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물편
2.9 참정공(參政公)휘(諱)정안(鄭晏)
선생의 휘는 안이시며. 초명(初名)은 분(奮). 자(仔)는 화경(和卿)이시다.
선생은 평장사공(平章事公) 숙첨(叔瞻)의 아들로 고려고종(高宗)때 학자인데. 지혜가 총명하여
어려서 과거(科擧)에 급제 하였으며. 음양(陰陽). 산술(算術). 의약(醫藥). 음율(音律)등에 깨우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선생은 당시 고려의 최고 실권자(實權者)였던 최이(崔怡-1179년생 시호. 광렬
(匡烈)과 남매간 (男妹間)이었다. 선생의 누이가 1231년에 하세(下世)하시니 왕은 채단(綵緞)70필
을 하사하여 왕후의 예(禮)로 장사(葬事)케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진양(晉陽-진주)의 수령(守令)으로 나아갔다가 1215년 당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
던 광렬공(匡烈公-최이)의 횡포함이 날로 심하여 짐을 보고 화(禍)를 입게 될까 염려하여 노모
(老母)의 봉양(奉養)을 내세워 사임(辭任)하고 하동(河東)고향으로 돌아와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쌍계동 대당골에 산성을 축성(築城)하는 등 불사(佛事)를 일어켰다.
1222년에는 남해(南海)로 건너가 독실한 불자(佛子)가 되어 명산 승찰(勝刹)을 편력(遍歷)하였으
며 대장경판간행재조(大藏經板刊行再雕)준비 등 불사에 전념하셨다.
1225년 선생의 자형인 광렬공(匡烈公-최이)께서 실권을 잡고 관료(官僚)들의 인사권(人事權)을
행사하게 되니 선생의 재능을 아껴 국자좨주(國子祭酒)에 등용하였다.
고려에서는 현종(顯宗)때부터 글안(契丹)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보려고 간행한 고려 대장
경 초판고본(初版古本)이 있었는데 1232년(고종19) 몽고의 침입때 병화(兵火)로 소실(消失)되고
없어졌으므로 1236년 몽고의 침입 등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선생은 나라와 백성을 블력으로
구하기 위하여 당시 나라의실권을 쥐고있던 광렬공(匡烈公-최이)과 반분(半分)하여 조판(組版)할
것을 약속. 강화도(江華島)에 장경도감(藏經都監)을 설치하고 지리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선생
의 고향인 하동(河東) 앞바다에 담가 삭힌후에 15년간에 걸쳐 81137매를 조판하였다.
(1236년(고종)-1251년(고종38완성)
위와같은 대역사(大役事)를 남매간에 사재(私財)를 털어 1251년 완성을 시켰지만.광렬공은 재물
만을 희사하고 공역(工役)은 하동에서 다 했기때문에 이는 선생이 일연대사(一然大師)를 불러
대사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총지휘하여 완성시켰을 것으로 본다.
※ 광렬공은1249년에 별세했으며 선생은 1252년 경판을 완성시킨 후에 별세하였다.
선생이 사재를털어 15년간이나 대역사를통해 조판한 고려 8만대장경판은 세계3대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전 세계에 큰 자랑거리가 된 중요한 문화재로서 이러한 큰 사업을 사재를 들여 완성시킨
선생의 위대한 업적은 다시 평가 되어야 한다. 선생은 1241년(고종28)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하였다.
뒤에 최항(崔沆)이 집권하였는데. 항(沆)은 이(怡)의 아들로서 공의 생질이었다. 항(沆)또한 공을
불러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삼았다가 다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중서문하(中書門下)
참지정사(參知政事)138)로 옮겨 주었으나. 항(沆)이 마구 사람을 죽이는것을 보고. 하루는 공의
문하생(門下生-제자)들인 낭장(郎將). 임보(林葆). 내시 이덕영(內侍 李德英). 위주부사 석연분
(威州副使 石演芬)과 같이 시사(時事)를 논하여 말하기를 『인명(人命)이 지극히 중(重)하거늘
최영공(崔令公-최항)은 어찌하여 저와 같이 살인하는고』
하고 항(沆)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므로. 뒤에 덕영. 연분이 임보의 집에 모여서 술을 마시다
가. 다시 공의 말씀을 칭찬하고 탄복하여 말하기를 『은문(恩門)139)의 말씀은 진실로 옳도다』
하였는데. 이 말을 임보의 처형(妻兄)의 집 종이 듣고 항(沆)에게 알려 주었으므로. 항(沆)이 평소
에 공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인망(人望)을 거두고자 하여 밖으로는 비록 예의를 갖출지라도
안으로는 실상 시기하더니. 이 말을 듣고서는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정공이 본래 다른 마음
이 있어서 나의 일을 비방(誹謗)하니 장차 난을 일어킬 것이 아닌가』하고
공의 집을 적몰(籍沒)140)하고 백령도(白翎島)에 유배(流配)하였다가. 1252년 사람을 보내 물에
던져 죽였다. [고려사-高麗史] [하동군지-河東郡誌]
138) 고려 중서문하성의 종 2 품 벼슬,
139) 공을 가리킴(평생 스승으로 모심),
140) 죄인의 가산을 몰수함,
2.10 밀직공(密直公)휘(諱)정국룡(鄭國龍)
공의 휘는 국룡이시고 문과에 급제하시어 좌윤(佐尹)141)을 지내신 후. 고종조(高宗朝)142)에
봉익대부(奉翊大夫)143) 밀직부사(密直副使(144)상호군(上護軍)에 증직 되셨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선생이 찬 하신 문헌공(汝昌) 증손 현감공(大民-대민)의 묘 비문에 공의
위계가 종 2품 上인 광정대부(匡靖大夫)로 되어 있음은. 공이 아들 문충공의 공적으로 증직 되신
것 같은데. 문충공이 1309년(충선왕1년)에 종 2품 동지 밀직사사에 오르셨기 때문에. 공은 그 다음
해에 증직 되셨을 것이니 1310년에는 밀직사(密直司)의 관질(官秩)을 높여. 첨의부와 함께 양부
(兩府)라 하였으므로, 거기에 부사(副使)는 따라서 종 2품 上 품계인 광정대부로 되었을 것이라
사료된다,』
공의 묘소(墓所)는 하동군 적량면 하곡(河東郡赤良面鰕谷)145) 갑좌(甲坐)에 석장(石葬)146)으로
모셨으며, 아들은 문충공(文忠公) 지연(芝衍)과 좌윤공(左尹公) 난연(蘭衍) 두분 이시다,
공의 5세손인 문성공(麟趾-인지)이 삼도 순찰사(三道 巡察使)147)로서 하동 객관(河東 客館)148)
에 오셨을 때 객관 현판(懸板)에다 시(詩)를 지어 놓으셨는데, 그 서문(序文)에 이르시기를 국룡
(國龍)은 하동현(河東縣)의 현리(縣吏)로 계셨으나 고조부이신 문충공(芝衍)께서 벼슬길에 나아
가시게 되셔서, 벼슬이 중대광(重大匡)149)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150)와 판선부사(判選
部事)151)에 이르시게 되어, 고향을 떠나서 살게 되었다고 하셨으며 1818년(순조18년-戊寅)에
공의 18세손인 지우재공(遂榮-수영)152)이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찬하고, 금학당(琴學堂)
이학서(李學書)공이 글씨를 썼으며, 또 1899년(고종36년,己亥)에 공의 8세손 문헌공(汝昌-여창)
후 죽헌공(泰鉉-태현)이 제각기(祭閣記)를 찬 하였다,
☞ 아래글은 병자보(丙子譜-1696년 숙종22년,丙子) 및 제각기(祭閣記)에 실려있는 글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지혜가 총명(聰明)하고 민첩(敏捷)하여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났다,
어느 날 사상(使相-절도사)이 있는 현부(縣部-고을 관청)에 들어가 절도사와 같이 놀게되었는데,
이 때 공이 절도사를 보고 그의 발바닥에 검은 사마귀가 있음을 알고 빙긋이 웃으시니 절도사가
공의 웃는 얼굴을 보시고 “어찌 하여 웃느가” 하고 물으시므로 공이 “절도사님의 발바닥에 검은
사마귀사 나 있습니다” 하신지라 절도사가 공의 말씀을 듣고 자기 발바닥을 보니 과연 검은 사마
귀가 있었다, 이 때 공이 절도사를 보고 “가상(家相-집터의 지세)이 좋지 않아서 그런것 같습니다”
하시니 절도사가 괴이하게 여겨 공의 재주를 시험해 보려고 “내가 너를 보니 신령(神靈)을 만난것
같으니 그 신령을 만난 것으로 글을 지어 보라” 고 하였다,
공이 곧 응배(應拜) 하시고 아래와 같이 읆으셨다,
紛紛神靈滿長空 遠近江山自正峰
분분신령만장공 원근강산자정봉
誰謂靑松千歲壽 一朝變作白頭翁
수위청송천세수 일조변작백두옹
구만리 장공에 신령이 가득히 분분하고
앞산 봉우리로부터 원근 강산에도
누가 청송은 천년이나 산다 하드니
하루아침에 백발 노인으로 변했네
절도사가 공의 재주가 뛰어남을 실증해 보시고 크게 장탄(奬歎)153)하시어 같이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켜 주셨으므로 공은 열심히 공부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일찍이 등제(登第-과거
급제)하여 마침내는 크게 등용되시고 하동군(河東君)에 피봉(被封)되셨다,
(1994년 乙亥, 문헌공 파보)
141) 고려때 향직(鄕職)의 6 품,
142) 고려 23대 왕때,
143) 고려 때 종 2 품, 下 품계,
144) 고려 때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 군기등을 맡아보던 관청의 종 2 품 벼슬,
145) 새비골「새우골」(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리 산 1-6 ) (하동정국룡묘역)
146) 돌로 만든 봉분,
147) 병란이 있을때왕명으로 충청.전라.경상도의 군무를 순찰하던 벼슬,
148) 대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임금의 명을 받고 내려오는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곳,
149) 고려 충렬왕 때 종 1 품, 문관의 품계,
150) 고려 충렬왕 원년에 중서 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도첨의부로 하였는데 여기에 정 2 품 벼슬,
151) 고려 충렬왕 때 이조,병조,예조를 합친 선부(選部)의 장관으로서 종 1 품이였음,
152) 문성공후 장정공의 12세손,
153) 감탄하여 칭찬함,
2.12 진사공(進士公)휘(諱)정국교(鄭國僑)
공의 휘는 국교이시고, 밀직공의 동생으로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올랐으나 전란(戰亂)등으로
다 소실되고 공의 대한 기록이 없어 진주시 도동(晋州市 道洞)에 재실(齋室)을 짖고 단(壇)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공의 외아들이신 양손(良孫)공은 종사랑(從事郞-7품관)의 품계의 올랐으며 현손(玄孫) 이은
(以誾)공은 진사로 학행이 있었고 내손(來孫)인 순(洵)공은 참봉(參奉)을 지내셨다,
☞ 참지정사 휘안晏께서는 밀직공 . 진사공의 (父-아버지)라고 확신하는데 종현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그증거는 당시 역적으로 몰려 가산을 적몰(몰수)하고 귀향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물에 빠트려 죽임까지 당하는 상황에
후손들은 우리의 선조다 라고 공개적으로 말을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 해봅니다....
출처; 하동정씨 세적실록 2008년인쇄본
雲鶴 炳逸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