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다음 카페 <함안 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에 올려져 있는 것입니다. 주변의 관계자분들께 이 글을 카톡으로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1959년 하림 태생 조성래 올림
함안에는 조리안(趙李安)이라는 3성씨가 있다. 그것은 함안 조씨, 재령 이씨, 안흥 안씨이다. 그 중 재령 이씨에 대해 알아보자. 나, 조성래의 조모님이 재령 이씨 이증아(李曾兒)이다.
■ 충절의 상징.
● 재령이씨(載寧李氏)와 모은(茅隱) 선생
재령이씨(載寧李氏) 시조(始祖)는 경주(慶州) 이씨의
시조인 신라의 개국원훈(開國元勳)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 그 후 몇 대를 지나 고려의 문하시중
(門下侍中) 이우칭(李禹稱)이 재령군(載寧君)에
봉(封)해 경주에서 분관(分貫)된 재령 이문의 시조이다.
황해도 서어산(鋤於山)에 그의 묘소가 있다.
재령군으로부터 몇 대 후에 상장군(上將軍) 이소봉
(李小鳳)의 장자(長子) 이일상(李日祥). 차자(次子)
이일선(李日善)은 관직이 사재령(司載令)에 이르렀다.
사재령은 고려 공민왕의 외손으로서 고려의 국운이 쇠진함을 보고는 가족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경남 밀양부 서쪽 소음리(召音里)에 은거(隱居)하여
세상을 마쳤다.
아들 6인 이신(李申), 이술(李戌), 이축(李丑), 이오(李午), 이유(李酉), 이인(李寅)을 두었는데 넷째 아들 모은(茅隱) 이오는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서 신왕조(조선왕조)에 벼슬하지 않고 함안의 모곡리
(茅谷里)에 가서 은거하기를 자청(自請)하였다.
그 밖의 여러 아들들도 또한 신왕조에 벼슬하지 않았다.
모은(茅隱)은 일찍이 포은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
(李穡) 두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면서 의리의 학문에 독실하여 당세의 사림에게 추앙을 받았었다.
고려가 망하자 여려 현인들과 송도 교외의 두문동
(杜門洞)으로 들어가서 망복수의의 결의를 표명하고. 남쪽인 함안군의 모곡리에 터를 정해 은거 하였다.
그는 자신이 끝까지 고려왕조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기 복거지(卜居地) 주위에 담장을 쌓아 이
담 밖은 신왕조(조선왕조)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유민의 거주지인 ‘고려동’ 임을 명시하여
망복수의의 표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후에 조선 태종 때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며, 또 항상 그의 아들 개지(
介智)에게 경계하기를 “너도 또한 고려왕조의
유민이니 어찌 신왕조에 벼슬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는 절대로 신왕조에서 내려주는
관명은 사용하지 말고, 또 내 신주도 이곳 ‘고려동’
담 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러한 그의 유명에 따라 아들 개지는 끝내 벼슬하지
않고 한평생을 마치었다.
(참고문헌 : 대한민국 구석구석)
함안 재령 이씨 모은공파의 파조는 모은(茅隱) 이오(李午)이다. 전서공 금은(琴隱) 조열(趙悅)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30살쯤 어린 이오는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약 6개월쯤 살았다. 거기에는 식량이 없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만은 홍재(洪載), 금은 조열(趙悅), 모은 이오(李午) 3선생은 두문동에서 나와 처음에는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두심마을로 가서 2년정도 살다가 거기에도 살기가 힘들어서 홍재 선생은 합천에 계속 남고, 조열과 이오, 두 사람은 함안으로 내려와서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이 두 분 다 그 이전에는 함안과 크게 연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은(茅隱) 이오(李午) 선생은 고려 궁중에서부터 함안까지 금은(琴隱) 조열(趙悅) 할아버지를 쭉 따라 다녔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망할 때 금은(琴隱) 조열(趙悅) 할아버지는 공조전서(工曹典書, 오늘날 국토건설부장관, 정2품)이었고, 연세는 59세였다. 그 때 이오 선생은 30세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