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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 발전사
1.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한 현 하롤드 대주교
ꡒ여기 동방으로 뛰어들고자 했던 이 잠들다.ꡓ
이 말은 어느 날 현 대주교님이 공동 묘지 어느 곳에 있을 당신의 묘비를 상상하며 떠올린 문구이다. 현재 제주시 가톨릭 묘지에 있는 그분의 묘소에는 이러한 비문은 없지만, 그분이 바로 동방으로 뛰어들어 밝은 빛이 되신 하롤드 헨리(Harold Henry) 현 대주교님이다.
현 대주교님은 미국 미네소타 주 노스필드에서 1907년 7월 11일,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아버지 프랭크 헨리와 어머니 미네바 쉐스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모라비아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잦은 전직으로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던 그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종교에 접하게 되었으며, 6년 동안에 국민학교를 무려 일곱 차례나 옮겨 다녀야만 했다.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께서 가톨릭 신자인 여성과 재혼하기까지 일 년여 정도를 친척 집에 얹혀 지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하롤드가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을 본 이복 누이 이사벨이 그에게 가톨릭 재단인 성 스테파노 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되지 않아도 좋다는 학교의 승인을 받고 그 학교에 입학했는데, 사실 그때 그는 가톨릭의 사제란 사악한 힘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 힘으로 자신을 꼼짝 못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학한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한 신부님으로부터 ꡒ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ꡓ에 관한 강의를 듣고서 가톨릭 교회란 성모 마리아만을 흠숭한다고 여겼던 종래 자신의 생각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고, 가톨릭에 심취하게 되어 드디어 1922년 5월 12일 세례를 받았다.
그 무렵, ‘동방’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선교사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중국 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를 키우기 시작하여, 1918년 설립된 성 골롬반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영세한 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과 부모님의 결혼 문제로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고, 그곳 오마하에서 일 년을 지낸 후 실버 크리크로 옮겨 학업을 마치고,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아일랜드의 성 세넌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만일 아일랜드에 가지 않았더라면 성직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여길 만큼 그곳에서의 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성 세넌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10년간의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1932년 오마하의 성 골롬반 성당에서 주님의 백성의 목자인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토록 열망하던 중국 선교를 위한 머나면 항해에 오르게 되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를 위해 전혀 다른 곳에 자리를 마련하셨다. 중국 사회가 혼란하여 항해 중에 갑자기 중국 대신 한국 선교로 소임이 바뀌어, 항해의 목적지는 중국이 아닌 더욱 낯선 동방의 나라 한국이 되었던 것이다.
1933년 일곱 명의 동료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후 대구에서 언어 수업을 받았다. 아일랜드의 신학교에서 달필로 유명했던 그로서도 한국어를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 했으며, 더구나 일본 식민지 치하라 일본어까지 배워야 한다는 이중의 부담을 가졌다. 그러나 자신이 배운 바를 전파하고자 하는 열의에 가득찬 젊은 선교사로서 ꡒ한국말 모릅니다ꡓ고 말해야만 하는 고통을 통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겸손을 익히게 되었고,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많은 부분을 자신의 첫 부임지인 노안 본당에서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터득하였다.
이방인들에게 이 언어 문제와 병행하는 것이 다름아닌 음식 문제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언어나 음식에 따르는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니, 정말로 그가 도전해야 할 문제는 본당 신자들이 그를 낯선 외국인으로 바라보는 시각,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이방인이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우리 한국인들과 동고 동락하며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하여, 즉 완전 적응을 하기 위하여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고자 각종 풍속에 참여하면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후 나주로 부임하여 교세 확장과 더불어 새 성전을 건립하고,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등 날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오랫동안 현 대주교님을 감시해 오던 일본 경찰들의 압력은 더욱 거세어져만 갔다. 1941년 6월부터는 아예 스물네 시간 내내 감시하더니, 진주만 사건이 터지자 휴가를 요청하여 목포로 내려가 있던 그를 연행하여 단지 미국인이라는 죄명으로 급기야 나주 감옥에 감금시켰다. 다시 광주 사제관으로 이송되어 연금되었다가 1942년 본국으로 강제 송환 당한 이후로는 미국 종군 신부로서 활약하여 동성 훈장을 수장하였다. 이는 그분이 사제로서 군인 세계에 완전 적응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그곳 골롬반 신학교의 강의를 맡았는데, 이 시기는 그분의 생애 중 가장 평탄했던 시절로서 그분은 그다지 흡족치 못하게 여겼다. 그것은 당신 마음속 깊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크게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1947년, 주교 대리로 임명된 후 한국에 다시 온 그는 이제 일본군의 감시가 사라진 대신 새롭게 부딪쳐 오는 문제가 있었으니, 이는 공산주의에 의한 국토의 양분과 사회 혼란이었다.
미국 델라웨어 주에 있는 웰밍톤 다리는 현 대주교에게 있어서 행운의 다리이다. 동란 이후 광주교구의 재건을 위한 모금을 위해 순회하시다가 그 다리에서 몬시뇰의 임명 소식을 전해 받았으며, 후에 다시 그 다리를 건너다가 대주교가 된다는 소식을 접한 다리이기 때문이다.
6․25동란 후, 재건 사업과 예비자 교육, 의식주 해결 등의 문제로 동분서주 여유가 없는 가운데서도 그는 다시금 병원과 진료소의 필요를 절감하고 수도회의 도움을 받아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또한 나환자의 자립을 위해 -나환자들이 존경의 뜻으로 헨리를 한글로 ꡐ현ꡑ이라 명명한- 현애원, 호혜원 그리고 영암 등 세 군데에 자활촌을 마련하였고, 소록도에 미감아를 위한 육아원을 설립했다.
이처럼 육체는 병원에서 그리고 영혼은 교회에서 돌본다지만, 정신을 위해서는 아직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한국인들의 교육열에 힘입어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대건신학교(지금의 광주가톨릭대학)의 설립만큼 그의 시간과 정력을 소모케 한 것은 없었다. 신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 마련에 애쓰다가 심장병이 더욱 악화되기도 했다.
까리따스 수녀회. 골롬반 수녀회, 과달루페 선교회, 글라라 관상 수녀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천주의 성 요한 의료 봉사 수도회, 예수 고난회 등 여러 수도회의 진출과 사회 복지 기관의 도움으로 본당과 공소 건립, 병원과 진료소, 중․고등학교, 신학교, 피정센타, 유치원 등을 건립하고, 평신도 사도직 활동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는 등 노약자나 신체 장애자, 그리고 고아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이처럼 혼신의 힘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을 그는, 당시 공산당에 의해 처참히 죽어간 몬시뇰 브렌난을 비롯한 많은 신앙인들의 피 흘림에 대한 대가라고 여겼다.
미국에 다녀오는 길에 일본에서 레지오 주회를 하는 것을 보고 감격하고서 바로 꼰칠리움에 연락하여 1953년 5월 31일 목포에서 레지오를 창단하였다.
광주대교구에서 회갑을 지낸 현 대주교는 장성한 딸을 부모가 사위에게 내주듯이 한공렬 주교에게 광주대교구를 인계하신 후 1971년 제주교구장으로 부임하였다.
죽음이 임박해 오면서 그가 겪은 커다란 변화는 점차 신비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인간의 의지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이 신비의 영역에 접하면서부터는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로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음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되었다.
현 대주교는 1976년 3월 1일 월요일 아침, 향년 66세로 미사 준비 기도 중에 선종하셨다. 장례식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그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ꡒ고인의 일생은 선교 자체였습니다. 고인의 생활 태도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도록 하는 메시지였습니다.ꡓ
위의 조사는 바로 그분의 삶을 요약해 설명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2. 한국 레지오의 도입과 발전
[1] 도입과정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된 것은 1953년 5월 31일 당시 광주교구장이신 현 하롤드 대주교의 지도로 목포시 산정동 본당에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과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그리고 경동 본당에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었다. 이어서 광주, 청주, 춘천, 원주, 전주, 서울, 제주 지역의 각 본당에 확산되어 각 교구에 확장 되었다.
초창기 각 쁘레시디움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꼰칠리움 직속 쁘레시디움으로서 꼰칠리움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사업보고를 하였다.
1955년 10월 9일에는 한국 최초의 꾸리아가 창단되었는데 산정동 3개 쁘세시디움(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동신자의 모후 쁘레시디움)과 경동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 및 함평 전교의 모후 쁘레시디움 등 5개의 쁘레시디움으로 ‘목포 매괴의 모후’꾸리아가 탄생되었다.
1956년 8월 7일에는 광주시 북동 본당 산하 8개 쁘레시디움으로 ‘중재자이신 마리아’ 꾸리아(CURIA MEDIATRICS)가 설립되었으며 1956년 12월 6일에는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씨움(COMITIUMMEDIATRICS)으로 승격되었다.
1957년 3월 3일 한국 최초의 소년 꾸리아인 ‘목포 천지의 모후 꾸리아’가 창설되었다. 이어서 1957년 6월 10일에는 ‘광주 바다의 별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레지오 사도직의 소개가 잘 되어감으로 인하여 교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모든 본당마다 앞을 다투어 쁘레시디움 설립이 가속화 되었다. 사제와 수도자의 손과 발의 역할을 하며 정성을 다하여 봉사하고 자신들의 성화에 소홀함이 없이 모범적인 신심생활을 하였다. 특히 광주대교구는 한국 본산지답게 레지오 사도직에 참여도가 높았으며 교본 규칙에 따라 전국을 지도하며 착실히 성장해 나감으로써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57년 5월 7일에는 세계 본부인 꼰칠리움으로 부터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지도적 역할을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씨움에 의뢰한다는 승인서를 받게 되었다.
이듬해 1958년 7월에는 세계 본부인 꼰칠리움에서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SENATUS MEDIATRICS․국가평의회)를 승인하였다.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된지 5년만에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하여 국가평의회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각 교구에 레지오 마리애가 아래와 같이 전파되어 활성화 되었다.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
1953년 5월 31일 산정동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
평화의 무후 쁘레시디움
경동의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 설립.
1955년 10월 9일 매괴의 모후 꾸리아 창단(목포 산정동 성당)
1956년 8월 7일 중재자이신 마리아 꾸리아 설립
1956년 12월 6일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씨움 승격
1958년 7월 13일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 승격
□부산교구
1956년 1월 3일 서대신동 영원한 도움이신 성모 쁘레시디움 설립
1956년 11월 2일 임마꿀라따 꾸리아 설립
1957년 3월 10일 임마꿀라따 꼬미씨움 승격
1978년 11월 10일 바다의 별 레지아 승격
□대구대교구
1957년 1월 13일 왜관 종도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7년 2월 3일 계산 다윗의 적루 쁘레시디움 설립
1957년 8월 22일 왜관 천주의 성모 꾸리아 설립
1958년 1월 12일 의덕의 거울 꾸리아 설립
1959년 1월 22일 의덕의 거울 꼬미씨움 승격
1959년 2월 15일 왜관 천주의 성모 꼬미씨움 승격
1971년 6월 13일 김천 평화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1986년 5월 1일 의덕의 거울 레지아 승격
1999년 1월 1일 꼰칠리움 직속
□전주교구
1955년 5월 5일 전동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7년 7월 17일 파티마의 모후 꾸리아 설립
1960년 9월 11일 파티마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1986년 5월 1일 파티마의 모후 레지아 승격
□마산교구
1956년 7월 10일 진해 중앙, 하늘의 문 쁘레시디움 설립
1957년 2월 17일 진해 그리스도의 모친 꾸리아 설립
1959년 9월 30일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 설립
1961년 7월 16일 치명자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1988년 3월 1일 치명자의 모후 레지아 승격
□안동교구
1957년 10월 25일 상주 서문동 그리스도의 모친 쁘레시디움 설립
1958년 8월 10일 함창 천상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9년 9월 27일 함창 구세주의 모친 꾸리아 설립
1962년 3월 25일 상주 남성동 죄인의 의탁 꾸리아 설립
1975년 8월 15일 안동 사도들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2000년 5월 31일 안동 사도들의 모후 레지아 승격
□제주교구
1955년 12월 22일 중앙 천주의 성모 쁘레시디움 설립
1957년 8월 28일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 설립
1980년 5월 11일 치명자의 모후 꼬미시디움 설립
1981년 8월 2일 치명자의 모후 꼬미시디움 승격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1955년 8월 19일 명수대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1957년 1월 29일 혜화동 상지의 좌 꾸리아
1958년 6월 8일 혜화동 상지의 좌 꼬미씨움
─ 서울 꼬미씨움으로 지칭
1959년 3월 15일 명수대 평화의 모후 꾸리아
1960년 3월 30일 명 동 무염시태 꼬미씨움 설립
1960년 5월 8일 명 동 무염시태 꼬미씨움 승격
1974년 9월 25일 명 동 무염시태 레지아 승격
1978년 12월 23일 명 동 무염시태 세나뚜스 승격
□수원교구
1958년 8월 21일 양지 매괴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60년 1월 17일 천지의 모후 꾸리아 설립
1964년 1월 19일 천지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1981년 3월 19일 천지의 모후 레지아 승격
□인천교구
1957년 9월 22일 답동 매괴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8년 4월 8일 바다의 별 꾸리아 설립
1958년 6월 8일 바다의 별 꾸리아 승인
1965년 7월 18일 바다의 별 꼬미씨움 승격
1986년 3월 30일 바다의 별 레지아 승격
□원주교구
1955년 3월 20일 원동 천주 성총의 모친 쁘레시디움 설립
1957년 5월 5일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 설립
1966년 6월 12일 치명자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대전교구
1957년 3월 3일 논산 부창동 천지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9년 3월 12일 논산 부창동 루르드의 성모 꾸리아 설립
1961년 7월 9일 대흥동 다윗의 적루 꼬미시움 승격
1987년 8월 30일 대흥동 평화의 모후 레지아 승격
□청주교구
1954년 2월 15일 북문로 하자없으신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6년 8월 20일 구세주의 모친 꾸리아 설립
1957년 10월 7일 구세주의 모친 꼬미씨움 승격
1987년 6월 28일 구세주의 모친 레지아 승격
□춘천교구
1954년 11월 홍천 무염시태 쁘레시디움 설립
1955년 11월 5일 소양로 종도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6년 9월 2일 소양로 평화의 모후 꾸리아 설립
1957년 5월 5일 소양로 평화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2] 활성화에 따른 발전
평신도의 특수 사도직은 레지오 마리애 신심단체가 전국의 모든 교회에 소개되자 사제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선행되는 가운데 서로 앞다투어 평신도들에게 권장하면서 쁘레시디움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이 레지오 마리애의 도입 과정도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 예를 들어본다면 첫째, 교본의 내용이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교본 규칙을 무시하고 적절한 편법으로 운영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둘째, 지도자의 편리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다 보니 결코 바람직스런 방법이 아님을 늦게나마 발견하게 된 것이다.
어떤 평의회에서는 심지어 묵주기도를 5단이 아닌 1단만 바치자고 했던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한 교본에 조직, 운영에 따른 규칙이 자세히 나열되고 있지만 번역이 어렵게 되어 이해하는데 곤란했던 일 등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었으니,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기도하며 연구해서 원만히 운영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대군단의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이다.
본 신심단체의 고유한 특성은 첫째 자기자신의 성화요, 둘째는 하느님 말씀의 전파이다. 신심단체이기 때문에 두터운 신심으로 영성생활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단원들이 증가됨에 따라 약간의 혼선이 있었으니 영적 지도자들이 정성어린 지도로 이제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세나뚜스는 아일랜드 출신의 지도 신부님을 맞아 바로 더블린에서 하고 있는 그대로 정통성 있는 레지오를 전수받아 전국의 레지오 지도에 임함으로써 레지오 운영의 본보기가 되었다. 어느 지역에서나 레지오 지도가 잘못 되어가면 광주 세나뚜스에서 직접 방문하고 지도하며 서신으로 질문에 응답하는 것은 물론 매월 월보를 통하여 운영과 관리에 대하여 교육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전국 어느 곳에서나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광주 세나뚜스에 질의해 오고 있다.
서울 지역의 레지오는 1955년 8월 19일 광주대교구 현 하롤드 대주교님의 주선으로 당시 서울 성의중․고등학교장으로 계셨던 김성환 신부의 지도를 받아 명수대 본당에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설립된 후로 모든 본당에 확산되었다. 1956년 9월 25일 혜화동 본당에 치명자의 모후 뿌레시디움이 설립되었고, 1957년 1월 29일 혜화동 본당에 상지의 좌 꾸리아가 설립되었고, 1958년 6월 8일에는 꼬미씨움으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상지의 좌 꼬미씨움은 서울 꼬미씨움으로 지칭되었다. 1959년에는 명수대 본당에 평화의 모후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초대교회, 조상들의 강한 신심이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주듯 초창기의 선배 단원들은 매우 열심히 레지오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매달마다 단원들은 매우 열심히 레지오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였다. 매달마다 증설되는 쁘레시디움과 평의회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거대한 군단을 형성할 수 있었다.
1960년 3월 30일에는 명동 대성당에 본부를 둔 무염시태 꼬미씨움이 설립되었고 같은 해 5월 8일에는 무염시태 꼬미씨움으로 승격시켜 수도권 레지오를 관리 운영해 오다가 날로 확장되는 레지오 조직의 관리를 위해 1974년 9월 25일 무염시태 꼬미씨움을 레지아로 승격시켰다.
한국 세나뚜스는 전국을 관리 운영하면서 이제까지 큰 고충은 없었으나 계속 레지오 조직이 확산됨에 따라 지역적인 관계 때문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즉, 매월 세나뚜스 월례회를 개최하는데 각 교구 평의회에서는 광주까지 와서 종합보고를 해야하고 방문도 가야 하며 합동회의 때도 광주까지 와야하는 등 지리적인 여건관계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고 레지오의 효율적인 관리 운영을 위해 서울 지역에 세나뚜스 설립을 서두르게 되어 마침내 세나뚜스로 승격시켜 줄 것을 꼰칠리움에 상신하여 1978년 12월 23일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로 인준을 받았다.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는 서울 지역의 인천, 수원, 춘천, 원주, 대전, 청주 교구의 레지오 조직의 관리 운영을 담당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로써 한국 세나뚜스는 이에 광주, 대구, 부산, 전주, 마산, 제주, 안동 교구의 레지오 관리와 운영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광주와 서울의 양 세나뚜스는 성모님께 일치하는 모습으로 굳게 뭉쳐 오늘도 하느님 나라 건설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된 이후 평신도 사도직의 신성한 의무를 정성껏 수행하며 한국 교회 발전에 봉사해 왔다. 그 동안 전국적인 큰 행사도 치루었는데 그 중에서 기억할 만한 행사는 아래와 같다.
1978년 5월 5일 한국세나뚜스 주최로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25주년 행사를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전국의 단원들과 영적 지도자들을 모시고 성대히 개최하였다. 그리고 1979년 7월 16~17일 양일간에는 서울 상지회관에서 천주교 한국선교 200주년에 즈음한 교세 200만 신자 확보를 위한 전국 꼬미씨움 단장, 지도신부 회의를 개최하고 민족 복음화 활동 5개년 계획안을 확정하였다. 또한 1984년에는 한국 200주년을 맞이할 때까지 200만 신자 선교를 위한 각종 행사를 서울과 광주의 양 세나뚜스에서 선교의 과학적인 계획을 세우고 각 교구마다 행사를 거행하여 선교에 대한 사명감을 고취시키며 레지오의 일치를 재다짐하였다. 1984년 5월 6일에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되었던 성인 103위 시성식 및 한국 선교 200주년 경축행사 대행사에 적극 참여하였다. 1986년 10월 25~26일에는 광주 명상의 집에서 전국 꼬미씨움 단장, 지도신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3세기를 향한 민족 복음화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1990년까지 300만 신자화 선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 하자는 다짐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께서 역사상으로 두 번째인 성모성년(1987년 6월 7일~1988년 8월 15일)을 윤허함에 따라 성모군단인 한국 레지오에서는 전국의 각 꾸리아 단위로 성모성년 개막에 따른 경축행사를 성대히 가졌다.
1988년 4월 5일에는 레지오 마리애 한국 도입 35주년을 맞이하여 맨 처음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였던 목포 산정동 본당의 정원에 기념비를 건립하여 한국 세나뚜스 총재이신 윤공희 대주교의 주례로 기념비 제막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각 지역에서 6천여 단원들이 축하 행사에 참여하였다. 한국 레지오 성지로 조성되어야 할 선정동 본당에 레지오 첫 기념 사업으로 기념비가 건립되었음은 보람있는 일이며 앞으로 기념관과 기념탑 등을 건립하여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성지 조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1988년 5월 15일에는 한국 세나뚜스 주최로 성모성년 전국 대회를 청주 공설운동장에서 8만 5천여명의 단원들이 모여 성대히 개최하였다. 이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파악하고 민족 복음화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그 동안 베풀어 주신 성모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이번 큰 행사는 5월 성모성월을 더욱 찬란히 장식하였다. 이 경축행사에 꼰칠리움 극동지역 담당 맥그라쓰 신부도 참석하여 식장을 더욱 빛내 주었다. 이 외에도 많은 행사들이 있었는데 특히 단원들의 영성생활을 지도하고 성모님과 일치하며 충성스런 성모군대의 정예 군대화를 위하여 전국 각 교구 단원들을 대상을 기사교육을 일년에 몇 차례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모습으로 교육과 피정을 실시하여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에 정성을 다하고 있으며 레지오의 목적과 정신이 몸에 배도록 인내와 기도로 꾸준한 수련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의 양 세나뚜스는 단원들의 신심을 두텁게 연마하고 영웅적인 활동성을 소개하여 레지오의 발전을 기하고 성모군대의 일치된 모습으로 민족 복음화를 성취시키기 위해서 '레지오 마리애’란 월간지를 창간하게 되었다.
‘레지오 마리애’란 이름으로 1988년 8월 1일에 발간된 레지오 영성지는 한국 레지오의 길잡이가 되고 장지기가 될 것이며, 조직에 순종하는 레지오 정신을 발휘하는데 활력소의 역할을 다할 것은 물론 민족 복음화에도 크게 기여하리라 굳게 믿는다.
1991년은 세계 레지오 창설 제 70주년이 되는 축복된 해이다. 한국 세나뚜스에서는 경축행사를 각 교구 평의회별로 실시토록 하였는데 예정대로 모두 실시하였으며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에서는 4월 5일 광주 가톨릭 대학 운동장에서 윤공희 대주교님을 모시고 8천여 단원들과 제 70주년 기념 행사를 성대히 거행하였다.
1993년 5월 5일에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제 4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 주최로 광주대교구 산하 레지오 단원 약 8천명과 영적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축미사와 경축식을 성대히 실시했으며 이를 시작으로 서울Se., 대구Re., 부산Re., 전주Re., 마산Re.에서도 각각 레지오 도입 제 40주년 행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에서는 산하 교구를 대상으로 중견 간부 양성을 위한 레지오 제 1, 2, 3단계 기사교육을 매년 2회 이상 2박 3일 일정으로 실시하여 내실을 다지고 있으며, 각종 교육과 봉쇄 피정을 통하여 평신도 특수 사도직의 수련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1998년 5월 23일에는 레지오 마리애의 최초 도입지인 목포 산정동 성당 구내에 A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 B을 건립하여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 총재 윤공희(빅토리노)대주교님의 주례로 축성 미사를 봉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