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제주시 삼양1동
시대 ; 조선
유형 ; 어로유적
삼양1동 속칭 서흘개 마을 공동어로집단은 동동네와 섯동네로 나누고 동네마다 전용포구를 갖고 있다.
섯동네 갯가에 있는 포구를 앞개 또는 앞개성창(城滄)이라고 한다.
앞개의 입지 조건을 보면 앞개성창은 포구 북동쪽에 있는 고지콪이라는 곶부리를 의지하여 자리잡았다.
고지콪은 북동풍을 막아준다.
고지콪과 백사장(남서쪽)으로 외성(外城)을 쌓아 포구를 축조해 놓고
다시 그 안에 남북으로 성을 쌓아 포구를 나눴다.
포구 입구에 있는 공간을 밖개(外浦) 그 안에 있는 포구를 안개(內浦)라 한다.
포구는 조간대 수직선상으로 볼 때 상층에 위치한다.
썰물인 때는 바닥을 드러낸다. 출어하기 위해서는 포구 바닥이 드러나기 전에
배를 보다 수심이 깊은 포구 밖 연안 '우무수'로 옮겨 대기해야 하는 불편이 있다.
그러나 포구 안에는 해안선을 따라 '닭통'·'엉덕물'·'큰물'·'서쪽물'·'샛다리물' 등 단물이 솟아
이 포구에 정박하는 배들은 '소'라는 선식충(船食蟲)의 피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혹 선식충이 번식하고 있는 배일지라도 이 포구에 일부일만 정박하면 '소'들은 저절로 죽어버린다.
포구의 출입구는 서쪽에 나 있다.
그 앞에는 '작은지충여'·'큰지충여'·'벌러진여' 등의 수중암초가 있어
배의 출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나 썰물 동안에는 서풍을 막아주는 구실도 한다.
이 포구에 정박하는 배들은 그 암초들을 피하며 출입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즉, 인근 연안의 특정 물체(전봇대·집·돌출바위 등)를 이용하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가며 항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현재의 포구는 1924년(甲子)에 개수했다.
촌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지금의 외항(밖개)은 바로 그 때에 축조되었다 한다.
이를 기념하여 포구가에 다음 내용의 '개수기념비'를 세웠다.
전면 ; 都監督 李晩烈, 發起人 金在涉, 監督 金萬澤 夫錫祚 金元伯, 兼理事 高大吉
우측면 ; 斯港改修 而誰敦治 衆力共之 五監在玆
후면 ; 洞首 宋儀奉 區長 高信千 公員 李晩行 安彭祚 二區洞首 姜達銑 區長 愼雨錫 庶務 文鳳昊
좌측면 ; 甲子五月五日三陽一洞
성창 끝에는 비석이 하나 있으나 글자가 완전히 마모되어 내용을 알 수 없다.
추정컨대 도대불 설치를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로 보인다.
첫댓글 현 다음지도상에는 가름성창이라는 곳 외항에 비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