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기독교와는 다르지만 그곳에도 주님의 선과 진리가 풍성한 것을 봅니다. 물론 기독 사상과 다른 점이 많지만 배울 점도 많아요. 불가의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여기 그분의 글을 먼저 인용하겠습니다.
<< ... 그러나 신은 일체 존재에 평등하십니다. 신이 내편이란 생각이야말로 미신이라는 것이며 배척되어야할 종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전인수" 격인 오류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신은 나와 남에게 공평하십니다. 또한 인간과 기타 피조물에게도 공평하십니다. 그것을 불교에선 "인과법"이라 합니다. '종두득두 종과득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의 법칙입니다. 이를 예수님도....'뿌린 대로 거두리라.' 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신통이라 하고 기독교에서 기적이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결론적으로 그것이 인과를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질서 속에 꽁짜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신통이며 기적이라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는 필시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자들의 술책에 속아 오다가 문득 의심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신이 내편이라면?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왜? 저 강퍅한 적을 신의 권능으로 치시지 않는단 말인가?
그러면서... 전쟁하는 이들은 신은 나의 편이라 떠들어댑니다. 그러다 보니 '승자 곧 정의' 라는 되지 못한 사고방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죽은 놈만 억울하게 되는 것이지요. 흔히들 신은 아무개의 편을 들어주었다 라고 말합니다. 승리의 여신 운운하지요. 미신은 바로 그것이 미신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공정함을 잃은 사람을 천박하게 보는데... 하물며 신이 공정함을 잃는다면? 그게 잡신이지 어떻게 참된 진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시각에 이런 글이 어떻게 읽혀질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분의 글이 참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의 사상은 너무 거저 얻는 은혜와 내 편의 하나님에 물들어 있어요. 그만큼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하나님을 이해함에 있어 오류도 많겠지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거저 얻는 무상의 선물이기에 누구든지 와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얼핏 들으면 그 모두가 공짜 같이 여겨져 사람들은 얼른 손벌리고 하나님께 다가가 죄인을 불쌍히 여겨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무한 감사를 드리곤 합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의 주요 주제를 차지할 정도로 믿음 있는 행위로 보이지만 그러한 믿음은 어쩌면 공짜를 좋아하는 무지한 믿음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경 다른 편에서는 하나님께 다가오는 자 모두 그 악을 떨친 후 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분명하나 그것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의 악을 버리고 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선물은 기실 공짜가 아니고 먼저 악을 치우는 인간의 수고를 필요로 하는 조건 아닌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할 때 참된 믿음이란 공짜를 바라는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최선의 노력을 하여 인간의 의무를 담당케 하는 그런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너무 내편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뒤치닥거리나 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그러기에 윗분이 지적한 대로 콩 심은 데 콩 나게 하시는 하나님 곧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은 별로 반가워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찌 하나님은 두 말씀을 하십니까? 언제는 거저 얻는 은혜라 하시더니 이제는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심으로 공짜는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에 우리는 어느 편에 서서 어느 쪽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는지 또 성경은 과연 어떻게 증언하는지 각자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악을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는 마음도 평화로울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속에 자기 악을 통제할 힘이 없는데 어찌 마음이 자신의 말을 듣겠습니까. 힘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본래적인 사람 나름대로의 기질 탓도 있겠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엇보다 자기가 처리할 일을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주님께 맡기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따스한 품속이나 그리워하면서 자꾸 현실의 어려움을 회피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점점 더 나약해지고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참아내지 못하며 두려워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게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기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훈련을 통하여 그 실제적 힘을 기르는 것이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 응답을 받는다는 명목 하에 믿음으로 기다리는 일이 아닙니다. 묘하게도 인간의 습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에 눈길을 돌리면 돌릴수록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힘을 기르기보다는 하나님께 의존하여 얼른 자신의 난감한 상황을 훌훌 털고 벗어나려고만 하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가 신앙에 악을 떨쳐버릴 힘이 없다면 지금까지 그 힘을 기르는 훈련을 하지 않았기에 그런 힘이 생길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오류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후 자신은 정작 일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두를 손에 쥐어주시기만을 기대한 나머지 도움이 오기 전 스스로 자기 악과 싸우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저 하나님의 힘은 보이지 않게 또 지각되지 않는 사이에 틀림없이 우리에게 작용되고 있다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악에 빠져 스스로 그분을 멀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지독한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바친 사랑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죄를 벌하기 보다 죄를 용서하시는 모습이 주님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분은 선인과 악인 모두 가리지 않고 비와 햇빛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던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갈라지는 경우가 생기고 마는 것은 자기 죄로 인해 우리 마음이 스스로 하나님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로막는 것이지 하나님이 죄 때문에 은혜와 사랑을 거두시는 것이 아님을 알고 죄 가운데서도 여전히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은 지속되고 있음을 교리적으로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힘을 잃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 사랑을 눈으로 확인하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로 인해 조급함이 생기고 낙심이 생겨 힘을 잃어버리기 쉽상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으로부터는 끊임없는 도움의 손길이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실제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악을 버린 후나 선을 행한 후에 조금씩 그 도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데 처음에는 이것이 쉽지 않아 잘 지각이 안 됩니다. 훈련으로 이것이 웬만큼 진행되었을 때 그때부터 그 사랑과 은혜는 평화와 기쁨으로 지각되며 믿음을 증진시켜 점차 기운이 더 나는 것이지요. 그러기 전까지는 소망을 버리지 않은 채 인내와 확신으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조급함이 문제이지요. 조급함은 낙심을 부릅니다. 낙심은 모든 힘을 잃게 하는 무력과 연약의 근원이고요. 사실 신앙에서 참는 것만큼 귀한 능력도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보다 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 안에 엄청난 천국의 힘이 깃들어 있는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모든 악한 역사가 참아내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이 참는다는 의미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여하간의 일로 괴로운 것은 마음 속에 거하는 악의 결과로 옵니다. 만일 이를 인정한다면 다시 말해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면 그 죄로 인해 지금 우리가 마음의 괴로움 당하는 것을 감사로 받으며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행한 악의 대가로 고통을 받는 것을 당연시하며 이를 묵묵히 참아내는 신앙이 얼마나 훌륭한 믿음에 속한 일이겠는지요. 우리는 이를 통하여 진정한 회개의 상태에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옆의 한편 강도의 믿음입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말한 것을 잘 숙고해 보면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그의 이 말 한 마디에 회개하는 그의 영혼과 그 믿음의 전부가 들어 있습니다. 악을 버리지 못하겠거든 그 악으로 인해 당하는 괴로움이라도 참아내는 훈련을 해야겠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큰길을 열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조급해 하는 것은 신앙의 금기입니다. 조급함! 그것 역시 버려야할 큰 악에 속하는 것이니 그것을 지독한 악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외부에 악을 한 두 가지 행한 것으로 인해 괴로워하여 그것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 염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악으로 인해 당하는 괴로움을 바라보며 그조차 참는 힘을 기르는데 사용하며 조급해하지 않는다면 여기에도 한편 강도의 마음에 깃든 천국이 열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신앙으로 말미암아 흉악한 강도일망정 주님의 품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가 선을 행하였습니까? 아니요. 그는 자기 악을 인정하고 그 대가로 고통받는 것을 당연시 여김으로 잘 참아냈습니다. 천국은 그런 마음에 건설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을 잘 한다면 필히 마음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자신에게 나타나는 악을 보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괴로워만 하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낙심만 되고 자기 비하만 더하여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구원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괴로움을 잘 참아내며 새롭게 일어서는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것입니다. 기왕에 죄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그 괴로움의 시간들을 유익의 시간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인내를 배워 다음의 싸움에서 지지 않을 힘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연약할수록 주님을 찾지 않을 수 없으나 자칫하면 연약이라는 병에 걸려 하나님의 치마폭 속에서 움츠려 들고 겁을 내기만 하는 어린아이처럼 되기 쉽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좋기는 좋아도 그것만을 사모하며 좋아한다면 점점 인간의 나약한 병은 깊어만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제 힘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시기에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모든 약함을 떨치고 일어서서 이제 어떠한 어려움이 달려들지라도 그것을 물리치고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또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강인한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영혼의 구원 곧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를 이루기까지 겸손과 참음으로 이 어려운 때를 잘 견뎌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그럴 때 제일의 금물은 낙심하는 것이니 이를 철저히 경계해야 하겠지요. 낙심하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게되고 기쁨은 소멸되어 다시 일어서려는 힘, 그 용기까지 점차 잃어져 어쩌면 영원한 신앙의 겨울을 맞을지도 모르니 이런 영적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를 게을리 말아야겠습니다.
첫댓글 네 그렇군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