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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빼앗긴 조국祖國이니 사랑도 구슬펐던 허영숙許英肅 ]
박계주朴啓周
허영숙許英肅 여사- 하면 누구나 우리 문단의 大家 春園 李光洙 선생의 부인으로 알고 있고, 둘째로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 중의 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30년 전 전에 “산아産兒 제한론制限論”등을 각 신문 잡지에 발표함으로써 필봉筆鋒을 휘두른 논객論客이었다는 것을 요새 사람으로서는 별로 아는 이가 없을 것 같다. 당시 여성문제나 사회문제를 갖춘 여성 논객들은 허영숙許英肅 씨 외에 박인덕朴仁德, 윤성상尹聖相, 황신덕黃信德, 최은희崔恩喜 씨 등 허다許多하기는 했다.
이제 그들 가운데에서 許 여사를 들어 선구적先驅的 업적보다는 주로 그의 애정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 60전錢을 빌려준 인연因緣=
춘원 이광수 씨와 같이 일본 동경유학을 하고 있었던 소설가 전영택田榮澤 씨 등의 말에 의하면 당초에 춘원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던 여자는 나혜석羅蕙錫 양이었다고 한다. 나혜석 씨는 당시 동경미술학교에 다니고 있던 여학생으로 여간 정열적인 여성이 아니었다고 하며, 춘원이 나 양을 찾은 편이 아니라 나 양이 더 능동적으로 춘원을 찾았다고 한다.(崔承九 씨와의 연애는 그 뒤의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나 양은 당시 동경 우시꼬데(牛込) 여자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는 허영숙 양을 동생처럼 늘 데리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야 어떻든 허영숙 씨가 말하는 춘원과의 관계를 엿듣기로 하자.
허 양이 임상臨床 실습 차 부속병원에 가있을 때 허술한 대학생복 차림의 한 학생이 진찰 받으러 왔다가 진찰비 1원 20전이 없어서(그때 그 학생은 60전 밖에 없었다 한다.) 진찰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려는 것이 딱하게 보여, 더구나 일본 사람도 아닌 조선인 유학생이기에 자기가 60전을 빌려드리기로 하고 진찰 받게 했다 한다.
그때의 인상을 허영숙 씨는 말하기를- 백석白晳의 미남자인데다가 광채를 발하는 황금빛의 동공瞳孔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 장차 큰 일 할 사람이라는 것, 그리하여 첫눈에 마음이 이끌렸다는 것이다. 진찰 카드를 보고 그가 유명한 이광수라는 데에 허 양은 더욱 놀랐다 한다.
춘원은 그 당시에 학생이었지만, 서울에서 발행되는 ‘매일신보每日申報’에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연재連載하고 있던 때라 글줄이나 보는 사람은 어느 누구나 춘원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날 진찰을 받고 돌아갔으나 입원비가 없는 그는 입원할 수도 치료 받을 수도 없어서 명계관明溪舘이라는 하숙- 그것도 냉기冷氣가 떠도는 다다미 2층 방에서 신음하다가 그만 각혈咯血을 하게 되었다. 고열에 의식을 자주 잃으면서 헛소리 하는 말은, 병원에서 만난 소녀의 이름과 병원 이름이었다.
어쩔 줄을 모르던 하숙집 노파는 전화로 병원을 찾았고, 거기 있다는 소녀 허영숙 양을 불렀다. 전화로 위급을 들은 허 양은 그렇잖아도 궁금하고 걱정되던 차라 주저할 짬도 없이 주사기며 약을 들고 춘원의 하숙에 달려갔다. 방에 들어서니 베개며 요며 방바닥에 각혈한 검붉은 피가 낭자했다. 허 양은 얼른 주사를 놔주고는 방바닥의 피를 친히 훔쳐 내었다. 이리하여 허 양은 그날부터 매일 춘원의 하숙을 찾아와 치료해줄 뿐더러 소제까지 하고 심지어 베갯 닢이며 내의를 빨아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허 양이 공부 때문에 얼마 있지 못하고 가버리던 춘원은, “영英이! 영英이!” 하고 수 없이 부르다가 끝내 대답이 없으면 방안에 남아있을 허 양의 체취라도 맡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허 양의 간호와 치료로 다소 건강을 회복하게 된 춘원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허 양은 극구 만류했으나 그는 듣지 않고 <무정無情>을 끝내려고 그냥 글 쓰다가 또 병석에 쓰러지게 되었다.
게다가 하루는 ‘고다즈’의 연기에 중독되어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허 양이 발견하지 않았던들 춘원은 숨을 걷우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허 양은 춘원의 고향 댁에 연락을 취하려 했다. 그러나 고아로 자라나다시피 했고 고향에 있는 아내 백씨(백혜순白惠順)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을 것이니 고향에 통지한댔자 소용없는 일이라 춘원은 그것을 못하게 했다. 단지 그는,
“이대로 지나면 나는 죽을 것 같소. 서울에 계신 김성수金性洙 씨에게 연락 해주시오.”
하고 말하기에 허 양은 김성수 씨에게 편지를 했다. 며칠 뒤에 곧 김성수 씨로부터 녹용대보탕鹿茸大補湯 백첩과 돈 50원이 송금돼 왔다. 춘원에게 있어서 허 양은 생명의 은인이요, 천사요, ‘베아트리체’ 였다
허 양 역시 춘원을 존경하는 한편 사모思慕의 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허 양은 그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피력披瀝했다.
“ 사모思慕는 하였으나 결혼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는 아내가 있는 사람이요, 폐병자肺病者였으니 누군들 결혼하고 싶었겠어요. 단지 나 아니면 조선이 필요로 하는 그 분이 죽을 것만 같아서 곁에 와주지를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자주 만나게 되니 정이 깊이 들었을 뿐이지요.”
김성수 씨가 보내준 돈으로 춘원은 비로소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으며, 건강도 차츰 회복하게 되었다. 그 무렵에 허 양은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허 양은 출발 전에 춘원을 아다미[열해熱海]로 정양 차 보냈다. 집에서 송금해온 돈 중에서 여비만을 남기고는 나머지의 돈을 춘원에게 몽땅 주었다. 아다미에 같이 가서 숙소까지 정해주고 서울로 돌아갔던 것이다.
=북경北京에서 날아온 전보電報=
서울에 돌아온 허 양은 대학병원 내과에서 일 보게 되었다. 그때의 허 양의 나이는 스물 두 살. 그 당시에는 결혼할 과년한 나이라 결혼문제가 대두되었다.
신랑 후보로서는 같은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닥터 김.
“ 닥터 김은 좋은 분이었어요. 어머니를 비롯하여 집안 어른들이 닥터 김과의 혼담이 있게 되자 혼인이 성사나 된 듯이 기뻐들 했지요.”
허 양도 닥터 김을 존경 할 만 하여 혼담에 응하려 했다. 그러나 쩐지 춘원과의 관계가 마음에 걸렸다. 그뿐만 아니라 닥터 김에게도 춘원과의 관계를 말하고 그래도 결혼할 테냐고 물었다. 닥터 김은 그들이 환자 대 간호인 관계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1주일의 여유를 달라 했다.
그동안 허 양은 동경에 있는 춘원에게 편지를 했다. 약혼하게 된다는 것. 이후부터 춘원을 친 오빠처럼 모시겠다는 것, 이러한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받아본 춘원은 즉시 서울로 달려왔다. 허 양은 닥터 김의 회답을 듣기 전에 춘원을 맞아야만 했다. 당시 춘원은 “무정無情” 다음에 새로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던 “개척자開拓者”의 집필도 중단하고 달려왔던 것이다. 춘원은 역전驛前 와다나베(渡邊) 여관에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닥터 김으로부터 춘원을 친 오빠로 모시겠다는 데에 찬성하고 약혼하자고 제의해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약혼을 기정적旣定的 사실로 알았던 양가兩家는 발끈 뒤집혀지듯 야단이었다. 양반 행세를 하던 양가는 집안 망신이라고 허 양을 몰아세웠다. 그리고 아내 있는 춘원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1주일 간 여관에서 묵던 내성적內省的인 춘원은 속수무책束手無策이어서 체념하듯 했으나, 진취적인 허 양은 춘원더러 도망치자고 제의했다. 중국 북경北京에 있는 ‘나가이 하나꼬(永井花子)’라는 여자가 의사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북경에 오면 수입이 많다고 전에부터 편지가 자주 있어서 그리로 도망치지는 것이다. ‘나가이’는 북경에 오게 되면, 안동安東에서는 어느 여관, 심양瀋陽[봉천奉天]에서는 어느 여관, 산해관山海關에서는 어느 여관에 들려 유留하면서 오라고 친절히 편지로 일러주었다.
허 양은 소작료로 들어온 돈 중에서 2천원을 훔쳐 가지고 춘원과 같이 가족 몰래 북경北京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심양瀋陽에 이르러 ‘나가이’가 알려준 ‘야마도’ 호텔에 들렀더니 친척 오빠인 조종필趙鍾弼 씨가 미리 와서 기다리다가 허 양을 붙잡았다. 분명히 서울을 떠날 때에 서울에 있었던 조 씨가 어떻게 돼서 미리 와 있을까. 나중 알고 보니 ‘나가이’ 편지를 없애지 않았기 때문에 그 편지를 보고 심양을 앞질러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 양은 돌아갈 것을 거부했다. 조 씨는 타일렀다. 어머니를 비롯하여 일가에서는 영숙에 대한 완고한 조처를 후회하고 있다는 것,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청을 들어주겠다는 것, 물론 춘원과의 결혼도 승낙할 것이며, 그것을 자기가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랬건만 허 양은 거부했다. 그러나 춘원은 이를 받아들이자고 우겨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서울에 돌아왔더니 사태는 허 양이 예측한 대로였다. 처자가 있는 춘원과의 결혼을 찬성할 리가 없고, 완고했던 시절이라 춘원의 소설을 음담패설淫談悖說이라 하여 호색가好色家 취급을 했다.
허 양은 집안에 감금당한 몸이 되었으며 춘원은 할 수 없이 여관에서 홀로 고뇌의 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이냐. 서울에 있을 허 양이 북경에서 전보를 쳐온 것이 아닌가. 지금 북경에 먼저 도망쳐왔으니 빨리 와달라는 것이다. 춘원은 부랴부랴 기차로 북경에 달려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북경에서 그들의 사랑의 보금자리는 중국 집의 한 칸을 세 얻어 꾸며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허영숙 씨는 ‘나가이’의 소개로 ‘야마모도’ 병원에 취직하였다.
= 조국祖國을 위해 사랑을 남겨두고 =
그러나 춘원은 사랑에 승리를 하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우선 하던 공부를 끝마쳐야만 했고,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 할 일이 많았다. 아내가 벌어다주는 것으로 방안에 처박혀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허송생활虛送生活할 수는 없었다. 춘원에게는 다시 커다란 고민이 닥쳐오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뒤에 절규되던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의해 젊은이들이 나라에 몸을 받쳐야만 할 때였다. 더구나 당시 중국에서는 5. 4 운동이 일어나 소란하던 때여서 춘원에게 주는 자극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춘원은 고민 끝에 북경 생활 석 달 만에 자기의 포부를 말하고 홀로 북경 생활을 떠날 것을 허영숙에게 피력했다.
“나라를 위해서라 했지만 정말 야속했어요. 세상에 그런 박정薄情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고 무척 원망했지요.”
허영숙은 그때를 회고하며 이러한 술회述懷를 했다.
춘원은 영숙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라는 말 한 마디도 없이 1918년 11월 하순에 사랑하는 영숙을 북경에 남겨둔 채 서울에 돌아왔다. 그때 서울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론民族自決論 에 의해 독립운동이 극비리에 태동胎動되고 있었다. 3. 1 운동을 석 달 앞두고 기독교 측과 천도교 측이 단합이 잘 되지 않음을 보고 계동桂洞 김성수 씨의 집을 중심하여 모의하던 인사들은 기독교 측의 설득說得을 최남선崔南善, 송진우宋鎭禹 씨가 담당하게 했고, 천도교 측의 설득은 춘원과 현상윤玄相允 씨가 맡아 춘원은 최린崔麟을 설복說服시킴으로써 비로소 단합團合케 했던 것이다. 그 길로 춘원은 곧 동경에 달려갔다. 동경에서도 우리 유학생 간에 독립운동이 태동되고 있었다. 조선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웅변대회에서 6백 여명의 유학생을 앞에 놓고 열렬 청년학도들은 민족자결의 열변을 토함으로 해서 일본 경찰의 해산과 체포 등 일대 소란을 야기惹起시켜 정세가 험악해졌다. 이때 뒤로는 ‘재일본在日本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을 조직하고 그 대표로 최팔용崔八鏞, 백관수白寬洙, 윤창석尹昌錫, 이종근李琮根, 김도연金度演, 이광수李光洙, 송계백宋繼白, 서춘徐椿, 김철수金喆壽, 최성우崔誠愚 등이 선출되어 맹활약하게 되었다.
당시 춘원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맡아 지었으며, 그것을 영문英文으로 번역하여 동경에 주재駐在한 각국 대사관에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더 활발하게 또는 광범위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유학생들은 춘원을 선출하여 국제도시國際都市와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상해上海로 극비리에 파견하게 되었다. 상해에서는 각국 공사관에 마음대로 ‘독립선언서’를 배포配布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망명객亡命客들이 있었기 때문에 국내의 독립운동과 호응呼應시키려 했던 것이다.
정양靜養 차 일본 관서關西지방을 여행하는 척 하다가 춘원은 ‘고베(神戶)’에서 화물선貨物船을 타고 상해로 밀항密航하기에 성공했다.
그가 상해에 도착하여 동지들을 만났을 때 국내에서는 3. 1 독립만세 운동이 벌어졌으며 뒤이어 상해에선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미국에 있는 안창호安昌浩 씨를 모셔오게 되었다. 그리고 춘원은 “독립신문獨立新聞” 사장 겸 주필主筆로 활약하는 일방 사료편찬회史料編纂會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를 편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재정난財政難에 허덕이어 굶다시피 하며 주야晝夜로 활약活躍하던 춘원은 자주 각혈咯血을 하게 되었으며 병석에 쓰러지는 때도 많았다.
= 사랑마저 빼앗겨야 하나 =
상해에서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21년 봄이었다. 그때 서울에 돌아와 있던 허영숙許英肅이 ‘대판大阪 조일신문朝日新聞[오사까 아사히 신문]’에 보도된 춘원의 빈사상태瀕死狀態의 기사를 읽고 상해로 가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만주滿洲와 북경北京 지방에 의료시찰단醫療視察團을 파견하게 되자 허영숙은 서울 대학병원에 있는 옛날의 은사恩師 ‘요시끼(吉木)’에게 부탁하여 총독부總督府의 거물巨物 ‘미와(三輪)’ 경부警部에게서 여권旅券을 발급 받음으로서 시찰단에 끼이게 되었다.
허영숙은 천진天津 정거장에서 밤에 몰래 내려 상해로 가는 기차를 바꿔 탔다. 자주 일어나는 비적匪賊과 반란反亂의 진포선津浦線 열차 습격을 받으며 스물 다섯 된 허영숙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상해에 이르기는 했으나 임시정부는 그가 총독부의 여권을 가지고 왔다는 것, 그리고 2천원이라는 거금巨金을 가지고 왔다는 것으로 총독부 스파이로 몰리게 되었다.
허영숙은 상해에 와서 의사 노릇을 하며 남편의 독립운동의 뒷받침을 하려 했으나 사태가 험악해지자 당황하게 되었다. 춘원은 아무 변명 없이 매일 술을 폭음暴飮했다.
허영숙은 상해에서 1주일을 춘원과 같이 유留했으나 사태의 악화惡化를 수습收拾하기 위하여 안창호安昌浩 등은 춘원 몰래 허영숙을 빼돌려 고국에 돌려보내게 되었다. 물론 임시정부의 과격파過激派들도 모르게 감쪽같이 했다. 허영숙은 울며불며 춘원의 전송餞送도 받지 못하고 상해를 눈물로 하직하게 되었다. 이로서 춘원의 고민은 절정絶頂에 이르렀다. 불원천리不遠千里가 아니라 불원만리不遠萬里하고 상해까지 찾아온 애인이 1주알 만에 그것도 스파이 혐의를 받고 울며 떠나간 데에 대하여 미칠 것만 같았다. 아무 일도 손에 붙지 않았으며, 매일 술을 폭음暴飮하여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임시정부의 일부 강경파들이 허영숙을 없애치우자고 하여 안창호는 허영숙을 빼돌려 고국에 돌려보냈지만, 그리고 그동안 사태가 험악한 것을 보고 허영숙은 춘원더러 고국에 같이 돌아가서 농촌에 파묻혀 감자 농사나 짓자고도 말했지만,
“ 내가 두 번 다시 왜놈들의 발꿉 아래에서 살 줄 아오?”
하고 화를 냈던 것도 춘원은 몹시 후회되었다. 함께 고국에 갈 생각은 없었으나 1주일도 못 있고 떠나가는 그에게 왜 화를 내었던가 하고 그는 후회막급後悔莫及이었다.
그러자 몇일 뒤에 춘원에게는 엽서 한 장이 날아들었다. <세상에 당신같이 무정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는 원망에 가득 찬 허영숙의 편지였다. 만주 심양瀋陽에서 부친 것이었다. 그 편지를 받아 읽은 춘원은 더욱 미칠 것만 같았다. 촌시寸時라도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 영英이! 영英이! 나를 원망 말아다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 생명 이상으로 너를 사랑하며 잊지 못하노라. ”
춘원은 미친 사람처럼 방안을 헤매었다. 거리를 헤메었다. 그러다가 그는 아무도 모르게 상해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임시정부의 직원들이 춘원의 책상 설합을 뒤졌을 때 봉천에서 보낸 하영숙의 엽서 한 장만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 편지를 본 여러 사람은 춘원이 봉천에서 하영숙을 만나보고 돌아오리라 믿었다. 국내에 돌아가면 체포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 죽지 않고 돌아온 죄罪? =
춘원도 그러한 생각으로 봉천에 눌러있을 것만 같은 애인을 따라가서 사죄하고, 그리고 앞날을 약속한 뒤에 상해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허영숙이 고국에 돌아가서 농촌에 파묻혀 있자고 말하기 전에 만주나 시베리아로 도망가서 살자고 말했으니 봉천에서 애인을 만나면 만주나 시베리아에 가서 살면서 동포를 위해 일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춘원이 봉천에 기차로 달려갔을 때에는 허영숙은 ‘야마도’ 호텔에서 이미 떠나 고국에 돌아간 뒤였다.
춘원은 만주의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그대로 상해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고국에 몰래 잠복潛伏하여 허영숙을 만나보고 사죄한 뒤에 다시 몰래 상해로 돌아갈 심산으로 국내에 발을 들어 밀게 되었다.
허영숙이 서울에 돌아온 지 며칠 안 되어 형사가 나타나서 지금 춘원이 평북平北 선천宣川에 와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허영숙은 깜짝 놀라면서 그러나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허둥지둥 선천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형사를 따라 어떤 여관에 갔더니 중국복을 입은 춘원은 각혈을 하며 병석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여관에는 형사들이 배치되어 망을 보고 있었다.
“ 조선 동포가 나를 사랑함이 컸던 만큼 내가 잘못함을 볼 때에 나를 미워함도 큰 것이라고 어떤 친구가 위안慰安하는 말을 주었다. 내가 상해에서 죽지 아니하고 돌아온 죄는 면할 수 없는 죄다.”
춘원이 그 뒤 그의 “문단文壇 삼십년三十年을 돌아보며”에서 술회述懷했지만, 그때의 춘원으로서 상해에 그냥 눌러 있을 수가 있었을까. 춘원이 상해에서 죽었다면 그의 문학 작품이 우리 문화의 유산遺産으로 지금 남아있을 수가 있었을까? 누가 이렇게 춘원의 귀국歸國을 심판할 것인가?
그러나 그 당시 춘원의 귀국을 가리켜 조국을 배반한 것이라고 비난이 소나기처럼 퍼부어졌었다. 1921년 11월 13일 부의 ‘동아일보’에,
“이광수李光洙 씨 돌연히 검속檢束. 동경사건東京事件 관계인가?”
라는 타이틀 밑에 체포기사가 보도되었을 때 국내외 인사들은 모두 깜짝 놀랐으며, 한 여자 때문에 조국을 배반했다고 비난이 자못 컸던 것이다. 그만큼 그 시대는 완고頑固하다고 해야 할까. 어떻든 춘원은 경찰에서 석방된 뒤에 1년간을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으며, 허영숙이 총독부에 매수買收되어 이광수를 변절變節시켰다고 비난했다. 허영숙만이 아니라 일개 여자 때문에 변절한 이광수라고 이광수들을 욕들을 했다. =<끝>= [ 女像 ] 196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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