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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해설사 전국 자료실 스크랩 서울시 목탑과 석탑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의성 탑리 오층석탑
하늘빛 추천 0 조회 5 13.09.02 13: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목탑과 석탑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의성 탑리 오층석탑

 

 

 

<의성 탑리오층석탑의 특징-백제의 목탑과전탑의 충실한 번안탑>촬영.글돋선생  

 

 이번 황금 연휴 때 문화재 답사 지역은 경북 의성지역이었다.

신라의 탑 연구에 꼭 봐야 할 탑이  의성군 탑리 오층석탑이다. 이 오층석탑의 주요한 특징이 있다.

 

 1.백제의 목탑을 석탑양식으로 제작된 미륵사지석탑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충실히 번안 소화시킨 탑이다.

 2. 분황사 모전석탑 이후 신라의 목탑과 전탑의 양식을 잘 조화시킨 탑이다.

 3. 경주의 고선사지삼층석탑과 같은 전형기 석탑이다.

 4.  의성 탑리 오층석탑 감실 하대에 信枋石 사용 유일한 구조(경주 고선사지 문비아래도 신방석 사용)

 5. 탑을 조성하기 위해 흙을 돋아서 축토를 한 후에 土築垈위에 탑을 세운 점

 6. 축대에 사용한 호석(護石)용도의 자연석은 성혈이 나와 있는 청동기 시대 암괴들이다.

 이런 점을 비쳐 볼 때 이곳은 청동기 시기에도 성서로운 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주는 위쪽이 아래쪽보다 좁은 일종의 엔타시스(배흘림)형태이며, 기둥위에는 주두(柱頭)가 조각되어 있어 목조건축의 수법을 엿볼 수 있다. 2층 옥신석부터는 네 면마다 탱주를 두었다. 옥개석(屋蓋石)은 그 형태가 벽돌로 쌓아올린 전탑(塼塔)처럼 낙수면과 받침에 층단을 나타내었는데, 낙수면의 층단은 모두 6단이며, 층급받침은 초층이 4단이고 2층부터는 5단이다. 추녀는 목조건물처럼 네 귀퉁이가 살짝 반전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이 탑은 옥개석의 상·하면에서 전탑의 양식을 응용하는 한편, 우주의 형태와 주두, 옥개석 추녀의 반전 등에서 목조건축의 수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의성군 탑리는 면소재지 지명이다. 얼마나 의성의 오층석탑이 마을에 중요한 자리매김하고 있나를 단적으로 보여준 지명고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일제시대 초에(大正15년) 탑을 중수위원회가 발족되어 탑을 정비하였던 기록을 일층 탑신부에 새겨 놓아 탑 원형을 훼손하는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이층 기단부에 "고누" 양식을 새겨 놀았던 낙서 또한 보여 결과적을 훼손된 흔적들이 보였다  

 

 신라의 석탑에 관해서 박경식(단국대교수)가 잘 정리한 내용 중 의성군 탑리 오층석탑은 백제의 목탑을 석탑양식으로 석재로 충실히 옮긴후 이를 잘 번안하여 잘 소화시킨 석탑이 탑리오층석탑이고 하였다. 박교수의 석탑에 관한 이해를 소개해 보자,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 발생국인 백제는 중국의 목탑양식을 충실히 석재로 옮겨 미륵사지석탑과 정림사지오층석탑을 건립하였으며, 신라는 목탑과 전탑의 양식을 충실히 번안하여 善德王 3년(634)에 분황사 모전석탑을 조성하면서 우리나라 塔婆史의 一章을 열었다. 이후 한국 석탑의 전형양식을 창출한 신라는 목탑과 전탑의 양식을 잘 소화 정리하여 7C 전반기에 이르러 의성 탑리오층석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같은 類의 석탑은 모두 한국석탑의 始原樣式으로서 통일후 형성된 전형석탑의 조형이 되고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정치 사회적인 통일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까지도 포함하는 전체적인 통일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석탑문화를 발생시키게 되었다. 통일후 신라에 의해 건립된 석탑은 감은사지동·서삼층석탑, 고선사지삼층석탑, 나원리오층석탑으로 이를 典型期의 석탑이라 부르고 있는 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양식상의 공통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① 기단은 상·하 2층기단으로 하층기단에는 3주의 撑柱(탱주)와 兩 隅柱(우주)가 각각 별석으로 조립되고 있으며 갑석 하면에는 角形(각형) 1단의 副椽(부자재 서까래)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초층탑신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② 탑신석은 양 우주를 별석으로 놓았고, 각 1매 판석으로 네벽을 이루고 있다.
③ 8매로 구성된 屋蓋石(옥개석)은 완만한 낙수면을 보이고 있으며, 상면에 角形 2단의 탑신괴임이 하면에 角形 5단의 옥개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④ 대부분의 석탑은 露盤(노반) 이외에는 상륜부를 결실했는데, 감은사지동·서삼층석탑은 철제찰주를 남기고 있다.
이처럼 공통된 양식을 구비한 전형석탑에 이어서 8세기 중반에 이르러 定型樣式의 석탑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定型期의 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이 계열의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전반에 걸쳐 건립된 모든 석탑을 일컫는 말로써 불국사삼층석탑(석가탑)을 가장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의성 탑리 오층석탑으로 본 통일신라 석탑 양식

이중기단

.가구식기단에 탑구 설치

. 백제 미륵사탑, 일본 법륭사의 기단(초기적 2중기단을 보인다)-초기 이중기단의 예

.수직력이 떨어지는 취약점이 있지만 이중기단을 쓴 이유는 가람에서 탑의 점유면적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

상하층 기단의 결구방식

.하층은 ㄴ자형 귀틀석사용, 백제탑에는 보이지않고 오직 신라에서 처음 사용한 점이 주목된다

.상층은 판석형 결구법(아이자형 나비장 사용)

.몰딩의 사용과 초층탑신 결구법

.상하층 갑석에는 각형과 호형,탑신받침에는 각형2단을 사용하였다

.초층탑신 결구법은 정림사탑과 동일한 방식을 썼다. (백제 양식을 차용)

.의성 탑리 오층석탑 감실 하대에 信枋石 사용 유일한 구조

.하대에 심방석(문비아래 받침석)의 사용(경주 고선사 탑의 초층문비와 함께 유일한 구조)

.2층탑신부 부터는 엇물림식 결구법을 사용함

 

 

 의성군 탑리에 있는 오층석탑-옆에 초등학교가 보인다. 흙을 돋아 축대를 쌓아 탑을 조성한 것이 특이하며, 호석을 둘레에 쌓았다

 

 

경주 "길벚 문화재 탐사회원들" -이 번 탐사지는 의성 군 문화재 탐사

 

 

목탑과 전탑(벽돌탑)의 유형을 잘 느끼게 해주며, 고선사지탑과 분황사 탑의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라 典型期전형기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土築臺 위에 세운 오층석탑, 축대에 호석(보호석)을 배치해 놓고 있다. 이 호석에 성혈(청동기시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 청동기 시대에 이곳이 성서로운 곳이라고 생각되어졌다

 

옥개석 받침대 우주의 기둥 頭柱가 있다, 목탑의 형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후 석탑엔  옥개석 우주 받침석 보이지 않는다. 목탑 형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형식이다 

 

 우주는 위쪽이 아래쪽보다 좁은 일종의 엔타시스(배흘림)형태이며, 기둥위에는 주두(柱頭)가 조각되어 있어 목조건축의 수법을 엿볼 수 있다. 2층 옥신석부터는 네 면마다 탱주를 두었다. 옥개석(屋蓋石)은 그 형태가 벽돌로 쌓아올린 전탑(塼塔)처럼 낙수면과 받침에 층단을 나타내었는데, 낙수면의 층단은 모두 6단이며, 층급받침은 초층이 4단이고 2층부터는 5단이다. 추녀는 목조건물처럼 네 귀퉁이가 살짝 반전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옥개석도 결구법이 이용되어있다. 

옥개석 각형 5단이 조출되어 있다

 

 

감실이 있다. 원래 안쪽엔 문이 있었던 자리가 있지만 지금은 소실, 문틀 하대에 신방석의 사용(고신사지 삼층석탑에도보임)한 형식은 현재 유일한 구조이다 . 신방석 양옆에 조출된 받침이 특이하다

 

석문이 안쪽으로 개폐장치가 되어있기 때문에 감실 부처의 크기는 형태는 반부조형태이거나 뒷면에 위치하고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양 우주의 기둥은 민흘림 기둥형태로 약간 위쪽이 쫍고 아래로 올 수록 너비가 커진다. 시각과 무게 중심에서 오는 비례감을 이용한 법칙? 

 

 

 

 

 

 

일층 탑신 뒷면 새겨진 "대정15년(1926년)6월 석탑보존회 일본인과 유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보존이 아니라 훼손회랄 명칭이 맞을 것 같다  

 

  대정이란 연호(메이지 일왕의 아들)를 해방 후 삭제한 흔적이 있다

  일본인 이름이 보인다.

 有村正稚란 일본명도 보이네

 

 

 

 

 

 

호석에 성혈의 흔적이 보인다(청동기 시대 흔적) 

 

탑 옆에 솟아 있는 십자가 뾰족탑, 불교와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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