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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5월이었다.
이태원 골터장군 동상 앞을 지나서 미8군
정문앞 쪽으로 이어지는 큰 길가에 심어진
가로수들이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 꽃들을 보면서 해마다 벌어지는
창경원의 밤벚꽃놀이를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국화는 무궁화이지만 실제로
무궁화는 한가한 간이역 주변이나 파출소나
동사무소 화단에서나 가끔 볼 수 있었다.
곳 경복궁 창경원 근처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네의 화사한 꽃들을 피워내곤 했다.
창경원의 밤벚꽃놀이가 시작되면 창경원
안에는 크리스마스 때처럼 색깔이 서로 다른
알전구들이 빛을 발하고 연인들이 거기
몰려들었다. 창경원 입구에서는 솜사탕
장수와 오징어 장수, 김밥 장수들이 판을
벌였고 순경들이 신경질적으로 호루라기를
빽빽 불곤 했다.
축제가 없는 나라.
그리하여 심심한 백성들이 구경거리가 없는
나라에서 봄에 열리는 그 창경원의
밤벚꽃놀이는 서울 시내 전체를 들썩이게
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김밥 싸들고 새나라
택시 타고 창경원 밤벚꽃놀이도 한번 가지
못한 서민의 남편들은 기가 죽고는 했다.
행복한 표정으로 연인들이 회전목마를 타곤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질 때는 비가
와야 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때는 둘 사이에 낳은 아이를 회전목마에
태우고 웃으면서 사진을 찍는 법이었다.
그리고 짝이 없어 외로운 사람들은 소주를
아주 많이 마시고서는 아무 데서나 징징
울거나 오줌을 질금거리곤 했다. 엉성한
무대에서는 그때를 맞추어서 동백아가씨의
이미자가 나오는 공개방송을 하곤 했다.
그때쯤이면 관식이가 어린 시절을 자라온
산골 고향 마을의 복숭아꽃들이 한참 피어나
있을 것이었다. 복숭아의 그 예쁜 꽃들이
산골에 피어나고 산골짜기를 찌렁찌렁하게
울리는 수꿩들의 목타는 울음소리가 들릴
무렵, 그러나 그때쯤이 시골에서는 '절망과
이름하여 보릿고개.
어두운 뒷방에 앉아서 겨우내 해소 끊는
소리를 해대던 늙은이들이 죽어 나오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얼굴이 누렇게 뜬
사람들이 밭둑을 어슬렁거리는 때였다.
산비탈이나 밭두렁가에 솟아오르는 봄 쑥을
캐서 죽을 쑤어 먹고 쑥독이 올라 입술과
얼굴 전체가 쑥색으로 변해 있는 사람들.
양조장 술 찌게미를 밥 대신으로 얻어먹고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어린애들. 제가 싸놓은
똥을 다시 먹어야 하는 비쩍 말라 비루 먹은
시골 개들. 그런 비참한 정경이 사방에
펼쳐지는 4월.
그러나 봄이 왔다고 꾀꼬리는 그 눈부신
노란색을 뽐내면서 허공을 날았다. 꾀꼬리가
나를 때마다 여름 나방에서처럼 노란
그리고 꽃들이 피었다. 아니 산골
고향뿐만이 아니라 학교 언덕 옆에 있는
황민이네 복숭아 밭에도 그 요염한 꽃들이
점점이 붉은 피를 뿌린듯 피어나 있을
것이었다.
미8군 정문이 저만큼 보였다.
원래 미8군 자리가 구한말에 높은 벼슬을
지낸 황민이 고조 할아버지네 땅이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그 땅을
전부접수하여 군기지로 사용하면서 대신 지금
이태원 입구인 콜터 장군 동상 자리에 군
관계자가 올라가서 여기서부터 한강까지
오른쪽 땅을 대신 갖겠소, 왼쪽 땅을 대신
갖겠소 하고 물어서 오른쪽 땅을 주시오
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황민이네는 오른쪽의 땅을 원했는데
체면에 장사를 할 수 없고 자손들 또한
취직이라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려고 하지
않아 시루떡 떼어먹듯이 땅을 한 조각씩
팔아서 가계를 꾸려 나왔다고 한다.
관식이네가 다녔던 학교 부지도 황민이
할아버지가 기증한 땅이었다.
어디 학교 부지뿐인가, 동사무소,
파출소,모두 황민이 할아버지가 기증한 땅에
지은 것들이었다. 황민이 할아버지는 관직이
없는 백면 서생이었지만 아직도 그
일대에서는 당당한 양반 이었다. 황민이네 집
생김새도 솟을대문에 사랑채가 있는 전통
양반 한옥이었다.
동네에 텔레비전이 있는 유일한 집이어서
중요한 권투시합이 있는 날이면 황민이네
집이 동네 극장으로 변하곤 했는데 안마당에
한조각이라도 돌리곤 했다.
미8군 정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야 관식은
아, 이게 평소하구는 좀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미군 헌병
하나에 한국인 카츄샤 하나 정도가 입구에서
영내에 드나드는 차량과 사람들의 신분증을
검사하고는 했는데 그때는 그 앞에 탱크 두
대가 떡 버티고 서 있었을 뿐 아니라
전쟁영화에서나 나오는 기관총좌가 역시 두
개 설치되어 있었고, 다수의 미군 헌병들이
총개머리를 허리에 꽂고 서 있었던 것이다.
허리에 꽂고 있는 총을 슬며시 내려서
금방이라도 우당탕탕 총질을 할 것 같은
태세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 벚꽃 거리에는
희한한 옷차림을 한 양공주들이
어슬렁거리거나 혹은 8군 영내 입구에서 껌을
그러한 일상의 모습들이 그날은 보이지
않았다.
8군 정문을 조금만 더 걸어내려가면
오른쪽에 육군본부가 있었는데 거기는 한술
더 뜨고 있었다. 탱크가 네 대나 정문에
있었고 철모에 풀을 꽂은 해병대들이 많은
숫자의 헌병들과 함께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확실히 군인들은 달라 보였다. 툭하면
모자창에 있던 끈을 턱 밑에다가 걸치고
나타나는 경찰들하고 틀렸다.
우선 그들의 일정한 몸매.
그리고 군화에서 나도는 흙냄새.
그 모든 것들이 민간인 속에서 섞여 사는
경찰들하고는 달라 보였다. 그리고 얼핏
들여다본 육군본부 안에는 수많은 군
육군본부 앞을 지나면 바로 거기가
삼각지였다.
대한민국 최초로 고가도로가 생겼고 그래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라는 노래가 나오게
된 바로 그 근처에 태호네 집이 있었다.
전화가 골프 회원권만큼이나 귀한 시절이어서
태호 녀석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거기까지 온 김에 관식이는 태호네
집에 들러 보기로 마음먹었다. 생각 같아서는
계속 걸어서 남영동 서울역을 지나 시청,
광화문까지 구경을 하고 싶었으나 길거리
요소요소에 해병대들이 총을 들고 서 있는 그
상황이 어쩐지 으스스해서 포기한 것이다.
그런 기억 때문에 관식은 아버지가 밖에
나가지 말라는 말을 얼른 군사혁명과
연결시켰던 것이다.
아버지는 짧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관식으로서는 그게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5.16쿠데타가 났을 때에는 시내
곳곳에 서 있는 탱크의 아가리에서
당장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지만
그런 일이 없던 것이다. 그리고 또 작년의
한일 회담 반대 데모가 거세져서
고등학생들까지 나서자 계엄령이 선포되어서
또 서울 시내에 군인들이 쫙 깔리는 상황이
전개되었지만 그때도 별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5.16이다, 계엄이다, 위수령이다,
하는 일들이 몇 년 사이에 주기적으로
되풀이되고 있었기 때문에 만성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해도 벚꽃이 피는 4월부터 데모가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전년부터 계속된 '한일 굴욕외교 반대
정부에서는 한일 외교 정상화를 추진했고
그해 6월에는 정식으로 조인식까지 마치게
되었다.
일이 그렇게 결론이 났으나 대학생들과
야당, 일부 재야에서는 그정부의 결론에
승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데모를
하던 학생 하나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서 죽는
사건이 생겼고, 그것은 사그라들던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정부당국에서는 야당적인 색채가 강한
대학교수들을 캠퍼스에서 몰아내려 했고 이어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런 소란이 그칠
새가 없었다. 그러자 정부는 군인들을 풀어
문제의 대학에 쳐들어가고 이어서 대학은
휴교령, 그다음에는 위수령을 내렸다.
위수령이라는 것이 말은 그럴 듯했지만
것에 당분간 대학은 휴교한다, 라는 말이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다녔다.
대학의 문이 대학문을 지키는 수위들이
마음대로 닫았다 열었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국민 모두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주로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관식이로서는 강건너
불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뭐 어때요. 저는 대학생도 아닌데 누가
잡아갈라구요......"
"그래두 군인들이 왔다갔다 할 때는 집에
있는 것이 좋아......"
"예. 알았어요......"
집에 있으라는 아버지의 말을 겉으로만
듣는 척하고서 관식은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태호네 집에 가볼 작정이었던
기실 태호 녀석의 집에 가보기로 작정을
하고나자 관식은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친구들을
피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었고 그런 눈치를
보이는 친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필이 녀석은 통 소식이 없고 영길이도
마찬가지였다.
재필이네 집에는 전화가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으나 태호에게는 집이 가까우니 연락을
하면 될 일을 가지고 관식이는 자격지심
때문에 스스로 친구들을 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고등학교 시절
얼싸절싸하고 같이 어울리던 녀석들의 학과
실력이라는 것이 철수만을 빼놓고는 거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공부를 좀 한다고 하는
철수도 겨우 야간대학에 들어갔을 뿐 태호,
황민이 독고준 모두 삼류 대학의 무슨
이름모를 과에 입학한 정도였다.
기실 대학입학이라는 것이 80년대나
90년대처럼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대학마다, 물론 세칭 일류대학이라는 곳을
빼놓고서는 청강생제도 라는 것이 있어서
모집정원은 30명인데 50명씩 1,2,3,4,반으로
편성해서 등록금을 받던 시절이었다.
집안 형편이 등록금 낼 만하면 대충
청강생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물론
나중에 뭐 문교부에 등록된 학생이냐
자격증이 나오느냐 아니냐를 따질 때면
그렇지는 못했지만 말만 청강생이지 일반
대학생과 다를 것이 없었다.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이마에 나는
청강생이오, 하고 써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90년대의 지금 모모 하는 대학생들이
기실은 그 청강생들이 내는 일반 학생과
똑같은 등록금으로 건물도 짓고 해서 대학을
발전시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단 대학의
호적에만 청강생이다. 그렇게 기록되어 있을
뿐 학점 이수도 대학생활도 졸업장도 다
마찬가지였고 예비고사 따위도 다행히 그때는
없었다.
따라서 집안에서 대학엘 보내겠다고 작정을
하면 이유야 어떻든 대충 대학 문턱에 들어갈
수는 있었다. 누나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형도
대학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형편을
관식이는 잘 알고 있었다.
출세하고 돈버냐.....하고 같이 놀던 친구들
중에 몇몇이 그래도 정식으로 시험을 쳐서
합격이 됐는데 자신은 떨어졌다는 데에
저존심이 상해 있었던 것이다.
이태원을 지나 미8군 정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야 관식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다.
구두를 잘 닦아 신고 흰 장갑을 손에 끼고
총을 든 군인들의 모습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태원 콜터 장군
동상 앞에서 삼각지에 이르는 거리에
양공주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이
거리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미군부대에
외출 금지령이 내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옥시풀로 머리에 물을 들여서 노란 머리를
하고 속옷같은 짧은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않는다는 것은 언제나 미군부대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름이 지나서일까.
거리는 스산했다. 미8군 정문 앞에 서 있는
탱크, 그리고 육군본부앞에 서 있는 헌병들과
군인들의 딱딱한 모습, 그런 것들이 마치
5.16혁명 직후의 모습과 흡사했다.
늘 그렇듯이 거리를 슬슬 걸어서 관식이는
태호네 집 앞에 도착했다. 대문을 꽝꽝
두드렸으나 얼른 기척이 없었다.
임시휴교를 했으니 집에 있을텐데.....
"야, 태호야, 나 관식이야.....아무도
없냐?"
관식이는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꾸무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안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태호가 나왔다.
"내가 너네 집에 오는데 그럼 무슨
꽹과리라도 쳐야 한단 말이냐?"
"들어와라 좌우간......"
태호 녀석은 그때까지도 잠을 잤는지 아직
부스스한 얼굴이었다. 방안에 들어가자
이부자리가 그대로 펴져 있었다.
"너 참 태평하구나, 서울 시내에 군인들이
쫙 깔려가지구 언제 무슨일이 생길지 모르는
판인데......"
"라디오를 계속 듣구 있었어."
"이불 속에 드러누워서?"
"지금 심정으로는 왜 내가 일찍 군대를
가지 않았나 하구 후회를 하구 있다."
"대학 1학년에 벌써 군대를 가?군대 가서
월남 가게......"
"아마 내가 군대에 있었으면 제일 먼저
죽어서 태극기를 관에 덮고 돌아왔을 거다."
에이 썅, 월남이나 갈까, 세상살이가
수틀리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두고 하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니 얘기는 지금 죽구 싶다
이거냐? 아니면 어디가 아픈거냐?"
"아프기는 뭐......."
태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태호의 모습을 쳐다보면서 관식은 어쩐지
잘못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호가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 갈란다, 위수령인가 뭔가가 내렸다고
해서 탱크 구경을 나왔다가 네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들렀다."
관식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일어나자 태호
녀석도 따라 일어났다.
"아니 사실은 나두 나가려든 참이야, 같이
나가자, 내가 술 한잔 살게......"
아직도 벌건 대낮이었다.
거리에는 평소와는 달리 사람들의 통행이
뜸했다. 그리고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겁에 질린 얼굴로 총총걸음들을
하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헌병이 집총
자세로 뻣뻣하게 서 있었는데 그게 아마도
시민에게 겁을 주려는 작전같았다. 서울 시내
곳곳에 그렇게 총을 쥔 군인들이 말뚝처럼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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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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