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환상과 직관의 시인 오장환
장 세 련(동화작가)
카페글올리기 1m용량초과로 원고만 개재,사진 미개재 -(울산문학 제74호 참조 )
향기를 품은 사람이 있다. 드물긴 하지만 그런 사람의 향기를 찾아가는 길
은 기대로 가득하다. 지고 나면 그만인 꽃향기를 찾아가는 일만 해도 신이 나
는 일이다. 하물며 죽어 시간의 저편으로 멀어진 뒤에도 향기를 풍기는 사람
의 자취를 찾아가는 일이니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꽤 먼 곳에서 풍기는 향
기를 벌 나비만 좇는 게 아니다. 사람의 향기야말로 꽃향기보다 멀리까지 가
는 향기다. 태평양이나 대서양 같은 대양을 건너기도 하고, 지척에서 풍기기
도 하는 것이 사람의 향기다.
만리향은 만 리까지, 천리향은 천 리까지 향기가 풍긴대서 붙여진 이름의 꽃
이다. 딱히 물리적인 거리를 잴 수는 없지만 향기가 멀리까지 가는 꽃이란 건
알 수 있다. 모두 후각으로 느끼는 향기다. 그런 향기를 마음으로 느낄 수도
있다. 사람의 향기가 그렇다. 품격이나 인격이 풍기는 향기로 꽃향기와는 사
뭇 다르다. 지고 나면 그뿐인 꽃과 달리 오래 전에 가고 없어도 후세에까지 길
이 남는 향기가 사람의 향기다.
이름만 들어도 그립고 설레는 사람이 있다. 삶의 방식이나 명성과는 관계가
없다. 인품이나 정서가 풍기는 향기를 가진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굳이 건축물로 만들어진 문학관을 갖지 못하더라도, 독자
들의 가슴에 은은한 그리움은 되어야 할 텐데,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초
조함을 달랠 겸 아쉬운 대로 들른 곳은 오장환 문학관이다. 문학의 향기를 흩
뿌리고 간 선배문인을 찾아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므로,
울타리에 가려서
아침 햇볕 보이지 않네
해바라기는
해를 보려고
키가 자란다
- 해바라기 -
문학관으로 들어서는 골목의 담장에 그려진 시화가 눈길을 끈다. 낮은 담장에 그려진
샛노란 해바라기 꽃잎이 건강해 보인다. 이 골목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뛰어놀았을 시인의 어린 시절이 그려진다.
시골의 한적한 풍경과 걸맞은 시화는 그대로 평화다.
길에 떨어진 조개껍질에서 바다의 생동감을 느끼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바다라곤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내륙에 살면서 그런 감정을 갖기는 더욱어렵다. 이런 면에서 오장환 시인은 남다른 감성의 소유자였다. 어쩌면 바다를 보기 힘든 내륙 생활이 시인 나름의 새로운 바다를 만들고 그것이 시로 탄생되었을 것이다. 시인에게 붙은 이름 ‘아름다운 환상과 직관의 시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 감성을 유추하고도 남을 만하다.
시인 오장환은 월북문인이다. 1988년은 오장환이 당당하게 시인으로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다시 올리게 된 해다. 광복 후 40여 년간 이름조차 거론할 수 없었다가 그 해에 무더기로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덕분이다. 이때부터 오장환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된다. 그 결과 오장환 전집을 비롯하여 평론, 시집 등이 속속 발간된다. 더불어 초창기의 시와 동시는 물론 장편시 등
의 자료들도 발견되어 한국시 문단의 새로운 조명을 받기도 한다. 해금조치로독자들은 시인의 섬세하고 서정적인 작품들을 마음 놓고 만나게 된 것이다.
충북 보은군 회인면 회인로5길 12. 오장환 문학관의 현주소다. 시인이 태어나 열 살 때까지 살았던 고향집이 있는 곳이다. 생가 터를 중심으로 2006년에건립된 문학관은 뒤쪽으로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서 유달리 아늑하게 느껴진다. 비교적 너른 터에 펜션처럼 예쁘게 건립된 문학관은 겉모습부터 아기자기하다. 널따란 마당에서는 웬만한 규모의 문학행사는 개최할 수 있을 것
같다.
나하고 분이하고
못 쓰는 종이로
비행기를 접는다
우리우리 비행기는
푸릉푸릉 날아갈 테지
그리고
하늘나라 별아기를
태우고 올 테지
- 종이비행기 -
종이비행기를 타고서라도 다른 세상으로 날아보고 싶은 시인의 꿈이 드러난 동시 역시 문학관으로 가는 골목을 그림과 함께 장식하고 있다. 오장환은 가멸은 집안의 도령으로 성장한다. 그렇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보니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런 갑갑함을 시인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발전시킨다. 뿐만 아니라 고개를 넘어서 오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서 묵어갈 때마다 세상의 소식들을 접한 것도 자유시를 쓰게 된 동기의 발판이 된다.
유년기의 시인은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까칠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이미지는 귀염성 있게 생긴 용모 덕분에 진솔한 성품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말수가 적은 대신 사색하는 시간을 늘려서 얻은 감성들을 오롯이 시로 풀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꿈은 많지만 말수가 적어 조용한 소년기를 고향에서 보낸 시인이 고향을 떠난 것은 1931년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집을 떠
난 뒤 그 학교에서 정지용 시인을 만나 시를 배우게 된다.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시심을 키우고, 교지 《휘문》을 만드는 일에도 적극 참여한다. 1933년에 발간된 교지 임시호에 시인의 첫 작품인 시 두 편이 실려 있다. 「아침」과「화염」이다. 이후 《시인부락》, 《낭만》, 《자오선》등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왕성한 필력을 과시한다. 이 시기에 발표한 시집 『성벽』과 『헌사』는 많은 문인들과 독자들의 찬사를 받는다. ‘시단의 새로운 왕이 나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을 정도다.
시인은 병상에서 해방을 맞는다. 「병든 서울」은 해방의 기쁨을 감격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해방기념조선문학상’의 최종후보에 오를 만큼 문학성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석탑의 노래」는 1947년 중학교 5․6학년 국어교과서에도 수록된다. 이렇듯 활발한 문학활동을 전개하던 시인이 월북문인이 된 것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테러가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바람에 몸을 심하게 다친 시인은 북한과 소련에서 지병 치료에 골몰한다. 그 후 소련기행시집인 『붉은기』를 마지막으로 발표한 뒤 한국전쟁 중 사망한다. 전쟁 중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 사망원인이다.
시인의 생가는 문학관의 오른쪽에 복원되었다. 이곳에서는 방문객들에게 떡이나 군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 계절에 맞는 다양한 농작물로 만든 간단한간식을 제공한다. 모두가 직접 재배한 것들이다. 시골집 아궁이에서 갓 구워낸 군고구마, 가마솥에 약간 눋도록 찐 고구마, 명절이나 행사 때 남은 떡을냉동시켰다가 싸리채반에 쪄서 내는 떡 맛은 아늑한 주위 풍경과 더불어 미각
과 시각을 함께 만족시킨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게 되는 것은 정겨움 때문이다. 출출할 때 먹게 되면 고마움이 저절로 생겨나는 먹을거리가 아닐 수 없다. 오가는 나그네들이 누구나 마음 편하게 쉬어갔다는 시인의 집. 그들의 출출한 배를 채워주었을 베풂의 삶이 고스란히 읽히는 간식의 맛은 입안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달큰한 고향의 향기로 채운다.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오장환 시인. 시인의 업적은 결코 나이로 평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짧은 생애에 비해 많이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이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문학관을 들어서면 시인이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밀랍으로 만든 실물크기의 인형.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워낙젊은 나이의 모습이라 보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도 하고, 요절한 시인이란
자각에 안타깝게도 한다.
전시실에는 다양한 자료들이 망라되어 있다. 휘문고 교지 《휘문》에 실린 초기 시는 물론 방정환 선생이 만든 《어린이》잡지와 《조선일보》등에 발표한 오장환 시인의 동시가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이육사 시인에게 보낸 친필 엽서와 해방 후 중학교 5․6학년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도 온전하게 만날 수 있다.
시인의 문학친구들의 면면이 특히 눈길을 끈다. 스승인 정지용 시인을 비롯해서 박두진, 이중섭, 이육사, 서정주, 김광균과의 문학세계가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오장환시인은 이들과 인간적으로도 매우 두터운 관계를 유지했지만 문학적인 벗으로서도 아주 가깝게 지냈다. 덕분에 굳이 그들의 문학관을당장 가볼 수 없더라도 그들의 문학세계를 잠시라도 엿볼 수 있는 호사도 누
릴 수 있다.
동화적 상상으로 읊은 동시들도 여러 편이 전시되어 있다. 시인의 동시들을 읽고 있노라면 시인의 혈기왕성한 나이 때가 일제강점기였다는 사실이 언뜻믿기지 않을 정도다. 일제의 핍박과 탄압 속에서도 그처럼 맑은 동심을 지켜냈다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라가 짓밟히는 와중에도 시의 그물이나 짜고 있었다는 걸 비난해야 할지, 그런 와중에도 자신이 지닌 감성을 잃지 않
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할지 잠시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쩌랴. 나라를 빼앗겼다고 스스로의 감성까지 억누르며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것만이 바른 삶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에서도 민족성을 잃지 않은 우리민족의 혼처럼 자신의 본질을 지켜내려는 의지가 아름다운 동심으로 표현되었으리라.
영상실에는 해설이 있는 시집도 마련되어 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정지용 시인과의 만남과, 병에 걸려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영상관이다. 이곳에서는 시인의 대표 시12편을 해설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여유도 누릴 수 있다.
문학사랑방에서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방문을 언제든 환영하고 있다. 시 강좌를 듣고 시를 토론하는 공간이다. 문학세미나도 열리며 문학동아리 활동을 도와 회원들에게 빌려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오장환문학관에서는 다양한 행사들을 펼치고 있다. 해마다 개최하는 ‘오장환문학제’가 대표적이다. 1996년에 시작한 오장환문학제는 매년 기념행사에 이어 백일장을 열어 인근지역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다. 이 행사를 기점으로 보은을 새로운 문향으로 채울 문인이 나올 거란 기대로 문학관을 나오면서 오장환시인의 시 「나의 노래」 탁본 대열에 줄을 선다. 과연 나는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줄을 서노라면 스스로의 삶을 반추해보는시간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