을 다해서 며칠 전부터 부처님께 올릴 쌀을 준비해 먼 길을
걸어 사찰에 와서는 불공을 올리는데, 정초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많이 모이다 보
니까 독불공을 하긴 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 그걸 어떻게 다 했겠어요?
그러나 이백 명, 삼백 명이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의 독불공을 잘 하는 방법이 있어
요.
정식으로 우리가 독불공을 하게 되면 한 번만 해도 두 시간이 걸립니다.
이를테면 천수경을 외우고 정근을 또 한참 하지요. 관음정근이든 석가모니 정근
이든 정근을 하고, 유치由致니 청사請詞니 하는 불교의식이 많은데 그런 것들을
다 여법如法하게 외우고, 칠정례를 하고 대회참大悔懺이니 소회참小悔懺이니 하
는 것들을 하게 됩니다.
좀 큰 불공을 올릴 때는 대회참, 소회참이라 해서 절을 수십 번 하는 그런 의식을
합니다.
축원 또한 재고축再告祝, 삼고축三告祝을 하고 그리고 신중단까지 하려면 한 사
람 불공만 해도 좋이 두 시간 정도 걸리거든요.
그런데 한 이, 삼 분에 해 치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마음에 흡족하게
하는 방법이 있어요.
또 그렇게 하지 않고는 하루에 백 명, 이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다 할 수 없거든
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천수경도 생략하고 그 좋은 반야심경도 생략합니다. 유치由致와 청사請詞는 말할
것도 없고 또 ***야니 칠정례니 하는 것들 다 생략합니다.
일년에 한두 번, 몇날 며칠동안 정성을 들여서 쌀을 가려 놨다가 들고 와서 정성
을 다하는, 신도님의 그 정성에 부합하는 불공을 해 드려야 하는데 사람은 많고,
그렇지만 그분들께 흡족한 불공을 해드리려면 앞에서 열거한 그 모든 의식을 다
생략하고 축원문만 잘 해 드리면 됩니다.
불공할 순서가 되면 해당 신도님을 부처님 앞에 세워놓고, 축원문도 ‘앙고仰告
시방삼세十方三世....’ 이렇게 복잡히 서론, 본론, 결론 그렇게 하지 않고 그저 본
론만 합니다.
‘오늘 어디에 사시는 누구누구가 부처님 앞에 이렇게 와서 불공을 올립니다. 이
분의 소원은 이러이러 합니다.
사대강건四大剛健하고 육근청정六根淸淨하고 신무일체身無一切병고액난病苦厄
難 심무일체心無一切 탐진미혹貪戀迷惑, 그리고 모든 가족들이 건강하고 우순풍
조雨順風調 민民안락安樂해서 농사를 짓든, 상업을 하든 모든 이의 심중 소구소
망 원만성취되어...’
이렇게 축원을 하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가족의 이름을 확실하게 불러드려야 합
니다. 신도님 귀에 쏙쏙 들어가도록 불러 줘야 그 다음 축원문이 생명력을 발하거
든요.
이처럼 축원문을 잘 해드리면 반야심경이고 천수경이고 하나도 안 외워도 흡족해
합니다.
그 축원문 하나를 가지고 그렇게 별러서 왔고, 정성을 다해서 왔고, 기다려왔기에
아주 흡족해합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뭐 반야심경 한 편이라도 읽어주면 좋겠고, 천수경 한 편이라도
읽어주면 좋겠는데 그런 것들 다 생략하고 축원만 잘 해주면 흡족한, 그런 심리는
그럼 도대체 무엇이냐?
그런 것들을 여러 가지를 연관시켜서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무슨 깊고 좋은 내용
보다는 당장 마음에 바라는 어떤 뭔가를 흡족하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마음으로 바라는 그것이 불공 올리는 불자님들의 소원이거든요. 발원이고 축원입
니다.
그 마음을 만족시켜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바라는 바가 뭡니까? 꿈이며 기대감입니다. 꿈과 기대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
어 하나의 생명력입니다. 살아가는 힘이에요.
부처님 앞에서 축원을 한다는 사실은 거기다가 불을 지펴주는 일입니다.
원願이라는 것은 그와 같이 중요하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자기 발전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어떤 꿈을 가꿔가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거지요.
그런 사실들을 불공을 진행하는 사람으로서 가만히 연구를 해 보면 그렇습니다.
무슨 깊은 뜻이 중요한 게 아니고 보통 사람들에겐 바라는 바 어떤 원願을 충족시
켜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족들이 정말 잘 되었으면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먼 길을 불공 올리러 왔는데
그 이름을 부처님 앞에 확실히 불러주고, 또 건강하고 무병장수 하라는 그런 축원
을 해 줌으로 해서, 바로 그것을 기대하고 왔기 때문에 불공하는 사람은 천수경,
반야심경을 안 외도 아주 마음이 흡족한 겁니다.
그렇게 이, 삼분 안에 축원문을 한 번 읽어 드림으로 해서 아주 훌륭한 불공이 되
는 거지요. 그래서 이백 명, 삼백 명이 되는 정초의 불공군들을 다 충족시켜서 내
려 보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심리적으로 가만히 해석을 해 보면 그래요, 바라는 바 원願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고 그 원願은 다름 아닌 바로 생명력이며, 그 생명력에 불을
지펴주는 데 만족하지 않을 사람이 없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앞에 삼배를 하더라도 그렇게 꿈이 많지요. 그
게 나쁜 게 절대 아닙니다. 꿈이 있어야 되는 거지요, 바라는 바가 있어야 되는 거
지요.
그러기에 불공을 한 번 올리더라도 그렇게 축원이 길고, 예불을 한 번 하는데도
행선축원이 얼마나 거창하고 내용이 많습니까? 얼마나 바라는 꿈이 큽니까!
우리가 지금부터 살펴보려는 것이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인데 발원문도 행선축
원, 서원문과 다 같은 것입니다.
잘 알고 계시듯이 [천수경]은 아주 짧은 경전인데 그 속에도 원이 아주 많아요,
별별 원이 거기에는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더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원동력은 꿈이구나, 바라
는 바이구나, 그것이 어떤 생명력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은 저희 출가 스님들이 공부하는 취문반의 교재 속에 들어
있는 글인데 운허 스님께서 번역하신 내용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읽는 ‘시방 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하는 이 번역은 운
허 스님의 번역입니다.
다른 스님의 번역본도 한 가지 있지만 크게 알려져 있지 않고 운허스님의 번역이
통용되고 있지요.
十方 三世(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法寶(법보)와 보살 성문 스님
네께 至誠 歸依(지성귀의) 하옵나니
그랬습니다.
시방과 삼세의 부처님, 그리고 팔만사천 큰 법보, 법보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불법승 할 때의 가르침[법]이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뜻하면
서 나아가 진리의 가르침, 여기서는 분명히 팔만사천 큰 법보라고 그랬잖습니까?
이건 팔만대장경, 부처님의 설법을 뜻하는 것입니다.
불법승 할 때는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 제일 타당하지요.
그 다음,
보살 성문 스님네께
보살, 성문, 스님 모두 승보에 해당되지요. 우리가 예불문에서 봤듯이 보살은 삼
보로 분류하자면 역시 승보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보살 성문 스님네께 지성귀의
하옵나니’는 ‘삼보에 먼저 예배를 올립니다.’ 이런 뜻입니다.
慈悲(자비)하신 願力(원력)으로 굽어살펴 주옵소서
불법승 삼보는 누구 할 것 없이 부처님도 그렇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렇고, 보
살 성문 스님도 역시 자비하신 원력으로 모든 중생을 굽어 살피는데 그 뜻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서두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살아온 길을 이제 살펴보는 것이지요.
저희들이 참된성품 등지옵고
참된 성품[본성], 본래는 정말 깨끗한 성품인데 그것을 등지고
無明(무명)속에 뛰어들어 나고 죽는 물결 따라 빛과 소리 물이 들고 심술
궂고 욕심내어 온갖 번뇌 쌓았다고 했습니다.
캄캄하니까 무명이지요, 본심으로 살지 못하고 캄캄한, 어리석은 무명으로 그냥
살기 시작하니까 생사의 물결과 보이고 들리는 것들, 그리고 내 마음에 달콤한 그
런 것들에만 욕심을 내고 심술을 부려 어떻게 하든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런
마음 씀씀이 때문에 번뇌가 자꾸 쌓이게 되지요.
보고 듣고 맛봄으로 한량없는 罪(죄)를 지어
잘못된 길 갈팡질팡 生死苦海(생사고해) 헤매면서
그랬습니다.
보고 듣고 맛보는 그런 것이 다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과도하면 죄가 됩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 잘못된 길 갈팡질팡 생사고해 헤매면서, 나와 남을 執着
(집착)하고
나도 집착하고 남도 집착하고, 그게 아상我相, 인상人相인데 사람들은 자아의식
이니 남이라고 하는 차별의식이니 하는 것들이 강하지요.
그런 한계를 우리는 그어놓고 삽니다, 그게 집착이지요.
그래서 바른 길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른 길만 찾아 다녀 여러 생에 지은 業障(업장) 크고 작은 많은 허물
三寶前(삼보전)에 원력빌어 一心懺悔(일심참회) 하옵나니
그랬습니다.
불교 안에서도 여러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을 단생單生으로, 일회적인 생
으로 보는 그런 가르침들도 간혹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여러 생에 지은 업장’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한 생만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룻밤 자고 깨어나서 또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계속 살듯이 삶과 죽음이 계속 반복되면서 많은 생을 거듭한다는 것이
불교적인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런데 간혹 생을 일회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불교라는 이름 하에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간혹 있어요. 그런 것은 꼭 맞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살펴서 이해해
야 합니다.
여러 생에 지은 業障(업장) 크고 작은 많은 허물
三寶前(삼보전)에 원력빌어 一心懺悔(일심참회) 하옵나니
불법승 삼보 앞에 원력을 빌어서 일심참회 하옵나니,
바라옵건대 부처님이 이끄시고 菩薩(보살)님네 살피옵서
그러니까 일단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나서는 서원과 간청을 하게 되는 것이지
요.
우리는 중생이고 서민이고, 차별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는 아직도 그런 것이 나눠
져 있으니까 이제 부처님과 보살님께 서원을 세우고 간청을 하게 됩니다.
苦痛(고통)바다 헤어나서 涅槃(열반)언덕 가사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많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이고득락離苦得樂’이지요. 고통을
떠나서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 것,
그것을 苦痛(고통)바다 헤어나서 涅槃(열반)언덕 가사이다
이렇게 이제 아름답게 표현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命(명)과 福(복)은 기리기리 昌盛(창성)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수명이라든지 복이라든지 이런 것은 창성해야 되고
오는 世上(세상) 佛法智慧(불법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
날적 마다 좋은 國土(국토) 밝은 스승 만나라는 거지요.
불자들이 불교를 인연 맺으면서 마음속에 꼭 간직해야 할 서원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간직함으로써 자기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방향을 향해 꾸준히 정
진하고 정진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돌아가시게 되면 비록 죽을 때 죽는다손 치더라도 그런 꿈과 용기와 정
진력을 가지고 죽는 순간까지 살아가는 것, 이게 이제 순간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지요.
그리고 또 불법지혜는 무럭무럭 자라나야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래요.
법회 할 때나 강의하면서 생각하기를, 우리 불자들은 할일이 너무 많고 할 공부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 공부를 열심히 하다보면 이 세계 속에서 내 자신이 끊임없이
성장해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날 적마다 좋은 국토에 날 것이고, 밝은 스승을 만나게 되는 거지요.
이런 것들을 삼보전에 발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信心(신심) 굳게 내고 아이로서 出家(출가)하여
귀와 눈이 聰明(총명)하고
이건 이제 동진출가童眞出家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지요. 꼭 동진출가해서 승
려가 되겠다는 마음이 없는 분들은 좀 맘에 걸리는 대목이지요.
동진출가童眞出家를 출가의 가장 이상理想으로 봅니다. 최소한도 이십 전에는 출
가해야 되는 거지요. 요즘은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이 출가를 하고 있고 이십 세 이
전의 출가자는 참 드물지만 옛날에는 아주 많았어요.
나이 들었다 해서 나쁜 출가는 아니지요. 팔십에 출가해서 큰 도를 이룬 협 존자
같은 모범생도 있습니다만, 대개 보면 이십 전에 출가를 하게 되고, 또 십세 전후
로 출가한 분들도 많습니다.
조주스님 같은 경우는 구세에 출가를 하셨는지 그랬는데, 이처럼 동진출가해서
아주 훌륭한 스님이 되신 사례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출가의 가장 이상적인 연령은 열 살 전후의 동진출가라 했고 열 살 전이면
더 좋지요. 왜냐하면 세속의 때가 안 묻었으니까요.
과거의 업은 있지만은 그래도 금생의 업은 적지요. 그러니까 잘 가르치면 아주 훌
륭한 수행자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아이로서 出家(출가)하여 귀와 눈이 聰明(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世上(세상)일에 물 안 들고 淸淨梵行(청정범행) 닦고 닦아
그렇지요, 과거생에 들었던 물이야 어쩔 수 없지만 금생에는 최소한도 세상일에
물 안 들 수 있는 거지요.
이 내용은 경전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고 불교 역사에도 나오지 않는 것인데, 근래
우리나라 불교계를 잘 살펴보면 5.16 이전에 군에 가지 않고 사찰에서 스님 생활
을 하던 이들이 더러 있었어요.
그런데 5.16이 일어나면서 그런 사람들을 전부 다 잡아다가 군에를 보냈습니다.
그러니 적령기에 간 사람들도 있고, 나이가 들어서 간 사람도 있고 그렇지요.
그래서 스님 생활을 하다가 전부 군에 갔다 왔어요. 그 사람들이 3년 간 군대생활
을 하고 다시 돌아와서 승려생활을 하는데 그 사람들 때문에 절집안의 분위기가
확 달라져 버렸습니다.
‘잘못했다, 옳은 일했다’ 하는 이런 뜻은 아니에요.
그런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한창 젊은 시절에 군대생활 3년을 하고
왔으니, 군에서 듣고 보고 배우고 익히고 막 살아간 그 업이 어디 가겠습니까?
아무리 다시 절에 들어와서 억누르고, 감추고, 참고 견딘다 하더라도 어딘가에서
그 업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들이었지요. 가만히 살펴보면 그 무렵에 절
집안의 분위기가 아주 급속도로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세상일에 물 안 든다 하는 이런 말이 바로 그러한 문제 때문이지요.
淸淨梵行(청정범행) 닦고 닦아 서리같이 嚴(엄)한 戒律(계율) 털끝인들
犯(범)하리까
점잖은 거동으로 모든 중생 사랑하여 이내 목숨 버리어도 지성으로 보호
하리
그랬습니다.
다른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 목숨마저 버릴 수 있다는 거지요.
참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이건 이제 대단한 발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불법을 올곧게 익혀서 아주 훌륭한 선지식이 되고 조사가 되려면 중간에 어떤
어려움도 만나지 않아야 되겠지요.
三災八難(삼재팔난) 만나잖고 불법인연 구족하여
般若智慧(반야지혜) 드러나고 보살(菩薩)마음 堅固(견고)하며
지혜가 있어야 되고, 그 다음 자비가 그 뒤를 따라야 됩니다.
그래서 반야지혜 드러나고 보살마음 견고하며라고 되어 있어요.
보살마음은 지혜도 포함되겠지만 자비심을 뜻합니다.
자비가, 온전한 자비가 되려면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지혜없는 자비는 보통 우리 중생들이 느끼고 또 갖고 있는 정情이지요. 그건 자비
라고 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이제 반야지혜가 드러나고 보살마음이 견고해서,
諸佛正法(제불정법) 잘 배워서 大乘眞理(대승진리) 깨닫는다 그랬어요.
모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잘 배워가지고, 대승진리-가장 바람직한 진리를 깨
닫는다고 했습니다.
불교에도 여러 차원의 가르침들이 있거든요, 뭐 소승교니 대승시교니 온갖 차원
의 가르침이 있으나 여기서 대승진리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진리, 궁극의 진리,
더 이상 나아갈 데 없는 불교 최고의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치를 아는 것이 불교 공부의 가장 큰 요체要諦입니다. 그런 뒤에 육바라밀
행을 닦는 겁니다.
모르고 닦아봐야 그건 별 의미가 없지요. 그러니까 불교의 이치, 제불정법을 잘
배워서 대승진리를 깨달은 뒤에 그때서야 비로소 육바라밀 행을 닦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승지겁을 뛰어넘는 거지요. 아승지겁 동안 계속 닦는다는 게 아닙니다.
제불정법을 잘 배워서 대승진리를 깨달으면, 아승지 겁이란 게 있을 수가 없는 거
지요. 그래서
阿僧祗劫(아승지겁) 뛰어넘고 곳곳마다 說法(설법)으로 천겹만겹 疑心(의
심)끊고
이부분은 천겁만겁千劫萬劫이라고 잘못 표기가 되어 있는 곳이 많습니다. 천겹만
겹이 맞지요. 원문이 파의망어破疑網於 중중重重으로 되어 있거든요. 중중重重,
거듭 중字를 번역한 글자입니다.
천겹만겹 疑心(의심)끊고 魔軍衆(마군중)을 降伏(항복)받고 三寶(삼보)를
잇사올제
이것도 ‘뵙사올제’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 ‘잇사올제’라고 표기해야 돼요, 삼보를
이어간다는 뜻의 소륭삼보紹隆三寶라고 원문에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거기서 뭘 삼보를 뵙습니까? 삼보를 끊이지 않고 이어간다는 뜻입니다.
삼보를 이어갈제
十方諸佛(시방제불) 섬기는 일 잠깐인들 쉬오리까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시방제불을 섬긴다는 거지요.
온갖 法門(법문) 다 배워서 모다 통달 하옵거든
‘모두 통달’ 이렇게 해도 틀리지는 않습니다만, 초기번역이 아마 ‘모다’ 라고 되어
있지요, ‘모다’라는 말을 잘 썼습니다. ‘모두 다’라는 뜻에서 ‘모다 통달 하옵거든’
그렇게 썼어요.
福(복)과 智慧(지혜) 함께 늘어 無量衆生(무량중생) 濟度(제도)하며
보십시오, 우리가 자꾸 복만 따지는데, 복과 지혜가 함께 늘어야 된다고 했습니
다.
복 없는 지혜는 그야말로 너무 외롭지요. 그러나 지혜가 우선은 우선입니다.
지혜 없는 복은 ‘코끼리에게 진주를 거는 것’이라는 이런 표현을 경전에서 했어
요. 코끼리 목에다 진주 영락을 걸어봤던들 그게 무슨 좋은 줄을 알 것이며, 제대
로 쓸 줄을 알겠습니까?
사람이 영락구슬을 가지고 있어야 그걸 제대로 쓰지요.
복과 지혜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복도 있어야 하지만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지혜가 있으면서 뒤에서 받치는 복이 있어야 된다는 거지요.
소산疏山 스님이라고 하는 이가 있어요. 소산스님은 깨달음은 아주 출중한데 지
어놓은 복이 없어가지고 당신이 사는 산에는 나무까지 듬성듬성 나 있어서, 한 끼
밥을 지을 나무를 구하기도 그 산에서는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글 소疏,
뫼 산山, 이름이 소산疏山입니다.
한 끼 밥을 지을 나무 구하기도 그렇게 쉽지 않았다 하니, 아주 높은 지혜를 가진
도인도 복이 없으면 사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복이 없으면 또 그럴 수가 있어요.
아무리 도가 높고 깨달음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복은 복이고, 지혜는 지혜이지 않
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지혜는 없어도 복은 참 많지요, 복은 다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같
이 풍요로운 세상에 지혜만 보탠다면 더 잘 살 수가 있는데 지혜가 없으니 이 풍
요를 제대로 수용을 못하는 그런 입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福(복)과 智慧(지혜) 함께 늘어 無量衆生(무량중생) 濟度(제도)하며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한다고 했지요, 복이 있고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고 복이
있고, 이렇게 갖춰져야 말이 먹혀듭니다. 그게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리 말을 해도
감동을 주지 못하고 누가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여섯 가지 神通(신통)얻고 無生法印(무생법인) 이룬 뒤에
여섯 가지 신통은 육신통이라고 해서 잘 알고들 있는 거지요.
무생법인-생사가 없는 그런 진리를 이룬 뒤에
觀音菩薩(관음보살) 大慈悲(대자비)로 十方法界(시방법계) 다니면서 普賢
菩薩(보현보살) 行願(행원)으로 많은 衆生(중생) 건지 올제
예불문에 사대보살 이야기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관세음보살과 보현보살 두 분
을 거론했습니다.
큰 자비심이 있어야 되고, 큰 자비심으로써 보현보살과 같은 실천행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여러 갈래 몸을 나퉈 微妙法門(미묘법문) 演說(연설)하고
그랬지요.
지난번에 우리가 공부한 관세음보살의 삼십이응신에서 중생의 근기 따라, 중생의
입장을 따라서 또 중생의 성향과 성격과 수준에 맞추어서 알맞은 법문을 근기에
맞게 설하는 것, 그것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의 삼십이응신이라고 설명 드렸지요.
여기에서, ‘여러 갈래 몸을 나퉈’라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중생제도를 위해서 방편으로 별별 모습을 나투어 별별 일을 다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러면서 미묘법문을 연설합니다.
地獄餓鬼(지옥아귀) 나쁜 곳엔 광명(光明)놓고 神通(신통)보여
제게도 이런 능력이 있으면 참 잘 될 거예요. 광명을 놓고 신통을 보여줄 수 있으
면 뭐 저절로 중생 제도가 될 것입니다.
방편으로 그러는 것도 좋은 거지요.
내 모양을 보는 이나 내 이름을 듣는 이는 보리마음 모두 내어 輪廻苦(윤
회고)를 벗어나되
그랬습니다.
‘문아명자면삼도聞我名者免三途 견아형자득해탈見我形者得解脫’이라는, 행선축
원에 있었던 내용하고 뜻이 같지요.
여기서는 ‘보리마음 모두 내어 윤회고를 벗어나되’라고 해서 깨달음에 대한, 진리
를 깨닫고자하는 그런 마음을 모두 내어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되,
火湯地獄(화탕지옥) 끓는 물은 甘露水(감로수)로 變(변)해지고 劒樹刀山
(검수도산) 날쎈 칼날 연꽃으로 化(화)하여서
이랬습니다.
이 부분은 꼭 물이 펄펄 끓는 지옥이 있다기보다는 당장의 우리의 분노심을 이렇
게 표현한 것입니다.
불교공부를 잘 하고, 또 지혜롭게 인생을 살 수 있는 그런 마음이 갖춰진다면 설
사 분노가 일어나더라도 그 분노를 얼른 바꿀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남을 공격하고 싶은 공격심, 여기서 말하는 검수도산은 남을 해치고 싶고
공격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때는 劒樹刀山(검수도산) 날쎈 칼날 연꽃으로 化(화)하여서
이렇게 했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살다보면 그야말로 화탕로탕 같은 그런 분노심, 온 세상을 다 태워버리고
싶은 그런 화가 날 때가 있지요. 그런 분노심이 치밀 때가 누구에게든 다 있습니
다.
또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까지 공격하고 싶고 해치고 싶은 그런 마음이 나지요.
그게 바로 검수도산劒樹刀山입니다. 칼검劒자 나무 수樹자, 또 刀山-칼산 이런
말이지요.
바로 우리들 마음의 공격성과 분노심, 공격심 이런 것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래도 불교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고, 불공을 드리고 이렇게 해서 관세음
보살을 알기에, 욕하고 싶은 그런 생각이 문득 일어나고, 또 남을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속에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불러 그런 좋지 않은 마음을 억누르고 덮어 씌워서 스스로를 자제하고 다스릴 줄
아는 그런 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불자들은 그게 있습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얼마나 큰 덕입니까!
그걸 못 배운 세상 사람들은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합니다. 욕하고 싶으면 사정
없이 욕을 해버리고, 화내고 싶으면 화를 마음대로 내버리고 공격하고 싶으면 무
슨 음모를 꾸며서라도 그 사람을 망하게 한다든지 상하게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상대를 망하게 하기 위해 아주 치밀하게 애를 쓰지요.
문득 일어나는 마음이야 누구나 다 있지만 그 마음으로 하여 상대를 손해 보이거
나 해를 입히려, 일을 진행시키는 그런 경우는 없어야지요.
문득문득 일어나는 마음이야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럴 때 우리는 관세음보살을
불러야 됩니다.
입에서 욕이 나가고 공격하는 말들이 나갈 때 우리가 ‘관세음보살~’ 이렇게 한다
면 그야말로 화살이 나가고 칼이 나가는 그 순간에 ‘연꽃이 나간다’ 는 그런 표현
그대로가 되는 거지요.
그런 이치를 불자들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관세음보살을 불러서 참
고 억누르고 견디어 내 자신을 다스리고 억제해 나가다보면 시간이 지나 마음이
잔잔해 질 것 아닙니까?
그럼 정신을 차리게 되고 본심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지요.
그때는 화냈던 것, 욕했던 것, 이런 것들이 후회스럽지요.
잘 몰라서 그랬던 것을, 뭔가 오해가 있어서 그랬던 것을, 내가 오해했거나 상대
가 오해했거나 또 그 사람이 고의적으로 나를 해치려고 했을 때는 연민의 마음으
로 그 사람을 어여삐 봐야하고 불쌍히 봐야 되는 거지요.
이게 이제 불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도 정작 그렇게 살아오진 못했고 지금도 사실은 이게
내 살림살이로 완전히 자리 잡지는 못했어요.
이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우리 불자들이 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훌륭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꾸 반복하다 보면 이런 생활이 우리 모두의 살림살이가 되어 아예 그런 분노심
이나 공격심이 일어나지 않게 되겠지요.
劒樹刀山(검수도산) 날쎈 칼날 연꽃으로 化(화)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바람
직한 마음씀씀이 입니까? 이렇게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苦痛(고통)받던 저 衆生(중생)들 極樂世界(극락세계) 往生(왕생)하며 나
는 새와 기는 짐승 원수 맺고 빚진 이들 온갖 苦痛(고통) 벗어나서 좋은
福樂(복락) 누려지이다
이 경우, 저절로 그렇게 받는 경우가 있지만은 대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공격하고 해치고 그저 뺏으려고 전쟁을 일으키고, 어떻게 하더
라도 자기 영토를 더 만들려고 하고, 자신의 지도영역을 더 넓히려고 하고 또 어
떻게 하든지 자기 소유로 하려고 하지만 그래 봤자 그 인생도 결국은 원점으로 돌
아가야 하고, 그 돌아가야 할 원점은 공空이지요, 공空이 원점이에요.
어떤 삶을 살았던지 그 삶의 원점은 공空입니다. 그런 걸 알면 그렇게 살지 않지
요.
그래서 이런 성인의 가르침, 인생과 세상의 실상實相을 바로 깨달으신 성인의 가
르침을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그런 데 있습니다.
모진 疾病(질병) 돌 적에는 藥(약)풀되어 治療(치료)하고
이 얼마나 큰 자비심입니까? 모진 질병이란 돌림병이라고도 하고 유행병일 수도
있고 그렇지요.
내 자신이 약풀이 되고 내 삶이 그대로 쌀이 되어 가난한 중생들을 구제하되,
여러 중생 利益(이익)한 일 한 가진들 빼 오리까
여러 중생에게 이익하다면 무엇이든지, 어떤 일이든지 다 한다는 거지요.
千劫萬劫(천겁만겁) 내려오던 원수거나 친한 이나 이 세상 眷屬(권속)들
도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얽히었던 愛情(애정)끊고 三界苦海(삼계고해) 뛰어나서
十方世界(시방세계) 衆生(중생)들이 모다 成佛(성불)하사이다.
이렇게 멋진 서원, 이렇게 멋진 축원이 또 다시 있겠습니까!
정말 읽을수록 신심 나고 좋지요.
어릴 때 보면 큰 절에서 새벽 3시에 도량석, 종성을 하고 대중이 다 모여서 칠정
례를 올린 뒤, 부처님 앞에서 아주 맑고 청아하게 발원문을 읽지요.
대개 이런 발원문은 어린 사람이 읽습니다. 맑고 청아한, 그리고 그 애조가 착~
깔려있는 음성으로 쭈욱 읽어나가면 아주 그냥 가슴이 서늘해지지요.
적막한 산사의 새벽에 맑고 청아한 소리로 이런 글을 읽고 모든 대중들이 귀를 기
울여서 듣는, 그런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내용이 좋습니까!
虛空(허공)끝이 있사온들 이내 所願(소원) 다 하리까
有情(유정)들도 無情(무정)들도 一切種智(일체종지) 이루어지이다.
이 앞에 나온 내용들이 얼마나 큰 서원입니까? 허공은 끝이 없지요? 그런데 허공
이 설사 끝이 있을지언정 내 서원은 다 할 수가 없다는 거지요.
이런 표현들은 [보현행원품]을 그대로 바꿔놓은 거지요.
‘중생이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번뇌가 다한다 하더라도 내 서원은 다할 수가
없다’는 그런 식의 표현이 되어 있었지요.
有情(유정)들도 無情(무정)들도 一切種智(일체종지) 이루어지이다.
그러니까 유정은 생명 있는 것, 무정은 돌이나 나무 같은 것들을 뜻하는데 그런
모든 것들도 다 일체종지, 일체지혜-모든 것을 꿰뚫어 아는 깨달음의 지혜를 다
이루어지이다 하는 그런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발원發願, 축원祝願 내지 서원誓願의 중요성에 대해서 서두에 말씀을 드렸고, 그
다음에 흔히 사찰에서 예불 끝에 읽는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을 이렇게 살펴보았
습니다.
오늘 [예불문]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오셨지요. 지금 89명이 창에 계십니다. 신기하지요? 여기에
는 미국에 계신 분, 호주에 계신 분, 중국에 계신 분이 많이 올라와 계시는데, 과
학의 발전으로 각자 자기 집에 앉아 이렇게 전 세계에서 접속만 하면 같은 시각에
같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런 좋은 기술을 우리는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세상끝님 법상님 玄山님 대원성님 법성04님 캔들댄스님 도연님 bohyun님 청정안
님 대해월님 초연화님 해성님 날마다좋은날님 가람님 카안님 청정행♡님 손님님
원행님 이지님 청운화님 마니주님 명주님 진각화님 성보행님 묘연화님 선법행님
명불행님 인희님 바람향기님 묘하님 불퇴지님 만월님 무아심님 문선심화님 우담
화님 청정월님 화엄법해님 발심화님 은우님.
아까 보니까 전산스님도 와 계시고 많은 분이 계셨는데 나가셨나 봅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이렇게 동참하셔서 법석을 빛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예불문 제5강 정리-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