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해평윤씨】 시조는 고려시대 고종 ․원종을 섬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 공부판사(工部判事) 군정(君正)이다.
군정의 증손대에서 문영공파(文英公派:之賢)와 충간공파(忠簡公派:之彪)의 양파로 갈라진다. 해평윤씨가 배출한 조선의 상신 6명, 문형 3명 중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은보(殷輔)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승훈(承勳)만이 문영공파에 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충간공파에서 나왔다.
충간공파에서도 선조 때 영의정 두수(斗壽)의 후손인 오음공파(梧陰公派)와, 그의 아우로 선조 때 대제학을 지낸 근수(根壽)의 후손인 월정공파(月汀公派)의 양파가 번창하여, 후손이 해평윤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두수의 다섯 아들 방(昉) ․흔(昕) ․휘(暉) ․훤(暄) ․오(旿) 등이 모두 등제 현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방이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냄으로써 부자 영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방은 도승지 ․한성판윤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에 반대하여 은퇴하였으며, 인조반정으로 예조판서에 등용,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흔은 우승지를 지내고 계축옥사로 파직되었다가, 역시 인조반정 뒤 예조참판 ․중추부지사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휘는 인조를 호종, 적진을 왕래하면서 화의를 교섭하였고, 뒤에 형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고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또 훤은 병조판서, 오는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오음공파에서 뛰어난 인물을 살펴보면, 치천공파(稚川公派)인 방의 아들 이지(履之)가 돈령부판사, 신지(新之)가 선조의 부마로 시 ․서 ․화에 능하였다. 신지의 아들 지
(墀)가 이조참판, 지의 5세손 명렬(命烈)도 이조참판, 명렬의 아들 치희(致羲)가 이조판서, 치희의 아들 용선(容善)이 한말 총리대신인 의정(議政)을 지냈다. 치희의 조카 의선(宜善)은 순조의 부마, 이지의 6세손 홍렬(弘烈)이 판서를 지냈다. 장주공파(長洲公派)인 휘(暉)의 손자 계(堦 )와 계의 아들 세기(世紀)가 다같이 병조판서를 지냈다. 세기의 5세손치용(致容)은 공조판서, 그의 아우 치정(致定)은 이조판서, 치용의 아들 우선(宇善)도 이조판서를 지냈다.
계의 손자 급(汲)도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글씨에 뛰어나 윤상서체(尹尙書體)를 이룩하였다. 급의 종손 시동( 東)은 정조 때 각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백사공파(白沙公派)인 훤의 아들 순지(順之)는 예조판서 ․대제학, 훤의 증손 유(游)는 이조판서, 순(淳)은 이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을 지냈다. 근수는 선조 때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오르고, 부제학 ․대사헌 ․형조판서 ․양관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한편 문영공파의 인물로는 은보가 영의정, 은보의 종손 승길(承吉)이 찬성, 그의 아우 승훈(承勳)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근세인물로는 윤비(尹妃:純宗妃)가 영의정 방의 후손이고, 치호(致昊)는 흔의 8세손이다. 그의 아버지 웅렬(雄烈)은 한말에 군부대신이었다.
5)【칠원윤씨】 시조는 신라 때 태자태사(太子太師) 시영(始榮)이며, 그의 후손 수(秀)는 고려 충렬왕 때 군부판서(軍簿判書)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을 지냈다. 수의 증손 저(抵)는 태조의 잠저시부터 시종한 인연으로 상장군이 되고 제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 3등에 책록, 찬성사가 되었다. 수의 6세손 석보(碩輔)는 옥당(玉堂) ․직제학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의 아들 풍형(豊亨)은 관찰사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석보의 증손 탁연(卓然)은 명종 때 춘추관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옥당 ․3도관찰사 ․형조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선조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칠계군(漆溪君)에 봉해졌다. 수의 14세손 지술(志述)은 숙종 때 유생으로 신임사화에서 화를 입었으며, 임창(任敞) ․이의연(李義淵)과 함께 3포의(三布衣)로 일컬어졌다.
6)【무송윤씨】 시조는 고려시대 보승낭장(保勝郞將)으로 호장(戶長)을 지낸 양비(良庇)이다. 그의 증손 택(澤)은 정당문학 ․첨의찬성사를 지냈고, 택의 손자 소종(紹宗)은 조선시대 병조전서(兵曹典書)로 《고려사》 편찬에 참여,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소종의 아들
회(淮)는 세종 때 병조판서 ․대제학을 지냈는데 주호(酒豪)로 유명하였고, 그의 손자 자운(子雲)은 우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또 자운의 5세손 형(泂)은 선조 때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호조판서 ․중추부판사를 역임하였다.
7)【해남윤씨】 시조는 존부(存富)이며, 후손 구(衢)가 중종 때 호당에 뽑히고 사성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의중(毅中)이 대사헌 ․대사간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의중의 손자 선도(善道)는 시조(時調)의 대가로 유명하며, 한성서윤 ․예조참의 ․중추부첨지사 등을 역임하였고, 남인의 거두로서 예송(禮訟) 때는 송시열(宋時烈) 등과 대립하였다. 선도의 증손 두서(斗緖)는 숙종 때 화백으로서 심사정(沈師正) ․정선(鄭敾)과 함께 3재(三齋)로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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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해주윤씨】는 서흥윤씨(瑞興尹氏)라고도 하며, 시조는 세종 때 중추부지사를 지낸 중부 (重富)이다. 아들 희평(熙平)은 연산군 때 무과에 급제, 공조판서 ․중추부지사를 지냈다.
9)【영천윤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호장 절생(切生)이다.
영천윤씨의 인물로는 태종 때 군수 순(淳), 성종 때의 이조참의 긍(兢), 선조 때 중추부참지 사 빙(聘) 등이 있다.
10) 예천윤씨】의 시조는 추밀원부사를 지내고 증례빈시소윤(贈禮賓寺少尹)인 충(忠)이다.
증손 상(祥)은 태조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 ․예문관제학 ․성균관박사를 지냈으며, 성리학과 역학(易學)에 밝아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11) 양주윤씨】
양주윤씨(楊洲尹氏)의 시조는 고려에서 도첨의 정승을 역임한 윤숭(尹 崇)이다.
그의 선계는 문헌이 실전되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양주에 정착한 사족(士族)으로 전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양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으며, 숭의 아들 덕방(德方)이 판전의사사를 역임했으며, 손자 수(壽)가 조선에서 만호(萬戶)를 역임하였고, 증손 기(期)는 주부를 지내 가문의 전통을 세웠다.
그외 6세손 장(璋)이 성종때 식년문과에 병로과로 급제하여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며,
10세손 안국(安國)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부승지,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홍국(弘國)은 병조 좌랑으로 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5. 尹字의 解說
윤(尹)자를 성(姓)으로 사용하는 윤문의 후손으로서 윤(尹)자가 갖는 참뜻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옛날의 한한 대사전에 의하면 윤(尹)자는 원래 또 우(又)자와 삐칠 별(丿)자를 합쳐서 만들어진 문자(文字)로서 모든 사물을 손에 잡고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한편 또 우(又)자는 다시 우 또는 용서할 우라고도 하는데 옛날 중국(中國)의 고대(古代)에 있던 사기(史記) 및 공자세가에 전해져오는 글자로서 원래는 이런 모양으로 형성되었다고 하며 삐칠 별(丿)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키는 한자의 변으로서 삐칠 변이라고 하는데 이 두 글자를 합치면 윤(尹)자가 되는 것이며 이 두 글자를 합친 복합적인 뜻은 사물(事物)을 손에 꼭 쥐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윤(尹)자를 가리켜서 다스릴 윤(治也), 바를 윤(正), 벼슬이름 윤(官名), 성실한 윤(誠信), 믿을 윤(信), 성윤(姓)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며 윤(尹)자는 이처럼 서로의 믿음을 주고 올바른 바탕 위에서 사물(事物)을 지배하는 뜻을 지닌 자(字)로서 옛날 고대중국(古代中國)의 고서(古書) 사람이 성씨(姓氏)와 높은 벼슬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윤(尹)자와 비슷한 자로서 윤(尹)자에 다른 자획을 붙여서 한글자가 된 이(伊)자와 군(君)자가 있는데 이(伊)자는 사람인(人)자와 성윤(尹)를 합쳐서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성인(聖人)이라는 뜻을 가진자(字)이며 군(君)자에 대하여는 윤(尹)자와 입구(口)자를 합친 자로서 만백성을 다스린다는 권좌(權座) 인격으로써 천자(天子), 군주(君主), 제왕(帝王)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래서 옛날 은나라에서는 탕왕(湯王)의 정승(政丞)으로 천하(天下)를 잘 다스렸다는 이윤(伊尹)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서전(書傳)에는 이윤(伊尹)이 지었다는 이훈(伊訓)이라는 글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그뿐만 아니라 윤(尹)자가 들어있는 벼슬이름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경우를 보면 부윤 (府尹), 서윤(庶尹), 소윤(少尹), 우윤(右尹), 정윤(正尹), 좌윤(左尹), 판윤(判尹)등 여러 가지의 관명(官命)이 있으며 고대중국(古代中國)이 경우를 보면 영윤(令尹), 경윤(卿尹), 윤백(尹伯)등을 들 수 있다.
우리의 세보(世譜)에도 영윤(令尹)이라는 관명이 나오는데 소부공(少府公)의 아드님이 바로 영윤 (令尹)공이시다. 그런데 3000년전이 작품까지도 모두 수록되어 있다는 시경(詩經)이
소아절남산편 (小雅節南山篇)에 윤씨태사유주지씨(尹氏太師維周之氏)라는 문구(文句)가 있는데
이는 태사윤공은 우리나라의 기둥이며 주춧돌이라는 뜻으로서 중국(中國)에서도 윤성(尹姓)의 연원 (淵源)이 유구(悠久)한 역사(歷史)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