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Kazak이야기(2)>
Good morning 36!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 갈 때 살아남는 방법은 물을 거슬러 오르려 함이 아니고 물살을 따라 떠내려가며 헤쳐 나오는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물 흐르듯이 순리대로 산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지만 가끔씩 이런 말들이 생각나고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6월의 첫 날입니다. 세월 참 빠르네요.
아주 가끔씩은 내가 가족들로부터 소외 돼 가고 있다는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전엔 모든 주도권을 내가 쥐고 또 결정을 독단적으로 했지만 요즘 보니 결정들은 저희들이 다 해놓고 "아버지, 이렇게 이렇게 하기로했으니 그리 아세요" 한 다든가 "아버지, 오는 토요일 어디 어디에서 가족들 점심먹기로 했으니 시간 내세요!" 합니다. 또 내가 잘 모르겠어서 물어보면 아, 어머니는 아시고 있으니 어머니께 물어 보세요. 합니다.
중국 고사에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연의 순리로 알고 너무 외롬 타지 말고 또 성질내지 말자고 스스로를 달래며 살고 있습니다^^~ 다들 그러고 사시나요? 아님 나만 이러고 살고 있나요? 좀 과장되이 표현했지만 앞으로 갈 수록 더 해질거라는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아버지, 틈 나실 때 유럽 동반여행 다녀 오세요! 하는 말은 저희들이 경빌 대겠다는 얘기겠지 나 보고 당신 돈 있음 다녀 오세요, 는 아니겠지요?^^
지난번에 이어서 카작얘기나 하렵니다. 좋은 시간 들 되세요! / Hav e a good time!
'흐르는 강물처럼' <Kazak이야기(2)>
샤샤는 중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한 한의사입니다. 특히 지압과 침술에 뛰어난 일가견이 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고려인중에 누가 아프다하면 찾아가서 치료를 해주곤 했습니다. 샤샤의 장인, 그러니까 샤샤의 부인인 이라(Ira)의 아버지는 카자흐스탄 퇴역 육군 대령입니다. 아띠라우의 고려인중에서는 보기 드문 고위직이었고 또 아띠라우 지역사회 여러 계층에 두루 발이 넓었습니다. 저도 이런저런 일로 아띠라우에 체류하는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샤샤네는 아띠라우 근교에 꽤 큰 다차(Dacha)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다차란 주말농장이라고 할 수도 있고 별장구실도 하고 아무튼 시내에서 좀 떨어진 조용한곳에 주택이 딸린 농장입니다. 그들은 가끔씩 고려인들을 그곳으로 초대해서 파티를 열었는데 그럴 때면 저도 가서 샤스릭(Shashrick)요리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샤스릭이란 쉽게 설명해서 양고기 고치구이인데 실제는 양, 소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닭고기로도 샤스릭을 만들어 먹습니다. 저는 그 당시 언제고 한국에 돌아가면 샤스릭식당을 해 볼 거라고 틈틈이 스텐레스 스틸 꼬챙이를 사이즈별로 사 모아 갖고 들어왔고 틈틈이 각 고기별로의 레시피를 만들었습니다. 샤스릭 만드는 방법과 샤샤와 누디밀라집사님 얘기는 잠시 미루고 아띠라우 고려인들 얘길 먼저 조금 하렵니다.
'아따라우'는 우리 한인들의 또 다른 한의 역사가 서려있는 가슴 뭉클한 사연이 있는 도시입니다. 아띠라우에는 스탈린에 의해서 강제로 이곳에 이주해 온 고려인들이 1세대에서 4세대까지 해서 모두 약 3,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멀리 1937년에 스탈린은 여러 이유(두드러진 이유는 한인을 일본의 스파이로 본 것입니다)를 내 세워서 그 당시 "원동" "브라딕 보스톡"에 살던 우리 동포들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의 동토의 땅으로 강제로 이주 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추운겨울에 한 달 동안이나 화물기차칸에서 이리 저리 부딪치며 이곳까지 와서 황량한 벌판에 내 던져졌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초기에 거처 할 곳이 없어서 언 땅을 파서 움막을 치고 그 속에서 살았다고도 했습니다. 아띠라우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치카로프(Chkalov)"라는 작은 촌락이 있고 그 당시 그들이 살던 땅속 움막자리가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아띠라우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찾아 나선 곳이 치가로프였습니다. 그곳에는 82세 되신 고려인 황금심 할머니께서 혼자 살고 계셨는데 저는 현장일이 바빠지기 전 꽤 오랫동안은 격주로 일요일 예배가 끝나자마자 황 할머니를 뵈러 치카로프를 갔었습니다. 갈 때마다 할머니께서는 제 점심 밥상을 차려주셨는데 상위에는 하얀 쌀밥과 텃밭에서 갓 따오신 상추와 실파가 올라오곤 했습니다. 저는 상추바닥에 실파를 깔고 그 위에 밥을 한 숟갈 얹고 한국에서 갖고 간 고추장으로 간을 맞춰서 크게 한줌 쌈을 싸서 입에 넣었던 그때 그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따라우에 처음 도착했던 그 해 5월 어느 날 고려인들이 치가로프를 단체로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도 그분들 틈에 끼어 대절버스를 타고 보은의 방문단으로 치카로프로 갔습니다. 초등학교 교문 앞에는 카작 동네 원주민들이 길게 늘어서서 고려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버스에서 고려인들이 내리자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는 묘한 해후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학교에서 가까운 땅속 움막터를 둘러보며 옛 이야기들을 나눴고 다시 학교 강당으로 자리를 옮겨 즐거운 춤. 노래판을 벌렸습니다. 강당 가운데는 길게 식탁이 차려져있었고 그 위에는 정갈해 보이고 종류가 다양한 음식들이 잘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작은 학교 학예회처럼 환영사와 답사를 주고받으며 그간 두 민족간의 격조함을 공식적으로 달랜 후 술과 음식을 나누며 노래도 돌아가면서 했습니다. 그 당시 강제 이주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을 달리했고 그 후 20년 동안은 교육도 못 받고 군대도 못가고 참으로 힘든 인고의 세월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고려인들은 그래도 원래 유목민족인 카자흐스탄 원주민들의 따뜻한 인정에 도움 받아 살아남았다는 말씀들을 하곤 했습니다.
황 할머니께서는 오랫동안 신장이 안 좋아서 고생하셨는데 제가 귀국하고 나서 얼마 후에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제가, 할머니, 저하고 같이 병원에 가시죠! 하면, 일 없으니 그냥 내가 말한 약만 사다 달라고 매번 그러셨습니다. 그 약이라는 것이 무슨 신장에 좋다고 알려진 꼭 현미녹차같이 티백에 들어있는 차였는데 할머니께서는 고집스럽게도 매번 그 차만 사다 달라고 하셨다. - 다음에 -
첫댓글 어쩜 우리집 이야기를 그리도 잘아시나요.
집집마다 사는게 다 그런가 봅니다.ㅋㅋㅋ
박형 알현 한지가 오래돼서 얼굴모습이 아련 하네요. 언제 한 번 봐야 할텐데...
좋은 날 되세요!
이름 석자만 나와도 반갑다. 그렇게,그렇게 살면서 세월을 즐겨야 하지 않겠니 !
너무,오랜 시간 연락을 못 한것같다. 어쩌다 보니,그렇게 되엇구나,자주 연락 이나하자.~~~
석준아, 오랜만이다. 다 내 잘못이지. 그저 건강관리 하면서 잘 지내라. 그러다 보면 자주 볼 때가 더 많을거야.
난 요새 문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