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필리핀 가톨릭 교회의 역사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로 1521년 마젤란의 상륙 이후 스페인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됐다. 스페인은 당시 서로 적대시하는 필리핀의 작은 국가들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수도자들을 파견했고 아우구스티노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등이 이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다. 이후 도미니코회의 수사가 최초의 주교로 임명돼 교회 회의를 개최하고 교회 행정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여러 종족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하고 프랑스 혁명의 이상이 전파되면서 필리핀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했고 결국 1898년 독립을 선언,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화국 헌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파리조약에 따라 필리핀을 할양받은 뒤 1902년 필리핀인들의 저항을 물리쳐 필리핀의 지배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1902년 로마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필리핀 독립교회」가 설립돼 다른 교의나 전례는 모두 로마 가톨릭과 같으면서도 교황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하나의 분파를 형성해 유지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1907년 필리핀에 자치권을 부여해 필리핀인들에 의한 입법의회가 구성되고 1934년에는 필리핀 독립법이 미국 의회를 통과했으며 이듬해에는 필리핀 연방 정부가 1946년 독립을 목표로 발족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이러한 일정은 중단됐고 1945년 미국이 필리핀을 탈환하고 이듬해 총선을 거쳐 필리핀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필리핀 가톨릭 교회는 400여년 동안 스페인으로부터 받은 가톨릭 신앙과 종교적 실천을 유지해왔다.
대중 신심 행사들
▲ 십자가 형을 실제로 재현하는 모습(실제로 손 바닥에 못을 박는다)
필리핀 교회에 대해 말할 때 대중 신심에 대해서 빼놓을 수 없다. 필리핀 교회에서는 공식적인 전례보다도 오히려 대중 신심들이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공식 전례가 필리핀 문화와 괴리를 보일 때 필리핀의 문화에 보다 가까운 대중 신심들이 활성화됐다는 것이다. 물론 전례운동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전례 개혁이 도입됨으로써 이 괴리가 상당히 좁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대중 신심 중에서 성탄 대축일 전 새벽미사는 주목할 만하다. 필리핀에서는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며칠 동안 새벽미사와 성야 행사를 거행하는데, 이는 스페인 선교사들이 농부들의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른 시간에 미사를 했다고 한다.
「심방 가비」(Simbang Gabi)는 마리아를 기리는 9일간의 새벽미사이고 「파눌루얀」(Panuluyan)은 자정 미사 전인 12월 24일 저녁에 거리에서 이뤄지는 연극이다. 이는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서 여관을 찾아다닌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필리핀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환대가 마리아와 연결된다. 즉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거절하는 것은 마리아를 거절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성주간에는 성모 마리아 상을 중심으로 수난을 겪은 성인들의 상을 실거나 장식한 수레를 끌고 행렬을 한다. 성모상 앞을 행진하면서 묵주 기도를 바치고 찬미가를 부름으로써 성모님의 슬픔을 함께 나눈다.
부활 대축일 새벽의 만남 행사는 필리핀 마리아 신심의 절정이다. 검은 천으로 가린 마리아상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상을 모신 행렬이 마을 광장에 모여 마리아가 부활한 아드님을 만나는 것을 기념한다.
필리핀 교회는 새로운 천년기를 맞으면서 토착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있다. 필리핀 교회는 자신들이 가톨릭 신자인 동시에 필리핀 사람이라는 것, 선교사들에게서 받은 신앙에 자신들 고유 문화와 전통의 옷을 입혀야 한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식한다. 토착화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바로 필리핀 사람들 자신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행일2003-11-02 [제2371호, 10면] 가톨릭신문 박영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